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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9:42:11

미우라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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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황실.svg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고무라 주타로

주조선국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ruby(三浦 梧楼, ruby=みうら ごろう)]
파일:미우라 고로 1880년대.jpg
메이지 시대 군복을 입은 미우라 고로》, 1880년대. 사진.[1]
<colbgcolor=#fff,#1F2023><colcolor=#b0313f,#ce4e5c>이름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출생1847년 1월 1일
나가토국 하기시
(現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
사망1926년 1월 28일 (향년 79세)
국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직업군인, 외교관, 정치인
작위 자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Miura_Goro.jpg
노년의 미우라 고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가. 을미사변의 주도자이다. 정계의 막후로 활동하면서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 성립에 관여했다.

2. 생애

조슈 번에서 출생했고[2] 기병대에 들어가[3]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으며, 1874년에는 육군성 제3국장으로서 대만 출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1876년 메이지 정부를 반대하는 하기의 난을 일으킨 사족들의 순국군을 진압했다. 1877년 서남전쟁이 발발하자 제3여단장으로서 사쓰마 번 주둔지 가고시마 성을 함락하여 1878년 일본 육군 중장이 되었다.

1881년 의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호소하는 건백서를 제출했다가, 이듬해인 1882년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좌천되었다. 1888년에 예편된 후 1890년 귀족원 의원을 거쳐 1895년 주한일본공사로서 조선에 부임했다. 당시 일본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 배상금을 부과시키고 랴오둥 반도대만 섬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경계한 러시아 제국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일본 밟아버려야 함"이라고 협의했으며, 나란히 손잡고 일본의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일본에 요구했다. 결국 집단 다굴에 굴복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납한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한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해왔던 일본 세력을 날려버리려 했다. 조선 왕실과 친러 인사들이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Карл Вебер)와 비밀 접촉을 하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 분할안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300만 원의 기증을 제의하여 조선 왕실을 매수하려는 등, 조선 내에서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에 초조해진 일본은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파악하고, 조선 주재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일본으로 소환하였다. 대신에 이노우에의 후임자로 외교에는 무지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를 파견하는데, 조선에 도착한 미우라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4]

공사에 부임한 미우라는 참선 승려를 자처하면서[5] 남산일본 공사관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는 공사로서의 업무는 최소한만 처리하고, 고종 내외를 알현한 자리에서는 "관음경을 필사해서 드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거나,[6] 관저에 모셔놓은 부동명왕상 앞에서 독경[7]을 하는 등의 한가한 행보를 보이며 주변의 눈을 속였다. 제물포에서 발행되던 중국계 영자지인《노스차이나 헤럴드(North China Herald)》에서도 미우라를 "늙고 유약해 보이는 인물"[8]로 묘사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은밀히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를 통하여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했다.[9] 동시에 사람을 시켜 흥선대원군과도 밀서를 주고받으면서 거사를 준비했다.[10]

마침내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를 중심으로 스기무라, 조선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포병 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등이 실행 방안을 확정하였다. 당초에는 10월 11일 거사하려 했으나 모의가 누설될 것을 염려해서 이틀을 앞당겨 실시하였으며, 10월 8일 새벽 공사관 수비를 담당하던 일본군 및 일본인 낭인, 일본군 교관들과 내통하던 우범선 이하 훈련대의 대다수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궁궐을 제압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사태가 벌어지자 궁궐은 일본군 수비대와 이 사건에 이용된 조선군 훈련대가 장악하였고, 고종은 사태 수습을 일본 공사에게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미우라는 친일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급조하였다. 미우라는 당시의 사태를 조선인 훈련대에 의한 궁문 돌입 사건으로 몰고 가면서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훈련대 난동시 일본인이 혼입하였다는 소문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규명해줄 것을 외부에 요구하는 등 위장된 행동을 하였으며,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정변에 희생당하거나 이미 자신의 지시에 따라 시해된 명성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강등 조치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을미사변 발생 당시 궁궐에 머물러 있던 미국인 고문 윌리엄 다이(William M. Dye)와 우크라이나인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ій Середін-Сабатін)이 현장을 목격하였고 이들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미국 대리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 Allen) 등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을미사변의 진상을 폭로했다. 사건의 진상이 세계에 알려지자 일본은 국내외 여론의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었으며, 을미사변은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은 남의 나라 왕후를 아무렇게나 죽여대는 국가로 찍혀서 위신이 추락했고, 조선인들은 명성황후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어찌 멋대로 황후를 살해할 수 있느냐"면서 분노했다. 결국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해 을미의병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태가 불리한 것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변리공사로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는 체하고 이노우에를 왕실 문안사로 파견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어 미우라, 스기무라, 오카모토, 낭인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외교관, 고문관, 군인, 순사, 신문기자, 낭인, 그리고 시인 요사노 텟칸(与謝野鉄幹)[11]등 약 45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였는데, 이들은 국제사회의 여론이 수그러들자 곧 석방되었다.

그동안 일본 공사의 위세에 눌려왔던 김홍집 내각도, 국내 주재 외교 사절들의 항의를 받자 문제가 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폐서인이 된 명성황후를 복위시켰다. 당시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말한 인사 중에 이완용도 있었는데, 그가 친러파였기 때문이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하게 된 것도, 일본의 과도한 내정 간섭과 을미사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죽은 이후 그 장면이 찍힌 기록영화가 시중에 나돌자, 이토와 막역한 사이였던 미우라는 분노하여 이에 대해 히라타 도스케 내무대신에게 항의했고, 결국 국가에서 기록영화 필름을 매입하게 했다.[12]

미우라는 경술국치 이후 병탄의 공을 인정받았는지 1910년 추밀원의 고문관이 되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 통치에 계속 참여했으며, 메이지 시대의 원로로 취급받았고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호헌3파:입헌정우회・헌정회・혁신클럽 연립내각)이 성립하는데에 관여했다.[13] 요독증[14]으로 1925년 3월 16일 사망 판정을 받았다가 기사회생한 뒤, 1926년 79세의 나이에 죽었다. 죽기 직전 구술 대필을 통해 회고록 2편을 남겼다.

3. 대중매체에서


[1] 1880년대 촬영된 사진으로, 1895년 을미사변 무렵 찍힌 사진도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머리를 선승 수준으로 짧게 깎은 점만 다르다.[2] 그러면서도 번벌 정치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3] 이 당시부터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앙숙 관계였다고 한다.[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대만 + 배상금 + 랴오둥 + (사실상) 조선을 얻어냈지만 랴오둥은 삼국간섭으로 잃고 조선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러시아)와 친해지고 일본을 멀리한다) 노선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서술한다. 이노우에가 정부의 승인 아래 큰 계획을 세우고 미우라가 세부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이노우에에서 미우라로 공사가 바뀌고도 보름 넘게 같이 지낸 것이나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했다는 설을 예로 든다.[5] 그는 일본의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와 가깝게 지냈다. 다케다는 일본 불교의 한국 사찰 장악에 몰두했던 승려였다.[6] 명성황후는 미우라에 대한 첫인상을 "금강산 스님 같은 인상인데, 사람은 착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고 평했다고 전해진다. 미우라는 고종 내외 앞에서 자신의 불교 신앙을 공공연히 드러냈는데, 한번은 미우라가 대화 중 명성황후의 심기를 건드리자 명성황후는 미우라에게 "왕비에게 조언을 하느니 목탁이나 두드리며 독경이나 하시게"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7] 주변인들은 '염불'이라고 기록한 경우가 많았는데, 부동명왕상을 모셔놓았다는 기록을 보면 일본 불교의 특성상 진언종의 부동명왕 진언 수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음경도 진언종에서 많이 읽는 경전이다.[8] an aged and rather feeble-looking individual[9]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8월 1일의 3번째 접견 시에는 대례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공사들보다 늦게 들어가서 알현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어가서 고종을 보기는 했지만 사연(賜宴)에 참석하지는 못하고 물러났다.[10] 대원군은 미우라를 직접 보고자 했으나, 미우라는 이를 거부했다. 그가 대원군을 직접 찾아간 건 을미사변 직전이 되어서였다.[11] 시인 요사노 아키코의 남편이다.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을미사변 당시 현장에 없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풀려난다.[12] 히라타는 "저격 당시의 장면이 시커멓게 찍혀서 사물 분간이 되지 않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미우라는 "희든 검든 국가의 원로를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것이 문제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13] 호헌3파(입헌정우회, 헌정회, 혁신클럽)가 기요우라 내각 반대 운동을 결정하게 된 회담이 미우라 고로의 자택에서 개최되기도 했다.[14] 정상적으로 콩팥을 통하여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할 노폐물(요독)이 콩팥의 기능이 감소하기 때문에 배설되지 못하고 체내에 축적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양한 증상들을 의미한다.[15] 1982년《풍운》이후 14년만에 같은 배역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