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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16 22:53:53

창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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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옷그림.jpg
신윤복의 풍속화에 나오는 예시
1. 개요2. 종류
2.1. 소창의
2.1.1. 중치막
2.2. 대창의2.3. 학창의
3. 여담

1. 개요

"진사(進士)는 심의, 거인(擧人)은 창의[1],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협수장유(夾袖長襦)[2](소창의)를 겉옷으로 입는다면 백성들이 편안하고 명령이 제대로 지켜질 것"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中 서인복의(庶人服議)
"큰 창옷을 쓰고 소창옷한삼 달고 사람 불러 흥정하니"
한양가(漢陽歌) 中

옷의 옆이나 뒤에 트임이 있는 옷으로 창옷(氅옷) 또는 창의(氅衣)라고 불리는 남성한복의 겉옷들이다. 무의 유무와 소매의 넓이, 트임의 배치, 형태 등에 따라 크게 소창의, 대창의, 중치막의 세 종류로 나뉜다.

조선시대 때 "창의"라 하면 "대창의", "창옷"이라 하면 "소창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통적으로 한자를 높이 여겨 부르던 문화가 적용된 듯.)

소창의, 중치막, 대창의를 모두 '창의류'로 통틀어 부르는 것은 연구가 덜 진행된 시점의 착오이며, 소창의/중치막과 대창의는 다른 기원의 옷이라는 것이 요즈음의 중론이다.
소창의와 중치막의 경우 17세기 이전까지는 같은 옷이었으며, 소창의와 중치막이 구분되지 않던 시절의 중치막은 (이중섶이며) 무가 있고 소매가 약간 넓으며 옆트임이 있는 옷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앞뒷자락이 좁아지며 무와 이중섶 형태가 사라지고, 넓은 소매와 좁은 소매의 두 가지 형식으로 갈라져 지금의 소창의와 중치막이 정립되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출토복식류에서 이러한 소창의와 중치막의 과도기적 형태를 볼 수 있다.
대창의는 17세기 초 이응해 묘 출토복식에서 처음 확인되며 형태를 제외한 구성 면에서 후대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창옷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존재하다가 1884년(고종 21) 5월 갑신의제개혁시에서 도포 등 다른 광수의와 함께 폐지되고, 1895년 3월 을미개혁에서 공사예복(公私禮服)에 두루마기만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창의는 자연히 소멸되어 갔다.

2. 종류

2.1. 소창의

파일:소창의3.jpg 파일:소창의1.jpg

소창의는 장유(長襦)[3]라고도 하며, 중치막이나 대창의에 비해 격이 떨어져 주로 집에서 입는 옷이나 중치막을 제외한 포류의 받침옷으로 쓰였다.

좁은 소매에 무가 없고, 옆트임이 겨드랑이 부근까지 길게 나있으며[4] 뒷트임은 없다. 조선 후기엔 사대부들 사이에서 저고리 대용으로 입기도 했으며[5], 집안에서는 소창의만을 입기도 하지만 외출 시에는 사대부들의 단령도포 따위의 겉옷의 형태를 잡아주기 위한 받침용 옷으로 쓰여졌다. 물론 일반 서민들에게는 겉옷으로 사용되었다.
"수의로 사용되는 옷 중에서 장유가 세속에서 말하는 중치막이나 동의(冬衣)[6]를 말한다."
사례편람(四禮便覽) 中
용도가 용도였던 만큼 비교적 튼튼하게 겹옷이나 누비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소매가 넓은 광수의에 솜을 두면 옷태가 곱지 않고 솜도 많이 들어가며 무거워지기 때문에 소창의에 솜을 두거나 누벼 만든 경우가 많다.

하급 관리나 군졸, 시종이 입던 것인지라 이들을 가리켜 "창옷짜리"라는 멸칭이 존재했다.
"부인의 장배자가 옆이 트인 옷인데 남자들이 입는 장유와 거의 같다." (중략) "장배자가 약간 짧아지면 단배자(短背子)가 되는데 지금의 당의 이다."
한정당집(閒靜堂集) 中
조선 후기에 당의의 기원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학자들이 당의의 기원을 소창의에서 찾기도 하였다. 한국복식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기록에 이끌려 당의가 소창의의 변형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였으나 당의는 조선 초기의 장저고리에서 변화된 것으로 역사적 근거와 반대된다.
출토복식을 통해 당의의 형태 변화를 잘 확인할 수 있다.

2.1.1. 중치막

파일:중치막(1).png 파일:중치막2.jpg
"소매가 길고 섶이 여며지면서 양옆이 트인 옷이 요즈음 장부(丈夫)들의 장유[7]와 같다."
한정당집(閒靜堂集) 中

중치막은 소창의와 기본적인 형태는 같지만 소매가 넓은 옷으로, 17세기 후반에 갈라지기 전까지는 소창의와 같은 옷이었다. 대창의와 소창의의 중간 정도의 형태인지라 ‘중치’로 표현되었다고 파악된다.

소창의보단 격식을 차린 옷이었기에 도포나 대창의처럼 세조대를 매고서 외출할 때 홀로 입거나 대창의나 도포의 받침옷으로도 쓰였다.[8]

조선 후기부터는 대중적인 옷으로 자리잡아 양반중인들 사이에서도 입는 외출복이 되었다.

소매가 넓으면서도 큰 옆트임 덕분에 활동성을 챙길 수 있었기에 왕실, 양반, 중인 등 여러 계급에서 널리 쓰였고 소창의와 같이 "동의(冬衣)"라고 불리며 겨울용 방한복으로 누비를 둔 중치막의 유물이 많이 보인다.

2.2. 대창의

파일:대창의1.jpg 파일:대창의2.jpg

왜란 이후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는 소매가 넓고 무와 뒤트임이 있는 옷이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 창의는 임진왜란 이후 도포의 뒷자락을 생략하여 만든 것으로 식자識者들은 뒤트임으로 인해 북쪽 기운이 약해져 병자호란이 발생했다고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창의는 독립기념관 소장으로 전세 유물인 부총관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담녹색 무문능無紋綾 창의와 전라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응해(1547~1627) 장군 묘 출토 창의(국가민속문화재 제246호)이다.

대창의는 소매가 넓고 길며 소창의, 중치막과 달리 옆트임이 없거나 매우 짧은 대신 긴 뒷트임이 있으며 두루마기처럼 삼각형 무가 존재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앞은 도포와 구분할 수 없지만, 도포와 달리 무 옆선에 이음매가 있으며 트임을 덮는 천인 전삼이 없다.

나름 품이 크고 급이 높은 옷이지만 중치막과 같이 외출용 편복이나 관복의 받침옷으로 사용하였으며 중요한 일에는 도포를 입었다. 뒤트임 사이로 바지가 보이면 보기 좋지 않기에 대부분은 안에 중단으로 소창의나 중치막을 받쳐입었다.

2.3. 학창의

파일:학창의1.jpg 파일:학창의2.jpg
창옷의 일종으로 사대부들이 관직을 떠나서 입는 평상복인 연거복이며 도사, 신선, 학자 등 지적인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묘사된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의 제갈량.

보통 와룡관 혹은 정자관과 함께 입었으며 보통 하얀색에 검은 줄이지만 후기에 들어서며 파란색, 초록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었다. 17세기에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되며, 이 즈음 김육, 송시열 등 중국과 교류하던 학자들이 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 현지화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파일:송하한유도.jpg 파일:장만 초상 유복본.jpg 파일:흥선대원군(이하응) 초상 와룡관학창의본.jpg
조선 중기, 김육[9]의 초상화와 장만[10]의 초상화 조선 후기, 와룡관과 학창의를 착용한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17세기 그림에서 나타나는 학창의는 동시대의 다른 옷들과 달리 섶과 무가 없고 가운데에서 맞닿는 맞깃 형태의 깃을 단추로 여미게 되어 있다. 트임이 있어 사규삼과 거의 같은 형태이기도 하다. [11]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창의에 가선을 두른 현대의 모습과 같아진다.
파일:1580187050.png
여담으로 심의와 똑같은 배색이자 학자들을 상징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헷갈려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보면 구조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조선 후기의 학창의는 대창의와 형태가 같으며 거기에 검은 가선만 달린 모양이다.
심의는 흰 바탕에 검은 선이 달리는 것은 학창의와 같으나, 의(衣)와 상(裳)을 따로 만들어 합쳐 제작하며 트임이 없다. 깃이나 소매부리의 형태도 일반적인 한복과 다르다. 입었을 때 따로 허리띠()를 갖추는 것도 다른 점이다.

여담으로, 학창의는 도교에서 기원한 옷이고, 심의는 유교에서 기원한 옷이다.

3. 여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연암집에 창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중존에게 답함

세상 사람들이 하도 바쁜 탓인지 남의 말을 흐리멍덩하게 듣고, 전하는 말도 어물어물하니 이 때문에 근일 말하는 자들이 더욱 조리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자세히 말을 할 터인데, 그대 역시 너무 길게 끈다고 싫증 냄이 없을는지요.

내가 처음 영남 고을에 부임했을 때, 용소(龍沼)에서 비를 빌게 되어, 유 선생이라는 이가 축관(祝官)으로 와서 용소 위에 있는 절에서 재(齋)를 지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의복이 예스럽고 특이해 보였지요.
그래서
“선생이 입고 계신 것이 무슨 의복입니까?”
하고 물었더니,대답이

“학창의(鶴氅衣)입니다.”
하더군요.

이는 대개 벼슬아치의 사복을 ‘창의(氅衣)’라 칭하므로 ‘학(鶴)’ 자 하나를 더 얹어 그와 구별하게 한 것이오. 그 제도는 옷깃은 모나고 양 섶은 곧으며, 흰 바탕에 검은 선을 둘렀으며, 세 자락이 옆으로 터지고 양 옷깃이 맞닿아서 몹시 점잖아 보이더군요.[12]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선생은 부디 산에는 놀러 가지 마시오.”

그가 그 까닭을 묻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지요.

“예전에 밤에 모였던 때가 기억나는데, 좌중에 조경암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히 실행하는 사람이었소. 그가 일찍이 두 학동을 거느리고 구월산을 노닐면서 치관을 쓰고 심의[13]를 입고 다녔는데, 산성별장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 거요.

조(趙)는 사뭇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산 이름이 구월산인데 본래 이름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했더라오. 그러자 성장(城將)이 별안간 호통을 치며 ‘과연 오랑캐(兀良哈)로다!’ 하며 좌우에게 눈짓을 주어 포박을 하려 드는 것이었소. 조는 성을 내며 ‘너는 어찌 남을 되놈이라 욕하느냐?’ 하니, 성장 역시 꾸짖으며 ‘네가 되놈 옷을 입고 되놈 말을 하니 되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소. 조는 하도 다급하여 정수리를 드러내 보이며 ‘너는 언제 상투 지닌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라 했소.

잠시 후에 절 중이 와서 알아보고 ‘이분은 여주 조씨 생원(趙生員)이오.’ 하자, 성장은 그래도 의심이 안 풀려 중에게 당부하기를 ‘이 손님은 밥도 주지 말고 산 밖으로 내쫓아라.’ 했더라오. 그래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하여,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더라오.

나는 조에게 말하기를 ‘군자란 평상시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삼가는 법이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심의를 증정했어도 소강절(邵康節)은 늘 입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평상시에 행동을 삼가는 군자가 아니겠소?’ 하니, 조의 말이 ‘그렇다마다요. 내가 한참 곤욕을 볼 때에 머리털이 있어 덕을 보았소. 지금처럼 연로하여 대머리였더라면 무엇으로써 해명했겠소?’ 하여 온 좌중이 더욱 크게 웃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오. 지금 선생이 입고 있는 그 의복도 성장에게 의심 살 것이 아니겠소?”

유(劉) 역시 크게 웃고 나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 옷은 우리 고장 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가 물려준 제도입니다. 감히 묻자온대 성주께서 입고 계신 것은 무슨 의복입니까?”
하기에,

“이 역시 이른바 창의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유는 말하기를,

“명칭과 실상이 다 근거가 없습니다. 새 깃을 갈라서 옷을 만든 것을 창(氅)이라 이르는데, 창이란 본래 학의 날개로, 그 날개를 펴면 까만 선을 두른 것 같으니 이른바 호의현상(縞衣玄裳)이란 것이 이것이요, 옛날의 의복이란 검은 선을 두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라 이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른바 창의라는 것은 선을 둘러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소매는 장삼 같으며, 더구나 옷깃을 여미는 부분(督袵)이 항상 열려 있고 현무(玄武)는 엄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단지 습속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니, 옛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성장의 의혹을 사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나서, 곁에 있던 통인(通引)을 가리키며 강개한 어조로 말하였소.

총각이란 관을 아직 쓰지 않은 동자의 호칭이니 이른바 ‘총각관혜(總角丱兮)’가 이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땋은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드리워져도 오히려 총각이라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고 명칭과 의리가 모두 어긋났으니, 이 역시 등솔이 터진 창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고장의 정동계(鄭桐溪)가 물러나 산중에서 살 적에 그 밑에 있는 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어 쌍상투로 틀어 올렸지요. 이것은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우리 일가 두어 사람들이 삼동(三洞)에 놀러 가기 위하여 기생과 악공(樂工)을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사절하며,

“그대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산 전체가 바로 기생인걸요.”
했더니, 모두 놀라며 어째서냐고 물었소. 나는 웃으며,

“적상산(赤裳山)이 아니요.”
하였소.

그리고 농 삼아 앞에서 한 말을 들려 주며, 함부로 산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 고을에는 어진 이가 많소이다.”
하였더니, 그 손들이 발끈하여 일어나면서

“백성으로서 제 원님이 되놈 옷 입었다고 조롱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합니다.

그 뒤 이웃 고을 원님들 너댓 명이 모였을 때, 영남 풍속이 거세어 원 노릇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지요. 그때 누군가가

“되놈 옷과 심의에 대한 풍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오. 그런데 또 어디서 들었소?”
했더니, 대답이

“그대 집안의 족형(族兄)과 친분이 있어 근간에 찾아갔더니, 이상한 소문을 파다하게 전해 줍디다.”
하는 것이었소.

아! 그 전하는 말이 비록 몹시 해괴했지만 굳이 변명할 가치도 없었소. 게다가 쟁반에 담은 음식이 계속 들어오고 거문고와 노래가 다투어 연주되었으므로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남들도 자세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때 큰 눈이 갓 개고 초승달이 누르스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동산에 들어가서 뭇 기생을 시켜 촛불을 잡히고 수만 그루의 긴 대나무를 구경하였지요. 그 김에 부러진 대나무 가지를 다투어 주워서 술을 덥히고 고기를 구우니, 좌우에서 대나무 토막 터지는 소리가 대포처럼 번갈아 터져 나오고, 갈대숲 까마귀와 산비둘기가 날개가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졌소.

술이 얼큰하자 서로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기를,

“음산(陰山)에서 밤사냥할 제 초라함을 면치 못해, 초피 갖옷은 낡아빠져 뒤가 터진 것은 여전한데, 비파 소리 쓸쓸하고 줄 퉁기는 손가락은 추위로 떨어져 나갈 듯하네.”
하였지요.

한바탕 웃음과 해학이 흐드러졌으니 모두 다 한때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농담거리가 굴러다니다가 남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대는 어찌 잊었소? 밤에 말 탄 이교(吏校)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 속에 한껏 사냥을 했다는 말들은 모두 이런 따위가 번복되어 구실로 된 것임을 말이오. 그대는 왜 나를 위해 변명해 주지 않았소? 매란 밤에 풀어놓는 동물이 아니고, 산협(山峽) 고을 이교들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마필(馬匹)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출처]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1] 대창의를 뜻한다.[2] 좁은 소매의 긴 저고리라는 뜻.[3]저고리[4] 시대가 지날수록 옆트임의 시작 부분이 올라간다[5] 출토복식을 수습할 때 저고리가 나오지 않거나 소창의의 수량이 다른 포에 비해 많게는 수 배 이상 확인되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6] 겨울옷, 소창의의 이명이기도 하다.[7] 소창의[8] 그러나 광수의 안에 광수의를 입는 것이 불편하고, 소창의의 출토 수량이 중치막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소창의를 받침옷으로 입었을 확률이 높다.[9] 대동법을 적극 도입한 명재상.[10] 이괄의 난 진압의 1등 공신인 조선 중기의 명재상.[11] 김원택 묘 출토복식 참조[12] 해당 설명은 조선 중기의 학창의의 형태와 일치한다.[13] 여기서 언급되는 심의는 학창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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