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 훈련대 간부 | ||
제1대대장 이두황 | 제2대대장 우범선 | 제3대대장 이진호 |
1. 개요
訓練隊1895년 2차 갑오개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창설된 부대. 일본 공사가 제안하고 일본 육군 장교가 교관이었으며 3명의 훈련대대장들은 (당연히) 모두 친일파였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죄로 사건 이후 해체되었다.
2. 설명
1895년 제2차 갑오 개혁 당시에 창설되었다. 그해 1월에 일본 공사가 근위병을 설치할 것을 제안해 2월에 구 친군사영(親軍四營)[1]에서 장병을 뽑았다. 규모는 1개 대대 수준이었다. 훈련대장으로는 참령을 임명했고 교관은 일본군에서 파견된 육군 장교가 맡았다. 1대대 외에 서울에 2대대를 추가 설치하고 평양에 3대대를 설치했다. 청주와 진주 등에 4대대 - 6대대를 설치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 7월에는 1대대, 2대대를 합쳐 연대 규모로 재편성되었다.일본 교관에 의해 양성되었고 지휘관들은 친일파로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가 그해 해체되었기에 1년도 유지되지 못했다. 훈련대에 맞서 싸웠고 이후 러시아 교관의 훈련을 받아 재창설된 시위대와는 편제도 장비도 성격도 전혀 달랐다. 별기군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근대 편제를 구성하는 등 이전의 군사 개혁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3.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조선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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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대한제국군 시위대와 교전하였다. 일본 공사 미우라에 포섭된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2],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전 군부 협판 이주회 등이 일본군에 합세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 및 훈련대 동원을 담당한 인물은 구스노세 유키히코였고 미우라는 을미사변 발생 전, 구스노세 유키히코를 포함한 관련자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각자의 역할과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
을미사변 이후 1895년 11월 법부에서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모두 모반자로 지목하여 재판할 때, 궐석으로 재판받았다. 한편 현장에 있던 박선, 이주회 등은 11월 14일 법부의 최종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왕명으로 유길준,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권영진(權濚鎭),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2월 15일 고종은 이들에 대한 참수령을 내렸다.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는 일본으로 망명에 성공하였다. 이 가운데 우범선은 결국 일본에서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두황과 구연수는 일본 망명 생활 동안 살아남았다.
4. 여담
- 조선군이었던만큼 당연히 조선 정부의 지휘를 받았고 조선의 세금으로 운영되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모략으로 조선의 군대를 향해 총끌을 겨누었는데, 그래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훈련대에 대한 인식은 쿠데타나 반란과 동일할 정도로 매우 나쁘다. 이렇다 보니 현재는 훈련대 반란 사건 관련자 대다수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올라갔다.
- 조선군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켜서 을미사변에 가담하게 된 것은 고종의 또 하나의 숙군의 실패 사례이자 임오군란에 이어서 군대 관련 문제로 두 번째 흑역사를 남기게 된 사례이다. 고종은 훈련대를 해체하겠다는 통보만 했을 뿐 훈련대 해체로 불만에 쌓여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요주의 인물들인 훈련대 장교 이두황, 우범선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즉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는 장교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막장 행동을 한 것이다. 거기다 훈련대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일본인 교관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부인을 참혹하게 잃어버리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일본군 및 훈련대와 싸우다 숨진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 여러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00년 9월 고종이 세운 사당으로,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석이다 1969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