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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창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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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원종의 왕자
능창대군 | 綾昌大君
파일:5212e9b758547ff93f192fa1066d96f7232519.jpg
능창대군묘 전경
출생 1599년 9월 5일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사망 1616년 1월 5일 (향년 16세)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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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전(佺)
부모 부왕 - 원종(元宗)
모후 - 인헌왕후(仁獻王后)
형제자매 4남 중 4남
배우자 능성 구씨(綾城 具氏)
자녀 1남 1녀
신체 39.3cm(머리 둘레)[1]
작호 능창수(綾昌守)
→ 능창군(綾昌君)
능창대군(綾昌大君)[2]
시호 효민공(孝愍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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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능창군 추대 사건
3. 사후4.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왕족.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인헌왕후로 추존된 연주군부인 구씨 사이의 3남이자 인조능원대군의 동생이다.[3]

2. 생애

1599년(선조 32년) 7월 16일 한성부 새문리 정원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 34년) 능창수(綾昌守)에 책봉되었으며 1607년(선조 40년) 6월 할아버지 선조에 의해 아들없이 일찍 죽은 큰아버지 신성군의 후계로 입적했다. 신성군의 부인이자 양어머니 신씨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딸이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신립의 외손자가 되었다. 그런데 능창수의 친외할머니, 그러니까 생모 구씨의 어머니가 신립의 누나이기 때문에 양어머니 신씨는 혈연상으로 5촌 외외종이모(어머니의 외사촌누이)이다. 능창수가 신성군의 양자가 된데에는 신성군의 친동생 정원군의 아들이란 것 말고도, 외가가 신성군의 처가와 혈연 관계로 엮인 것 역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1612년(광해군 4년) 겨울에 능창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지혜로웠고 독서를 좋아했으며 외모도 훤칠하게 잘 생겼고 무술에 뛰어나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등 다방면에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래서 붙은 별칭이 '현공자(賢公子)'였다.

2.1. 능창군 추대 사건

능창군의 중부 광해군은 의심병이 심했다. 왕위 승계 과정에서 있었던 선조의 견제와 신하들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그래서 즉위 후에 역모 고변만 있으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옥사를 일으키고 피붙이들까지 죽였는데 이는 재위 중반으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불행하게도 능창군 역시 이를 피할 수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8월, 이른바 '능창군 추대사건'에 엮인 것이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이이첨이 속으로는 신경희를 꺼려서 제거하려 했다는 서술 그리고 대북파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봉산옥사 계축옥사 해주옥사 같은 여러 역모 사건을 조작했기에 능창군 추대사건 역시 대북파가 역모 사건을 조작해 반대파를 탄압했다는 오해가 존재하나. 정사의 기록은 오히려 반대로 능창군 추대사건은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 세력이 역모에 몰린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익산의 진사 소명국이라는 자가 있었다. 수안군수 신경희[4]와 친했지만 어떠한 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신경희는 소명국을 죽이려고 윤길과 (신경희의 숙부 신할(申硈)의 사위였다) 모의해 소명국을 음행(淫行)을 고발했다

옥에 갇힌 소명국은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뜬금없이 신경희가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 등이 신경희의 사촌 누이의 양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을 했다 그 근거로 신경희 일당이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를 내보인 것을 꼽았다. 신경희는 자신은 정인홍의 고제[5]이자 이이첨과 마음을 통하는 벗이며[6] 대북(大北) 사람들은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역적질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어찌 신이 하였겠습니까[7]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명국은 교활하고 구변이 있어서 소명국과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가 쩔쩔매자 이에 광해군은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신경희는 대북파의 일원으로 정인홍의 제자이자[8] 이이첨의 사람이었기에[9] 평소 대북파는 역적 토죄를 일삼았기 때문에 유희분과 박승종을 비롯한 소북 세력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박승종은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이첨까지 옭아매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희와 윤길, 양시진은 극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봉산군수 윤공과 백령첨사 윤숙이 인성군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했다. 윤공, 윤숙, 인성군은 유배를 가고 신경희는 형신하는 동안에 다섯 번이나 역변(逆變)을 고해 죽음을 늦추고자 하였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윤길(尹趌)·양시진(楊時晉) 역시 신문을 받다가 죽었으나 끝내 자복한 자가 없었고 거짓 고변을 한 소명국은 풀려났다.

능창군도 역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라는 누명을 씌어 잡혀와 창덕궁 인정문 뜰에서 광해군에게 직접 심문을 받았고, 이후 잠시 옥에 갇혔다가 강화도 교동군으로 귀양을 떠났다.[10] 유배지 생활은 혹독했다. 달아나지 못하게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인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한마디로 집 울타리 곳곳에 가시가 박혀 있던 것. 뿐만 아니라 의금부도사 구시백(具峕伯)은 능창군의 목에 칼(계구)을 채워 작은 움직임조차 힘들게 하였고, 거기에다 두 끼만 먹는 밥도 석회수로 지어 도저히 제대로 먹을 수 없게 했다. 다행히 능창군과 같이 지내게 된 지역 주민 고봉생과 강화군청의 사동인 수생이란 아이가 자신의 밥을 덜어서 주었으나 이 역시 발각되어 수생은 능창군과 밥을 따로 먹게 되었다.
결국 참담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능창군은 1615년 11월 17일 유배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는 겨우 17세. 자결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미수기언》에서는 음독자살했다고 하고 《연려실기술》에는 영창대군처럼 아궁이에 불을 때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능창군묘지명》에는 목을 매 자결했다고 나온다.[11] 자결할 당시 수생에게 부모에게 고하는 글을 써서 전해주었다. 수생은 그의 편지를 바로 정원군 내외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흙 속에다 숨겨두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인조에게 올렸다. 참고로 인조반정 때 정원군은 이미 사망했다.[12]

3. 사후

어린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원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살던 집마저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빼앗기자 분한 마음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 화병으로 죽었다.[13][14] 이는 광해군에 의해 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된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역모와 연루되고 후손없이 요절했기 때문에 신성군의 양자에서도 파양당했다. 신성군의 후사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3남인 평운군 이구가 이었다. 1623년(인조 1년) 큰형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면서 3월 15일에 복권되었고, 가덕대부를 거쳐 현록대부로 추증받았다.

그리고 능창대군의 죽음과 관련있는 이이첨, 류희분, 기자헌은 처벌을 받으면서 죽임을 당했고, 박승종은 처벌당하기 직전에 자결을 했다. 유몽인과 박홍구는 처음에는 유배를 갔으나, 이후에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흥안군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우다가 발각당해 처형당했다. 이렇게 해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영수들의 죽음과 잇따른 반역시도로 인해 북인 권신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고, 이후에 남이공과 김신국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 흡수되면서 북인은 조정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632년(인조 10년)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면서 능창군을 '능창대군'으로 승격시켰다.
파일:5212e9b758547ff93f192fa1066d96f7232519.jpg
<colbgcolor=#94153E> 능창대군의 묘
능창대군의 묘는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군장리[15]에 있었는데 1629년(인조 7년) 10월 29일 경기도 광주군 고대면 남한산성 근처 혁동으로 이장되었고 다시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춘궁리 고골 궁안마을 뒷산으로 옮겼다가 1999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때 미라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연구자들이 미라를 보려 했으나 이미 후손들이 서둘러 재매장한 뒤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4. 가족 관계

4.1. 후손

1615년 3월, 외가 쪽 친척인 능성 구씨 부인과 혼인했다. 그러나 능창대군이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여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해 [16] 큰형 인조가 자신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능창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러므로 능창대군의 후손들은 실제로는 인평대군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원래 인평대군파 출신이었던 남연군 이구와 그 후손들[17]의 호적에, 이들이 은신군 계열로 입적 되기 전 본 뿌리가 인조의 후손이 아닌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적혔다.

단, 《조선왕조실록[18]과 《미수기언》과 《택당집》에 따르면 혼례 전에 노비 중 한 명을 첩으로 두었고 그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고 적혀 있다. 《선원록》에 따르면 딸 이름은 이영온(李英溫)으로 능창대군이 사망한 1615년에 태어났으며 유일한 친자식이다.

향주 이영온은 양천 허씨 허서에게 시집을 갔고 4남 2녀를 두어 대를 이었다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들이 진짜 능창대군의 후손이다.[19]

4.2. 역대 종주(宗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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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능창대군이 머리에 매고 있었던 망건의 길이가 39.3cm였다는데 망건 길이를 볼 때 능창대군의 머리 둘레는 39.3cm로 추측된다.[2] 봉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3]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 차남이자 서자인 능풍군, 3남이자 적자인 능원대군,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4] 신립의 형 신잡의 아들.[5] 제자들 중에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6] #[7] 이 말에 광해군이 어이가 없었는지 "대북 사람 중에 노예가 된 자가 누구인가?"라고 따지자 신경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8] 이 때문에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인홍은 자신의 제자인 신경희를 구하기 위해 평번(平反, 피의 사실을 거듭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거나 혹은 신중히 조사하여 를 가볍게 해 주는 것.)을 주장하였다.#[9] 광해군 일기와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1004106_003 《인조실록》의 기록에 신경희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의금부가 수색하러 오자 거절하고 내놓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10]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hpba&logNo=105791414.[11]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hpba&logNo=105791414.[12]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8A%A5%EC%B0%BD%EB%8C%80%EA%B5%B0.[13] 물론 해당 건도 광해군이 악의를 가지고 했던 일이고, 능양군이 역모로 몰렸는지라 억울한 일은 맞지만, 적어도 정원군의 경우 그동안 다른 왕족들이나 양반, 일반 백성들에게 해왔던 만행들을 감안하면 정의구현이라는 평가가 많다.[14] 이 집을 뺏고 지은 궁이 바로 경희궁인데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강탈당한 집을 다시 찾은 모양새가 되었다.[15]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16] 왕실족보인 선원록이나 선원계보기략 등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죽었다(未娶卒) 기록되어 있다. 또한 능창대군의 묘지명이 기록되어 있는 자료(택당집, 미수기언) 등에서도 결혼은 하지 않았고(未授室無子 - 택당집) 다만 첩이 있었고 그 첩에게서 딸이 있었다고만(便房生一女 - 택당집, 有遺一女 外婦出也 - 미수기언) 기록하고 있다.[17] 운현궁가흥녕군가, 흥완군가, 흥인군가.[18]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38권, 1639년(인조 17년) 2월 6일 갑오 2번째기사.[19]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hpba&logNo=10579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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