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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군 | 지휘관 이괄 · 비정통 국왕 흥안군 |
(기익헌과 이수백등은 이괄 및 다수의 인원들을 살해하고 조정에 투항했다)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이괄 李适 |
| 출생 | 1574년(선조 7) 이전[1] |
| 사망 | 1624년(인조 2) 4월 1일 (음력 2월 14일)(향년 50대 추정) |
| 경기도 광주목 경안역 인근 (現 경기도 광주시 역동) | |
| 본관 | 고성 이씨[2] |
| 자 | 백규(白圭) |
| 가족 | 조부 이택(1509~1573) 조모 이금정(李金貞)(1515~?)[3] 아버지 이제(李磾)(1539~?) 어머니 동래 정씨[4] 형 이적(1559~?), 이운, 이섬 동생 이돈(1575~1624), 이수(1577~1624) 아내 이예이(1571~1624)[5] 아들 이전(李栴), 며느리 이계이(李季伊) 딸 이씨, 사위 오세륭(吳世隆)[6] |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반정으로 공신이 되었지만 후에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성 장악 3일 만에 패주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고 갑신정변 이전까지 삼일천하의 선례가 되었다.2. 생애
이괄은 진사(進士) 이제(李磾)[7]와 어머니 동래 정씨 정순하(鄭純嘏)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괄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문신 집안이었는데 족보에 따르면 이괄은 이암의 8대손이다.[8][9] 1592년 아내 이예이와 혼인하였다.[10]선조 말기부터 관직에 올라 선전관부터 목사까지 높은 직책을 오갔다.[11] 출생적으로는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던 대북파는 아닌 온건파였던 중북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시 전공이 없었던 젊은 시절부터 고위직들과 어울릴 수준은 되었으며 비슷한 명문의 양반 출신 장수들과 교우 관계를 쌓았다. 이괄은 젊은 시절부터 전형적인 벼슬길을 밟았으며 출생답게 용병술보다는 서예 방면으로 명성을 떨쳤다.[12]
선조 말기인 1606년 젊은[年少][13] 무관(武官)으로서 범람한 행동을 많이 저질렀다고 형조 좌랑 자리에서 쫓겨난 바 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태안군수로 복직하였으며, 반년 뒤 경성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광해군 때는 광해군 8년에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며, 임명 1년 후인 광해군 9년에 정의현감 조양보가 군수 물자를 잘 마련했다고 포상해 주자고 요청했다가 ‘아무리 제주도에서 제주목사가 가장 높은 자리라고 해도 전라감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며 직권 남용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이 ‘요청이 없으면 조정이 어찌 지방의 일을 알겠느냐’고 비호해 주었다. 이후 광해군 14년에 북병사에 임명, 북방에서 여진족을 쫓아내기도 했다. 이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떠날 즈음 신경유 같은 친구들의 귀띔을 받고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인조반정에서 착호갑사들을 이끌었다. 그 공으로 2등 공신의 첫 자리에 올랐다.
반정 당시에 이미 고변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져 대장 김류도 오지 않고 장단의 병사들도 합류하지 않아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이귀의 제안에 따라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뒤늦게 김류가 합류하여 그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자 화를 내며 반항하다가 이귀의 중재로 화해하였다. 이 밖에 연려실기술에는 ‘김류는 1등 공신인데 자기는 2등 공신이라고 분개했다’고 나와 대중에 김류와의 불화설이 잘 알려져 있으나, 실록에는 그런 말이 없다. 오히려 김류는 ‘이괄은 공이 많으니 변방이 아닌 도성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거나 이괄·이귀와 함께 인조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이괄을 추천한 김원량[14]의 인격과 공로를 칭찬하기도 한다. 인조가 공신 책봉의 타당성을 물을 때, 김류가 직접 이괄이 초기부터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공이 커서 2등 공신의 첫 번째에 오를 만한 인물이라고 타당성을 설명했다. 이로 볼 때 실제로는 이괄과 김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공적을 인정받아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어째선지 한 달 만에 그만두려고 했는데 인조에게 반려되었다.[15] 연려실기술에는 ‘이수일이 내응한 공적이 많아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괄은 판윤이라고 공론이 억울해했다’고 나오나, 이수일이 내응한 공적은 실록에 전혀 기록이 없으며 공조 판서에 임명된 기록도 없고, 심지어 공신 목록에도 이수일의 이름은 없다. 이수일이 판서가 되는 것은 인조 6년이며 그것도 공조가 아닌 형조 판서였다.
그 밖에 좌포도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사 박진장을 잡으면서 행패를 부렸다고 이귀가 고변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조사 결과 실제로는 공조 좌랑 홍진도가 한 짓이었고 이괄은 홍진도의 요청에 따라 병사들을 보내준 것뿐이었다. 이괄의 부하들이 저지른 짓이라 이괄이 범인으로 몰렸던 모양이다. 진상을 파악한 인조가 사건 처리를 중단시켰다. 처음에 이괄을 고발한 이귀 또한 홍진도를 무고죄로 비판했으니 이괄의 무죄는 확실히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6]
이후 평안도의 도원수 장만의 청에 따라[17] 부원수로 임명되었고,[18] 북방 후금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자주 들어오면서 철저한 계획을 요구받았다. 출발하는 날, 이괄은 "신이 이 중임을 받고 밤낮으로 떨리고 두렵습니다. 금년에 불행하게도 적병이 침입해 오면 군사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한 차이가 현격히 다를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한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라며 책임감을 한껏 표현하였다. 또한 구주와 태천은 성채가 없고 영변이 주둔할 만하다고 말하는 등, 나름대로 정보 수집에 기반한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인조가 직접 어검을 내려주고 이괄의 수레를 왕의 손으로 밀어주며 굳건한 신뢰를 보였다고 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조 2년 1월 17일에 별안간 이괄이 정충신, 한명련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온다.[19] 20일 이귀는 이괄의 국문을 강하게 주장하고, 특히 이괄은 몰라도 이괄의 아들 이전이 역모에 가담한 것은 확실하다면서 아들이 반역했는데 어찌 아비가 모르겠냐고 하였다. 다음날 21일에는 사간원과 사헌부가 합세하여 이괄의 국문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조는 이괄이 반역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비호해 주며, 이괄의 아들 이전만 데려오라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전은 이괄의 군중에 있었고,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온 금부도사와 선전관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실 금부도사가 찾아온 시점에서 이괄에게는 사실상 반역 외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다만 서인들 중에도 이괄보다 어이없이 숙청당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혼란한 정국이 더 큰 원인이었다.[20] 다만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괄이 반역할 것이라고 고변한 것을 추관(推官)이었던 김류가 무고(誣告)라 생각하여 고변한 한흔을 죽이고 문회와 이우도 죽여 옥사를 번복하려 하였고 인조가 이괄의 아들 이전만을 체포하도록 하자 이귀가 이에 반대하자 이귀를 추고(推考)하라고 인조가 명령을 했는데 인조는 아마도 이괄이 반역을 할 것이라는 고변을 무고로 보고 있었고 형식적으로 대충 조사 좀 하다가 옥사를 덮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려실기술에는 금부도사가 아들을 잡으러 오자, 이괄은 일부러 문을 늦게 열어주며 시간을 끌고는, 아비인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며 차라리 반역하겠다는 심리를 부하들에게 털어놓았고, 이에 심복들이 반역을 부추기자 결심을 굳히고 다른 장수들을 불러 위협한 뒤, 도사를 안으로 들인 다음 베어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비록 야사의 기록이지만 실록에도 '이괄이 도사 등을 죽이고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라고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
하지만 정말로 충동적으로 난을 일으킨 것인지는 이괄이 이후 생포되지 않고 죽는 바람에 국문을 못해 밝혀진 바 없다. 부하들이 앞장서서 난을 부추겼다는 것이나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한 일사불란한 행동을 볼 때, 어렴풋이라도 반란의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방군과 항왜를 동원하여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원정으로 복구되지 못한 관군들을 우회하거나 박살내며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는 자신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며 이괄에게 맡겨놓은 정예군단에게 쫓겨서 충청도 공주로 도망쳐야만 했다. 이괄은 손쉽게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의 10번째 서자였던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인조를 뒤쫓지 않고 한양에서 안일하게 뭉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21][22] 다음날 이괄은 정충신의 보잘 것 없는 진영을 공격했다가 그만 참패했고 겨우 목숨을 건져 경기도 이천으로 패주했으나 부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게 배신당하며 취침 중 목이 잘린다. 이괄의 목을 가져온 두 사람은 용서받고 하위직이나마 벼슬을 살게 되는데 이수백은 마탄 전투에서 패해서 수급이 잘려진 장수들의 자식들에게 대낮에 목이 잘린 반면에 기익헌은 조용히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
3. 평가
'조선 시대의 여포'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는 군사 행정 보직으로 더 오랫동안 근무한 인물이다.[23] 이러한 후방 근무 경험 덕분에 성공할 기회를 여러 번 얻은 정책통이지만 현대에는 이미지가 180도로 변하여 변방의 마초, 장수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이괄에 대한 평가는 좋아졌는데 혈통과 인맥을 따라 광해군 때 온갖 대접을 받다가 인조반정으로 뒤통수를 친 행적은 잊혀지고 인조를 엿먹인 인물로 완벽히 왜곡되었기 때문이다.반란에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아서 포졸 수준의 병사들만 이끌어야 했던 관군들을 인조를 옹립한 정치적 배신을 통해서 얻은 정예 병력으로 도륙했다.[24] 그런데 이괄은 자신을 잘 우대해 준 광해군을 배신하고 무너트린 직후 북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서 악명을 떨친 인물이고, 인조에 실망한 이후로는 참혹한 내전을 일으켜서 동료 장수들의 목을 벨 때의 잔혹함을 보면 이괄은 정치가 아닌 군대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칼부림을 부리던 인물에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25] 애당초 인조반정에 참여했을 때부터 이괄은 명백히 정치적 야망과 배신 행위를 정치군인이며, 단지 본인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권력을 탐내면서도 정치라는 걸 전혀 하지 않고 군대를 활용했던 위험한 인물이다. 특히 친구였던 정충신을 상대로 거짓 투항을 통해서 방심시킨 다음 항왜들을 이용해서 적을 혼비백산시키고 격파하는 기만책을 보면, 이괄은 무력이 뛰어난 군인으로 왜곡된 현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동료 군인들을 배신하고 죽이면서 이득을 취했던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라는 조선시대의 역사 기록에 더욱 부합하는 성격이다.[26]
이후 패잔병까지 병력에 넣으며 맹렬하게 따라오는 정충신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산길을 통해서 진군한다든지 자기 나라 땅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하는 잔혹함으로 앞을 막는 관군과 추격하는 정충신을 동시에 따돌리면서 전격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27] 인조가 이괄에게 준 병력은 조선 최고의 정예병이었는데 결국 15,000명의 정예병을 반란에서 잃으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초기 방어에 실패해 크게 당하는 나비 효과까지 야기하고 말았다. 이괄뿐만 아니라 평안도의 대여진족 병력들까지도 역적으로 몰릴까 봐 도망치거나 여진족에 투항해서 길잡이 노릇을 했으며 이미 한윤 등등 부하들이 탈주하여 홍타이지에게 가서는 조선의 상태를 낱낱이 알렸다. 결국 이괄이 병자호란의 기반을 만든 셈.
여담으로 이괄을 무찌른 정충신도 능력은 엇비슷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직책이 관서군의 행정과 보급에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의 행보는 완전히 달랐는데 정충신은 이괄과 싸우기 직전까지 평양 주변을 돌며 관서군의 추가적인 분열을 차단했고 다수의 반란군을 폭력없이 설득으로 항복시켰다. 인조반정 때도 두 사람의 행보가 똑같았는데 그때도 이괄은 한양을 점령하고 광해군 정권을 무너트려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추구했지만, 정충신은 정치적 욕심 때문에 조선을 배신하는 군인들이 생길 수 없도록 병사들을 독려하고 조선의 북방 방어선을 수호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기록상으로는 정충신이 전반적인 용병술과 노련함 때문에 이괄의 기만술 능력보다 훨씬 고평가 받는 편이다. 정충신은 포졸 수준의 관군 수천 명을 이끌고 이괄을 따르는 조선의 최고 정예군 1만 명을 상대로 다양한 설득과 유인작전을 벌이며 결국 와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정충신은 명장 권율의 제자답게 노련한 용병술만큼은 이괄보다 몇수위로 높은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다.[28]
이괄군은 15,000명이 넘는 조선 최고의 정예군을 독식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잔꾀를 잘 부린다는 기록이 많은 이괄의 기만책으로 각 지역마다 수천 명에 불과한 관군의 방어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충신이 정신을 차린 후 관군들이 보잘 것 없는 병력이나마 치밀한 대오를 형성한 이후로는 정충신이 파놓은 함정을 돌파하지 못하고 자멸했으므로 이괄이 당시 조선의 유일한 명장이었다는 인터넷에 퍼진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괄을 격파한 관군 장수들이 권율과 이순신 밑에서 직접 종군한 진정한 영웅들이었다.[29] 물론 반란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이괄의 용병술 자체는 뛰어나다 하겠지만 현대에는 애당초 승리할 수 없는 병력으로 이괄의 정예군 15,000명이라는 병력을 막아야 했던 관군 장수들의 능력이 과소평가되었다. 사실 이괄군은 소규모의 관군을 여러 번 각개격파하며 돌파했을 뿐인데, 지방포졸 수준이었던 관군들이 와해되어 버린 숫자를 모두 합해보면 많아 보이는 통계자료 때문에 마치 이괄이 천하용장인 것처럼 눈의 착각을 일으킨 것일 뿐이다.
군사적인 재능이 있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행운이 겹쳐서 무소불위의 명장으로까지 미화되는 인물이기도 하다.[30] 이괄에 대한 미화는 인조 시대의 조선이 겪은 군사적 패배에 대한 보상 심리를 찾기 위해서 도피처로 이괄을 밀어주는 심리에 가까운데 특히 비뚤어진 마초이즘으로 전쟁사를 판단하는 오류 때문에 이괄을 망상 수준으로 미화하는 여론이 종종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이괄에 대한 호평은 그냥 조선의 급조된 관군한테도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목이 잘려버린 이괄이 실제로는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유사역사학적인 심리에 가깝다. 심지어 고작 이괄 따위를 칭찬하기 위해서 권율과 이순신 같은 민족적인 영웅들의 제자이자 실제 기록상으로는 이괄보다 훨씬 업적이 대단했던 당대 관군 장수들을 깎아내린다든지, 이괄은 광해군의 비호를 받은 입장임에도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당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정예군을 꼬라박은 기회주의자 이괄을 두둔하는 황당한 인터넷 여론과 역사왜곡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괄의 관직을 보면 젊은 나이에 명천 현감으로 시작해, 17년 뒤에는 그 이경록의 최종보직인 제주 목사, 다시 7년 뒤에 한성판윤 겸 부원수 겸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는데 진급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이괄의 동년배들 중 이름도 유명한 신립의 아들인 신경진(1575~1643)과 그 신립의 부장이던 김여물의 아들 김류(1571~1648)조차 모두 이괄보다 직위가 낮았다. 이런 기록을 보면 이괄은 자신을 예뻐해 주던 광해군을 자신의 손으로 무너트려놓은 것이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앞길을 망쳐놓고 자신의 보직에 불만을 품었다는 이괄의 야망은 그리 정상적인 판단이 아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이괄은 이미 나이에 비해서 높은 관직에 올랐고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인데, 광해군까지 배신하여 인조를 옹립해놓고도 더욱 더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했을 정도로 권력 욕심이 끝이 없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서 이괄은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어 추악한 정권쟁탈전을 벌였을 뿐이며, 인민들의 어떤 지지와 호응도 받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이 직접 이괄더러 "리괄은 인조반정에서 자기가 한몫하였기 때문에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는데 그 뜻이 이룩되지 않자 거기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라고 교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괄의 난으로 서북지역의 방어가 무너져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방의 군인들이 한양(서울)을 며칠 만에 효과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한 반란이라는 이괄의 예시는 북한군의 군사적 선전 체제에는 꽤나 중요한 역사적 사례일 텐데도 국가 방어라는 차원에서 봤을 때는 이괄이라는 인물이 그만큼 국가와 군대에 해악을 끼치는 인물상이기 때문에 북한 같은 병영국가에서조차 일찌감찌 손절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 야사에서 수많은 전설을 지닌 임경업이랑 같이 강원도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도망친 이괄의 일가가 강원도에 숨어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장수에게는 연관성이 있는데, 임경업은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을 토벌하고 1등 공신으로 추천받아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임경업도 인조에 의해 숙청당했다.
- 야사에서는 매우 성질이 급하고 툭하면 주변사람들과 마찰을 빚고 난폭하고 성격도 더럽고 인격도 개차반이고 대인관계도 개판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 시절에 태도 문제를 지적받았다는 일부 기록을 제외하면, 인조 시대에는 이괄이 꽤나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김류와 이귀 등의 공신들에게도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인조반정 당시에 김류가 지각한 것에 화를 내며 항명한 것이 전부인데, 이는 이귀의 중재로 금방 일단락됐다.[31] 3번 탄핵당한 기록이 있으나, 그 중에 진짜로 처벌을 받은 것은 선조 때 단 1번뿐이며, 광해군 때는 광해군이 이괄을 아꼈기에 비호해 주었고, 인조 시절에는 다른 사람의 죄를 오해로 엉뚱하게 뒤집어 쓴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그밖에는 광해군을 폐위할 때부터 반복해온 이괄의 정치적 배신 행위에 대해서 권력을 위해 남을 배신하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는 어디서나 별반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야사의 호전적인 군인 이미지 때문에 현대에는 이괄 말년의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잊혀져 반역의 죄질이 세탁되어버리기도 한다.
- 전설에 따르면 이괄의 할아버지의 산소가 경기도 광주군(현 성남시)에 있었는데, 이괄이 역적으로 죽게 되자 할아버지의 묘가 용의 혈이라 묘를 파헤치니 연결된 못에서 물이 계속 나와 물을 퍼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스님이 양평에 있는 곳에 가서 물길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어 양평에 찾아가 물구멍을 재빨리 막고 묘와 연못의 물을 다 퍼내었다. 그리고 그 안을 살펴 보니 이괄의 할아버지의 시신은 없고 용의 모습을 한 이무기가 있어 죽였더니 이무기의 비늘이 수년간 흘러내렸다고 전해온다. 결국 이괄의 5대조인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이원을 묘소를 비롯하여 고조, 증조, 조부와 아버지의 묘를 파명당(破明堂)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고 마을 주변 곳곳에 보초를 세우고 섬처럼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여 그 마을이 섬마을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도촌동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당연하지만 이는 이괄은 재평가의 여지가 없는 기회주의자이자 반역자라서 삼족을 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지만 선조들의 업적만큼은 훌륭하다 보니 호부견자 이괄은 욕하되 조상들은 옹호하기 위해 이괄은 냉정히 비판하되 선조들은 위로하는 전설이 만들어진 걸로 보인다.
5. 대중매체
-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1986년 제6화 회천문에서 이규연(성우) 이 연기했다. 인조반정 당시 투구, 갑옷을 갖추고 대궐에 들어와 김개시(원미경 배우)를 직접 벤다. 김류(전운 배우)를 매우 증오하고 질시한다. 또한 자신이 2등 공신인 것에 더하여, 이귀와 김류의 아들들(이시백, 이시방, 김경징)이 자신과 같은 2등이라는 점에 더더욱 분노했다. 결국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 도망가다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죽는 내용으로 회천문 드라마가 막을 내린다.
- 1995년 KBS 서궁 에서 배우 박태민(박승규 ; 사극 '찬란한 여명'에서 이조연 / '용의 눈물'에서 최윤덕 / '태조 왕건'에서 호족 원극유 / '제국의 아침' 신강 / '무인시대' 이의민의 아버지 역)이 연기했다. 인조반정 때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와 김개시(이영애 배우)를 만나 죽이라고 명한다. 이괄의 부하가 화살을 쏘려는데 갑자기 개시의 정인 원표(김보성 배우)가 달려나와 몸으로 개시를 막아 결국 원표와 개시 모두 화살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유하복이 연기했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의 1부~2부는 이괄의 난을 중심으로 이괄을 주연급으로 다루고 있다. 항왜 서아지를 매우 신임하며 주인공이자 서아지의 양자인 함이에 대해서도 복수를 도와주겠다며 자기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어 아들인 이전이 함이에게 내심 샘을 낼 정도. 초반에는 이괄에 대한 미화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담대하고 호쾌한 인물로 그려졌지만, 한양 점령 후 참수된 가족들의 수급을 본 이후 마음이 내심 꺾였고 한양으로 진군하던 도중 겪은 일들로 인해 무고한 백성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등 환각과 광기에 사로잡혀, 그간 충실히 따르던 부하들까지 공포에 떨게 만든다.[32] 결국 실제 역사대로 정충신에게 패한 이후 도주하지만 이수백과 기익헌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에도 가끔 함이의 환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부분 환영으로 나올 땐 복수와 관련되었고 갑옷이나 관복 차림이지만 함이가 장가갈 때는 이전과 함께 축하해 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6. 관련 문서
[1] 1587년(선조 20)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1574년 작성된 조부 이택의 신도비명에 이괄의 존재가 기록되었고, 아우로 명시된 이돈, 이수의 생년이 각각 1575년과 1577년이므로, 이괄은 결코 1587년생일 수 없다. 맏형과의 나이 차를 고려하면 생년은 대략 1570년 전후로 추정된다.[2] 사암공파 17세.[3] 효령대군의 6남이자 성녕대군의 양자인 원천군 이의(原川君 李宜)의 증손녀로, 원천군의 서3남인 가은군 이빈(加恩君 李份, 1453~)의 8남 광복부수 이존영(廣卜副守 李存英, 1495~)의 딸이다.[4] 직제학공파-창원공파 18세. 금성현령을 지낸 정순하(鄭純嘏)의 차녀로, 남세건의 외손녀이다.[5] 실록에는 예(禮)로 기록되었다. 1624년 3월 22일(음력 2월 4일) 시동생 이돈과 함께 참형에 처해졌으며 #, 아버지 이방좌(李邦佐)도 이틀 뒤 주살당했다. #[6] 오환의 아들. 해주 오씨 찬성공파-사복시정공파 17세이지만, 역모에 휘말려서 족보에서 삭제되었다.[7] 1570년(선조 3)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3위로 급제했다. [8] 암(嵒) - 강(岡) - 원(原) - 사암공(思菴公) 지(墀) - 륙(陸) - 교(嶠) - 택(澤) - 제(磾) - 괄(适). 연산군 시기 폭정에 실망해 청도로 낙향하여 제자를 키운 어엿한 문인으로 알려진 모헌(慕軒) 이육(李育)은 같은 고성 이씨로 이괄의 고조부인 청파(靑坡) 이륙(李陸)과 동명이인이다. 청파 이륙은 『청파극담』이라는 책을 썼는데 『대동야승』에도 실려있다.[9] 한편 이괄의 난을 진압한 장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괄의 6촌 누나 풍천 임씨(1564~)의 남편이었다. 교 - 징 - 임정로 처 이씨 - 장만 초처 임씨.[10] 추안급국안 002책 611페이지, “이 몸이 이괄의 처가 된 것이 33년이되…(身爲李适妻三十三年是乎矣)”[11] 선조실록 112권의 1599년(선조 32) 윤4월 9일 정해 1번째 기사에서 처음 그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당시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었다. 이때 이괄의 나이는 약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음력 5월 1일에는 종6품 명천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2] 이괄의 명성은 반역 이전까지는 붓글씨에 대한 것이었다.[13] 당시 이괄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최소 33세였다.[14] 김원량은 훗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자점의 주장에 따라 사형당하고 효시된다. [15]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4월 9일(무진) 맑음[16] 이후 이귀가 홍진도의 악행과, 외척인 홍진도의 위세에 겁먹고 말을 못하는 대간을 인조 앞에서 비판했으나, 인조는 도리어 이귀를 꾸짖었다.[17] 이괄 혹은 이서가 좋겠다고 추천하였다.[18] 연려실기술에는 평안부사를 겸직했다고 나와 있으나 정작 실록은 인조 2년 1월 20일에 김신국을 평안부사로 임명했다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무장 이수일으로 25일 교체했다고 나와 있다.[19] 이괄을 고변한 인물은 문회라는 인물인데 이괄의 난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을 역모로 무고했다가 유배당한 인물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이괄을 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20] 이괄을 잡으러 달랑 금부도사만 보낸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선조 시절 도주 오해를 받은 신각을 참수할 때도 선전관만 보냈고 이순신을 압송할 때도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전공이 누적된 이순신을 경계해 꼬투리잡아 끌어내린 선조지만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조선은 200년 이상 유교 이데올로기와 중앙 집권 체제를 굳혀왔고 그런 체제에서는 국왕이 보낸 사자에게 따르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걸 거부하면 진짜 반란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괄이 몇 안 되는 예외였다.[21] 물론 이괄이 놀았던 것은 아니다. 왕족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곳간을 열어 쌀과 재물을 베푸는 등의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문제는 인조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인조가 살아있기 때문에 한양 백성들은 필연적으로 인조와 흥안군을 저울질했다.[22] 〈연려실기술〉에서 정충신은 이괄이 인조를 추격하면 상책이요, 모문룡과 손을 잡으면 중책, 한양에 머무르면 하책이라고 평가했다. 〈속잡록〉의 기록에서는 장만이 모문룡과 손을 잡으면 상책, 오랑캐 추장들에게 의탁하면 중책, 한양에 머무르면 하책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장만과 정충신이 상중하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며 기록된 두 기록의 내용도 조금 다르고 화자조차 다르다.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23] 반정공신이 되기 이전 이괄의 주요한 관직 경험은 목사와 선전관이며 중앙이나 후방 지역에서 근무한 시간이 더 길고 생전에는 용병술이 아닌 붓글씨로 이름을 떨쳤다.[24] 편견과는 달리 이괄을 상대한 관군 장수들의 능력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포졸 수준의 지방군이 붕괴되었는데도 국가의 위기 사태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다 죽은 장수들이 있는가 하면 이괄의 정예병들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개인의 능력으로 이괄군을 돌파한 관군 장수들도 있었다. 이괄이 그런 충성파 관군보다 우월한 병력을 이끌었던 이유는 바로 광해군을 배신하고 인조를 옹립한 정치적 배신 덕분이었다.[25] 이괄의 여포 이미지는 이괄을 기용했던 모든 왕들마다 꾸준히 문제가 될 정도로 군법을 어기고 정치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아서 생겨났을 뿐 실제로는 중앙과 후방에서 근무하느라 행정 장교 경험은 충분히 쌓았던 인물로서 정치판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반정에 그가 왜 참여했는지 생각해 보라.[26] 이괄의 인생을 정리해 보면 선조와 광해군 시절에는 그럭저럭 멀쩡한 군인이었는데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한번 권력을 탐한 이후 권력욕을 하지 못하고 다른 관료들에 대한 배신과 숙청을 반복했다. 사실상 인조반정 이후의 이괄은 옛날 군인 동료들을 정치적 이익에 따라서 쳐죽이는 방법으로 조선의 최고 병권을 차지할 정도로 기회주의적이면서도 틈만 나면 다른 관료들을 배신하여 이득을 취한 인물이다.[27] 거의 절벽을 타고 넘는 수준이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정충신조차도 이괄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가 병사들이 지치고 낙오하여 마탄 전투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관군들이 각개 격파당하고 말았다. 물론 정충신은 이괄보다 나이가 많았고 정충신이 지휘한 군사들도 역량이 떨어지는 포졸 수준의 병사들과 부상병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28] 여담으로 이괄의 난은 불과 며칠 만에 진압되었다. 사실상 정충신은 이괄의 기만책에 한번 속은 이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용병술을 펼치는데, 정충신이 새벽에 함정을 파놓으니깐 바로 다음날 점심에 이괄이 모든 병력을 꼬라박고 자멸해 버린 수준으로 싱겁게 패배해 버렸다. 이괄의 반란이 실패하는 마지막 날의 허무한 패배를 살펴보면 왜 이괄의 능력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비판이 많은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29] 이괄이 죽음으로써 후진들의 양성에 실패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괄을 상대했던 관군 장수들의 능력은 오히려 반란군 지휘관들을 압도하는 면도 있었으며 이괄을 격파한 장수들이나 후임들은 2차례의 호란 때도 턱없는 전력차에서 장렬히 싸우다 죽는다.[30] 실제로는 이괄의 승리 대다수가 약한 데다 숫자도 얼마 안 되는 지방군에게 승리한 것이고 이괄은 패배했을 때도 자신보다 턱없이 적은 관군을 상대로 지형에 유인당해서 황당하게 패배했다.[31] 또한 반정 당시의 기록은 사관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 데다가, 반정 당시에 이미 도망쳤을 광해군을 인조가 끌고 다녔다고 서술되는 등으로 다른 기록과도 안 맞고 현실적으로도 동떨어진 부분도 좀 있어서 신뢰성은 비교적 떨어진다. 진짜 있었던 일보다는 당시 떠돌던 소문을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32] 이괄의 가족들을 죽이는 데 대해서 인조와 신하들끼리 여러 찬반론이 오갔는데, 결국 효수가 효과를 크게 보게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