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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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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용어 (서열순)
마마(媽媽) 마노라(抹樓下) 자가(自家) 대감(大監)
영감(令監) 원님(員님) 나리(進賜) 선생(先生)

1. 조선시대 지방관의 속칭2. 업무와 위상3. 유명한 사또4. 미디어 매체에서
4.1. 사또가 나온 작품들

1. 조선시대 지방관의 속칭

지방에 파견된 문무관리를 의미하는 '사도(使道)'[1]의 음이 모음간 격음화를 거친 것을(ex: 효과→효꽈)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특정한 관직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지방관으로 파견된 정3품 상계 이상의 당상관을 전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에 가깝다. 정3품 하계 이하의 당하관은 사또(使道)가 아니라 안전(案前)이라고 불렀다.[2]# 암행어사는 어사또, 상급 지방관인 관찰사(감사)는 감사또, 삼도수군통제사는 통제사또 등으로 파생이 가능하다.[3] 즉, 사또란 종2품인 관찰사병마절도사 혹은 정3품인 수군절도사처럼, 대감이나 적어도 영감에 해당하는 직위의 양반이 지방관으로 파견나와있을 때 주어지는 호칭이다. 상감(上監) 마마 > 대감(大監) 마님 > 영감(令監) 마님 > 현감(縣監) 나리 순이다.[4]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사또 / 안전은 문관 경외관직 기준으로 종6품 현감(縣監), 종5품 현령(縣令), 종4품 군수(郡守),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 정3품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5]·목사(牧使), 종2품 감사(監司)·부윤(府尹), 정2품 판윤(判尹)[6] 등에 해당하는 수령직으로, 해당 고을의 백성들은 원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님'은 수령을 뜻하는 원(員)을 존칭으로 표현한 것.[7]

이처럼 다양한 경외관직 사또 / 안전이 나타난 것은 부-목-군-현[8]이라는 지방행정구역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9] 특히 같이 오늘날의 광역시같은 큰 도시를 관할하는 '부윤(府尹)의 경우 더 세분화 하여 한성부의 장은 '판윤(判尹)'[10] 강화·개성·광주·수원부의 장은 '유수(留守)'[11]라 하였다. 사또들끼리의 위계를 살펴보면, 감사(監司)[12]로부터 지휘를 받는 수직관계를 제외하고 나머지 외관직 사또 / 안전들끼리는 수평적 관계가 원칙이었다.[13] 예를 들어서, 종6품 현감보다 종3품 도호부사가 품계가 높다고 해서 도호부사가 현감에게 정식 명령을 내리거나 하는 행위는 할 수 없었고 감사라고 하더라도 전시가 아니면 감찰이나 상소 외에 지방 수령들의 행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선진화된 지방행정체계를 갖추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14]

또한 어떤 지방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는 그 지방에 파견되지 못하게 하는 상피제가 적용되었다. 여기엔 단순히 고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인척이 해당 고을이나 인접 고을에 현직 지방관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포함했다.[15]

2. 업무와 위상

조선시대의 관리는 말단 관리를 제외하고 몽땅 왕이 직접 임명했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지방관들은 꽤 높은 품계이기 때문에 전부 임명직. 따라서 왕의 대리인 직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삼권분립이 없었던 시기이니만큼 일반 행정은 물론이고 군사들을 지휘하거나 재판을 총괄하는 등 사실상 그 지방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군사적인 행동을 해야 하기도 했기에 문관뿐 아니라 무관도 부임할 수 있었고, 군사요충지의 경우 아예 무관만 임명해서 대비시켰다.

휘하에 6방[16]을 두어 업무를 배분했다. 악질 탐관오리 옆에 붙어있는 걸로 유명한 이방, 한 대요~ 를 외치면서 곤장 때린 횟수 세는 형방 등이 이 6방. 6방 외에도 유향소(향청)라는 기구가 있어서 그들과 논의해 일을 처리했다. 유향소는 지역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지방 유지, 전직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해당 지방에 연고가 없는 수령을 보좌하며 한편으로는 이들이 태클을 걸면 수령 입장에선 귀찮아지기 때문에 수령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17] 여튼 유향소에서 향안[18]에 등록된 지역 양반들과 상의하여 예산 등 주요 사안을 함께 논의하였다.

휘하 6방들은 각자 담당하는 임무도 달랐다. 근데 어째서인지 사극 같은 곳에서는 죄다 이방으로 불린다. 6방의 신분은 작은 관아의 경우에는 중인 신분의 향리가 맡았지만[19] 큰 관아의 경우 정식 과거 합격자 중에서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엄연히 양반 신분이다. 한성판윤 휘하의 6방은 어지간한 현감급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20] 이는 군대로 따졌을 때 대대 작전과장(소령)이 대대의 중대장(대위)보다 더 높은 계급인 것과 비슷하다.

유향소 명단에 고관대작 출신이나 해당 지역의 전 지방관 등이 있으면 수령도 어찌 하지 못할 만큼 파워가 세지는 문제점이 있어서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한 경재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대충 이름을 풀어보면 수도(한성)에 있는 유향소 정도 되는데, 지방 출신의 중앙 고위 관료들이 경재소에서 유향소 대표인 좌수 또는 별감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유향소를 통제할 수 있었다. 나중엔 경재소를 없애고 좌수, 별감마저 지방 수령이 임명했기 때문에 유향소의 견제능력은 사실상 없어지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수령 자문 기구로 전락했다. 다만 양반들인지라 수령을 건너뛰고 조정에 직접 상소를 올릴 수 있고, 실제로 이렇게 사또가 파직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기에 유향소와 대놓고 척지는 건 의식적으로 피하였다.

왕의 대리인이니 당연히 어명을 공표하고 백성들에게 알려 따르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으며 고을의 예산을 측정해서 편성하고 집행했다. 농경사회이니만큼 농사가 잘 될 수 있도록 농법을 보급하는 일과 흉년이나 기근이 들면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과 피해를 복구하는 일도 담당했다.[21] 마을에 송사가 생기거나 범죄가 발생하면 그것을 수사[22]하고 재판하는 일까지 맡았다.[23] 지방관들은 주기적으로 상급기관과 중앙정부에 업무보고를 해야 했으며 중앙에서는 이를 토대로 업무능력을 평가했다. 이때 감영에 감찰을 명령하거나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위상은 민란과 같은 민중 봉기 때조차도 작용해서, 조선 시대에 극도로 분노한 민중들이 민란을 일으켜서 관아를 습격할 때도 지방관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다른 고을로 강제 추방하는 경우는 있어도 죽이기까지 한 사례는 없었다. 왜냐하면 왕의 대리인을 죽이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24] 봉기를 주도한 인사들도 민란을 자처하는 경우 따로 상소를 올려서 '저희는 결코 조정과 주상 전하에게 반역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수령의 탐학과 부패가 너무나 심하여서 어쩔 수 없이 봉기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해명했다. 물론 이런 대형 사고가 날 경우 대부분의 왕들은 민심을 수습하고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고자 지방관을 파면하는 등의 개선조치를 취하기 마련.

사극이나 전래동화 등의 영향으로 능력이 변변찮은 사람들이 전전하는 하급 관직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외직(外職)은 조선시대에 높은 관직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적인 보직이었고, 어느 정도 능력이 검증된 인재들로 하여금 자기 포부도 펼쳐보고 정치적 경험도 쌓아보는 돗안 그들이 중임(重任)을 수행할 역량을 갖추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이른바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이자 '더 큰 일을 맡길 만한 인물인지 판별할 수 있는 시험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수백 년이 지난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5] 거물급 정치인들 중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시장이나 도지사를 한 번쯤 거치며 정치적으로 내공을 쌓은 사람이 적지 않다.[26]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거나 왕에게 밉보인 인물들을 지방 수령으로 임명해 쫓아내는 경우도 있긴 했다만... # # #

반대로 생각해보면 왕 눈치만 보면 되는 임명직이고 지방의회 같은 의결기구도 없어서[27] 지방관들이 행정뿐 아니라 입법과 사법까지 혼자 다 해먹을 수 있었다. 물론 유교적인 연구가 필요하거나 강상죄나 역모 같은 복잡한 사안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재가를 받아야 했지만 일반 범죄자나 민사소송의 경우 진짜 수령의 재량이었다. 그래서 지방유지나 일반 백성을 상대로 검은 돈을 축적할 수도 있는 지위였기에 양반들은 이 사또가 되어보는 것만 해도 큰 소원인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부정부패만연한 조선 후기에 가면 당상관에 해당하는 정3품 이상인 승지[28]들이 관품이 훨씬 아래인 수령직으로 빠지려는 꼼수를 부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기에 이른다.[29] 반대로 지방의 안정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고위관리 중 한 명을 차출해서 내려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인조 때 황해도 도원수로 파견된 김자점이나 정조 때 곡산의 수령으로 파견된 정약용이 있다. 마을에 귀신이나 역병이 돌아 중앙의 고위관료가 사또로 왔다는 전래동화가 한둘이던가.

3. 유명한 사또

조선시대 고위 관리라면 사또를 한번씩 다 거쳤으므로[30] 문서 폭주를 피하기 위해 지방관 활동으로 유명한 사람 위주로 기재.

4. 미디어 매체에서

여러 창작물에선 주로 전립을 쓰고 구군복에 등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명대사는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그러나 취급은 별로 좋지 못하다. 생전에 원한을 산 귀신 때문에 급사 당하거나 탐관오리가 되어 민생을 등한시하고 기생 낀채 풍악을 울리며 즐기다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파직되는 역할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중립적인 묘사라고 하더라도 주인공이나 높으신 분들에게 휘둘리는 줏대없는 역할이라거나 주인공이 도적일 경우엔 기껏해야 포졸들을 거느리고 다니다 주인공에게 당하는 역할 정도가 전부이다.

다만 젊은 사또의 경우 취급이 좋은 편으로, 대체로 지방 유지들의 부정부패를 개혁한다거나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이 많다. 전래동화에서는 사또가 어리다고 얕보는 아래 아전들을 통쾌하게 혼내주기도 한다.[34] 일반적으로 선역에겐 미모 버프가 기본으로 주어지는 동화의 법칙답게 미남인 경우도 대다수다.

사실 미디어에서 사또들이 전부 구군복을 입는 것은 재현 오류다. 구군복은 요즘으로 치면 장교 정복 겸 방탄복 안에 받쳐입는 옷이라서 오랑캐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변방에 임명되는 무관 출신 수령들이나 입는 옷이고, 문관 출신 수령들은 해당 고을의 군역을 관리할 책임이 있긴 했으나 업무 자체는 그냥 양반의 정장인 흑립도포 차림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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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 해군에서 그린 조선 비인현감[35] 이승렬과 부하들의 모습[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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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조선을 방문한 일본인 야스다 요시카타가 그린 충청관찰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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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부사 송상현. 그는 평소에 이 복장으로 업무를 수행했고 임진왜란에서도 갑옷 위에 단령을 입고 싸우다 전사했다.

물론 모든 문관 출신 사또들이 전부 흑립도포만 착용한 것은 아니라서 사모단령을 착용하고 사또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이럴 경우에는 자신의 품계에 맞는 단령으로 입어야 한다. 현감이 당상관 단령을 입으면 안 된다.

4.1. 사또가 나온 작품들

궁중 암투극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다 나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특히 주연이나 조연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뜻 자체는 굉장히 평범한데 "파견되어 도를 전하는자" 란 뜻이다. 12사도의 그 사도와 똑같다.[2] "네이놈/년, 감히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라고 할 때 그 안전(案前)이다.[3] 충무공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할 당시 이미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에 있었기 때문에 영감이 아닌 대감에 해당하며, 조선판 문민통제원칙에 따라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4] 정3품 상계 이상의 당상관은 마님이라 불렸으며, 정3품 하계 이하의 당하관은 나으리(進賜)라고 불렸다. 이 당시만 해도 음독과 훈독이 나뉘어 있었는데, 나아갈 진(進)에 줄 사(賜)를 써서 나으리 라고 훈독했다.[5] 통칭 부사. 대도호부는 전국에 5곳 밖에 없는 중요지역이고 도호부는 그냥 사람 많으면 승격하는 식이어서 대도호부보다 한단계 격이 낮지만 일반적으로는 둘을 싸잡아서 부사라고 칭한다.[6] 윤(尹)이라는 한자 자체가 수도를 다스리는 지방관을 뜻한다. 그러니까 현대로 치자면 윤(尹) = 서울특별시장인데 중국도 다를 게 없어서 후한 시절에는 황제의 궁궐이 존재하는 도시의 지방관을 하남윤(河南尹)이라 했다.[7] 임지가 백두산같이 오랑캐의 출몰이 잦은 곳에는 문관이 아니라 무관으로 사또를 임명하는데 대표적으로 신립이 그렇게 사또로 임명된 무관이다.[8] 예를 들어 개성윤, 나주사, 괴산수, 용인령, 연천감이 이에 해당.[9] 이는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어 인구수나 상급 단체에 따라서 시-군-구라는 명칭으로 차등을 부여하며 인구수에 따라 단체장의 직급도 다르다.[10] 정2품이다. 판서와 같은 위치이며 오늘날에도 서울시장은 다른 광역단체장보다 한 단계 높은 장관급의 대우를 받고 있다. 다만 오늘날의 서울시장은 국무회의 참여권을 가짐과 동시에 행정안전부에서 인사권을 일부 가지는 타 지자체와 달리 서울시만큼은 서울시장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위상이 어마어마한 데 비해 한성판윤은 지방관이라기보다 중앙에 있는 당상관 한 명 격이고 그마저도 한성부의 치안이나 군사권은 병조와 포도청이 담당하는 등 실권은 약했다고 한다.[11] 종2품이다. 감사와 같은 품계다. 광역자치단체시장급이다.[12] 왕이 직접 임명하는 외관직 중 최고인 종2품이며, 관찰사라고도 부른다.[13] 감사랑 동급 대우인 유수와 판서랑 동급인 한성 판윤 정도만이 예외다.[14] 다만 간접적으로는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구휼미나 일손지원을 안 해버리거나, 중앙에다가 감찰을 요청하는 방법 등이 있다. 사실 이건 대한민국에도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창원 NC 파크 건설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홍준표가 도비 지급을 거부한 적이 있는데 이유인즉슨 당시 창원시장이 안상수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죄다 관선제였던 조선시대에는 감사가 맘만 먹으면 일개 수령 정도 엿먹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15] 다만 이 상피제가 무조건 좋기만 한건 아니다. 연고가 전무한 지역에 가기 때문에 지방관이 지역 사정에 어두울 수 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 특히 가문의 영향력이 막강한 안동이나 경주 같은 곳은 문중 세력과 대판 싸우다가 제대로 일도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허다했다. 사실 이들 지역은 현대 선거전에서도 문중이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해서 공당에서 문중 눈치를 보느라 전략공천, 단수추천 같은 하향식 공천이 아예 불가능하다. 심지어 경선을 하더라도 문중 사이의 알력 싸움이 심해 경선불복, 무소속 출마자가 나온다.[16] 6조와 똑같이 이, 호, 예, 병, 형, 공. 현대의 과장급에 해당한다.[17] 지방관이 자기 고향이나 그 근처로는 부임할 수 없는 상피제 덕에 수령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부임한 고을에 대해서는 익숙할 수가 없었다.[18] 고을 양반들의 명단으로 지방유지나 전직 관료들이 유향소 간부라면 이들은 유향소 회원이라고 보면 된다. 양반의 품위를 훼손한 경우에는 명단에서 짜르는 경우도 있었으며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19] 이들은 양반도 아니고 과거 합격자도 아니기 때문에 정식 품계도 없는 사람들이였다. 요즘으로 치면 공공기관의 공무직 근로자 정도 되는 셈. 더 골때리는 것은 돈을 단 한푼도 못받는 무보수 명예직이라서 조선 후기로 가면 이들의 부정부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커져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20] 현재도 서율시의 실/국장급은 1급 상당의 고위공무원으로 다른 시도에 비해 한단계가 높다. 서울시장의 대우가 장관급으로 타 시도에 비해 높기 때문에 그만큼 휘하 공무원들의 직급도 높은 것.[21] 자금이 많이 드는 일이니 만큼 이럴 때는 고을의 돈 많은 양반에게 손을 벌려서 기부받기도 했다.[22] 한양 근교지역은 포도청이 관할하기도 했으나 수사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조선시대 특성상 지방의 관아가 수사를 전담했다.[23] 3심제가 있었기에 1심은 지방법원에 해당하는 부-목-군-현의 책임자가 2심은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감사가 3심은 대법원에 해당하는 형조에서 담당했다.[24] 정확히 같은 논리로 지방관까지 살해당한 경우는 대놓고 역심이 있는 반란으로 간주되었다.[25] 지금도 서울시장은 장관, 그 외의 광역단체장들은 차관급의 예우를 받고 그 산하의 기초단체장들도 인구 수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3급 이상으로 예우받기에 예나 지금이나 결코 낮은 자리라 할 수 없다. 괜히 지방선거만 했다 하면 국회의원들이 너도나도 사퇴서 쓰는 게 아니다.[26] 서울시장을 지내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한동안 문재인에 이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안희정,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지낸 정우택 등이 대표적이다.[27] 유향소가 있고 중앙에서 감찰을 위해 감찰어사를 내려보내거나 상급기관에 감찰을 명령하기도 했지만 지방 수령과 감찰어사들이 결탁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유향소는 임진왜란 이후로 장식이 되었다. 물론 수령의 친화력에 따라 유향소를 존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유향소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현대에 와서는 유향소와 감찰어사가 각각 지방의회와 국정감사로 대체되어서 조금 더 효과적으로 지방정부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28] 요즘으로 따지면 수석비서관이다. 수석비서관이 차관급 예우이니까 참판 이상인 셈.[29] 비슷한 이유로 각광받던 자리가 바로 선혜청 당상.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조세를 담당하던 기관의 실무책임자였기 때문에 그 지위는 지금의 국세청장과도 맞먹었다. 이 자리에 있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민겸호[30] 신립, 이순신 같은 무관도 사또를 거쳤다.[31] 판본에 따라 정동우라고 나오기도 한다.[32] 홍병원보다는 이쪽이 인지도 높고 끝발도 훨씬 쎄서 백낙신이 진주목시로 알려져있으나 사실 이사람은 진주 목사가 아니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라는 관직에 있던 인물이다. 경상우도 병미절도사는 현재의 대구/경북지역 일부와 서부경남지역의 병력을 총괄하는 보직으로 전쟁 발발 시 관찰사의 지휘를 받아 보통 5천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했으며 품계는 종2품으로 오늘날의 차관급 보직이였다. 즉 오늘날의 동원사단장~군단장 급인데 조선시대의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상설 무관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적인 파워나 예우는 중장~대장 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일개 목사보다는 당연히 이쪽이 직급도 높고 끝발도 세다.[33] 참고로 저 당시에는 중앙군(5군영) - 지방군(감영 및 각 군영)의 체재로 군대가 돌아갔는데 각 군영 아래의 천총(연대장), 파총(대대장) 등의 직제를 두어 편제를 운영했으며 중앙군(육군본부)과 감영(도청)이 각 병마사를 통제하는 시스템이였기에 절도사의 권한이 당나라의 그것과 같이 막강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병마절도사는 종2품이지만 실제적으로는 5군영과 관찰사의 아래에 위치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대장급이 아닌 소장~중장 급이라고 보는게 맞다. 저 당시 대장급은 절도사가 아닌 5군영의 책임자인 대장(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과 사(총융청, 수어청), 그리고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격인 삼도수군통제사라고 보는게 맞으며 절도사는 그보다 아래인 중장 급이라고 보는게 적당한 듯.[34] 대표적으로 고개가 너무 뻣뻣해서 숙일 줄 모른다며 돌로 깎은 갓을 쓰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고, 자란 지 1년 정도 된 수수대를 소매에 넣어보라 하고는 그게 안 되자 '1년밖에 안 된 수수대도 못넣으면서 그보다 훨씬 오래 자란 나를 소매에 넣으려 하느냐'며 일갈했다는 일화도 있다.[35] 비인현은 현재의 서천군 북서부 지역이다. 현재의 비인면, 종천면, 서면, 판교면에 해당한다.[36]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중에 이 그림을 보고 조선에 와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