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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12:05:45

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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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高永根
파일:external/img.kbs.co.kr/04.jpg
출생 1853년
사망 1923년 (향년 70세)

1. 개요2. 생애3. 평가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개화파지식인, 항일운동가.

2. 생애

초년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고, 1884년 4월 오위장, 1893년 8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무관이었다.

이전에도 동학 농민 운동 시기 전봉준은 격서에서 고영근과 민영준, 민영환을 탐관오리로 지목했었다.
하지만 을사조약에 자결한 민영환을 생각하면 전봉준 등 동학교도들이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위해 정적인 명성황후 세력을 무조건으로 적으로 돌린것으로 신뢰하기 어렵다.전봉준 판결문과 공초 기록문 달리 고영근과 민영환이 부패를 저질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정황과 증거가 없어 의문이 있다.

그리고 관료의 입장으로 황국협회에 가담하였고 다시 독립협회로 이동하여서 활동하였다.[1]. 1898년 11월 고영근은 독립 협회 부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으며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가 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래서 독립협회 몫의 중추원 의원 17인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중추원 건으로 독립 협회는 개박살이 났고, 고영근은 독립 협회의 재건을 노렸다. 그 과정에서 반대파 대신들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였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2]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박영효, 안경수 등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게 대표적으로 역적 취급 받던 이들과 함께 독립 협회의 복설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윤효정을 통해서 역시 일본에 있던 우범선을미사변의 일본 측 협력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우범선을 처단하기 위해 일부러 접근해서 친하게 지내다가, 기회를 봐서 처단해버렸다. 우범선을 죽인 직후 경찰에 자수,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면을 요청하는 등,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결국 징역 5년으로 감형, 복역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능참봉으로 재직했고, 1910년 한일 병탄 후에는 일제가 사여한 모든 관작을 사양하고 계속 능참봉의 일을 계속했다. 고종 사후 조선 왕조가 이왕가로 격하된 상황에서“대한 제국 황제”라고 쓰인 비석을 세웠다는 이유로 조선 총독부에 의해 파직되고, 1923년 향년 71세를 일기로 이듬해 사망했다.당시 동아일보 기사(1922년)

3. 평가

그간 친일반민족행위자 우범선을 처단했고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일운동가로 알려졌으나 반면 지나치게 미화된 인물이라는 평도 듣는다.

독립 협회 부회장 겸 만민 공동회 회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개화파 지식인으로 볼 수도 있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았다는 점에서 충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인생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하기 위해선 우범선을 암살한 계기에 대해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당장 고영근 본인은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우범선을 죽였다고 주장을 하였으며, 조선에 보낸 글에서도 이를 강조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충성하여 그래서 명성 황후가 죽은 다음에는 매국노를 처단하였고 개화파 지식인으로도 활동을 하였다. 한일합방 후에 모든 관직을 버린것도 일종의 독립운동가라 볼 수도 있다.

4. 관련 문서



[1] 독립협회로 이동한 배경에 대해서 황국 협회가 폭력적 단체로 변해서 이동했다고 나와있는데, 이후 독립 협회도 만만치 않은 과격 단체로 변했다.[2] 이 시기 고영근은 한국에서 암살자가 올 것을 두려워하고있었다라고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서 기록된 요시찰 한국인 거동에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