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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7 13:02:27

내우외환

고사성어
안 내 근심 우 바깥 외 근심 환
1. 개요2. 유래3. 기타

1. 개요

한자 그대로의 뜻은 "내부의 근심과 외부의 걱정"으로서, 나라 안팎으로 걱정거리가 많은 상황,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2. 유래

鄢之役, 晉伐鄭, 荊救之. 大夫欲戰, 范文子不欲, 曰: “吾聞之, 君人者刑其民成, 而後振武於外, 是以內和而外威. 今吾司寇之刀鋸日弊, 而斧鉞不行, 內猶有不刑, 而况外乎? 夫戰, 刑也, 刑之過也. 過由大, 而怨由細, 故以惠誅怨, 以忍去過. 細無怨而大不過, 而後可以武, 刑外之不服者. 今吾刑外乎大人, 而忍於小民, 將誰行武? 武不行而勝, 幸也. 幸以爲政, 必有內憂. 且唯聖人能無外患, 又無內憂, 詎非聖人, 必偏而後可. 偏而在外, 猶可救也, 疾自中起, 是難. 盍姑釋荊與鄭以爲外患乎?” 鄢之役, 晉伐鄭, 荊救之. 欒武子將上軍, 范文子將下軍. 欒武子欲戰, 范文子不欲, 曰: “吾聞之, 唯厚德者能受多福, 無德而服者衆, 必自傷也. 稱晉之德, 諸侯皆叛, 國可以少安. 唯有諸侯, 故擾擾焉, 凡諸侯, 難之本也. 且唯聖人能無外患, 又無內憂, 詎非聖人, 不有外患, 必有內憂, 盍姑釋荊與鄭以爲外患乎! 諸臣之內相與, 必將輯睦. 今我戰又勝荊與鄭, 吾君將伐智而多力, 怠敎而重斂, 大其私暱而益婦人田, 不奪諸大夫田, 則焉取以益此? 諸臣之委室而徒退者, 將與幾人? 戰若不勝, 則晉國之福也” 戰若勝, 亂地之秩者也, 其産將害大, 盍姑無戰乎!” 欒武子曰: “昔韓之役, 惠公不復舍 ; 邲之役, 三軍不振旅 ; 箕之役, 先軫不復命: 晉國固大恥三. 今我任晉國之政, 不毁晉恥, 又以違蠻․夷重之, 雖有後患, 非吾所知也.” 范文子曰: “擇福莫若重, 擇禍莫若輕, 福無所用輕, 禍無所用重, 晉國故有大恥, 與其君臣不相聽以爲諸侯笑也, 盍姑以違蠻․夷爲恥乎?” 欒武子不聽, 遂與荊人戰於鄢陵, 大勝之. 於是乎君伐智而多力, 怠敎而重斂, 大其私暱, 殺三郤而尸諸朝, 納其室以分婦人, 於是乎國人不蠲, 遂弑諸翼, 葬於翼東門之外, 以車一乘. 厲公之所以死者, 唯無德而功烈多, 服者衆也.

언릉(鄢陵) 전투에서, 진(晉)나라가 정(鄭)나라를 치자, 초(荊)나라가 정(鄭)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다. 대부들은 초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자, 범문자(范文子)는 이를 반대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임금이란 백성들에게 형벌로써 다스리는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형벌이 제대로 이루어진 이후에나 밖으로 무위를 떨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안으로는 화목을 다지고 밖으로는 위세를 떨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법관(司寇)은 약한 백성들에게 쓰는 형구인 도거(刀鋸)는 너무 써서 날로 닳아가고 있는데, 대부의 죄를 다스리는 형구인 부월(斧鉞)은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안으로 오히려 형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외세에 대한 것임에랴? 무릇 전쟁이라는 것도,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며, 잘못한 나라에 형벌을 내리는 것이다. 잘못은 대신들에게서 나왔고, 원한은 힘없는 백성에게서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은혜로써 원한을 사라지게 하고, 인내로써 죄과를 제거해야 한다. 힘없는 백성들에게 원한이 없고 대신들에게 잘못이 없는, 그런 뒤에야 가히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복종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게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법은 대신의 절못은 비켜 가면서, 힘없는 작은 백성들에게는 잔인하게 굴고 있는데, 장차 누구를 대상으로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인가? 무력을 행사할 때가 아닌데도 승리를 거두었다면, 이는 요행일 뿐이다. 요행으로 정치를 했다가는, 틀림없이 내부의 근심을 만날 것이다. 더구나 오직 성인(聖人)만이 외환(外患)이 없이 할 수가 있고, 또 내부의 우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누구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외환을 대처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그나마 구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시작된 질환은, 고치기가 어렵다. 그러니 잠시 초나라와 정나라에 대한 것은 그저 하나의 외환일 뿐이라고 치부해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릉(鄢陵) 전투에서, 진(晉)나라가 정(鄭)나라를 치자, 형(荊:楚)나라가 정(鄭)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다. 난무자(欒武子)가 상군을 거느리고, 범문자(范文子)가 하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난무자는 나서서 싸우려고 하였으나, 법문자는 이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오직 덕을 후하게 베푸는 자만이 능히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으며, 덕이 없으면서 무리를 복종시키려고 했다가는, 틀림없이 스스로 상처를 입고 만다고 하더이다. 우리 진나라가 덕을 칭하고는 있지만, 제후들이 모두 배반하고 있어도, 그 때문에 나라가 이나마 잠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제후들이 있음으로 해서, 이렇게 시끄러운 것입니다. 무릇 제후들이란, 어려움의 근본입니다. 더구나 오직 성인만이 능히 외환을 없이 할 수가 있고 또한 그에 따라서 내부의 근심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성인이 아니고서야, 외환이 없다고 한다면, 반드시 내부의 근심이 있게 마련이니, 어찌 잠시 초나라와 정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는 것으로써 그들이 외환으로 남아 있도록 하지 않습니까? 대신들이 힘을 합하여 내정을 처리하면, 틀림없이 장차 화목함이 이르러 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전투를 하여 다시 초나라와 정나라를 이긴다면, 우리 임금은 장차 그 지혜를 자랑하며 힘이 세다고 여길 것이며, 대신 교화에는 태만하고 세금은 무겁게 거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여기는 자에게 더욱 큰 대우를 해 줄 것이고 자신의 부인들에게 봉지를 더욱 늘려 줄 것입니다. 여러 대부들의 봉지를 빼앗지 않는 한, 어디에서 그러한 땅을 얻어 그들에게 보태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 중에 자신의 집을 내 맡기고 그저 물러설 자가, 장차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진나라의 복입니다. 전투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봉지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며, 그 해로움은 장차 크게 번질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잠시 전쟁이 없는 시간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난무자가 말하였다. "옛날 한(韓)에서의 전투에서, 혜공(惠公)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고, 필(邲) 땅의 전투에서는, 삼군(三軍)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궤멸당하였으며, 기(箕) 땅의 전투에서는, 선진(先軫)이 다시 살아오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우리 진나라의 삼대 치욕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국정을 맡아 책임지고 있으면서, 그러한 치욕을 씻어 내지도 못하면서, 다시 만이(蠻夷)의 초나라를 피하여 그 치욕을 가중시키려 하고 있군요. 비록 후환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내가 알 바가 아니오" 범문자가 말하였다. "복을 선택할 때는 큰 것을 가져야 하고, 화를 선택할 때는 가벼운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복은 가벼운 것은 쓸모가 없고, 화는 큰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진나라는 지난 날 그러한 큰 치욕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차라리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았었다는 것으로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어찌 잠시 만이와 같은 초나라를 피하여 그저 작은 치욕을 받는 것이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난무자는 이 의견을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초나라와 언릉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여공은 과연 자신의 지혜와 힘이 세다는 것을 자랑하기에 이르렀고, 교화에는 태만해 졌으며 새금은 무겁게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사로이 좋아하는 자들을 크게 키워 주고, 세 극씨를 죽여 그 시신을 조정에 전시하였으며, 그들의 집안 재산을 몰수하여 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라 사람들은 여공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드디어 익성(翼城)에서 그를 죽여, 동문 밖에 묻으면서, 겨우 수레 1승으로 예를 갖추었을 뿐이었다. 여공이 이렇게 죽은 것은, 오직 덕은 없으면서 공은 대단하여, 복종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국어(國語)》〈진어(晉語)〉 6편

춘추시대 중엽 막강한 초나라(楚)와 진나라(晉) 두 나라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진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정나라(鄭)가 진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자, 진나라는 이듬해 정나라 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초나라 군대도 지원군을 보내 언릉에서 두 군대가 마주쳤다.

당시에 진나라에서는 삼극(三郤)[1]ㆍ난서(樂書:난무자)ㆍ사섭(士燮:범문자) 등의 경(卿)들이 정치를 주도했다.[2] 상군을 거느린 난서(난무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경(卿)들은 싸울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지만, 하군을 거느린 사섭(범문자)만은 싸우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만이 외부의 걱정과 내부의 근심을 모두 없앨 수 있으나, 보통은 외부의 걱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부의 근심은 있기 마련이니, 외부로 전쟁을 나설 것이 아니라 내부의 근심을 없애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외부에 나가 전쟁을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나라의 임금을 오만하게 만들어 내부의 근심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니, 오히려 외부에 걱정이 있는 채로 그냥 놔두는 것이 바로 우리 진나라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난서는 사섭의 말을 듣지 않고 초나라와 전쟁을 벌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사섭의 말대로 진나라 임금인 여공은 이로 인해 오만해져서 세금을 무겁게 매기고 경(卿)들을 죽이는 등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 여공도 살해당하면서 진나라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즉, 고사에 따르면 외환(外患)보다는 내우(內憂)를 조심해야 되며, 내우(內憂)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힘없는 백성들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지 않는 권력자에게 벌을 주어야 된다는 얘기이지만, 점차 '내우외환'이라는 단어가 관용어로 사용되면서 '나라 안팎의 걱정거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3. 기타



[1] 극지(郤至), 극주(郤犨), 극기(郤錡) 세 명을 말한다.[2] 당시 진(晉)나라에는 사군(四軍) 팔경(八卿)이 있었다. 직급 순으로 중군장 난서, 중군좌 사섭, 상군장 극기, 상군좌 중항언, 하군장 한궐, 하군좌 지앵, 신군장 극주, 신군좌 극지이다.[3] 또는 내곶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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