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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15:32:57

구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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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 재직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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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구연수
具然壽
파일:구연수.png
일본식
이름
구보 쥬타로
久保壽太
출생 1866년 10월 8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25년 5월 6일 (향년 58세)
본관 창원 구씨
성보(誠甫)
가족 배우자 은진 송씨[1]
아들 구용서
학력 도쿄센슈보통중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졸업)
경력 광무국 주사
공무아문 주사
농상공부광산국 기사
경시청 경시부감
한국통감부 경무관
조선총독부 경무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와 유학 생활2.2. 친일 행적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군인,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2.1. 초기와 유학 생활

1866년 10월 8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1883년 4월 무과에 급제했고, 박영효 등의 개화파 인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1884년 4월 도쿄센슈보통중학교 중학과에 입학했으며, 1886년 4월 졸업했다. 같은 해 7월 도쿄제국대학 공예학부 채광급야금학과에 입학했고, 1892년 8월 졸업했다.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에 아키타현 광산학교을 입학해 1892년 졸업하기도 했다. 그 해 10월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11월 광무국 주사로 임명되었다. 1894년 6월 공무아문 주사, 1895년 4월 농상공부광산국 기사로 활동했다.

2.2. 친일 행적

2.2.1. 을미사변고종 퇴위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시 우범선의 부하로 사건에 가담했으며, 일본 낭인들의 안내에 협조했다. 여기서 그는 살해된 명성황후의 시체에 석유를 뿌린 다음 불태우는 작업까지 감독했다고 한다. 그 해 11월 이두황, 우범선 등과 함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히로시마, 교토로 갔다가 시해 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이 석방되어 귀국하자 도쿄로 가서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을 하였다. 1896년 4월 일본 정부에 광산기사로 고용되었고, 1899년 5월경 잠시 부산항에 들어와 국내의 세력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8월 말경 일본 측의 권고로 다시 돌아갔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구연수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했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측 외무대신에게 보고했으나 일본 정부는 그들의 송환을 거절했다고 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성부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순종의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1906년 6월 다른 을미사변 시해범들과 함께 사면받았다. 1907년 5월 귀국한 그는 일진회 평의원이 되었고, 6월 울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이 있고 나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의 지시 하에 일진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여 고종을 협박하고 퇴위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공로를 통해 경무사로 발탁되었으며, 고종 강제 퇴위 직후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는 등 곳곳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자 철시를 주도했던 상업회의소 회장 조병택을 체포하는 등 진압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이러한 내용의 고시문을 한성부의 각처에 내걸기도 했다.
일본 군대가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충지를 경비하므로 일반인들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약 유언비어를 퍼트린다면 발견되는 즉시 엄히 다스리겠다.

'한일경무합동'이 성립되고 마루야마 시게토시 고문이 경시총감으로 취임하자 1907년 8월 경시청 경시부감이 되었다. 1908년 8월 유길준 등이 갑신정변 이후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강구회'를 설립할 때 간사로 참여했고, 1910년 6월 통감부 경무관(경시)이 되었다.

2.2.2. 경술국치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유일한 조선인 경무관으로 임명되었다.[2]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5년 7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의원을 지냈다. 같은 해 다이쇼 덴노 즉위식에 참석했으며, 11월에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12월 『조선과 만주』 제113호에 게재된 「부랑선인의 구제책」이라는 글에서 조혼제도와 무위도식하는 생활태도 등을 비판하고, 동시에 국내의 부랑자들이 양산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제국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무지, 무자각, 태만, 구습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같은 잡지에 실린 「남대문의 제거에 반대했던 장군」이라는 글에서 새로 조선총독에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대해 호평하기도 했다.

1918년 7월 조선국세조사평의회 평의원을 지냈고, 같은 해 8월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으로 경무총감부가 폐지된 후 경무국이 신설되자 경무국 칙임 사무관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강우규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매일신보』 9월 11일자 기사에 "결코 조선인 절대 다수의 의사가 아닌 불량배의 우거로서 통탄불이한다."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강우규 의사를 비난했다. 1920년 7월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3년 4월 경무국 사무관을 퇴직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던 1925년 5월 6일 향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송병준의 딸.[2] 당시 경찰 최고 직급인 경무관에 임명된 조선인은 구연수 외에는 없었으며, 이 때문에 일제의 큰 신임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