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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말부터 상투를 정리하기 위해 사용하던 머리 장식. 상투를 틀 때 잔머리가 나오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도구이다.2. 구조 및 제작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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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을 제작할 때는 편자, 앞, 뒤, 당 순으로 나누어 짠다.
편자는 망건을 착용한 사람이 머리를 조일 수 있도록 말총을 평직으로 짠 부분이다. 이 편자를 망건골에 묶고 앞뜨기와 뒷뜨기를 하는데 뜨는 방식은 같으나 앞부분은 사람의 이마에 통풍이 되도록 뒤보다 성글게 짜며, 말총이 짧아 한 올로 한 줄을 모두 마칠 수 없기 때문에 뒤의 설단과 앞과 뒤의 연결부분인 설주에서는 한 코에 매듭을 두 번 지어 말총을 이어서 쓴다.
앞뜨기와 뒷뜨기를 하는 과정은 바닥뜨기라고 부르며 바닥을 다 뜬 망건을 몸골에서 당골로 옮겨 당을 걸게 된다.
당은 망건을 찬 사람의 머리크기에 따라 머리 윗부분을 조이는 역할을 하고 망건에서 제일 신축성이 좋은 부분이다.
망건을 다 만든 후에는 망건의 설단과 설주에 이은 말총을 가위로 다듬고 공단으로 마감한 다음 당줄을 건다.
2.1. 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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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품
도리옥[2] 관자 - 정2품
도리금[3] 관자 - 종2품
꽃이 조각된 대형 금관자 - 정3품
꽃이 조각된 대형 옥관자 - 당하3품 이하
호화로운 사치를 하는 자는 대모, 수정, 마노, 명박 등 보석을 관자로 썼다.
뼈, 뿔로 만든 관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썼다고 한다.
2.2. 풍잠
망건의 당 중앙에 다는 지름 4㎝ 내외의 타원 또는 반달 모양의 장식물.풍잠(바람 풍, 비녀 잠)이라는 이름처럼, 갓을 고정시켜서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비녀와 같은 것이다.
조선 후기가 되자 갓의 모자 부분이 작아지며 갓이 바람에 의해 젖혀지는 것을 막기위해 생겨났다.
18세기 후반 부터 탕건에 풍잠이 들어갈 공간이 생긴 것으로 미루어 보아, 풍잠은 탕건이 갓 받침용으로 바뀐 이후에도 사용 된 것을 알 수 있다.
풍잠 아래엔 2개나 4개의 구멍이 나 있어, 2개의 줄을 구멍 속에 교차시켜 앞 위의 당에 묶어 사용했다.
관자와 다르게 신분에 따른 재질 차이는 없지만, 상류층은 호박, 대모, 수정, 밀화 등 보석을 사용했고, 서민은 우각, 뼈, 나무 등을 사용했다.
- 타원형 풍잠
우각, 대모, 뼈 등 가벼운 재료로 만든 풍잠.[4] - 반달형 풍잠
옥, 수정, 호박, 나무 등 무거운 재료로 만든 풍잠. - 빗 풍잠
망건에 달지 않고 풍잠에 달린 빗살으로 비녀처럼 머리에 꽂은 풍잠. 재료에 구애되지 않았다. - 날개 풍잠
상투관에 달린 날개 모양의 풍잠.
2.3. 살쩍밀이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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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선의 말총망건은 명나라의 망건 양식을 전수한 것이지만 그것의 재료와 형태를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식의 특수한 수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망건이 전래된 고려 말부터 직접적으로 출토유물[6]과 전세유물[7] 이 있는 조선 후기까지 거의 머리 전체를 감싸는 구조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망건의 당의 높이가 낮아지며[8]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아는 머리띠 형태의 망건으로 고정된다.
| 파일:능창대군망건.png | ||||
| 왼쪽 부터 순서대로 능창대군[9], 최경선[10], 이익정[11], 채제공 일가[12], 영친왕의 망건[13]. [14] | ||||
망건의 높이 변화는 17세기 초반에 17cm[15], 17세기 후반에 14.5cm[16], 18세기에는 11.5cm[17], 18세기 후반 ~ 20세기에는 7cm~8cm[18]정도까지 줄어든다.
4. 망건장
| 한국의 전통공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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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408080><colcolor=#fff> 망건장 網巾匠 Manggeonjang (Horsehair Headband Making) | ||
| | ||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 |
| 분류 | 무형유산 / 전통기술 / 공예 | |
| 지정일 | 1980년 11월 17일 | }}} |
| <colbgcolor=#408080,#408080> 국립문화재연구소 망건장(網巾匠) |
| 무엇이든 엮는 손… 🖐 경이로운 장인의 집중력ㅣ망건장 / 국가유산채널 |
조선 시대에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으로 소속되어 망건(網巾)을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사람이다.
구한말~일제강점기를 증언한 구술채록 등에 따르면 제주도 화북~함덕에 이르기까지 망건을 많이 만들었으며, 특히 조선의 망건은 말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80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19] 현재 기능보유자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동에 거주하는 강전향과 딸 전영인이다.
5. 착용법
5.1.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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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현이도 / 영의정 채제공 / 삼도수군통제사 이창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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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성인식과 상투틀기 |
18세기 이전 출토유물이나 전세유물들을 확인해 보면 현재 남아있는 구한말 유물에 비해 당을 높이 걸어서 머리를 온전히 감싸는 형태로 만들어져 정수리에 상투를 틀려면 망건을 이마 중간까지 매어야 했다.[20]
5.2. 매는 순서
망건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매었던 물건이라 출토 미라부터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사진자료까지 다양한 착용법이 나타난다. 아래의 순서는 구한말~일제강점기 영상 자료에도 남아있으며 지금도 전승되고 있는 방법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망건 사용법 |
| 상투 트는 법 |
| 번호 | 상세 |
| 1 | 상투를 먼저 틀어 둔다.[21] |
| 2 | 망건을 이마에 대고,[22] 아랫당줄을 관자에 걸어,[23] 뒤로 뺀다. 착용자 기준 왼쪽을 향하는 줄은 오른쪽 관자에, 오른쪽을 향하는 줄은 왼쪽 관자에 걸어 당줄을 교차시켜 망건을 고정시킨다. |
| 3 | 양쪽의 아랫당줄을 당겨 망건을 조이고, 두 줄을 7~8번정도 꼬아 잡아당겨 고정한다. |
| 4 | 윗당줄을 상투에 돌돌 말아 고정한다. 아랫당줄도 상투에 감아 고정한다.[24] 살쩍밀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마무리한다. |
말로 설명하면 단순해보이지만 실제로 망건을 제대로 착용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망건 쓰다 파장'이라는 속담에서 보듯, 제대로 망건을 착용하고 모양을 잡으려면 꽤나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래서 시장에 나가기 위해 외출하려면 의관을 정제해야 하는데 계속 망건이 비뚤어지고 갓도 덩달아 비뚤어지다 보니 집에서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해가 져서 시장이 문을 닫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속담으로 나올 지경이었다.[25] 이 때문에 망건을 제대로 못 쓰고 비뚤어진 갓을 쓰는 모습은 18세기 이후 공명첩 등으로 갑자기 양반이 된 졸부들을 비웃는 문화 코드로 널리 쓰였다.
6. 착용대상
망건은 정자관과 달리 신분에 따른 착용 제약이 없어 구한말 기록사진들을 보면 노비나 평민들도 착용한 경우가 종종 있고, 신분이 높을수록 인모로 만든 고급 망건이나 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관자를 단 경우가 보인다.그러므로 상투를 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망건을 착용했어야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26] 대부분의 돈없는 서민들은 그냥 수건을 묶어 머리띠를 두르는 식으로 사용했고 그 위에 패랭이 같은 비교적 저렴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머릿수건(두건) 자체도 삼국시대부터 있던 문화이긴 하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남녀 가리지 않고 머리에 천을 두른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옆동네 중국의 복두는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4~5세기까지 올라가는 것 보면,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시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1] 명주실로 만든 망건은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드물지만 아예 없던 것은 아니라서 18세기 이익정 묘 출토 망건은 옻칠한 명주실을 결어 만들어져 있다.[2] 조각하지 않은 소형 옥[3] 조각하지 않은 소형 금[4] 이런 형태의 풍잠은 아래 사각형 판이 뻗어 나와 있어, 그곳에 구멍을 뚫었다.[5] 하지만 후술할 망건 유물들을 보면 근대 이전 조선 중 ~ 후기 까지의 유물들(능창대군, 최경선, 이익정의 망건)을 보면 명주실 또한 조선 후기 까지 빈번히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능창대군(~1615), 최경선(~1622), 이익정(~1782)[7] 심수관 소장 전 심당길 망건(~1597),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채제공 일가 망건[8] 물론 당의 높이만 변화 한 것은 아니지만 제일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이한 것은 당이다.[9] 경기도박물관 소장[10] 경기도박물관 소장[1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12] 수원화성박물관 소장[13] 국립고궁박물관 소장[14] 망건의 높이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시[15] 능창대군 묘 출토[16] 최경선 묘 출토[17] 이익정 묘 출토[18] 영친왕 망건, 대부분의 망건 전세유물[19] 舊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20] 능창대군 묘 출토 망건, 이익정(1699~1782) 묘 출토 망건, 최원립(1618~1690) 묘 출토 망건, 일본 심수관 소장 망건 등의 유물 참조.[21] 위와 같이 시대별로 다양한 착용법이 등장하나 모두 상투를 튼 다음 망건을 착용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22] 최소한 망건이 이마선을 감싸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니면 망건을 매는 의미가 없다.[23] 혹은 관자의 구멍에 넣어[24] 남은 당줄을 굳이 상투에 갈무리하지 않고 풍잠을 고정하는 줄과 상투를 함께 묶어 풍잠을 바로 세워 갓을 고정 하는데 더 유용히 써먹을 수 있다.(위의 두번째 영상의 경우가 이것과 같은 경우)[25] 현대 한국의 인식과 달리 이 시기 시장을 봐 오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의 노동이었다. 남녀가 유별해서 여성은 집 안의 일, 남성은 집 밖의 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장시가 지역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장시와 집을 도보로 왕복하는 과정에서 산짐승이나 도적의 습격 등도 조심해야 했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일례로 옛날에는 마포나루에서 인천 가는 거리는 오늘날에는 전철을 이용하면 단시간에 왕복이 가능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도보로 이동해야 했기에 지금은 신경도 안 쓰는 야트막한 양천고개가 큰 장애물이었고, 밤에는 호랑이로 인한 호환 때문에 고개를 넘기 힘드니 고갯마루 밑에서 하루 쉬어가야 했다. 직선거리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양천현과 계양현에 관아와 동리가 모두 있었던 이유이다.[26] 망건은 말총을 바늘에 꿰서 모든 부분을 수제작하기 때문에 제작시간이 오래 걸리며 값도 비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