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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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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1897년 (대한제국군 개칭)
해체 1907년 (군대 해산)
소속 원수부
통수권자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군 대원수)
군령권자 대한제국 황태자
(대한제국군 원수)
편제 대한제국 육군
• 대한제국 호위대
• 대한제국 시위대
• 대한제국 헌병대
• 대한제국 친위대
• 대한제국 진위대
• 대한제국 지방대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상무영
병역제도 모병제
상비군 약 2만 8천 명(1902년)[1]
전신 조선군
후신 대한민국 국군[2]

1. 개요2. 상세
2.1. 수뇌부2.2. 교범과 규범2.3. 역사
2.3.1. 칭제 전의 혼란 수습기2.3.2. 창군과 급속한 팽창2.3.3. 원수부 중심 체제 정립2.3.4. 일본의 한국 장악과 강제 군축2.3.5. 해산 전야의 쿠데타 시도2.3.6. 해산과 저항2.3.7. 해산 이후
2.3.7.1.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2.3.7.2. 의병과 독립군
3. 군종4. 계급
4.1. 인사명령4.2. 장성급 장교4.3. 황족의 군사계급4.4. 외척의 군사계급
5. 장비
5.1. 장비 도입
5.1.1. 1903년의 대규모 장비 도입
5.2. 군수공업
6. 군가7. 예산
7.1. 급여
8. 실전
8.1. 의화단 운동8.2. 과의 간도 영유권 분쟁8.3. 의병 진압8.4. 일본에 대한 저항
9. 대중매체에서10. 여담11. 같이보기

1. 개요

대한제국군()은 대한제국군대이다. 대한제국황제총사령관이자 대원수였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으로 구성된 육군과 해군 두 개의 군종으로 편제한 모병제였다.

전신은 당연히 조선군으로 갑오개혁 때 편제가 개편되었다가 아관파천대한제국 수립을 거쳐 창설되었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의 삼군영 조직을 통해 세를 불려나갔고 청의 의화단 운동간도 영유권 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군제가 대폭 축소되었고 군대 해산을 거쳐 일부의 명맥만 유지하다 대한제국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2. 상세

2.1. 수뇌부

대한제국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통수권자는 대원수 직위를 역임한 대한제국 황제였다. 황제는 원수부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국군을 이끌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 등 당대 다른 군주제 국가들에도 보편적으로 남아있던 특징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군주제 국가들의 군부는 정부의 문민통제를 받지 않았고, 그들과 병립하며 군주에 충성했다. 일본군 대원수였던 일본 천황 직속의 대본영(大本營)이나 독일군 최고전쟁지도자였던 독일 황제의 군사내각(Militärkabinett), 또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일원만이 보임되던 오스트리아 제국군 총감(Generalinspektor)직 등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시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이 군무를 담당하였으나 을미개혁군부(軍部)로 개칭되었다. 군부대신이 오늘날의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 원수부 관제 발표 이후 군부대신의 권한이 약화된 반면 원수부 각부 총장들의 권위가 상승한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한국을 장악한 후 한국 황제의 저항 동력을 뺏는 과정에서 원수부가 폐지되고 군부의 권한이 대폭 증대되었다. 물론 이 당시 군부대신들은 일본에 영합한 친일파들이 역임했다.

참모총장직의 경우 러일전쟁으로 들어온 일본이 원수부를 해체하며 고종의 군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참모부와 함께 잠시 도입하였으나, 실제로 임명되지는 않고 도로 폐지되었다.

2.2. 교범과 규범

총 12권이다. 야전교범으로는 전술학 부문에 '보병조전'과 '전술학교정', '야외요무령' 및 '보병공작교범'이, 축성학 부문에 '축성학교정'이, 군제학 부문에 '군제학'이, 병기학 부문에 '병기학교정', '사격교범' 및 '보병사격교범'이, 지형학 부문에 '지형학교정'이, 위생학 부문에 '위생학교정'이, 마학 부문에 '마학교정'이 있었다. 그외에 군제를 명시한 규범들로 '육군예식', '군대내무서' 등이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보병조전과 전술학교정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2019년경부터 육군군사연구소에서 관련 업무를 이어받아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실과 국회전자도서관에서 번역이 끝난 것들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하는 번역이 끝난 것들을 소개한다.

2.3. 역사

2.3.1. 칭제 전의 혼란 수습기

한국의 진정한 근대적 군사편제의 설립은 1894년 갑오개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오사변청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중앙군은 대거 무장해제당하고 일본이 조선의 정국을 장악하면서 중앙의 군사력은 사실상의 공백 상태가 된다.

1895년 1월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신식 군대인 훈련대가 설치되었으며, 5월에는 시위대가 창설된다. 3월 1일 기존의 지방군과 수군 사령관들이 가진 병부와 마패를 회수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에는 군무아문이 군부로 개칭되었다. 이어 5월에는 지방군과 수군이 의해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일제히 해산되면서 지방의 군사력마저 공백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시위대는 경복궁에 난입한 훈련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훈련대장 홍계훈이 전사하였다.[3]

이후 훈련대가 반역 혐의로 해체되면서 조선의 군사력은 1895년 9월 13일 시위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친위대 2개 대대가 사실상의 유일한 군사력으로 남게 된다. 지방군의 경우 친위대와 같은 날 진위대가 설치되었으나 총 2개 대대에 불과하였다. 그 외 옛 친군영을 비롯한 구식 군졸들을 그러모아 공병/마병/치중병으로 구성된 신설대 12개 대대가 존재하였으나 이들은 현역병이 아니었다. 이렇듯 조선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전횡, 지방군의 증발로 인한 지방의 민란이라는 내우외환에 처했다.

당연하게도 고종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침략을 막을 군사력의 증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며 일본의 영향력을 제거한 고종은 내각 주요 인사들을 친러, 친미파로 대거 갈아치운다. 군제 개편도 바로 시작하여 파천 직후인 3월 3일에 신설대 공병대와 치중병대원들을 새로 친위대에 소속시켜 친위대를 5개 대대로 급격히 증강했다. 5월에는 바로 연대편제를 도입, 친위대를 친위연대로 개편하였다.

동시에 지방군의 복구도 시작하여 해산된 구식 지방군졸들을 그러모아 지방대를 설치, 진위대로 개편하기 전 임시 편제에 소속시킨다. 5월 30일 각 지방의 친군영들[4]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군악대)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천 명이었다.

동시에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대관식민영환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러시아군 군사 고문단의 파견을 타진한다. 푸챠탸 대령을 필두로 하는 14인의 러시아 군사 고문단은 동년 10월에 조선에 차례로 입국하여 기존 조선군에 뿌리박힌 일본식 군제를 제거하고 러시아식 군제를 이식한다. 그들은 우선 친위대에 대한 훈련부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하고 1달 후인 3월 16일, 친위대원들 중 러시아식 훈련을 이수한 정예부대들을 빼내어 시위대를 재창설한다. 이로써 중앙군은 친위와 시위 2개 부대로 구성된다. 6월에는 군제개편이 더욱 가속화되어 지방대대장 10명이 임명되고 왕궁을 지킬 호위군이 신설된다.

2.3.2. 창군과 급속한 팽창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다. 칭제 시점에서 중앙군인 시위대가 약 2600명, 지방의 진위대는 7천 명이었다. 또한 독립협회의 여론전으로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철수하면서 사관 양성은 오롯이 한국인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고, 장교 양성을 위해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본격적으로 개교한다.

1898년에는 시위대 1대대와 2대대를 합치고 포병 중대(포대)를 설치하여 연대로 개편하였다. 1900년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기병 대대를 설치하여 보병 대대 2개에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등 제대로 된 4각 편제를 구성했다. 군악대(소대급)도 2대를 설치하였고 1902년에는 보병 연대가 2개로 늘어나 시위대의 총 병력은 약 5천 명에 이르렀다.

또한 기존의 호위군을 개편하여 황제의 근접 경호를 맡는 경호실 격의 호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 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지방대가 원수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99년 11월부터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고 이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침략하자 군사력의 강화를 느끼고 국방비를 증액했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0일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합시켰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 제6연대는 의주에 본부를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어 1만 600여 명에 곡호대(曲號隊) 378명을 두었다. 시위대와 진위대를 합쳐 1만 8378명에 이르렀다.

1902년에는 시위대는 2개 연대에 포병1개 대대와 기병 1개 대대를 합친 5천 명, 친위대 2개 연대 4개 대대 4천여 명을 두었고 이후 진위대는 확장을 거듭하여 18개 대대에 1만 8천 명으로 늘었고 호위대 730여 명과 헌병대 등을 합쳐 최대 2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연대 개수로 따지면 10개 연대였다. 고작 6년 전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합쳐 4개 대대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급격한 발전이었다.

육군무관학교는 장교를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 일부 인원은 졸업을 시키지 않고 임관시키기도 했다. 1900년에 최소 171명, 1902년 최소 2명[5], 1902년에 최소 307명, 1903년에 최소 111명 등 육군무관학교와 특별임관을 중심으로 위관급 초급 장교를 빠르게 공급했다. 당시 대한제국군의 대대 편제에서 위관급 장교가 차지하는 건 30명 정도[6]임을 감안할 때 1900년부터 1903년 사이에 나온 591명의 참위(소위)로만 거의 20개 대대를 채울 정도였다. 당시 대한제국군 전체 대대가 30개였고 이미 1890년대 후반에 구식 군대에서 초반에 장교 자원을 상당수 끌어와 대대들을 구성한 걸 볼 때 이 정도 연간 획득은 장교의 과잉 공급이었다. 이렇게 장교를 초과 생산한 것은 장차 징병제 전환 등에 대비하여 예비적으로 장교 자원을 확보해두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무관학교 졸업자들은 군내 보직을 채우고도 남아서 지방관이나 다른 중앙부처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무관학교에서 어학 교육을 40%나 편성할 만큼 대한제국 장교들은 국가 행정 전반의 엘리트 역할을 기대하고 양성된 것으로 보인다.

1904년에 러일전쟁 때 일본이 서울을 점령하고 군축이 일어나면서 1902년 이후 임관자들을 수용할 군 부대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들은 군대 해산까지 인사적체로 견습사관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대문 전투에 참여했던 장교 전사자들 중에는 소대장 보직도 맡지 못한 4명의 견습참위가 있는데 이들의 복무는 이미 4-5년에 도달한 상태였다.

2.3.3. 원수부 중심 체제 정립

파일:원수부 청사.png
<rowcolor=#ffd800> 원수부 청사와 고종의 행차 행렬
군사란 나라의 울타리이고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입니다. 집에 울타리가 없으면 방어할 계책이 없으며, 사람에게 손톱과 어금니가 없으면 위엄을 보일 권력이 없습니다. 옛날에 군사를 잘 양성하는 사람은 비록 100만의 많은 군사가 있어도 몸으로 팔을 움직이고 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하여, 전쟁에서 적과 상대하여 죽을 고비에 나아가는 것도 한결같이 팔과 손톱이 마음에 복종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휘 체계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대오를 편성하여 대관(隊官)을 정하고, 대장(大將)에게 총괄하여 거느리게 하되 차례를 나누어 영솔하게 하는 것은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대오를 편성한 명칭은 있지만 병정(兵丁)들이 제 마음대로 대오를 옮기고 있는 것도 심상한 일로 보고 있으며, 그 우두머리로 된 사람들 역시 지휘 체계와 기율(紀律)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신년에 폐하가 도성(都城)을 떠나 변란을 피하여 갈 때 한 명의 호위 군사도 없었으며, 갑오년에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침범하였을 때에도 한 명의 방어하는 군사가 없었으며, 을미년에 대궐에 침범한 역적의 군사들의 화가 황후(皇后)에게 미쳤으나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용단을 내리고 지휘 체계를 엄하게 정하여 장신(將臣) 이하 대장으로부터 편성한 대오의 군사에 이르기까지 일체 정한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만일 군사 규율을 어길 것 같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마시고 위력으로 제압하고 은혜로 양성하소서. 이렇게 하여 적을 공격하면 승리하고, 이렇게 하여 업신여김을 막는다면 견고해질 것입니다. 군사 제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1898년) 1월 3일 양력 4번째기사에 수록된 최웅의 상소문.

광무개혁을 위해 고종은 강력한 군주권을 행사할 필요를 느꼈다. 게다가 민권운동이 활발해지고 쿠데타 시도까지 활발해지면서 고종은 군사력을 확실히 장악해야만 했다. 이로써 1898년 고종은 각국 대원수의 예에 따라 자신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899년(광무 3년) 6월에는 일본군 원수부의 사례에서 따온 최고 통수 기구인 원수부가 개설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다. 대한제국군은 기존처럼 황제-군부대신-군대를 거치는 군령체계에서 황제 고종이 직접 대원수로서 군권을 장악하는 체계로 바뀌게 된다.

기존의 군부는 많은 권한을 상실하고 원수부가 주관하는 일의 후속 지원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격하된다. 1900년이 되면 군부 산하에는 포공국과 경리국만이 남게 된다. 반대로 원수부의 각국 총장은 군부대신과 동격의 19발의 예포를 받을 수 있었으며, 각부 대신과 판사 등에게 훈령을 내리거나 직접적으로 의정부에 안건을 상정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해졌다. 이로써 원수부는 대한제국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등극한다.

시위대친위대, 그리고 호위대는 원수부에 직접 속하였다. 한편 북방에 파견된 친위대원들의 비위행위가 문제가 되자 육군참장 백성기의 건의로 헌병대와 육군법원이 창설되었다. 이들 역시 원수부에 소속된다. 정확히는 1900년 9월부로 검사국 총장이 헌병사령관을, 군무국 총장이 육군법원을 관할하게 된다.

고종이 이렇게 원수부를 세워 군권을 장악한 이유는 내우외환에 더 잘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899년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위험이 가시화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비적들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과의 전쟁을 대비하려면 각 정부조직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군부가 있었음에도 원수부의 권한이 극대화되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원수부는 북방에 병력을 증원하여 청비들을 격퇴하고 각지의 민란을 진압했다. 이로써 한국의 불안한 치안을 명분으로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러시아일본 군대의 개입 명분을 사전에 차단하였다.[7]

2.3.4. 일본의 한국 장악과 강제 군축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9일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일의정서를 체결 후 1차 군축을 요구한다. 이로써 일본은 1905년 4월 16일에 대한제국군 친위대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시위대 역시 보병대대 3개로 구성된 1개 연대 규모로 축소시켜 버린다. 당시 시위연대 인원수는 2,513명이었으며 여기에 기/포/공병 잔존병 515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지방 진위대의 병력도 크게 감축시켰다. 1901년 이후 6개 연대이자 18개 대대 1만 8천 병력이던 진위대는 연대 편제가 모조리 폐지되고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8] 축소되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했다. 진위대 7개 대대를 다 합쳐도 고작 4,438명에 불과했다.

수뇌부와 통수체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극심했다. 우선 1904년 9월 원수부가 약화되고 곧 폐지된다. 반대로 군부의 기능이 복구되었으며, 참모부가 신설되었다. 일본은 이를 두고 군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라 선전했으나, 실상 이는 황제 고종의 군권을 박탈하고 친일 인사들을 한국 군부에 꽂아넣어 일본의 한국 장악을 원활히 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해산을 앞둔 1907년 4월 제2단계 군축이 이루어진다. 중앙군은 총원 3,704명의 시위혼성여단으로 개편되어 외연적으로 확대되나, 지방 진위대는 예하제대의 조정이 이루어져 부대 수는 유지하되 인원이 백 명 가량 감소한다. 이로써 한국군의 저항 동력을 거의 빼놓은 일제는 한국에 진주한 한국주차군을 상설화하면서 한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2.3.5. 해산 전야의 쿠데타 시도

파일:1907년7월20일이토.jpg
1907년 7월 20일 경운궁에서 퇴궐하는 이토 히로부미. 주변에 호치키스 기관총을 장비한 일본군이 삼엄한 경계를 서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한국 황제 양위로 인한 한국군대의 동요 및 일본군의 조치에 관한 件]

往電第七三號
明治四十年七月二十日 午前二時三○分 發
統監
珍田 外務次官

林 大臣으로부터
어제 19일 오후 한국 國務大臣에 대한 京城의 인심은 한층 더 격앙되었으며, 특히 侍衛隊(近衛隊)는 매우 격분하여 같은 날 한밤중에 궁중에 난입하여 각 국무대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형세가 극히 험악함. 軍部와 法部 양 대신은 궁중을 벗어나 이날 밤 11시경 統監 관저에 이르러 이상의 급보를 전하고는, 아울러 往電 제68호 한국 황제의 위임에 따라, 우리 병력으로 앞에 기록한 각 대신의 보호를 요청하였음. 그에 따라 長谷川 司令官은 곧 우리 주둔군을 왕궁의 각 요소에 배치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명하였음. 그 후 우리 군대는 동 11시 58분 각각 배치를 완료하였음. 이상을 우선 급히 전보함.
- 1907년 07월 20일자 통감부문서
[일본 군대의 대궐 경비 하에서의 황태자의 즉위식 및 외국 사신의 접견]

(신문전보 발송 20/7/1907, 3.30 p.m.)
Associated San Francisco

어젯밤 전 황제가 한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양위에 책임이 있는 내각대신 전원을 살해하도록 비밀리에 황실경비대에 명령한 음모가 伊藤에게 보고되어 일본 군대가 대궐을 수비 중이라는 공식발표가 있었음. 상기 음모의 실현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 11시에 伊藤을 방문한 한국 군부대신과 법무대신은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했음. 전 황제의 폭동진압 요청을 이미 받고 있는 伊藤은 즉시 長谷川에게 군대 출동을 명령했으며 그 군대는 한국 경비대의 계획된 공격이 대궐 통용문 반대쪽 병영으로부터 있기 전인 4시 반에 도착했음. 황태자의 즉위식은 오늘 10시에 거행되었음. 일본 및 외국 관리들에 대한 접견 희망에 따라 문관 및 무관 참모들은 4시 30분에 알현하였음. 즉위식 후 전 황제는 내각대신들과 작별했음. 長谷川 부대는 여전히 대궐을 수비 중이며 平壤聯隊는 증원 차 아침에 서울에 도착했음. 20일.
McCormick

그러던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황제 고종의 강제 퇴위가 결정되고 일본이 고종을 일본으로 압송한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대한제국군 내에는 격앙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서인한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따르면 시위혼성여단 2연대 3대대 주도로 경운궁으로 진격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퇴위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외 통감부문서에 따르면 육군연성학교 생도들 역시 가담하여 각지에 탄약을 옮겨 보관했으며,[9] 당시 평양연대로 호칭되는 부대는[10] 궁을 점령하려 했다. 한국군은 이외에도 각 관청을 공격해 점령하려던 것으로 파악된다.

1907년 7월 20일자 통감부문서에서[11] 나타나는 정황에 따르면 시위대를 호출한 것은 다름아닌 황제 고종 본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친일 내각이 경운궁에 한데 모여 자신에게 양위를 협박하고 있는 순간을 고종이 노렸다고 판단했다. 정황상 고종은 시위연대를 불러와 이완용 등의 친일 내각을 한꺼번에 일망타진하고 양위를 무효화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정위 임재덕이 이끌던 시위 제2연대 3대대는 가장 반일 성향이 강한 부대로 여겨졌다. 그들은 궁내부 대신 박영효, 시종원경 이도재, 남정철 그리고 4명의 고위 군 장교와 공모하여 작전을 계획했다.[12]

하지만 20일 새벽 시행되려던 이 계획은 친일파인 군부대신 이병무와 법부대신 조중응에게 간파당하고 말았다. 19일 밤 11시 경 통감 관저로 급히 달려온 친일파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이토 히로부미는 신속히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일본군 출동을 명령했으며, 하세가와는 제51연대 3대대를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한국군의 공격이 있기 30분 전인 4시 반에 경운궁에 도착하여 포덕문을 차단하고 궐내에 2문의 기관총을 설치했다. 그리고 한국군 2연대 3대대를 포위해 고종 구출 시도를 저지한다. 박영효와 이도재, 그 외 4명의 고위 장교는 체포된다. 고종은 최후에는 자살을 위해 아편을 입수하려 시도한 것으로 보이나 이 노력 역시 실패하고 결국 양위 문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양위 후의 한국 정세 및 對韓정책 稟申 件]

往電第八○號 電信案
明治四十年七月二十二日
統監
珍田 外務次官
林 外相으로부터 西園寺 首相에게

현재 京城의 형세를 보건대 원래 先帝는[13] 閣臣의 권고에 따라 그 본심이 아닌 양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가지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기도하는 듯함. 다음의 사실은 즉 이것을 증명하는 것임.

첫째, 閣臣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18일 조칙에서 양위의 의미를 명백히 하려는 閣臣의 요구에 대하여 先帝는 이를 거부하고 굳이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시킨다고 운운하는 문자를 내놓게 했다고 말함. 이 일은 선례를 들어 일본에서 사용하는 ‘대리’의 글자와 다른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필경 섭정의 뜻이며, 실은 先帝가 후일 君權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리 발판을 만들어 두려고 하는 내심을 가진 데 따른 것임을 의심할 바 없음. 朴泳孝 등이 이미 이 설을 주장한다고 함.

둘째, 양위 조칙을 공포한 날 밤에 先帝가 시위대(한국 근위병)를 궁중에 부른 것은 그 진의가 병력으로 閣員을 진압하여 시의에 따라서는 이를 살육하려고 꾀한 데 있었다는 증적이 현저함.

다만 이 거동은 통감의 명에 의하여 한국 병정 출동 예정시각 약 30분 전에 우리 군대를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겨우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음.

셋째, 朴泳孝는 지난 18일 先帝에 의하여 궁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사퇴하고 어제 양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閣臣은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더니 차제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하고 다만 사직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을 총리대신에게 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20일, 즉 양위 후 이틀 후에 同 先帝는 朴泳孝를 궁내대신에 親任하는 식을 올렸으나 閣臣은 조금도 이를 알지 못했음.

위 외에 군대의 동요와 난민의 폭거 등은 先帝의 사주에서 나왔거나 혹은 先帝의 뜻을 받들어 일어나는 것으로 직간접으로 내각대신의 사업을 저지하고 방해하려고 도모하는 것이 명백함.

요컨대 현재의 형세는 한편으로 先帝는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閣臣은 新帝를 옹립하여 정부를 유지하려고 하여 아직 전쟁은 없지만 사실 君位 쟁탈, 즉 내란의 정황에 있음. 그리고 先帝는 다년간 국가의 군주였으므로 威福에 의하여 많은 방면에 다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대신은 다만 일본의 후원을 믿고 있을 뿐으로 달리 신뢰할 만한 실력이 없음.

그러므로 우리의 보호가 없다면 현 내각원은 결국에는 先帝의 음험한 수단 때문에 멸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임.

일이 만약 이에 이른다면 한국은 무질서·무정부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일본은 이를 간과할 수 없어 병력으로 간섭할 필요가 생기게 될 것이므로 지금을 위해 도모하건대 우리 원조로 수립된 현 내각을 보호하고 新帝를 옹립시켜 先帝가 음험한 수단을 행하지 못하는 정부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우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방책이라고 생각함.

사정이 위와 같으므로 이번 사건에 관한 협상 담판은 아직 이를 개시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 일의 진행상황을 관망하면서 시기가 되는 것을 기다려야 함. 어쨌든 지금 2~3일 정도 경과하면 형세의 발전이 다소 명백해질 것이므로 그 모양에 따라 本官의 진퇴에 관하여 다시 廟議를 괴롭히는 바가 있을 것임.
[한국 군대의 무장해제 외 황제의 일본 移送說 및 宗廟에의 양위 보고]

(신문전보 발송 20, July, 1907, 1.00 p.m.)
Herald Paris

20일 이른 아침 대궐과 모든 전략지점을 경비하는 기관총과 시의 전체지역을 순찰하는 일본군 기병들의 모습은 소란 진정에 효과가 있었음.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의 흥분은 군 당국의 모든 사전조치에 의해서도 진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 다음은 어제 있었던 한국 군대의 폭동으로 큰 화제가 된 사건들임. 즉 군관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여러 곳에 많은 탄약을 저장한 것이 발견되었고, 한국 군대는 여러 관청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음. 한국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平壤聯隊가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대궐을 점령할 계획이 발각되어 모든 한국 군대가 무장해제 되는 결과로 귀착되었음. ( ) ( )은 일본당국의 입장에서는 양위는 일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못되며 오직 계획 중 제1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취했음. 황제가 일본으로 이송된다는 풍문이 되살아나자 바로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감정을 세차게 요동치게 했음. 아직까지는 伊藤과 林은 東京政府의 계획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황제의 이송은 분명 아마도 그가 섭정하여 황태자를 조종할 우려에 비추어 그 실현성을 노리고 있을 것임. 오늘 아침 일찍이 대궐의 고위관리가 종묘에 보고하여 황실 조상들의 신령들에게 정식으로 왕위의 변화를 알리고 지금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 군사령부는 어제의 폭동으로 일본인 피살 10명, 부상 30명을 발표했음. 한국인은 피살 4명 외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는 분명 극소수 한국 군인을 제외하고는 사상자의 정도를 감추기 위한 것일 것임. 폭동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는 돌멩이 외에는 무기가 없었음.
Ohl.

아침이 되어도 격앙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일본군은 한국군 무기고 2개를 폭파 처리했고 평양연대로 지칭되는 한국군 부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이토 통감이 고종을 알현하려던 시도는 안전 문제로 하세가와 사령관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14] 이 와중에 고종의 양위에 격분한 시위혼성여단 제1연대 3대대 장병들 중 일부가 무장탈영, 양위를 반대하는 민간인 시위대에[15] 합세하여 일본 경찰 수 명을 사살하자 일본은 한국군의 저항을 정말로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역시 급하게 증원되기 시작했다. 7월 22일 문서에 따르면 원산에서 일본군 구축함이 1,000명의 일본군 병력을 싣고 제물포를 향해 출발했다. 7월 21일과 24일자 문서에 따르면 통감부는 한성의 6,000명[16] 한국군의 움직임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혼성 1개 여단의 증원을 요청한다. 일본군은 전국에 분산배치된 반면 서울의 한국군은 일본군의 수를 웃돌고 9만에서 10만발에 달하는 탄약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때부터 한국군 해산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양위로부터 나흘도 채 지나지 않아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며, 7월 27일에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보안법을 반포하여 항일운동을 하는 집회나 인물을 체포하도록 했다. 7월 28일에는 군대 해산계획 초안이 마련되었다. 한국군 해산 시작 일자는 8월 1일로 결정되었다.

2.3.6. 해산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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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승환 자결 기록화.png
<rowcolor=#ffd800> 박승환의 자결과 시위대의 봉기
일본은 우선 남산에 포대를 방렬하고 대한제국군의 화포, 기관총 등의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여 탄약과 무기류의 관리를 일본군 일임하에 두도록 했다. 그리고 대한제국군 사병들이 반발하여 봉기할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군 일원에게 금족령를 발령하여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의 탄약고 및 무기고를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미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병들에게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 보급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 31일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발령과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다음날인 8월 1일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8월 3일부터 9월 3일 사이에는 진위대까지 해산시켜 일부 호위대 병력을 제외한 전 대한제국군을 해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산에 반발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였고 시위대 소속 2개 대대 등이 저항하여 일본군과 남대문 전투를 벌였다. 지방의 진위대들은 각지에서 봉기하고 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호위대 일부는 황제의 호위병으로 유지되었다. 해산인원 중 257명은 경찰관이나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되어 옛 동료들의 반대편에서 총을 잡았다. 1907년 이후에도 조선 보병대, 조선 기병대와 군부의 일부 기관은 남아 일부 군인들이 근무했으나 1910년에 일본군으로 소속을 완전히 옮긴다. 노백린 등은 군대 해산 후에도 근무하다가 이때 군문을 떠났다. 일본군 소속으로 옮긴 뒤에 계급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군의 계급에 상당하는 것으로 대우하다가 1920년에 계급 명칭까지 일본군과 완전히 합친다.

2.3.7. 해산 이후

2.3.7.1.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
해산 이후에도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한제국군은 병합 후 조선왕가의 호위를 맡은 조선보병대였다. 시위보병 2연대 2대대를 개편하여 '근위보병대'로 개칭했다가 경술국치 후 조선보병대로 명칭이 바뀐다. 이들은 남한 대토벌 작전을 비롯한 일본의 의병 학살에도 동원되었다. 조선기병대가 해체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다 1930년대에 사라진다. 1931년에 대부분 군인들이 전역 조치되고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흔적은 사라졌다.
2.3.7.2. 의병과 독립군
한편 반대로 정미의병에 합류한 구 대한제국군 장병들은 훈련과 무기의 질에 있어서 상당한 전력 향상을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원주진위대와 수원진위대 강화분견대는 아예 부대 전체가 무장탈영하여 의병에 가담한다. 1907년 11월에 일어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13도 창의군의 1만 병력 중 3천여 명이 대한제국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1910년까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우다 이후에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이 된다.

다만 상대적으로 장교 계급의 의병 및 독립군 참여 비중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이들은 친일파로 전락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은사금을 받고 조용히 퇴역한 편이었으며, 설령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군사적인 무력투쟁보다는 자강운동에 힘쓴 경우가 더 많았다. 때문에 구한국군 출신 의병장들 중에서는 부사관 출신들의 비중이 훨씬 높은 편이었다.

대표적인 대한제국군 출신 의병독립군 인사들로는 원주진위대 무장봉기를 주도한 특무정교 민긍호, 강화진위대를 모아 저항하다 일본에 잡혀 처형당한 의병장 이능권과 육군 장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저항운동을 전개한 나중소김좌진, 육군 참령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 무관학교 생도 출신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대한민국 초대 무임소장관 지청천 등이 있다.

3. 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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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시위대
대한제국군
진위대
대한제국군
헌병대
학교 육군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 육군유년학교
기타 군기창 대한제국군
상무영
육군법원 육군위생원

3.1. 대한제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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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대한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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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계급

1894년 12월 4일에 대장부터 참위까지의 장교 계급이 설치되었다. 1894-12-04 승정원기록

러시아 제국군[17]의 계급 체계를 모방했으나, 계급 상하 관계를 러시아군의 대 - 중 - 소 체계와 달리 정 - 부 - 참 체계라는 전통적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군에는 준장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대한제국군 역시 준장이 없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서방 군대의 Lieutenant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 번역이다. 말 그대로 정규 위관/ 대리 위관 / 참모 위관인 것. 이는 조선군의 관례상 대 - 중 - 소는 부대의 전투 서열상 상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도 구세군대한본영에서는 정 - 부 - 참 체계로 계급명을 나타낸다. 영관이란 표현은 현재 동북아에서 한국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이 정부참 체계는 명나라의 군사계급체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명과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 녹영군의 군사장교계급체계를 간략하게 서술하면 파총-천총-수비-도사-유격-참장-부장-부총병-총병관(정2품)-제독군무총병관(줄여서 제독, 종1품)이었다. 아무래도 역사상 이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기에 이러한 체계가 채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청나라 군대도 상하계급을 정-부 체계로 구분하고 '영관' 계급이 있었는데, 우리와 다른 점은 정 - 부 - 이 아니라 정 - 부 - 이라는 것이었다.# 고종이 여러 개혁 및 개편 과정에서 옛 전통으로부터 명칭을 따오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한제국군의 계급체계도 이러한 전례들을 참고한 듯하다.

참고로 같은 계급을 중화권에서는 교관급 장교로 불리며, 북한일본(구 일본군현 자위대), 베트남에서는 좌관급 장교로 불린다. 조선경비대 시절에 잠시 다시 정 - 부 - 참을 도입했으나 1948년 이후 대 - 중 - 소로 바뀌었다.

파일:daehan1.jpg
파일:daehan2.jpg
파일:daehan3.jpg

병사와 부사관들은 계급장에 소속 부대를 표기했으며, 참교부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줄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장교부터는 계급장 양 옆에 별이 표시되며, 장군부터는 별이 금색으로 바뀌었다. 위관급은 중앙에 태극 문양, 영관급과 장관급은 중앙에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과 오얏나뭇잎이 태극 문양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장이 잘 정리된 사이트들 1 2 또한 장교들은 견장 계급장과 함께 소매에 ㅅ자 형상 수장 계급장도 사용하였다. 줄 1개(참위) ~ 11개(대원수)로 구분되었다.

1894년에 해당 계급을 설치했다. 실록에 따르면 대장은 연령 정년이 없고 부장이 70세, 참장이 65세, 영관급 장교는 54세, 대위에 상당하는 정위는 47세, 기타 위관급 장교부사관은 45세였다.

4.1. 인사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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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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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황족의 군사계급

당시의 열강 국가들을 보면 황족이나 왕족이 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인으로 근무하였다. 명예직으로 군사 계급을 부여 받는 일도 많았다.

원수부(대한제국)를 총괄하는 입장에서 고종과 순종은 각각 대원수와 원수 계급을 받았다. 다른 황족 중에선 고종의 측근이었던 8촌 청안군이 계급을 받았다.

이하의 황족 군인은 을사조약 이후에 임용이 이뤄졌으며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는 명예 계급이었다.

고종의 직계 자식들 외에 종친들에게도 계급 부여가 이뤄졌다. 보면 고종의 친형(완흥군)과 친조카(영선군), 4촌(완순군), 8촌(의양군)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생존했으나 군사 계급을 받지 못한 황족(왕의 4대손 이내)은 다음과 같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자면 육군무관학교에 황족을 입학시킬 가능성이 있었으나 실제 입학이 이뤄지진 않았다. 무관학교가 실질적으로 기능했던 1898년부터 1904년까지 무관학도의 입학연령 18-27세에 해당했던 출생년도는 대략 1871년생에서 1886년생이다. 이에 해당하는 황족으로는 순종 이척(1874년 3월 25일생), 의양군 이재각(1874년 4월 4일생), 의친왕 이강(1877년생 3월 30일생), 예양정 이재규(1877년 4월 8일생) 정도가 있다.

4.4. 외척의 군사계급

외척은 황실의 지지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외척 출신의 관료나 장성급 임용도 있었다.

5. 장비

대한제국군 보병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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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기 <colcolor=#ffbc00> 볼트액션 소총 <colbgcolor=white,#191919>게베어 1871, 그라 소총, 무라타 13년식, 베르단, 30년식 소총
단발 소총 레밍턴 롤링블럭, 스나이더-엔필드
권총 C78, M1879, MAS 1873, 르벨 리볼버, 웨블리 리볼버, 나강 M1895, 26년식 권총, 마우저 C96, 콜트 M1873
지원화기 기관총 M1883 개틀링, 맥심 기관총
화포 암스트롱포, 크루프 포. 빅커스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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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raining_Korean_Empire_Army.jpg
대한제국군이 구매했던 맥심 기관총#

막 근대화를 시작하고 중공업이나 기술이 부족하던 현실적인 여건상 소화기부터 중화기까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한제국군이 운용한 주요 장비는 아래와 같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a290e51c7386782a8a7fef8d2d608f6a--korean-clothes-korean-dress.jpg
▲대원수 고종황제와 원수 순종황태자.
보다시피 피켈하우베 형태의 예식모도 도입되었었다.
파일:external/bemil.chosun.com/%B4%EB%C7%D1%C1%A6%B1%B9%B1%BA2.jpg
육군 군복들. 육군의 복제는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군복을 참고했다고 하며, 예장(예복), 정장(정복), 상장(常裝, 근무복), 군장(전투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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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는 초초혼 작가가 대한제국 군복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 '그림으로 보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개인출판 하였으며, 2024년에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5.1. 장비 도입

대한제국군의 무기류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다. 칭제 전에는 청나라에서 제조한 마우저 소총 및 기타 잡다한 소총들을 사용하였고, 아관파천 직후에는 친위대의 급격한 증편에 맞추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000정의 소총을 도입하기도 했다. 러시아제국 내 문건에 따르면 이 3000정은 베르단 소총이었다.

그 외 1902년 영국으로부터 빅커스 야포 12문과 맥심 기관총 6문을, 1899년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리볼버 300정을 구입하기도 하였으며, 1900년에는 프랑스로부터 그라 소총 1만정을, 1901년 3월에는 미쓰이 물산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30년식 소총 1만 정과 탄약 100만발을 구매했다.[23]

5.1.1. 1903년의 대규모 장비 도입

최대규모의 수입은 1903년 프랑스와의 무기계약으로, 소총 1만 2천 자루를 구입하였다. 1903년 2월 28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소총들은 일본에 주문한 양무호와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1903년에 대한제국은 프랑스계 회사인 용동상회를[24] 통하여 그라 소총 5만 자루와 총검 5만 자루, 탄환 1백만발을 구매하였다. 그러나 1904년 12월 17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 소총들은 결국 영국령 홍콩에서 압류당하였다. 이후 한국정부는 용동상회에 30만원의 금액을 지불하지만, 정황상 일본의 농간으로 이 무기들은 결국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 소총들은 1908년에 마지막으로 다시 언급된다. 당시 미국인 일부가 상하이 체류 한국인들과 계약을 맺어 마우저 소총 2만 5000정을[25] 정미의병에 공급하고자 밀수입을 시도했다. 이때 일본은 혹시 1903년 한국정부가 수입하려던 그 프랑스제 소총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 측에 수사를 의뢰했다.[26]

5.2. 군수공업

5.2.1. 칭제건원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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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칭제건원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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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히토 황태자 한국 도항 기념 사진첩에 수록된 1907년 10월 당시 용산 군기창 일대의 모습. 중앙의 공장이 당시 일본군 무기고로 사용 중이던 군기창이며, 아래 공사 중인 곳은 일본군 유곽 야요이쵸다.[27] 오른쪽 위 굴뚝은 탁지부 인쇄국 건물이다.#

5.2.3. 군복 제조

군복의 경우에는 자급 체제를 갖춘 편이다. 각 부대별로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직접 제작했다. <군대내무서>에 따르면 각 연대본부의 피복위원은 장인들을 지휘하여 군복을 새로 갖추는 업무를 맡았다고 명시되어 있다. 실제로 1899년 1월 11일자 황성신문에 윤정림이라는 연대 피복위원이[28] 삼천 벌의 군복을 제작하였으나 1천 벌이 사이즈가 맞지 않아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각 연대에서 군복을 제조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04년 군기창 관제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용산 군기창의 제혁소와 직조소에서 군복을 생산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상술한대로 군기창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그 외에 1906년 김두환이라는 상인이 1만 6천 벌의 피복 납품 문제로 수감된 사례로 보아 민간 업자들에게 위탁 생산을 맡긴 경우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6. 군가

남아있는 군가는 단 하나, 육군박물관 소장 <육군무관학교학도계칙> 후면에 그 원 소유자인 이범서가[31] 낙서해 놓은 제목 불명의 군가 뿐이다. 조승옥의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에서 재인용하자면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음은 알 수 없다.
군인들아 군인들아 대한제국 군인들아
잊지마라 잊지마라 충군애국 잊지마라

정병(精兵)을 배양하니 부국강병 기초로다
황실의 군대요 국가의 간성(干城)이라

나아가세 나아가세 죽을망정 나아가세
번개처럼 휘두른 칼에 추풍낙엽 적군일세
대한국기 높이 달아 억만 군인 개선가다

세간에는 충성가(忠誠歌)가 대한제국군의 군가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충성가는 6.25 전쟁 당시 불려진 대한민국 국군의 군가다.
육군무관학교에 보부상 출신인 길영수가 정원외 인원으로 들어갔다가 본인의 청원에 의해 퇴교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학도들이 만든 위무 목적으로 만든 신군가가 있다. 황성신문 1899년 1월 23일 잡보에 따르면 가사가 이렇다. 가사 내용으로 보면 알겠지만 군가라 말하긴 어렵고 그냥 이벤트적으로 불러준 노래다.
기초로세 기초로세
대한제국 기초로세
하여보세 하여보세
부상반수 하여보세
두평양수목추가
승어학교무예로세
다행일세 다행일세
대한군대 다행일세
평양립진목추는
대한제국 기초로세
길과천반수님은
좌적진고와식일세
반모실총 던져두고
대진목추 깎아보세

부상반수(負商盤水)는 보부상의 직책이다. 두평양(頭平壤)은 보부상이 머리에 쓰던 평양립(平壤笠), 수목추(手木椎)는 손에 나무 몽둥이를 들었단 뜻이다. 승어학교무예(勝於學校武藝)는 무관학교의 무예 보다 낫다는 뜻이다. 평양립진목추(平壤笠眞木椎)는 평양립과 나무 몽둥이란 뜻이고, 길과천반수(吉果川班首)는 과천 군수와 보부상의 도반수(都班首)를 지낸 길영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좌적진고와식(坐摘眞苽臥食)은 누워서 진고라는 물풀을 따서 먹고, 반모실총(半毛室銃)은 총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대진목추(大眞木椎)는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뜻한다. 한문투가 많이 섞인 당시의 언어 생활이 반영되어 있다.

가사 풀이를 하자면 보부상이 군인 보다 낫다 이런 식으로 길영수를 추켜세워주고 있다. 1898년에 황국협회대한제국 상무영 등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7. 예산

칭제 이래로 한국의 군사예산은 꾸준히 증가하여 1904년에는 5,349,521원에 달한다.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전체 정부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한 비율은 대략 23%에서 27% 사이였으나[32] 1901년부터 1904년까지는 급속히 증가하여 대략 38%에 달했다. 특히 1901년에는 41%가 군사비로 지출되는데 서인한은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서 이것이 전국 31곳에 해안포대를 설치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만성적인 재정부족에도 군사 비용이 과다하게 지출된 셈인데, 이는 강병 육성을 통해 대외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이다. 이를 위해 군비에는 각지의 둔토나 궁내부 내장원에서 관할하는 황제의 개인 비자금까지 투입되었다. 내장원의 자금 지원은 특히 부대 창설비와 해외에서의 장비 구입과 같이 거금이 들어가는 사업에 주로 사용되었다. 가령 1903년 군부에서 프랑스소총 5만자루와 총검 5만 자루, 탄환 1백만 발을 구입하는 데 사용한 30만 원은 내장원이 빌려준 것이었다.

그 외에도 내장원에서는 탁지부가 지급하지 못하는 월급을 대신 지급해 주거나, 역둔토에서 생산한 곡식을 군부대에 군량미로 공급하기도 했다.

전체 예산 대비 군사 예산은 다음과 같다. 이 예산은 궁내부 등의 자금은 포함되지 않았다.

7.1. 급여

1897년 기준으로 무관학도는 급료 36원, 6품(주임6등)인 참위는 연봉 454원, 부위는 544원이었다. 당시 교사인 교원(6등)이 180원을 받았다. 지방관인 군수가 연봉 600원을 받았는데, 이는 정위의 756원 보다 낮았다.[34] 참령은 1,056원, 부령은 1,116원, 정령은 1,500원이었다.

참장은 3,000원이고 부장은 4,000원이었다. 둘의 대우는 각각 협판(차관)과 대신(장관)에 해당했다. 보통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고위 장성인 대장이 차관급 대우를 받는 걸 감안하면 높은 의전이다.[35] 대장의 경우 보임된 사람이 1명도 없었지만 연봉은 4,996원이었고 종1품은 참정, 정1품일 경우엔 의정(총리)와 대등했다. 장교는 모두 판임관이 아닌 칙임관 이상이었다.

실제로 육군무관학교 졸업자의 경력을 살펴보면 무관학교를 졸업한 참위를 군수로 임용하는 사례가 가끔 나타난다.[36] 당시에 급여나 의전 면에서 대한제국 군인들이 굉장히 대우 받았음을 알 수 있다.

8. 실전

8.1. 의화단 운동

1899년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한제국 내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쳐들어와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의화단 진압을 위해 열강 8개국이 참전하였고, 러시아 제국고종에게 참전을 제안하였지만 초기의 대한제국군의 군세는 열악하고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이후 국방비를 대폭 늘려서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켰고,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이들과 교전하였다. 진위 5연대의 소대장 조기설, 김성열,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명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에는 이범윤을 북간도로 파견하여 한국인 보호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8.2. 과의 간도 영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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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의병 진압

일본은 1905년 4월에 18개 진위대를 8개 진위대로 감축시켰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일본은 원수부에속해있던 군령권과 군정권을 다시 군부에 환원시키고, 친일적 인사이면서 훈공과 근로가 가장 많은 육해군 대장으로 부원수를 두고 대원수와 원수에 諮詢하는 책임을 맡게함으로써 중심부에서부터 군통수권을 해체시켜 나갔다. 일본은 특히 대한제국 내부에서 황제에게 속한 군통수권의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여론을 조성해 나가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경우, “군부가 있는 이상 원수부는 승격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37]

일본은 고종의 군통수권의 지위를 격하시킨 이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을사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진위대를 투입하였다.

을사의병 당시 폐하의 군대에게 대적할 수 없다며 교전을 피하다 잡힌 최익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들은 일본군에겐 적의를 가지지만 대한제국군에겐 교전을 피하거나 소극적이 되어 알아서 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8.4. 일본에 대한 저항

청일전쟁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의 만행을 겪고 아관파천으로 탄생한 대한제국군이었기에 당연히 일본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서울과 덕수궁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의 항일 장교들을 교체시키거나 추방하고 용산에만 일본군 5만명을 주둔시키는 등 대한제국 각 거점에 주둔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같은 곳에 주둔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사병들은 상대편의 장교를 봐도 경례를 하지않고 무시했으며 사소한 충돌도 잦았다. 당연히 장교들도 서로 경례를 하지 않았다.

을사조약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일본이 퇴위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였다. 7월 20일에는 시위혼성여단 소속1연대 3대대 소속 병사 100여 명이 동조하여 종로의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대한제국군이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한 일본은 대한제국군을 해체하기로 하고 7월 31일 순종의 군대해산 칙명을 받아내어 8월 1일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9월까지 진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남대문 전투를 벌였고 원주 진위대, 여주 파견대, 강화 분기대, 홍주 분견대, 진주 분견대, 안동 분견대 등 진위대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을사의병과 합류 정미의병이 되어 전국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며 저항하였다.

9. 대중매체에서

10. 여담

민병 조직인 산포대(山砲隊)[42]를 지원하기도 했다. 원수부가 1902년 12월 함북 무산군에 설치된 산포 300명에게 양총 300정을 제공하였다.[43]

요동간도 영유권 분쟁을 두고 진위대 외에도 1902년부터 간도에 주둔한 '북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1905년까지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며 철도부설을 하던터라 처음에는 러시아 공사가 이런 월경 공격에 대해 침략 행위라며 항의하는 서한을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곧 러시아는 청군에 공동대응하자며 대한제국과 이런 합의를 맺었다. 첫째,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간도 및 그 부근 3마일 이내의 지역에 주를 설치하여 관리한다. 넷째, 간도에 소란이 생겨 주장(州長)의 권한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협동하여 적절한 방어책을 강구한다.

이범윤의 사포대는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대한제국군 편제에 속한 정규군이 아니었으나 고종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고 세를 걷어 사포대를 유지함을 허가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민병대준군사조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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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같이보기



[1] 고종과 대한제국에 옹호적인 황태연 등의 연구자는 포군과 여러 보조 병력 등을 합쳐 편제상 거의 3만이라 보는 경우도 있다. 日本外交文書 37권 제1책, 문서번호 390, 명치37년(1904년) 5월 31일 자료에 따르면 일본 외교관이 일본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실병력을 1.6만이라 추정하고 있다. 황태연은 이를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개입으로 탈영자가 발생한 뒤의 값이라 과소평가된 것이라 보고 있다. 이태진은 이 자료를 인용하여 대한제국군의 규모를 1.6만으로 보았다. 진위대의 경우 남부 지방에서 완편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 병력의 수치는 일본 외무성 예측치와 편제상의 최대 규모사이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2]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 대한제국군,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고 정부 자체도 대한제국 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 애초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천명했는데 임정은 대동단결선언에 따라 대한제국의 주권이 순종의 포기 이후 국민에게 넘어갔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현 국군이 구 대한제국군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3] 훈련대는 시위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훈련대의 반란을 막기 위해 고종이 신임하는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으로 맡기고 해체를 앞두고 있었으나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대장 3명(우범선, 이두황, 이진호)이 이끄는 훈련대가 궁궐로 들어오자 꾸짖으며 막아서다 일본군에게 사망한다.[4] 예를 들어 대구시의 친군남영, 평양시의 친군서영, 경성군의 친군북영 등.[5] 육군무관학교의 졸업자가 없는 해였다.[6] 중대장 5명, 소대장 20명, 부관과 향관 등[7] <대한제국기 군사 중심의 정국운영과 원수부 창설의 의미>, <러일전쟁 이전 대한제국 원수부의 군무정책 강화와 군사운영의 성격>[8] 북청진위대는 계획상 존재, 실제로 창설되지 않음.[9] 당시 연성학교는 군수품을 보관하던 삼청동 기기창 자리에 들어와 있었기에 탄약 접근성이 높았을 것이다.[10] 어떤 부대인지 불명. 1907년 당시 평양의 진위 제4연대는 이미 1905년 해체되고 평양진위대는 진위 제7대대로 감축된 상태였다. 정황상 시위혼성여단 제2연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11] 해당 문서명: 暴徒의 統監官舍 습격 기도 등 상황보고[12] 가담자 중에는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도 있었다.[13] 선제. 선황제를 의미. 여기서는 고종을 지칭함.[14] 이토는 결국 입궐했다.[15] 당시 이 데모는 곳곳의 친일파 관저를 불태울 정도로 극심하게 일어났다.[16] 어떤 기준에서 6,000명이라 한 지는 불명. 당시 한성에는 2,300명 정도의 시위혼성여단만이 남아 있었으며 6,000명은 한국군 전체 숫자였다. 다른 문서에서는 4,500명이라고도 한다.[17] 1895년 갑오개혁 당시 조선군 개편은 독일식 일본군을 참고했으나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원년에 창설된 대한제국군은 프랑스식 제정 러시아군 체계를 따랐다.[18] 원래는 정장이 되어야 하나 대장이라는 용어가 예전 조선군 시절부터 있었기 때문에 대장 계급명 사용.[19] 1904년 원수부를 일본이 폐지시킨 후 촬영된 순종의 군복 차림 사진을 보면 팔소매 계급장을 대장 계급장으로 착용하였으므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수부 폐지와 함께 대원수, 원수 계급 자체가 없어지고 황제와 황태자의 계급이 대장으로 격하되었다고 추정한다.[20] 위 표에서는 원사 계급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대한제국군이 모방한 일본군의 특무조장(후에 준위로 계칭)을 생각해볼때 원사보다는 준사관에 해당하는 계급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대한제국군에 준사관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21] 다만 일본군의 준사관은 한국군의 준위보단 원사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22] 10세가 되는 1907년에 참위, 1909년에 부위로 임용되었다.[23] 1900년 12월 28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참조.[24] 런던상회라고도 한다. 공식명칭은 롱동플레장상회(la Maison London plaisant et cie). 이들은 내장원경 이용익과 함께 평남 남부 무연탄전에 대한 개발도 계획했다.[25] 의화단 운동 당시 홍콩에서 보관하던 소총들이다.[26] 1908년 1월 16일자 통감부문서 참조.[27] 야요이쵸는 1907년 3월경부터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일대의 한국인 묘지들을 유족들의 허락도 없이 마구잡이로 파헤친 후 그 위에 세웠기에 원성이 자자했다. 황성신문 1907년 3월 9일자 기사 참조.[28] 어느 연대 소속인지는 불명[29] 순헌황귀비의 남동생이며 훗날 참장까지 진급하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한 친일파다. 진명여자고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30] 관원이력서에는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31] 무관학교 2회 졸업생[32] 동시기인 1899년 러시아는 전쟁성과 해군성에 각각 3억 3600만, 8400만 루블을 썼는데 이는 러시아 정부 총 지출의 28.6%를 차지하였고, 일본은 1899년에 세출총액의 44.9%인 1억 1430만엔을 군사비에 투자하였다. 출처: 러일전쟁 이전 대한제국 원수부의 군무정책 강화와 군사운영의 성격[33] 러일전쟁으로 서울이 점령되면서 정부의 정책 능력이 감소하면서 실제 군사예산 집행액은 210만원에 그쳤고, 1905년에는 70만원으로 줄었다.[34] 2024년 기준으로 기초단체장의 연봉은 부단체장의 격에 따라서 1억 2300만원대에서 1억 500만원대 정도이다. 2025년 기준 대위는 호봉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가장 높은 12호봉이 월 407만원 정도로 기본급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군수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35] 한국은 오늘날에도 대장이 실질적으론 차관급이지만 의전상 장관급으로 대우해주는 부분이 있다.[36] 육군무관학교 1회 졸업자인 구연호(具然浩)는 군부 경리국 제1과원으로 근무하다가 옹진군수로 발령이 났다. 육군사관학교 나온 소위가 국방부에서 근무하다가 관선 옹진군수로 가는 셈이다.[37] 고종의 軍統帥權 강화시도와 무산과정 연구-대한제국의 멸망원인과 관련하여-. 장영숙 14쪽[38] 군복 고증에서는 조금 아쉬운 것이 빨간색과 검은색 복제로 구성되어 있는 실제 대한제국군 군복과 달리 온통 검은색으로 깔맞춤되어 있다. 묘사된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견장 역시 빨간색 견장에 '시위대'라고 써져있는 것이 아닌 검은색 견장에 '시위-'라고 되어있는 것도 흠, 다만 일본군 군복은 고증이 꽤 잘된 편인데 당시 대한제국군 군복 색상이 일본군의 메이지 19년식의 군복과 유사하다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고증에 맞지 않는 군복을 보인 듯[39] 이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행진곡은 독일의 행진곡인 옛 친구(Alte Kameraden)[40] 이쪽도 군복 고증이 상술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급은 아니지만 대한제국군의 피켈하우베가 철모가 아닌 단순한 원형 모자 위에 꼬챙이를 단 괴상한 형태의 모습으로 나온다. 다만 당시 한국에서 피켈하우베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장식이 많고 비싼 피켈하우베의 특성상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도 어렵기에 영화를 제작할 당시 원형 모자에다 꼬챙이들 달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41] 심지어 일본 함대의 군함은 그냥 현실의 한국 해군 군함에다가 일장기만 어설프게 붙혀놓은 모습이다.[42] 해안 지역과 국경 지역의 포수를 모아서 설치했다. 당시 한반도는 총기 보급이 지금에 비해 활발한 시절이었고 민간에 포수가 많았다.[43] 황성신문 1902년 12월 24일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