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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왕자의 난 |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 박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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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이재면 추대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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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 |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 이두황 등 조선군 훈련대 | |
갑오의병 | 김원교, 서상철 등 | |
을미의병 | 유인석 등 조선 의병 | |
춘생문 사건 | 임최수, 이도철 등 친러파, 친미파 | |
신축민란 |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 |
을사의병 | 최익현 등 조선 의병 | |
정미의병 | 이인영 등 13도 창의군 |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 |
1. 개요
이인거가 일으킨 난.2. 배경
이인거는 인조반정 이후 반정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책을 펼치자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때문에 대북파 유희분(柳希奮)의 조카 효립(孝立)과 내통하며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3. 난을 일으키다
1627년 9월 28일, 그는 “나에게 정예 군사 수천 명이 있으니, 먼저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들을 제거하고, 전하의 곁에 있는 악한 무리들을 숙청하겠습니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의 소굴을 정벌하고 국가의 수치를 씻어내겠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강원감사 최현(崔晛)은 이를 반역으로 판단하고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그 후 이인거는 10여 명을 이끌고 횡성현으로 가서 군사를 일으키겠다며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했다. 그러나 횡성현감 이탁남은 겁을 먹고 원주로 도망쳤고, 이에 원주목사 "홍보"는 조정에 이를 급히 알리며 군사를 동원해 난을 막으려 했다.
1627년 10월 2일, 홍보가 원주의 군사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하자 이인거와 그의 세 아들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결국 저자거리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동조자들까지 뿔뿔이 흩어지면서 난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