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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그룹 초대 회장 김연수 金秊洙 | |
<colbgcolor=#219dcb><colcolor=#ffffff> 출생 | 1896년 8월 25일 |
전라북도 흥덕군 부안면 인촌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1] | |
사망 | 1979년 12월 4일 (향년 83세) |
본관 | 울산 김씨 |
호 | 수당(秀堂) |
부모 | 아버지 김경중, 어머니 제주 고씨 |
형제자매 | 형 김성수 여동생 김점효 |
배우자 | 박하진 |
자녀 | 장남 김상준 차남 김상협 삼남 김상홍 사남 김상돈 오남 김상하 육남 김상철 칠남 김상응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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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삼양그룹 창업주로, 인촌 김성수 전 대한민국 부통령의 친동생이다.
2. 생애
전라북도 흥덕군의 대지주이자 갑부였던 지산 김경중과 어머니 제주 고씨 장흥백파 고제방(高濟邦, 1833 ~ 1893. 2. 5)의 차녀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형 김성수가 아들이 없던 백부 원파 김기중[2]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김연수가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다.와세다대학에 유학가 있던 김성수가 김연수를 1911년 1월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항구에서 철도를 타고 도쿄로 가면서 보았던 공업단지의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도쿄 야자부중학교(1911~1916년)를 졸업 후 교토 제3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다가 낙제를 받고 공부에 흥미를 잃어 결국 자퇴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잡고 교토제국대학 경제부(경제학과) 선과에 입학했다. 선과는 지금의 청강생과 같은 것으로 강의를 듣다보니 정식으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 고등학교 검정시험을 거쳐 1920년 3월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본과에 편입했고 1921년 졸업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사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졸업 후 귀국하여, 형이 경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에서 근무를 시작한 뒤 경영까지 맡게 되었다.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했고 삼수사를 드나들던 문관산의 제안으로 이름을 삼양사로 개칭한다. 사장, 회장직을 역임하며 삼양사의 사세를 키웠고 2세들인 장남 김상준[3], 3남 김상홍, 4남 김상돈, 5남 김상하[4], 7남 김상응[5] 이 물려받았다.[6]
1933년 쇼와기린맥주 설립 당시 200주를 보유한 주주로 참여하고, 해방시까지 줄곧 취체역을 맡았다.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었던 경제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친형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으며, 현재 물가로 치면 약 1,000~1,500억원 규모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호를 딴 수당장학회가 설립되었으며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LG-POSCO 경영관에 역시 그의 호를 딴 수당학술정보관이 설치되었다.[7] 교수회관으로 수당·삼양 Faculty House도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만화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대한상공회의소 만화CEO열전
3. 친일 행적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및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재직 경력 등 친일 경력이 있다.그의 친형 김성수는 현재는 친일 시비가 있긴 하지만 당대에는 교육계, 정계에서 명망이 있었고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해 민족지도자로 존경받았던 반면, 김연수는 오로지 재벌 기업가로서만 활동한 데다 당대부터 친일 행적이 워낙 명백했다. 이에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활동을 개시한지 보름만에 김연수를 전격 체포했다. 반민특위 수사관들 앞에서 김연수는 그의 친일 행각이 강요에 의한 행위였다면서도 “민족 앞에 죄를 지었다. 벌을 달게 받겠다.”며 큰 틀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그에 대한 수사보고서는 ‘개전의 정(뉘우침)이 현저하다’는 취지로 관대하게 작성되었다. 구속된지 2개월 뒤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8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이후 2009년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물론 등재되었다.
김연수 본인이 쓴 일대기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나름대로 자기 반성의 글을 썼다.
삼양그룹 측도 대응을 자제한 채 침묵하고 있지만, 한 관계자는 서울신문 기사에서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민족자본을 형성한 공적도 있으며, 창업주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오너 일가 문서 참고하십시오.김연수의 아들들의 호는 남(南)으로 시작한다. 1남 남계(南溪) 김상준, 2남 남재(南齋) 김상협, 3남 남령(南嶺) 김상홍, 4남 남온(南溫) 김상돈, 5남 남고(南皐) 김상하. 선대로부터 고향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남쪽 고향 따뜻한 물가 언덕’을 아호로 삼았다.
4남 김상돈이 술회한 김연수의 생전 모습은 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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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직 중 사망. |
[1] 도로명주소 : 인촌안길 32-1.[2] 그의 호를 딴 원파기념관이 중앙고등학교 캠퍼스에 있다.[3] 前 삼양염업사 명예회장. 고려대학교 체육부의 대부로 통한다. 차범근(축구), 박한(농구) 등 유망주 스카우트에 공을 들였고 고려대 아이스하키부 창설에 기여했다. 고려대 아이스링크에는 그의 흉상이 있다.[4] 3남 김상홍과 함께 삼양사 경영에 참여했으며 회장직까지 역임했다.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김상홍의 장남인 김윤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그 인연으로 대한농구협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구평회의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생이다.[5] 형들이 경복고등학교로 진학한 것과 다르게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재학 도중 도미하여 유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삼양사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나 60대도 안 된 나이에 작고했다.[6] 2남 김상협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으며 고려대학교 총장과 제16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6남 김상철은 언론에 보도된 활동이 없다.[7] 수당의 장남인 김상준과 3남인 김상홍이 모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경영대학 전신) 출신이다. 김상홍의 장남인 김윤 역시 경영학과 졸업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