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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4 23:17:25

사포대



1. 개요2. 역사

1. 개요


1903년에 간도관리사로 파견된 이범윤이 간도 지방에서 결성한 한인들의 민병대 조직이다. 충의대(忠義隊)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2. 역사

○ 의정부찬정 내부대신임시서리 의정부참정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북간도(北墾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로,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그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沿邊)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곳에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사람이 지금 수만 호에 십여만 명이나 되는데, 청 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본부(本部)에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황상의 교화를 베풀고 호구(戶口)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시찰관 이범윤의 보고서(報告書)를 받아 보니, ‘우리 백성들에 대한 청 나라 사람들의 학대가 낱낱이 말하기 어려운 정도이니, 특별히 굽어 살펴 즉시 외부에 공문을 보내 청 나라 공사(公使)와 담판을 해서 청 나라 관원들의 학대를 막고, 또한 관청을 세우고 군사를 두어 많은 백성을 위로하여 교화에 감화되어 살기를 바라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하면서 먼저 호적(戶籍)을 만들어 보고한 것이 1만 3000여 호(戶)입니다.
이 조사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산 지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데, 아직도 관청을 세워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어 매우 많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는 채 청 나라 관원들의 학대에 내맡겨지고 있으니 먼 지방을 안정시키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외부에서 청 나라 공사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한 뒤에 그 지방 부근의 관원에게 공문을 보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경(國境) 문제를 논한다면, 이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界碑) 이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본래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비어 있던 땅에 갑자기 알맞게 정하는 것은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官吏)를 특별히 두되, 또한 저 북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 이범윤을 그대로 관리(管理)로 특별히 임명하여 북간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적으로 사무를 맡아보게 함으로써 저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북간도 백성들을 사랑하여 보살펴 주는 조정의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1903년 8월 11일

이범윤이 간도관리사로서 조직한 사설 민병대였다. 사포대는 엽총 등으로 무장한 포수 등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범윤이 간도관리사로 임명된 것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한 일이었지만, 사포대는 이범윤이 '개인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향토방위 겸 예비군 역할을 하였던 민보(民堡)나 민포군(民砲軍) 등과는 달리[1], 사포대나 충의대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한국 정부의 간도 관리 문제는 청나라나 러시아의 항의를 받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2] 공식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조치는 심각한 정치외교적 문제와 위기를 발생시킬 수 있었으므로,[3] 설령 이런 민병대 조직을 정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문서로 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사포대는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와는 무관하다.

러일전쟁 당시에 이범윤이 이끌던 친러 민병대 병력 500명 상당수가 사포대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5년에 청나라의 요구로 대한제국 정부가 이범윤에게 귀국을 명령하자,[4] 이범윤은 러시아 제국령으로 넘어갔다. 사포대 병력들도 상당수가 따라왔고,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에 병력들이 합류하면서 창의회로 이어진다.

1919년에 만주에 있던 단체인 정의군(正義軍) 휘하에 사포대란 단체가 있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1] 1902년 12월 24일 황성신문 보도에 따르면, 원수부(대한제국)에서 함경도 무산 지역의 포수들을 모은 산포대(山砲隊)에 양총 300정을 지원한 바 있다. 이들은 국내의 민병 조직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개별적으로 국경을 넘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공식적으론 국내의 민병 조직을 지원한 것이었다.[2] 북청진위대의 중대장이었던 조기설의 경우, 1903년에 군물을 탈취한 청비를 추적하려고 2개 소대에게 압록강을 넘어 상부의 지시 없이 월경하게 했다. 이 일로 종신 유배를 받을 뻔 했다가 참작되었다.[3]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에도 국경분쟁 상황이 벌어져도 웬만큼 격화되지 않는 한 군부대를 직접 동원하기보다는 국경경비대나 다른 준군사조직, 법집행기관 간 충돌 정도로 자제하고, 무력 충돌이 벌어져도 주먹다짐이나 몽둥이질 정도에서 시작하는 일이 많다.[4] 이 시기에는 서울이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군축이 이뤄지는 등 한국 정부의 순전한 의지라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