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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전근대
철과 가죽 또는 나무 등 여러가지 종류의 재료들로 만든 보호복이었다. 이때는 군복이라기 보다는 각 부대별 내지는 지역별로 상황에 따라서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갑옷을 입어도 죽는 건 같아서(무기가 너무 발전해버려서) 면제배갑과 흔이 아는 구군복을 입었다. 보통 고려시대부터 무관들은 철릭을 입었다. 그래서 권위를 위해 장수들의 경우 여전히 갑옷을 입었다. 다만 총알도 막게 하기 위해서 갑옷의 무게가 매우 무거워졌고 그런 만큼 비싸져 많이 보급되지는 못했다. 사극에 지겹게 나오는 포졸복은 사실 평시에 입던 근무복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조선 후기 중앙군을 제외한 군영은 오방전복과 전립을 착용했고, 중군 훈련도감은 호의와 전건을 착용했다.본격적인 근대식 군복의 등장은 1881년에 창설된 별기군으로부터 시작된다. 임오군란 이후 별기군이 해체되고 청나라의 영향 하에 설립된 친군영은 청군 군복[1]을 잠시 착용했으나 1882년부터는 별기군의 것과 비슷한 독자적 군복을 채택했으며 1884년 갑신의제개혁 이후 전군에 보급되었다.
군모의 경우 기존의 둥근 전립이 아닌 양반들이 쓰던 흑립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했다. 붉은 세로 띠에는 소속 부대를, 가로 띠에는 계급이나 성명을 기재했다. 장교의 경우 깃털 장식을 달았다. 상의는 마고자 형태의 검은 상의[2]였으며 장교들의 경우 위 사진처럼 소매의 붉은 줄의 2개였다.[3] 위 사진의 저고리 하단의 푸른 부분은 상의와는 별개로 방호력 강화를 위해 입는 내갑의다. 바지는 청색이였으나 흰 바지를 착용한 모습도 종종 보인다. 장성급 장교나 지방군 병사 일부는 구군복과 포졸복 등의 구형 군복을 계속 착용했다.
2024년에 일러스트레이터 최민준(필명 금수) 작가가 일러스트로 보는 조선의 무비-군사복식편이라는 책을 통해 조선시대 군복들을 총정리하였다.
1.2. 근대
1.2.1. 대한제국군
대한제국 육군 장교단
대한제국 육군 졸급 병사 복식 재현 사진. 구한말엔 군복제가 상당히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1907년 군대 해산 직전에 착용하던 군복이다.[5]
대한제국군의 훈장(위) 군모(왼쪽)과 견장(오른쪽). 견장에는 참위(소위) 계급장이 달려있다.
대한제국 보병 부위(지금의 중위) 예복과 상복용 견장[6] |
대한제국 보병 정위(지금의 대위) 예복 |
대한제국 기병 정위 예복 |
계급장은 어깨 견장과 소매의 ㅅ자형 수장 계급장을 함께 사용한 점이 독특한 점이다.
대한제국 포병 참령(지금의 소령) 예복 |
대한제국 육군 참장(지금의 소장) 예복 |
대한제국 육군 부장(지금의 중장) 예복 |
황제 정복, 황제 상복, 태황제 예복(왼쪽부터) |
<colbgcolor=#29176e> 대원수 정복[7] | <colbgcolor=#29176e> 대원수 정복을 입은 고종(왼쪽)과 원수 정복을 입은 순종(오른쪽) |
대원수 상복 | 대원수 상복을 입은 고종 |
한국군의 전투복 역사는 길게 보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별기군 제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 초 일본이 그러했듯 서양식 제복을 흉내낸 것으로 1895년(고종 32년) 4월 9일 칙령에 의해 최초 육군 훈련대의 보령과 장교들만 착용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에는 칙령 165호로 육군 모두에게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뒤 1897년 육군복장규칙에 의해 제정되어 이어 5월 22일에는 칙령 제24호로 이를 세분화하여 대례장, 군장, 예장, 정장, 상장의 5종으로 전반적인 정비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문관의 관복은 금실로 무궁화무늬와 오얏꽃무늬를 새긴 프록 코트로 정해졌고 무관의 관복은 대한제국 군복으로 정해지게 된다.
허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된 정규 군복의 역사는 잠시 끊겼고, 이들 중 일부가 일본의 강제해산에 저항하여 탈영하거나 의병활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초기 의병들 옷 중에는 이 옷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달 후인 10월 1일 그대로 친위대로 남아있는 군인들 한정으로 칙령 제26호 육군복장제식으로 최종 개정되었다.
여담으로 이 대한제국 군복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엔 별 관심도 없는 군복이지만, 이때의 군복이 진짜 멋있었다면서 그리워하는 의견도 꽤 존재한다. 사실 알록달록해서 너무 눈에 띄는 현 사관생도 예복이나 민간에서 소위 군바리라 놀림받는 현 국군 병사들의 전투복과는 달리 대한제국 군복의 디자인의 차분한 검은색 바탕에 강렬한 붉은색 디자인과 화려한 금색 단추와 실이 자아내는 형언할 수 없는 간지폭풍은 개천 이래 역대 한국군 역사상 최고 디자인의 군복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높은 평가 덕분인지 이후 대한민국 육군의 신형 군사경찰 행사복이 대한제국군 헌병 제복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자인을 채용하게 되었기도 하다.
군복의 모델은 일본군 군복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일본 군복 또한 프로이센 왕국군 군복을 기초하고 있었고, 이후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군복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군복은 대한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닌 해외에서 위탁형식으로 생산해 수입하거나 아니면 부대내에서 직접 생산하게 되어있었고 그나마 1900년 4월 17일 육군 참장이었던 백정기가 올린 12조의 상소문중 국산물산 장려와 재정낭비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01년 이용익이 육군피복제조소를 설립해 국내생산이 시작되었다. 또한 1903년 1월 18일 군부대신이었던 신산선의 건의로 장관, 영관, 위관의 복장중 상장은 국산 직물을 이용해 만들기 시작했다.
계급장은 견장에 태극과 별의 색깔, 개수 등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여기 참고 그 외에도 위의 대한제국 육군참장 군복처럼 소매에 ㅅ자 형상 줄의 갯수로 표시하는 수장 계급장, 모자 장식선, 칼라장, 바지 측선으로도 구분이 되었다. 줄의 갯수는 1줄(참위)~11줄(대원수).
병과별 색상은 붉은 색은 보병, 노란색은 포병, 초록색은 기병, 흰색은 헌병, 자주색은 공병, 옥색은 의무병이였다.
병과색은 시기마다 다른 곳에 적용되었는데, 1895년에는 바지의 옆선만 병과별 색상이 적용되었으나, 1897년 부턴 모자의 아랫부분과 정수리의 이화문, 자켓의 옷깃과 소매와 여밈부, 바지의 옆선에 병과별 색상이 적용되었고, 1900년 이후로 모자는 모두 보병의 배색을 쓰기로 통일 되었다가, 1900, 1902년에 헌병, 기병 병과가 다홍색/홍색 상의와 모자를 도입하고 1901년 군악 병과가 홍색 하의와 모자를 도입하면서 해당 병과만 별도 배색의 모자가 지정된다.
가령 1905년을 기준으로 헌병은 흰색 장식의 다홍색 모자에 흰색 장식의 다홍색 재킷과 흰색 장식의 검은색 바지를 착용하나, 같은 시기의 포병은 보병의 홍색 장식의 검은색 모자에 황색 장식의 검은색 재킷과 황색 장식의 검은색 바지를 착용했다.
허리에 두르는 장식띠[8]는 병과와 무관하게 홍색이었다.
2018년에는 풀 세트가 보존되어 있었던 대한제국군 진위대 장교 군복이 후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황희의 후손으로서 위관급 장교로 근무했던 황석(1849∼1938)이 착용했었던 군복으로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설립이 검토되고 있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기념관에 보존될 예정이라고 한다.
06식 기병 정위 상복 |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전투복에 해당하는 상복(常服)이 일본군 군복처럼 황갈색으로 변경되며, 소매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병과별 색상이 생략된다.
황갈색 상복을 입고 있는 조동윤 부장[9] |
대한제국 경무청 경찰 제복에 대한 블로그, 역시 우용곡 작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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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는 초초혼 작가가 대한제국 군복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 '그림으로 보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개인출판 하였으며, 2024년에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1.2.2. 의병
1. 을미의병(1895)
민비 시해사건/폐위에 대한 반발, 급진개혁정책의 한 고리로 단발령(斷髮令)[10]을 내리고, 대소관민의 삭발(削髮)[11]을 강행하였다.
이 당시 청일전쟁 1년 차에 접어들었다. 의병장은 대체적으로 사대문 유학자[12] 가문이거나 향리였고 그들의 재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포군들을 모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심지어 동학을 진압한 군관도 을미의병에 참가했었다. 을미의병은 동학의병과 1년차로 늦게 벌어지지만, 전혀 다른 세력이다.
당시 조선의 국군도 둘로 쪼개어져서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청일전쟁만해도 경복궁 방어가 무너지면서부터 경군은 일본의 지휘계통을 명령을 받게 된 것이고, 평양군은 청나라 세력과 함께 합세하여 싸웠던 것이다. 을미의병은 그 연장선상에서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정규군과 포군을 모집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의병 또한 국군이라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13]경군인 장위영은 일본군의 부역자가 되고 고종은 평양과 동학에 밀명을 내려 평양에 주둔 중인 조선군은 청나라와 연합하여 서로 싸우게 된다. 사진은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군 포로를 지키고 있는 경군 병력으로 포로 중에서는 조선인 병력도 포함되어있었다. |
관군도 2개의 세력으로 쪼개져 대립상태가 있었다. 훗날 대한제국군으로 불리는 세력은 일본군에게 군복과 장비, 총기를 받아 동학교도와 의병들을 끊임없이 교전, 학살한다.
조성학은 광주산성(廣州山城)에 들어가서 별패진(別牌陣) 군관 김순삼(金順三)과 함께 별패진의 포군(砲軍) 3백여 명을 출동시켰으며, 구연영은 양근·지평에서 군사 3백여 명을 일으키고, 신용희는 음죽·죽산 지방에서 화포군 3백여 명을 모았는데, 또 자원 출전하는 의포군(義砲軍)[14]도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지평고을에는 군수 맹영재의 지휘하에 있는포군(砲軍) 4백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백선이 영재와 동학혁명군을 토벌할 때에 양성 지휘하던 백선의 수하 병력이었다.
독립군이자 한국광복군 오광선 지사의 부친 오인수는 용인 일대에서 총 쏘는 데 있어 일인자로 정평나 있던 포수 출신으로, 인근 포수들의 친목모임인 화포계(火砲契)에서 매년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
화력이 열세가 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산이나 골짜기로 유인해서 유격전을 펼쳤다.
의기는 충천하다 하지만 무기가 없고 훈련이 없는 의병진으로서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닐 수 없어서 단양으로 이동했다. 토벌군은 장회협(長滙峽)으로 들어왔는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숙이 들어온 물가의 요해지이었다. 의병진에서는 숨어 있다가 적군이 전부 골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 발포(發砲)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골짜기로 들어오자마자 의병진이 저편에 발견되어 먼저 공격을 당하니 부득이 응전하며, 좌우 산협에 매복하였던 군사들도 일제히 공격하였는데, 맹렬한 총포 소리가 산중고읍(山中古邑)을 진동하며 격전이 몇 시간 계속되었다. 결과 승리는 험요(險要)한 지점을 차지하고 공격 태세를 갖추었던 의병진으로 돌아왔다. 날이 저물게 되자 적군들은 죽은 시체를 버리고, 부상한 자들은 부축하여 달아나니[15]
한말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의병부대. 출처 : 독립기념관 |
제천에서는 리볼버를 사용한 기록도 있다. 아마도 일본군의 무기고를 털은 것으로 보이나 사용법을 몰랐거나 다쓴 권총을 노획한 듯하다.
용감한 의병들은 적병을 보이는 대로 무찌르며 육박하여 들어가니 적진에서는 당황하여 퇴각의 길을 찾고 있었다. 여기서, 이중군은 큰 소리로,
“적이 지금 달아나려 하니 군사들은 급히 치라.”
고 호령하였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이 웅장한 호령 소리가 그의 목숨을 끊는 동기가 될 줄이야-. 적진에서는 이 웅장한 지휘관의 호령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여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중군장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자수로 육혈포 권총(六穴砲)[16]을 쏘았다. 그런데 권총이 비뚤어지며 나가지 않았다. 중군은 권총을 뒤에 있는 홍선표(洪選杓)에게 주며,
“이거 보시오, 웬일인지 모르겠소.”
하였는데, 이때 몸을 돌리는 중, 얼굴이 마주 섰던 큰 나무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그때 적의 탄환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니 그의 나이 28세였다.
“적이 지금 달아나려 하니 군사들은 급히 치라.”
고 호령하였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이 웅장한 호령 소리가 그의 목숨을 끊는 동기가 될 줄이야-. 적진에서는 이 웅장한 지휘관의 호령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여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중군장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자수로 육혈포 권총(六穴砲)[16]을 쏘았다. 그런데 권총이 비뚤어지며 나가지 않았다. 중군은 권총을 뒤에 있는 홍선표(洪選杓)에게 주며,
“이거 보시오, 웬일인지 모르겠소.”
하였는데, 이때 몸을 돌리는 중, 얼굴이 마주 섰던 큰 나무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그때 적의 탄환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니 그의 나이 28세였다.
처형되는 세사람은 김성삼(金聖三), 이춘근(李春勤), 안순서(安順瑞)로 1904년 9월 21일 오전 10시 용산과 마포를 잇는 도로변 철도 건널목[17]에서 강제 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마쳤다. 이 의병 처형의 삽화는 프랑스 신문사 르 쁘띠 주르날에서 그린 것으로 대한 실제사진은 민족문제연구소 설명을 덧붙인다. |
2. 을사의병(1905)
을사의병은 대한제국 외교권/금융권 박탈로 시작이 되었으며 황해도 평안도 지역도 참여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나 이전의 의병들 무장상태에 대해서는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 차이점이 있다면 남한산성 전투와 홍주성 전투에서 그 무장기록을 볼 수 있다.
경기 의진의 군사(軍師) 김하락의 수기 ≪정토일록(征討日錄)≫에서도 입성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산성은 사면으로 산이 깎아 서고 성첩이 견고하니, 정말 한 군사가 관문을 막으면 일만 군사도 열 수 없는 곳이다. 성중을 둘러보니 양곡이 산같이 쌓이고 식염이 수백 석이며 군물(軍物)이 풍부하게 갖추어 있다. 대완구(大碗口)가 수십 자루, 불랑기(佛狼機)가 수십 자루이며, 천(天)·황(黃)포, 지자(地字) 포가 역시 수십 자루이고천보총(千步銃)이 수백 자루이며 그 밖의 조총은 이루 세일 수 없게 많고 화약·철환이 산같이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군용물이 많음을 한껏 즐거워하고, 또 진칠 곳이 견고함을 기뻐하였다.”[18]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의병에는 의병 복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복 제도
1. 입자(笠子)는 혹 평양자(平壤子)로도 하고, 혹은 소매 넓은 주의(周衣), 혹은 소매 좁은옷이나 구전복(具戰服)을 각기 있는 대로 사용하되, 상의는 모두 누런 빛을 물들인다. 따로이 적삼과 바지 1벌씩을 준비하되 옷적삼은 길이는 다리(髀)를 가리우고 소매는 팔이 들어갈 만한 정도로 좁게 하며, 색깔은 그 사람의 난 해 천간(天干)을 따라 물을 들인다. 갑(甲)·을(乙)은 청색, 병·정은 홍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 같은 것이다.
아랫바지는 길이는 가슴에 닿을 수 있고 너비는 다리가 들어갈 정도로 하며, 색깔은 그 사람의 생년 지지(地支)를 따라 물을 들인다. 인(寅)·묘(卯)는 청색, 사·오는 홍색, 진·술·축·미는 황색, 신·유는 백색, 해·자는 흑색 같은 것이다
전대(戰帒)는 모두 청색으로 물들이고, 수건은 모두 홍색으로 물들인다.
1. 칼·창(鎗)·검·극(戟)·활·총은 각기 있는 대로 가지고 나오되, 갈고 쓸어서 빛이 나게 한다. 발낭(鉢囊) 1벌, 흑 백목(白木), 혹 삼베로 하되 쌀 2말이 들게 한다. 베주머니에 끈이 있는 것 2벌, 1벌에 백미엔 1되를 넣고 1벌은 빈 주머니로 가지고 온다. 표주박 1개, 화구(火具) 1주머니, 화철(火鐵)·화석(火石)·화우(火羽)·집신 2켤레, 입모(笠帽) 1벌, 유삼(油袗) 1벌, 유단(油丹) 3겹(摺), 짚으로 꼰 새끼 2줄(條), 혹은 숙마(熟麻)로 하되 길이는 3발은 되게 하고 한끝에는 올가미를 맺는다.[19]
1. 입자(笠子)는 혹 평양자(平壤子)로도 하고, 혹은 소매 넓은 주의(周衣), 혹은 소매 좁은옷이나 구전복(具戰服)을 각기 있는 대로 사용하되, 상의는 모두 누런 빛을 물들인다. 따로이 적삼과 바지 1벌씩을 준비하되 옷적삼은 길이는 다리(髀)를 가리우고 소매는 팔이 들어갈 만한 정도로 좁게 하며, 색깔은 그 사람의 난 해 천간(天干)을 따라 물을 들인다. 갑(甲)·을(乙)은 청색, 병·정은 홍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 같은 것이다.
아랫바지는 길이는 가슴에 닿을 수 있고 너비는 다리가 들어갈 정도로 하며, 색깔은 그 사람의 생년 지지(地支)를 따라 물을 들인다. 인(寅)·묘(卯)는 청색, 사·오는 홍색, 진·술·축·미는 황색, 신·유는 백색, 해·자는 흑색 같은 것이다
전대(戰帒)는 모두 청색으로 물들이고, 수건은 모두 홍색으로 물들인다.
1. 칼·창(鎗)·검·극(戟)·활·총은 각기 있는 대로 가지고 나오되, 갈고 쓸어서 빛이 나게 한다. 발낭(鉢囊) 1벌, 흑 백목(白木), 혹 삼베로 하되 쌀 2말이 들게 한다. 베주머니에 끈이 있는 것 2벌, 1벌에 백미엔 1되를 넣고 1벌은 빈 주머니로 가지고 온다. 표주박 1개, 화구(火具) 1주머니, 화철(火鐵)·화석(火石)·화우(火羽)·집신 2켤레, 입모(笠帽) 1벌, 유삼(油袗) 1벌, 유단(油丹) 3겹(摺), 짚으로 꼰 새끼 2줄(條), 혹은 숙마(熟麻)로 하되 길이는 3발은 되게 하고 한끝에는 올가미를 맺는다.[19]
3. 정미의병(1907)
“공(이토 히로부미)은 통감의 감독권을 확장하고 이로써 장래의 화근을 두절할 목적으로 신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였던 바, 이 때는 한 사람의 이의를 말하는 자 없이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20]
라고 한 것을 보면 통감의 명령으로 그들의 주구내각에 의해 얼마나 신속히 처리되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정미 7조약(丁未七條約)’[21]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일협약
일본제국정부 및 한국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圖)하고 한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좌개조관(左開條款)을 약정함.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수할 사.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예(豫)히 통감의 승인을 경(經)할 사.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차를 구분할 사.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차를 행할 사.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사.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용빙(傭聘)하지 아니할 사.
제7조 명치(明治) 37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조약(日韓條約) 제1항을 폐지할 사.
우위증거(右爲證據)함으로 하명(下名)은 각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수하여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함이라.
광무 11년 7월 24일
내각 총리대신 훈2등 이완용(관인)
명치 40년 7월 24일
통감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관인)[22]
일본제국정부 및 한국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圖)하고 한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좌개조관(左開條款)을 약정함.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수할 사.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예(豫)히 통감의 승인을 경(經)할 사.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차를 구분할 사.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차를 행할 사.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사.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용빙(傭聘)하지 아니할 사.
제7조 명치(明治) 37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조약(日韓條約) 제1항을 폐지할 사.
우위증거(右爲證據)함으로 하명(下名)은 각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수하여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함이라.
광무 11년 7월 24일
내각 총리대신 훈2등 이완용(관인)
명치 40년 7월 24일
통감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관인)[22]
상기 정미7조약 조인과 동시에 비밀 각서를 조인. 교환하여 정미조약 각조항의 시행 세목을 규정해 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한국군의 해산이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비밀각서는 극비로 취급되어 당시 일반 국민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여기에 비밀각서 가운데 있는 군대해산의 항목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각서
명치 40년 7월 □일 조인한 한일조약의 취지를 증거하여 점차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실시할 사.
제1, 제2(생략)
제3 좌개방법에 의하여 군비를 정리함.
1.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수위임무를 당케 하고 기타를 해대(解隊)할 사.
1. 교육에 관한 사관은 한국군대에 유무(留務)할 필요가 유한자를 제하고 기타는 일본군대로 부속케 하고 실지 연습케 할 사.
1. 일본에서 한국사관을 위하여 상당한 설비를 할 사.
제4, 제5(생략)
우개(右開) 외에 재무·경무 및 기술에 관한 관리로 일본인을 임용할 사는 추후 별로 협정함.
자에 기명 조인하여 후일의 증거로 함.[23]
명치 40년 7월 □일 조인한 한일조약의 취지를 증거하여 점차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실시할 사.
제1, 제2(생략)
제3 좌개방법에 의하여 군비를 정리함.
1.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수위임무를 당케 하고 기타를 해대(解隊)할 사.
1. 교육에 관한 사관은 한국군대에 유무(留務)할 필요가 유한자를 제하고 기타는 일본군대로 부속케 하고 실지 연습케 할 사.
1. 일본에서 한국사관을 위하여 상당한 설비를 할 사.
제4, 제5(생략)
우개(右開) 외에 재무·경무 및 기술에 관한 관리로 일본인을 임용할 사는 추후 별로 협정함.
자에 기명 조인하여 후일의 증거로 함.[23]
여기에 나오는 각서 제 1, 2, 4, 5는 모두가 정미7조약에 규정된 조항과 관련되는 시행 세목으로 되어 있으나, 제3의 군비 정리의 항목만은 정미7조약의 조문에는 없는 것으로 각서에서 볼 수 있는 조목이다. 이는 일제가 한국군 해산만은 일반에게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수행하려고 한 의도에서였다.
1907년 8월 10일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린 총살형 사진. |
1908년 2월 초순(양력) 이후가 되면 서울 근교에서의 의병들의 활약 기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러한 기간 동안의 서울 근교 및 서울에서의 의병활약은 13도 연합의병부대의 서울 진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라 이러한 기사를 추려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신문기사 일자 | 의병활약 일자 | 의병활약상황 |
1907.10.10 | 1907.10.7밤 | 동대문 외 약사사(藥師寺)에 5명이 유숙하다가 일군과 교전하여 순사 1명이 부상(의병은 피해가 없었음). |
10.18 | 동대문 외 사능(思陵) 등지에 의병이 괘방(掛榜)하였는데 그 내용은 추등(秋等) 호포전(戶布錢)을 일제히 의병소로 내납(來納)하라 함. | |
11.13 | 11.11 | 동대문 외 휘경원(徽慶園)에서 의병 5명(총기휴대)이 순검 1명을 착거(捉去)하였다가 12일에 방환함./동대문 외 10리에 의병 10명이 들어와 형사 순검 문철준(文哲準)을 착거하여 퇴계원(退溪院)으로 사라지다. |
11.14 | 동대문 외 부근 사찰(寺刹)에는 의병들의 횡행으로 유흥객이 없어지고 사찰이 적막함. | |
11.14 | 11.12 | 동대문 외 장위능동(長位陵洞)·이문동(里門洞) 등지에 의병이 나타나 매호에 장정 1인씩을 모집함. |
12.7 | 12.5밤 | 의병 약 1백 명이 동대문 외 둑도(纛島)에 들어가 일인 농장을 습격하여 일인 1명을 타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순검 1명과 동임(洞任) 1명을 착거함./ 의병 약 100명이 광화문 외 5리 되는 곳을 습격하여 순검 1명을 착거하고 일녀(日女) 1명에게 부상을 입힘. |
12.10 | 12. 8 | 동대문 외 장우리(長宇里)에 의병이 들어옴. |
12.13 | 12. 4 | 의병장 박성준(朴性俊)이 의병을 거느리고 동대문 외까지 들어왔다가 12월 8일에 체포됨. |
12.21 | 12.21 | 지영기(池永基)의병부대 의병 30~40명이 서울로 진격하려다가 경찰대와 격전함. |
1908.1.5 | 1. 1 | 의병 20여 명이 동대문 왕십리로 들어와 활약하다가 양주(揚州)지방으로 감. |
1. 9 | 1. 4 | 의병 5명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동대문 외 태능(泰陵)에 들어옴. |
1.15 | 1.13 | 의병 8, 9명이 창의문(彰義門) 외에 들어와 순검을 포살함. |
1.16 | 1.14 | 의병 6, 7명이 아현리(阿峴里)에 들어와 순사와 격전함. |
1.19 | 1.17 | 병 2명이 서문(西門) 외에서 체포됨. 서울 부근 의병 경성(警聲)이 대치(大熾). |
의병이 삼삼오오 작당하여 과천군(果川郡) 신원(新院) 말죽거리(馬粥巨里)·우안리(牛眼里) 등지로 섬홀출몰(閃忽出沒)함. | ||
1.21 | 경기내 장단군(長湍郡)·개성군(開城郡)에 의병이 다수 횡행, 순사 40~50명을 파견함. | |
1.24 | 근일 서울에 의병 경성이 대치하여 충화(衝火)하는 폐가 있음. | |
1.24 | 1.23~22 | 동대문 외에서 의병 3명이 체포되어 경시청(警視廳)으로 송교(送交)됨./근일 서울 시내에 의병 경성이 거익대치(去益大熾)./의병 4,5명이 사직동거(社稷洞居) 전 주사 서정억(徐廷億)씨 집에 들어와 금 6백 환(圜)·가권(家券)·답권(畓券)을 몰수. |
1.25 | 1.25 | 일군이 동대문 외에 속사포 매치(埋置)./의병 3명이 열은동(悅隱洞) 부근에서 개성일군수비대와 교전. |
1.26 | 1.24 | 의병 3,4명이 모화현(慕華峴) 정토동(淨土洞) 최모가(崔某家)에 수삼일 유숙한 후 출발. 의병 7,8명이 동막리(東幕里)로 방포 돌입하다. |
1.28 | 1.26 | 의병 10여 명이 창의문외(彰義門外) 삼패(三牌)에 군자금조달로 활약함./ 수일 전 과천군(果川郡) 죽암리(竹岩里)에서 의병 소모장 어윤성(魚允星)이 일경에게 피살됨. 유모(兪某)는 동군 죽암(竹岩)·우안리(牛眼里)에서 군자금조달로 활약. |
1.30 | 근일의병이 입성한다는 풍설로 일병이 기십명(幾十名)씩 4대문파수(四大門把守). | |
2. 6 | 동대문 외 금곡(金谷)에서 의병이 순사를 잡아 총살함. |
정미년(1907년) 음력 12월 25일(양력 1908년 1월 28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의 부고(訃告)를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있던 이인영은 부음을 받고 곧 후사를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에게 맡기고 자신은 즉일로 문경(聞慶)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군사장인 허위가 친히 3백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24]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집합하기로 약속한 각지 의병부대와 연락이 끊어지게 되고, 이 기미를 알게 된 일본군에게 각처로부터 닥쳐오는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매 결국 연합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항쟁의지가 있는 의병들은 함경도 산악지대까지 게릴라 전을 하다가 만주, 연해주 동포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계승된다.
영국 ‘데일리메일(Daily Mail)’의 종군기자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의 1906~07년으로 추정되는 의병사진이다.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오빈리로 추정되는 남한강가에서 촬영되었다.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그가 의병을 만난 뒤, 그들을 묘사한 말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 종군기자로 한국을 방문한 맥켄지는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그 침략상을 비판했다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4번째에 있는, 검은 동코트를 입고 검은 정모를 쓴 의병이 눈에 띈다. 가지고 있는 옷이 제복이니까 입은 것일 뿐이다. 옷을 하나 입기 쉬운 시절이 아니었다. 관군에 남아있던 일부 대한제국군 군인들은 친일파의 길로 간다. [25] |
의병의 전초병(前哨兵), 역시 맥킨지가 촬영한 의병들의 첫번째 사진이다. |
총평
의병들은 친일 개화파의 정책에 반대하고 전통복식을 유지하려 했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체되면서 대부분은 일본제국육군에 편입이 되고 [26] 일부는 일본의 통치지역에 빠져나와 투쟁을 이어간다.
통일된 제식 복장이 없었다. 오로지 항일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연대의식이 있었다
부록 : 의병에 관한 기록이 없는 이유
일제의 군·경에 의한 의병들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과 아울러 1907년 9월 9일에는 ‘총포화약취체법’을 제정하였다.
‘병기 탄약류 정리에 관한 군부대신 훈령’
① 화약은 모두 소기(燒棄)하고 만일 소기할 수 없을 때에는 물 속에 투기하여 후일 건져서 건조시키더라도 사용할 수 없게 할 것.
② 탄환(완전한 탄피)은 전항에 준하여 처리할 것.
③ 총포류는 병기로써 사용하지 못하게 처치하기 위하여 변형(變形)·절단(切斷) 등 적당한 방법을 집행할 것. 단 미술품 또는 역사상 자료가 될 가치가 있는 것은 이를 군부에 송부할 것.
④ 궁(弓)·시(矢)·인(刃)·창류(槍類)는 소기할 것.
⑤ 고대 갑주류(甲冑類)는 군부에 송부할 것.
⑥ 변형 또는 소기한 금속 본질은 신분이 확실한 자에게 매각할 것.
⑦ 군아(郡衙)에서 이전에 모치(募置)한 것으로써 포군(砲軍)이 사용한 병기도 역시 전항에 의하여 정리할 것.[27]
① 화약은 모두 소기(燒棄)하고 만일 소기할 수 없을 때에는 물 속에 투기하여 후일 건져서 건조시키더라도 사용할 수 없게 할 것.
② 탄환(완전한 탄피)은 전항에 준하여 처리할 것.
③ 총포류는 병기로써 사용하지 못하게 처치하기 위하여 변형(變形)·절단(切斷) 등 적당한 방법을 집행할 것. 단 미술품 또는 역사상 자료가 될 가치가 있는 것은 이를 군부에 송부할 것.
④ 궁(弓)·시(矢)·인(刃)·창류(槍類)는 소기할 것.
⑤ 고대 갑주류(甲冑類)는 군부에 송부할 것.
⑥ 변형 또는 소기한 금속 본질은 신분이 확실한 자에게 매각할 것.
⑦ 군아(郡衙)에서 이전에 모치(募置)한 것으로써 포군(砲軍)이 사용한 병기도 역시 전항에 의하여 정리할 것.[27]
이후 의병의 해외이동으로서 먼저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을 지적하게 되고, 그 다음 안중근(安重根)·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홍범도(洪範圖)·박장호(朴長浩)·전덕원(全德元)·백삼규(白三奎) 등 의병장을 중심한 의병들의 해외이동이 상당한 숫자에 달한다.
그러나 이상에 열거한 인물 이외에는 그 뒤의 행적을 파악할만한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밖의 사료도 거의 없으므로 수많은 의병들의 해외이동 전말을 기술하기가 어렵기는 하나 대개 이들은 항일독립군의 초석이 되는 독립청년 양성이나 스스로 광복전선에서 성혈(聖血)을 흘리고 쓰러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2.3. 독립군
독립군 세력은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시작되었으나 을사의병(1905) 잔존세력[28]과 같이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함경도를 마지막으로 1910년대가 되면 독립군과 그 가족들이 동북삼성일대로 이주를 하면서 정착을 했었고 많은 만주 또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독립군으로 재편성 가담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 운동 이후로 그 해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된다. 독립군에 대한 남겨진 기록을 교차검증하려면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북양군벌의 한 파벌인 봉천군벌의 자료를 보거나 아니면 노령[29]쪽으로 간 독립군의 경우 러시아측 기록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기에 봉천군벌중 일부가 독립군을 지원했지만, 군벌 수장 장쭤린이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했기 때문에 확신하기가 힘들다.
봉천군벌중 일부 군 간부는 독립군에 호의적이었다고는 하나 장쭤린이 1915년부터 일본과 결탁하여 군벌내에 확립하던 시기라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든다. 그 어느 국가도 그러하듯 자신의 영토에서 타국이민자 조선인들이 정규군 형태로 보이는 복장을 용인했을까?[30] 왜냐하면 다른 나라 이민족들이 자국에서 정규군임을 자처하고 일본군과 교전을 하는데, 쉽게 선의로 무장을 시켜주지 않고 정치적인 이해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홍범도 장군도 봉천군벌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으며, 곧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독대해서 무기를 지원 받았었다.
반면 만주에 있던 한인교민들은 일본군이 봉천군벌에게 상금을 제안하자 중국관헌은 독립단원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장쭤린의 군대도 마적도 토비(土匪)도 여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힘이 없는 집에 들어가 ‘독립군을 숨겼다’고 협박하여 금품을 빼았기도 하고 억지로 독립군이라 하여 상금을 타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게 교민이어도 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중국인으로 위장했던 광복군도 그랬듯이 중국 만주족 옷을 입고 민간복장으로 게릴라전을 하는게 안전 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어를 배워야했고 중국인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봉천군벌때 자료는 만주사변이후 일제에 의해서 많은 기록이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도 러시아 내전(1917~1922년)상태였기 그렇게 남아있는 경우가 없어 함부로 추측하기가 힘들다. 이후에도 진상규명을 시도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으나 1920년대 중후반의 임시정부에서는 1932년 상하이에 있었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하여 장제스의 중화민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 전까지는 고난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지청천[31], 이범석[32], 김학규[33]의 회고록과 수기를 참조하는 방법이 없다. [34]
봉오동 전투가 있었던 대한독립군, 쌍성보 전투로 유명한 한국 독립군 1932년 후반부영릉가 전투로 유명한 조선혁명군이 있으나 1932년 3월 만주사변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자료가 많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독립운동가들의 불문율 중 하나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불문不文’ 즉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운동 당대 자료는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고 사진자료는 더 구하기 힘들다. 구한다고해도 진위여부가 쉽지 않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부득이하게 일제가 남긴 문서들을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본 제국의 치하에서는 독립군에 관련된 기록이 있으면 체포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할때까지 광복군에게도 적용되었던 사항이었다.
안중근의 동의단지회 좌측부터 이종만, 백규삼, 왕현정, 황병길, 엄인섭 |
김좌진 장군과 대원들
청산리 전투(1920) 직후 촬영된 독립군'으로 알려진 사진이다. |
우용곡 작가가 그린 북로군정서군의 군복 모습.# |
홍범도 장군과 대원들
홍범도 장군의 사진 적백내전기 붉은군대의 튜닉을 입고, 부됸노프카를 쓴 부대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함부로 추측하기는 힘든 것은 사실이나 봉천군벌의 군복[35]이나 러시아 내전 당시의 적군[36] 계열의 러시아 군복을 입었을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 주로 게릴라 비정규전을 치룬만큼 부족한 부분은 직접 자체적으로 만들어 입거나 조선인이나 만주족 복식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 옷으로 위장한 독립군
독립군이 추운 겨울 체포됐다. 일본군은 체포한 독립군의 두 손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린 채 연행하고 있다. 만주족 호복을 입고 있다. (1935년).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
일본의 군수물자 운송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한 독립군이 주범으로 체포됐다. 목에는 사용하던 탄약을 건 채 포박돼 있다(1938년).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
일본군에 붙잡혀 처형당하기 직전의 독립군의 모습. 심한 고문으로 눈덩이가 부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모습도 보인다(1937년).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독립군이 체포돼 포박당한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생매장으로 처형됐다(1938년).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
광정단 결사대사진은 이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군복 상의에는 주머니가 없으며 자체 제작한 유사군복으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제 5관에 전시된 독립군 전투복
독립군 결사대 장교 군복[37] |
독립군 결사대 사병 군복 |
독립군 결사대 사병 견장 |
독립군 결사대 완장. 보통의 완장과는 달리 팔에 끼우는 방식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붙이는 방식이다. |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군복이 갖는 위엄과 소속감, 나아가 충정과 결의를 다지기 위한 도구로써 군복을 제작하고 착용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있다. 독립군의 군복은 완벽히 보존된 것은 현재로써는 없다. 독립기념관 제 5관에 전시된 독립군 군복에 따르면 위와같다, 위의 군복은 실물이 아니라 고등경찰기록 제34101 호의 글과 35383호의 글, 삽화를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다.[38]
봉오동 전투기록에는 일본군복도 노획해서 교란전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오류정정
김종진(金宗鎭)은 1921년 4월 윈난성(雲南省)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도대 2년 과정을 마치고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에 16기생으로 입학하여 1925년 4월 졸업하였다. 사진은 윈난강무당 졸업사진으로 윈난성(雲南省)을 뜻하는 '云'(雲의 약자) '16'이란 표시가 있다. |
창작물에서
SBS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꿈속에 회상되는 김좌진 장군의 군복 모습 |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대한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역)[39] 어깨에 완장 고증재현이 인상적이다. |
영화 하얼빈 신아산 전투 장면, 이창섭(엄인섭[40] 모티브) 대한의군부총장으로 나온다. |
1.2.4. 광복군
1. 개요
광복군이 창설되던 시기인 1940년 중산복 형태 중국군복을 입었다.[41] 중산복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부분적인 차이가 있지만, 앞섶은 단추로 여몄으며, 뚜껑이 달리고 주름 잡힌 네 개의 주머니가 달린 형태이다. 가슴 부위의 주머니 뚜껑은 ‘산(山)’자를 거꾸로 놓은 모양이었고, 허리 쪽에 달린 입구가 큰 주머니는 ‘호랑이 주머니(老虎袋)’라 불렸다. 앞섶의 단추 다섯 개는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감찰(監察)·고시(考試)의 오권분립(五權分立)을 뜻했고, 주머니 네 개는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상징했다. 또 소매의 단추 세 개는 민생(民生)·민주(民主)·민족(民族)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나타냈다.
이 중산복은 중국 국민정부 수립 이래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남성복이며,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복장으로 1920년대 이후 국민정부는 중산복에 ‘국부(國富)의 의지를 계승해 끝까지 혁명을 진행한다’는 등의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는데, 이런 뜻을 담아 군복을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년 4월 4일, 류저우) 초창기는 군자금을 모으기 위한 항일연극공연을 했었다고 한다. |
광복진선청년공작대라는 이름으로 결단식을 가진 것은 그 이듬해 1939년 2월이었다. 그때 청년공작대 제복을 만드는 것도 우리 형편으로는 그리 쉽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래도 어렵사리 제복을 갖추어 입을 수 있었다. [42]
1940~1945년까지의 중일전쟁상황은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가 충칭에 막 정착할 때였고 상하이나 난징과 달리 전기발전[43]라든가 근대경공업 시스템이 없었다. 따라서 원단 생산이나 휘장이나 계급장이 제대로 달린 군복이 많지가 않았다. 그러다보니 베틀로 짠 무명천과 착색제가 없어 세탁하면 물이 빠지는 천연염색이다보니 당연히 군복이 하얗게 되기 일 수였다. 모장이나 휘장도 도자기로 구워서 만든 것이 많았다.
그나마 충칭은 버마공로로 통해서 미국, 영국군에게 보급이 들어와서 사정은 좋은 편이었지만, 일본군이 장악한 철로와 도시로 둘러쌓인 제 3지대 푸양이나 장시성 상라오에 제 3징모분처, 그리고 창사 3차, 4차 전투를 겪은 9전구 공작대의 경우 명찰이나 계급장이나 심지어 청천백일기 모장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보시다시피 전투가 벌어졌었던 지역의 광복군 대원들은 초모공작을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호복을 입거나 파란색 군복에 계급장이나 명찰 등 달지 않았었다. |
한국광복군이 착용한 중국 국민정부군 군복은 조례와 사진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 자료가 흑백이기에 군인들이 실제로 조례에 정해진 색상대로 군복을 착용했는지 확언하기 어려운데, 이 시기 군복을 재현한다면 반드시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군복의 색상이 언급된 회고록 등의 자료에 근거해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 충칭중화민국국민혁명군 군복 |
6.7.8. 왕징웨이의 난징괴뢰국 화평건국군 군복이다. |
김준엽(金俊燁)은 그의 회고록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충칭(重慶)에 도착하기 전, 그가 잠시 몸담았던 중앙군 소속 유격대(遊擊隊)가 푸른빛의 심회색 군복을 착용한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을 어귀를 얼핏 보니 노랑 군복을 입은 중국 군인이 총에 기대어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국민정부군은 파란 군복을 입었고 친일 왕징웨이군(汪精衛軍)은 노란 군복을 입었다.신병인 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고, 따라서 마을 어귀에 노랑 군복을 입은 군인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44]
김준엽 회고록에서 또 그는 1944년 11월 한광반[45]을 졸업하고 충칭으로 떠날때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가 출발할 때 지급된 것은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국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부식비였고, 옷은 한광반에서 입던 청색의 얇은 여름군복이었으며, 맨발에 짚신을 신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안후이성만 저랬던 것도 아니고 다른 성들도 황색 군복에 대해서는 왕징웨이 친일괴뢰 화평건국군이 황색군복을 입고 있다는 기억을 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로 상하이에서 지하공작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유기석 회고록에도 나와있다. 참고로 해당 지역은 장쑤성으로 창저우시는 상하이와 난징 사이에 있다.
정기여객선이 창저우(常州)[46]의 교외를 달려 죽리파竹籬琶를 경과할 때, 적 괴뢰부대는 강 입구에서 여객의 ‘양민증’을 검사하였고, 검사가 끝나자 배는 바로 죽리파 외곽으로 달려갔다. 죽리파의 외곽은 ‘유격대 지역’이자 함락지역의 완충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격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배위에는 몇 명의 황색 군복을 입은 괴뢰 군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호랑이 가죽’(군복을 가리킨다)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을 입었다. 이것은 확실히 유격대를 만나기 두려워서 한 준비 행동이었다.[47]
당시 중국전선에서는 일본제국육군 뿐만 아니라 왕징웨이 군대와 토비[48] 신사군과 팔로군같은 중국 공산당 부대가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혼전지역에서 군복과 계급장 각종 휘장을 입고 다닌다는건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일이었다. 중국 민중들에게는 군복이 호랑이만큼 무서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간복장으로 총을 은닉하고 다니는게 훨씬 안전한 상황이라 보면 된다.
이러한 군복색의 차이점 때문에 광복군 제 3지대에서는 화평건국군 또는 일본군 복장을 하고 그대로 귀순을 했다가[49] 중국 유격대에 오인(誤認)되어 애매하게 죽음을 당한 무명의 젊은 징모대상귀순자들도 많았다.[50]
제 2지대 이준승지사의 인터뷰를 확인해보자
이현희 : 군화가 없었나요?
이준승 : 그럼, 군화가 어디 있어요? 짚신도 우리나라 짚신같은 형태가 아니고 아주 간단한 짚신입니다. 발만 어떻게 얾어매었으니깐요. 그때 우리가 신고 간 것이 구두였는데, 빼앗기지 않았으므로 그냥 신고 가다가 발이 부르텄죠[51]
이준승 : 그럼, 군화가 어디 있어요? 짚신도 우리나라 짚신같은 형태가 아니고 아주 간단한 짚신입니다. 발만 어떻게 얾어매었으니깐요. 그때 우리가 신고 간 것이 구두였는데, 빼앗기지 않았으므로 그냥 신고 가다가 발이 부르텄죠[51]
중앙군의 사정도 이러하니, 지방군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었으며, 중국 각지에 산재한 전군(全軍)에 통일된 복제(服制)를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광복군 군복 또한 청색이었다.
아직 저녁시간까지 목욕을 할 만한 시간이 있어 근방 중국 목욕탕으로 전원이 안내되었다. 라오허커우를 떠난 후 첫 목욕 기분과, 목욕 후 마침 광복군 총사령부로부터 광복군의 새 군복이 지급되어 산뜻하게 새 옷을 갈아입은 기분은 날 것같이 상쾌했다.
이가 득실거리는 청색 군복, 너덜너덜 찢기고 넝마처럼 해진 것[52]을 몇 개월 만에 벗어버리고 새 청색 군복으로 바꿔 입으니모두 사람마저 변한 듯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분 속에 조국의 군대가 다된 듯이 흐뭇해졌다.[53]
이가 득실거리는 청색 군복, 너덜너덜 찢기고 넝마처럼 해진 것[52]을 몇 개월 만에 벗어버리고 새 청색 군복으로 바꿔 입으니모두 사람마저 변한 듯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분 속에 조국의 군대가 다된 듯이 흐뭇해졌다.[53]
색깔도 파란색, 녹색[54], 하얀색[55], 심회색, 검은색[56] 등 다양했다.[57] 민간복장으로 초모공작할때는 양복, 중국농부옷[58], 중국약재상옷[59] 등 아주 다양했었다. 왕징웨이 난징 국민정부의 화평건국군 군복을 입었다.[60] 일본 패전 이후에는 미군복(제 2지대, 제 3지대)을 착용하거나 혼용 착용한 경우가 많았다.
제 6징모분처장(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흰색 군복. |
다만, 항전시기의 한국광복군이 주로 했던 일은 전투[61]보다 초모공작(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한국인 학도병을 빼내오거나 일본군 점령지구에 있는 한국 교민들을 광복군으로 빼내오는 일을 말한다.) 시기에 과연 완전군장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든다. [62]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의 장남 조인제 지사의 인터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현희 : 그 당시 선생님께서 광복군에 들어가서 활동하셨던 것을 몇가지 요약해주셨으면 합니다.
조인제 :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느냐 이겁니까?
이현희 : 그렇죠. 활동, 말하자면 독립운동인데 막연하게 독립운동보다도 구체적으로 무엇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조인제 : 그때 독립운동은 무장 독립군을 양성해가지고 교전단체로서 인정을 받아 일본과 전쟁하는 것이지요. 목적은 그것인데 제 1단계의 선행 사업은 사람을 모집하는 거에요.
이현희 : 초모공작이겠죠?
조인제 : 초모공작, 맞았어요. 왜놈의 정보를 원만히 수집하려면 그 치하에 들어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것이 광복군의 주요역할이에요. 광복군도 군대인데 초모나 정보공작으로 그치느냐 하지만, 임시정부에서 그 이상을 하면 국제법에 걸려요.
조인제 :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느냐 이겁니까?
이현희 : 그렇죠. 활동, 말하자면 독립운동인데 막연하게 독립운동보다도 구체적으로 무엇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조인제 : 그때 독립운동은 무장 독립군을 양성해가지고 교전단체로서 인정을 받아 일본과 전쟁하는 것이지요. 목적은 그것인데 제 1단계의 선행 사업은 사람을 모집하는 거에요.
이현희 : 초모공작이겠죠?
조인제 : 초모공작, 맞았어요. 왜놈의 정보를 원만히 수집하려면 그 치하에 들어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것이 광복군의 주요역할이에요. 광복군도 군대인데 초모나 정보공작으로 그치느냐 하지만, 임시정부에서 그 이상을 하면 국제법에 걸려요.
조선의용대 여군 사진, 중국 공군에서 쓰던 개리슨모로 소련 여군이 쓰던 M81 사이드캡과 동일하다. |
다만, 소련 모자와 다른 점은 무명천에 천연염색이다. |
치자(노란색)+청대(쪽 염색, 청색)염색을 해줘야 녹색이 나온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당시의 사진 |
1943년 한국광복군 성립 3주년 기념식 후의 촬영사진. |
장호강 : 예. 리황에 가서, 그때 갈 때 윤창호 동지와 둘이 갔습니다. 처음에 저는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에 거기 있던 고참을 안내를 받아가지고, 공문을 받아가지고 갔죠. 윤창호라고 우리보다 선뱁니다. 먼저 들어간 동진데, 지리를 알더만요. 그 사람하고 같이 갔습니다. 도보로. 사흘을 걸려서 리황에 가서 그 다음에 총사령부에 밤에 가서 사흘만에 리황에 도착해서 그 날은 밤이 되었길래 그 날은 자고 그 다음날 들어 갔어요. 6월 11일인가, 12일 경인데, 아이구 참 ……
Q : 됐습니다. 날짜를 모르시면 그냥 넘어가시죠.
장호강 : 들어가서 작전처 갔더니 중령이 안내를 하더만. 작전처의 주임하고, 대령이죠. 우리가 광복군에서 왔다. 쭉 브리핑을 현황을 보고드리고 ……
Q : 그렇게 하셨다고 했죠. 현황 보고 드린 내용이, 우리 부대에 병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일본군과 같이 싸워야 되지 않겠느냐. 도와 달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러셨죠.
장호강 : 그런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왜적과 싸울려면 무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약 300명이 들어와 있다. 그런데 무기를 좀 빌려줄 수 없겠느냐? 했더니, 에, 처음에 저희가 200정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그것도 많다는거죠. 이거 그렇게 안 된다. 100정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오너라. 내일 또 오너라 그래서 여러 가지 브리핑하고 공문을 갖다 바치고, 그 다음에 다른 얘기 쭉 하다가, 그 다음에 이제 다음날 갔죠. 갔더니 100정 밖에 못주겠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고, 또 전방에 연락을 했더니, 전방에 리황 총사령부에는 무기가 없고, 전방부대에 가야만 있다. 임천에 가면, 전방지휘소에 가서 산하 부대 어느 사단에서 타도록 해라.
Q : 아마도 무기고가 그 쪽에 있고, 사령부에는 없었기 때문이겠죠.
장호강 : 그래서 공문을 써다오. 그래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또 그 다음날 떠나서 임천으로 걸어서, 그것도 사흘 걸려서 갔습니다. 가서 200자루 달라고 이야기 하니까 안 된다고 그래, 하하. 그래 갔더니 또 사단사령부로 가라. 자기네 전방지휘소에는 무기가 없다. 가까이 있는 사단에 가라. 사단에 갔더니, 사단장이 부양에 우리 광복군에 왔다 간, 좀 얼굴이 익은 사람이었어요.
Q :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군요.
장호강 : 안면이 있는 분이었어요, 류 준장이라고. 갔더니 아주 대우를 잘 해줘요. 점심을 먹이고 지시해서 좋은 총을 골라서 100정 골라서 주라고. 골라 줄테니까 내일 와서 받아 가라. 그리고 자기네 사단사령부 안에서 자라. 그래서 우리 둘이서 거기서 대접을 받고, 밤에 또 좋은 음식 주어서 먹고, 그 다음날 총을 타가지고 갔죠. 그런데 둘이서 가져 올 수 없잖아요.
Q : 그렇죠. 100정이나 되는 총이니……
장호강 : 마침 거기가 강이 흘러내려 가고 있어요. 황하의 지륜데, 지류가 흘러서 우리 부양으로 가는 조그마한 강이 있습니다. 마침 그 부대에서 배를 구해주고, 중국 배를, 거기서 자기들이 사병을 시켜서 (총을) 다 실어주고 부양까지 싣고 왔습니다. 부양에 와서, 부양에 우리 광복군 연락처가 있거든요. 연락처에서 연락을 해가지고, 우리 동지들이 나와 가지고 총 100자루를 인수해 가지고, 마차를 구해가지고, 싣고 리오자이(劉寨), 그때는 우리 3지대가 이동을 해서 리오자이라는 데 이동해 있었어요. 여기에 우리 3지대 본부가 위치했습니다. 거기에 우리 3지대 본부가 이동해 갔습니다. 처음에 여러 곳에 이동하다가 인원이 점점 불어지니까 이거 안되겠다 넓은 지방 지역을 달라 해가지고. 그것도 중국 현정부와 교섭해가지고 여기에 갔더니 넓어요. 큰 부락, 큰 마당이 있더만요. 광장이. 훈련장으로 겸해서, 거기서 3지대 본부가 훈련을 하게 되었죠.
Q : 그때 총의 종류가 무엇이었습니까? 총의 종류가.
장호강 : 종류가 보병 소총이었습니다. 중국제 보병총이라고. 저는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 99식은 아주 깨끗하고 가볍고, 그런데 이 중국 것은 좀 무겁습니다. 쇠도 좀 둔해 보이고. 그런 총이에요.
Q : 그 무게는 우리 M-1총 만 합니까?
장호강 : 우리 M-1총보다야 가볍지요. 일본총보다는 약간 무겁고, 미제 총보다는 가볍고.
Q : M-1총은 서양 사람들 체격에 맞도록 만들어서 우리들한테는 좀 무겁죠.
장호강 :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의 99총 비슷하죠. 동양 사람 체격에 맞게 해야 되니까.
Q : 실탄은 구해 오셨습니까?
장호강 : 실탄은 안 주더만요. .
Q : 안 줘요?
장호강 : 예, 안 줘요. 제가 전방의 사단장을 아니까 좀 어떻게 줄 수 없느냐 하니까, 절대 안 된대요. 그때까지는 (중국측에서 한국 광복군을) 믿지를 못했죠. 우리 광복군을 확실한 전우라고 믿지를 못했죠.[66]
Q : 됐습니다. 날짜를 모르시면 그냥 넘어가시죠.
장호강 : 들어가서 작전처 갔더니 중령이 안내를 하더만. 작전처의 주임하고, 대령이죠. 우리가 광복군에서 왔다. 쭉 브리핑을 현황을 보고드리고 ……
Q : 그렇게 하셨다고 했죠. 현황 보고 드린 내용이, 우리 부대에 병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일본군과 같이 싸워야 되지 않겠느냐. 도와 달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러셨죠.
장호강 : 그런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왜적과 싸울려면 무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약 300명이 들어와 있다. 그런데 무기를 좀 빌려줄 수 없겠느냐? 했더니, 에, 처음에 저희가 200정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그것도 많다는거죠. 이거 그렇게 안 된다. 100정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오너라. 내일 또 오너라 그래서 여러 가지 브리핑하고 공문을 갖다 바치고, 그 다음에 다른 얘기 쭉 하다가, 그 다음에 이제 다음날 갔죠. 갔더니 100정 밖에 못주겠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고, 또 전방에 연락을 했더니, 전방에 리황 총사령부에는 무기가 없고, 전방부대에 가야만 있다. 임천에 가면, 전방지휘소에 가서 산하 부대 어느 사단에서 타도록 해라.
Q : 아마도 무기고가 그 쪽에 있고, 사령부에는 없었기 때문이겠죠.
장호강 : 그래서 공문을 써다오. 그래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또 그 다음날 떠나서 임천으로 걸어서, 그것도 사흘 걸려서 갔습니다. 가서 200자루 달라고 이야기 하니까 안 된다고 그래, 하하. 그래 갔더니 또 사단사령부로 가라. 자기네 전방지휘소에는 무기가 없다. 가까이 있는 사단에 가라. 사단에 갔더니, 사단장이 부양에 우리 광복군에 왔다 간, 좀 얼굴이 익은 사람이었어요.
Q :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군요.
장호강 : 안면이 있는 분이었어요, 류 준장이라고. 갔더니 아주 대우를 잘 해줘요. 점심을 먹이고 지시해서 좋은 총을 골라서 100정 골라서 주라고. 골라 줄테니까 내일 와서 받아 가라. 그리고 자기네 사단사령부 안에서 자라. 그래서 우리 둘이서 거기서 대접을 받고, 밤에 또 좋은 음식 주어서 먹고, 그 다음날 총을 타가지고 갔죠. 그런데 둘이서 가져 올 수 없잖아요.
Q : 그렇죠. 100정이나 되는 총이니……
장호강 : 마침 거기가 강이 흘러내려 가고 있어요. 황하의 지륜데, 지류가 흘러서 우리 부양으로 가는 조그마한 강이 있습니다. 마침 그 부대에서 배를 구해주고, 중국 배를, 거기서 자기들이 사병을 시켜서 (총을) 다 실어주고 부양까지 싣고 왔습니다. 부양에 와서, 부양에 우리 광복군 연락처가 있거든요. 연락처에서 연락을 해가지고, 우리 동지들이 나와 가지고 총 100자루를 인수해 가지고, 마차를 구해가지고, 싣고 리오자이(劉寨), 그때는 우리 3지대가 이동을 해서 리오자이라는 데 이동해 있었어요. 여기에 우리 3지대 본부가 위치했습니다. 거기에 우리 3지대 본부가 이동해 갔습니다. 처음에 여러 곳에 이동하다가 인원이 점점 불어지니까 이거 안되겠다 넓은 지방 지역을 달라 해가지고. 그것도 중국 현정부와 교섭해가지고 여기에 갔더니 넓어요. 큰 부락, 큰 마당이 있더만요. 광장이. 훈련장으로 겸해서, 거기서 3지대 본부가 훈련을 하게 되었죠.
Q : 그때 총의 종류가 무엇이었습니까? 총의 종류가.
장호강 : 종류가 보병 소총이었습니다. 중국제 보병총이라고. 저는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 99식은 아주 깨끗하고 가볍고, 그런데 이 중국 것은 좀 무겁습니다. 쇠도 좀 둔해 보이고. 그런 총이에요.
Q : 그 무게는 우리 M-1총 만 합니까?
장호강 : 우리 M-1총보다야 가볍지요. 일본총보다는 약간 무겁고, 미제 총보다는 가볍고.
Q : M-1총은 서양 사람들 체격에 맞도록 만들어서 우리들한테는 좀 무겁죠.
장호강 :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의 99총 비슷하죠. 동양 사람 체격에 맞게 해야 되니까.
Q : 실탄은 구해 오셨습니까?
장호강 : 실탄은 안 주더만요. .
Q : 안 줘요?
장호강 : 예, 안 줘요. 제가 전방의 사단장을 아니까 좀 어떻게 줄 수 없느냐 하니까, 절대 안 된대요. 그때까지는 (중국측에서 한국 광복군을) 믿지를 못했죠. 우리 광복군을 확실한 전우라고 믿지를 못했죠.[66]
이현희 : 그 밖에 장비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김국주 : 장비 지원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지하 공작을 나갈 때 무기를 가진 동지도 있었습니다만, 사실 그 때 우리 광복군은 소총이나 기관총을 메고 일본군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연합국 측에게 우리 한국 민족은 독립 의지가 굳세고 독립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윤봉길 의사와 의거는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했고 그 때부터 중국 정부에서도 본격적인 지원을 한 것입니다. [67]
김국주 : 장비 지원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지하 공작을 나갈 때 무기를 가진 동지도 있었습니다만, 사실 그 때 우리 광복군은 소총이나 기관총을 메고 일본군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연합국 측에게 우리 한국 민족은 독립 의지가 굳세고 독립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윤봉길 의사와 의거는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했고 그 때부터 중국 정부에서도 본격적인 지원을 한 것입니다. [67]
2. 광복군 계급(국민혁명군 계급)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까지의 광복군은 국민혁명군 계급이었다. 광복군이 창설되기 이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김구와 김원봉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68] 바오딩군관학교[69] 뿐만 아니라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때부터 꾸이저우강무당학교 출신인 김홍일 장군, 윈난강무당 출신인 이준식 장군 등등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입교해서 훈련받고 있었다.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
우한분교
기수 | 년도 | 명단 |
3기 | 1925. 7∼1926. 1 | 이빈(李彬) · 이일태(李逸泰) · 차정신(車廷信)[70] · 장성철(張聖哲) [71] · 유철선(劉鐵仙) 이상 5명 |
4기 | 1926. 3∼1926. 10 | 강평국(姜平國) · 유원욱(柳元郁) · 박효삼(朴孝三)[72] · 박건웅(朴建雄)[73] · 최림(崔林, 김원봉金元鳳) [74] · 강인수(楊儉, 姜人壽) [75] · 전의창(田義昌) · 이우각(李愚慤) · 권준(權晙)[76] · 이집중(李集中) [77] · 왕자량(王子良) · 윤의진(尹義進) · 최영택(崔泳澤) · 김종(金鐘) [78] · 이종원(李鍾元) · 노일룡(盧一龍) · 이기환(李箕煥) · 오세진(吳世振) [79] · 김홍묵(金洪黙) · 백홍(白紅) · 노세방(勞世芳) · 박익제(朴益濟) · 문선재(文善在) · 노건(盧建) 이상 24명 |
5기 | 1926. 11∼1927. 8 | 신악(申岳)[80] · 안유재(安維才) · 장익(張翼) · 김호원(金浩元) · 장흥(張興)[81] 이상 5명 |
6기 | 1928. 4∼1929. 5 | 김정문(金貞文) · 김명산(金明山) · 김은제(金恩濟) · 이춘암(李春岩) · 최문용(崔文鏞) [82] · 오상선(吳尙善) · 노식(魯植) · 신석우(申碩雨) · 김근제(金槿濟)[83] 이상 9명 |
7기 | 이석(李石) | |
8기 | 이근호(李根浩) · 나월환(羅月煥)[84] | |
10기 | 왕중량 나태섭(王仲良, 羅泰燮)[85] · 고일명(高一鳴, 高時福)[86] · 왕형(王衡, 安椿生)[87] · 왕신호(王信虎) · 조동윤(趙東潤) · 노태준(盧泰俊, 李無雄)[88] · 김동수(金東洙)[89] · 한대원(韓大源) · 김고두(金高斗) · 왕자인(王子仁)[90] · 이의흥(李義興) · 김동일(金東一) · 진동명(陳東明) · 신계서(申繼瑞) · 진국동(陳國東, 金裕哲)[91] | |
11기 | 장병훈(張炳勳) · 조열광(趙烈光) [92] · 이지강(李志剛, 李相勳) [93] · 진낙삼(陳樂三) · 조황(曹晃, 千暻伊) · 최영빈(崔英賓) · 유장환(劉章煥) · 왕수의(王守義) · 유민(劉敏) · 최양성(崔陽成) · 김병화(金炳華)[94] · 이철중(李鐵重) · 이운산(李雲山, 張致文 · 李雲煥)[95] · 관건 김병일(關鍵, 黃載衍)[96] · 엽홍덕(葉鴻德) · 강지산(康志山, 蔣載福) · 이청산(李靑山, 金貞彩) · 오주국(吳柱國, 白贊基) · 이국화(李國華, 韓道源)[97] · 이철부(李鐵夫, 金世雄) · 김해석(金海石, 朴珍守 · 朴景一) · 서홍(徐洪) · 구양군 박기성(歐陽軍, 朴基成)[98] · 이현근(李炫瑾) [99] | |
12기 | 노복선(盧福善) [100] · 김용무(金用楙) [101] · 진경성 신송식 (陳敬誠, 申松植) [102] · 김태삼(金泰三) · 김철(金鐵) | |
15기 | 유해준(兪海濬) [103] | |
16기 | 이규학(李奎鶴) [104] · 김응삼 한도명(金應三, 韓道明)[105] | |
18기 | 송면수(宋冕秀) [106] · 왕영수(王永秀, 민영수閔泳秀) | |
19기 | 이윤장(李允章)[107] | |
20기 | 김중진(金重鎭) · 강홍모(姜弘模) [108] · 이건국(李建國) [109] · 장철부(張哲夫)[110] | |
21기 | 조동린(趙東麟) [111] | |
22기 | 김영훈(金英勳) · 박위택(朴胃澤) · 김현규(金現奎) · 박천마(朴天馬) · 이시엽(李時燁) · 김중달(金重達) · 김명규(金明奎) · 안창도(安昌道) · 오용필(吳用弼) · 정기엽(鄭基燁) · 장해덕(張海德) · 박윤호(朴允鎬) · 권필현(權必鉉) · 장정근(張定根) · 김정인(金正仁) · 안수성(安秀成) · 김시구(金是九) · 김치삼(金致三) · 이성만(李成滿) · 박성남(朴成男) · 허지수(許志秀) · 서삼철(徐三哲) · 이학서(李鶴瑞) · 김병철(金炳喆) · 김광진(金光進) · 문시욱(文時旭) · 이원곤(李元坤) · 김로(金露) · 김은석(金銀錫) · 강일영(康一永) · 이학률(李學律) · 조동희(趙東熙) · 백현일(白賢一) · 이시봉(李時奉) · 김대위(金大衛) · 김병선(金柄善) · 문창덕(文昌德) · 박재준(朴在俊) · 나태규(羅泰奎) · 한창섭(韓昌燮) · 최용산(崔龍山) · 김용호(金龍浩) · 문창흥(文昌興) · 김은령(金恩嶺) · 김백운(金白雲) · 김일건(金一鍵) · 배호원(裵豪元) · 오귀성(吳貴星) · 문인준(文仁俊) · 이원경(李元敬) · 양치호(楊致昊) |
우한분교
기수 | 년도 | 명단 |
5기 | 1927년 | 박시창(朴始昌)[112] · 진공목(陳公木) · 진갑수(陳甲秀) · 안동민(安東民) · 안자산(安自山) · 사검인(史劍仁) · 왕구(汪炬) · 관추(關秋) · 조국동(趙國棟) · 안동만(安東晩) · 송욱동(宋旭東)[113] · 김준(金俊) · 유광세(劉光世) · 김치정(金致廷)[114] · 이종(李鍾) 이상 정치과 유원도(柳源道) · 박태섭(朴泰燮) · 진용학(陳龍鶴) · 백규(白珪) · 이건(李建) · 최승연(崔承淵)[115] · 김희철(金熙喆) · 박우균(朴禹均)[116] · 이춘식(李春植) · 이벽파(李碧波, 이상 포병과) |
중국군벌에서 운영하던 군관학교 출신들이기 때문에 한국광복군 창설 초창기엔 최소한 소위 이상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와 광복군 문서를 보면 중국군의 계급을 유지하고 있었다. 구대장의 계급은 소교[117], 지대장은 상교[118]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면서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 1지대장 김원봉의 경우 소장과 상교 두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각 전구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 대원들은 각 지역에 설치된 중국군관학교 안에 한국광복군훈련반[119]이 있었다. 주로 제식훈련과 역사교육, 위문공연등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940년 광복군 창설 이후에도 각 전구 지역에서 세워진 중국군 부대에 간부훈련단이나 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세워서 모집된 한국인들을 장교로 육성하고 있었다. 해당 표를 참고.
전구 | 사령관 | 관할지역 | 관할 중국군 부대 | 사관학교 | 광복군 부대 | 책임부대장 |
1 | 후쫑난(호종남) | 허난성, 안휘성 북부 → 산시성 남부, 시안 | 국민혁명군 제 34 집단군 타이항산 유격대 정훈부 | 중앙군전시간부훈련단 제 4단 | 광복군 제 5지대(1942년 4월 이후) 광복군 제 2지대 | 나월환 → 송호성 → 이범석 |
2 | 옌시산(염석산) | 산서성 남부, 섬서성 북부 → 옌안 | 일본군 점령지구인 화북지대 | 조선의용군[120] 주둔 및 이동지역, 광복군 2, 3, 5지대 초모공작지역 | 김무정 | |
3 | 구주통(고축동) | 저장성, 푸젠성, 장쑤성, 안후이성 남부(상라오, 젠양, 난핑) | 국민혁명군 군사위원회 | 제 3전구 사령부 전시간부훈련단(상라오 소재) |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 이소민[121] |
3 | 구주통(고축동) | 저장성, 푸젠성, 장쑤성, 안후이성 남부(상라오, 젠양, 난핑) | 국민혁명군 중앙군 제 3전구 사령부 정치부 | 제 3전구 사령부 전시간부훈련단(상라오 소재)김형석교관 | 광복군 제 3징모분처[122] | 김문호[123] |
5 | 리쭝런(이종인) | 안후이성 서부, 후베이성 북부, 허난성 남부(라오하커우) | 국민혁명군 제 5전구 사령부 | 제 5전구 간부훈련단 특설 정공간부훈련반 | 광복군 제 1지대 1구대 | 김준[124] |
9 | 쉐웨(설악) | 후베이성 남부, 후난성, 장시성(창사, 이창) | 국민혁명군 제 31집단군 제 92군 제 21사단 121연대/122연대 | 조선의용대 제 1구대(창사 2차 전투참가)[125] → 일부 광복군 제 1지대 편입/일부 옌안으로 이동 | 박효삼[126] | |
9 | 쉐웨(설악) | 후베이성 남부, 후난성, 장시성(창사, 이창) | 국민혁명군 제 9전구사령부 정치부 주임 쉬종웨(徐中嶽) 중장 | 광복군 제 1지대 3구대(창사 3차, 4차 전투참가) | 이병곤(1945.2.구대장)최문용, 김귀선 | |
10 | 탕은보(당은백) | 안후이성(푸양) | 국민혁명군 제51군 위쒜중(우학충, 舊 동북군 제 1군단으로 만주에서 김학규와 구면) | 중앙군관학교(린촨) 제 10분교 한국광복군훈련반 | 광복군 제 3지대 | 백파 김학규 |
설령 군관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한국인은 문맹률이 95%였던 중국군에 비하면 상당히 고급인재였기 때문에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소교[127]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128]
계급장 패용여부
명령 및 편제상 편의로 인하여 서류상으로만 부여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계급장을 패용하지 않았다. 주로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만 계급장을 사용하였고, 그 외 작전지역 일선에서 활동하는 군인들은 계급장을 절대로 패용하지 않았다.
Q : 그때 지사님은 무슨 계급을 달고 있었습니까?
장호강 : 그때 우리 광복군은 계급 안 달고. 내용은 부관참모니까 중령급입니다. 부령급이지요. 부령. 그러나 그때는 계급은 안 달고. 중국 군대도 계급은 안 답디다. 왠고 하니 전쟁 때는 달면 도리어 사병과 (사령부) 안에는 달고 있었는데 최전방 나온 부대는 안 답디다. 왜 안다느냐 했더니 전쟁시에는 안 단다고 그래요. 광복군도 속으로 난 무슨 계급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표시를 하지 않고 동지, 같은 동지다 이거죠.
Q 부를 때도 ○○동지
장호강 : 절대 무슨 저 계급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대장 동지지, 구대장 동지고, 장호강 동지라 그러지, 절대 계급은 안 불렀어요.
장호강 : 그때 우리 광복군은 계급 안 달고. 내용은 부관참모니까 중령급입니다. 부령급이지요. 부령. 그러나 그때는 계급은 안 달고. 중국 군대도 계급은 안 답디다. 왠고 하니 전쟁 때는 달면 도리어 사병과 (사령부) 안에는 달고 있었는데 최전방 나온 부대는 안 답디다. 왜 안다느냐 했더니 전쟁시에는 안 단다고 그래요. 광복군도 속으로 난 무슨 계급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표시를 하지 않고 동지, 같은 동지다 이거죠.
Q 부를 때도 ○○동지
장호강 : 절대 무슨 저 계급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대장 동지지, 구대장 동지고, 장호강 동지라 그러지, 절대 계급은 안 불렀어요.
사병 계급장의 경우 주로 일본군에 있었던 한국교민들에게 패용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대부분은 소위 이상 장교 대우를 받았었다.[129]
3. 인면전구공작대
(오른쪽부터) 한지성 대장, 롤랜드 베이컨(Roland Bacon) 대위의 아내 펄 맥래(Pearl MacRae) 여사, 한지성 대장의 부인이자 안공근 차녀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인 안금생 여사.[130] |
부대장인 문응국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영국군복에 아무것도 달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이 항복하고 나서 단체사진 찍는데, 그래도 무궁화가 들어간 자체 디자인한 계급장을 달았다고 증언한다.
문응국 : 그래요. 안원생씨를 퇴원해라 해서 다시 캘커타로 와서 귀국 준비를 했는데, 내가 1945년 9월 6일 아침에 떠났어요. 한 3일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있어야 별 것 없지. 그 군복 다 가지고 올 수도 없고, 영국 군복인데 뭐, 계급장만 우리가 다르게 달았어요. 영국 계급장을 달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싫다. 그래 우리가 임시로 만들어 단 겁니다.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거든 그때까지.
이현희 :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었어요?
문응국 : 없었어요. 그 때 우리가 편지를 해서 빨리 계급장을 만들자 해서 무궁화로 만든 것이 그겁니다. 그래서 영국식을 많이 닮았어요.
이현희 :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었어요?
문응국 : 없었어요. 그 때 우리가 편지를 해서 빨리 계급장을 만들자 해서 무궁화로 만든 것이 그겁니다. 그래서 영국식을 많이 닮았어요.
국민혁명군 군복은 해외에서 모르고 주문을 하면 화평건국군 군복을 입는 경우가 많으므로 문헌을 고려한다면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파는 신사군, 팔로군이 입었다고 생각하는 청색 군복을 구입해서 부대마크만 때고 입는 방법도 있고 재현을 더 정확하게 하려면 린넨 11수 원단을 사서 맞춤의뢰하는게 좋다.
부록. 조지영[131]지사의 광복군의 제복과 계급장 도안(1945년 3월 작성)
광복군의 확군(擴軍) 시기(1945년 8월 15일~1946년~5월)
1945년 8월 18일,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미군과 비행기를 타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기 위해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일본군과의 대치 끝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미군복에도 광복군 관련 부착물이 없었다. |
1945년 9월, 한반도에 소련정과 미군정이 진주해온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망했고 대신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이내 묵살되고 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정식적인 정부 승인과 정식적인 군대로서 면모를 갖춰야 했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에 대결구도로 정식으로 입국하냐 문제로 싸우게 된다.[132]
공훈전자사료관 발급된 날짜가 대한민국 27년(1945년) 9월로 이미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난 후, 발급된 신분증으로 일본인 거주지에 한국인과 일본인을 분리하기 위한 신분증으로 보인다. 공훈록을 조회해보면 3.1운동한 1854년생 이시흥 지사만 공훈록에 있지 신분증상 공훈록의 광복군 이시흥은 없다. 이 신분증상의 이시흥은 애국지사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주소가 상하이인 것으로 보아 한국 교민에게 대원증을 나눠준 것으로 보인다. |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중국대륙에서 총성이 멈추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광복군 총사령부도 난징과 상하이에 주둔지를 옮겨서 활동한다. 항복하고 나오는 일본군에 속해 있었던 한국인 병사들을 분리해서 추려냈고 일본제국의 군대에 붙어먹었던 군속, 한국인 교민[133]들을 수용했었다. 항전시기의 한국광복군 대원[134]들은 대부분 영관급으로 진급한 경우가 많았고 공훈 인정을 받은 한국광복군 사병의 존재가 있다면 이 당시 일본군 군속에 속해있으면서 몰래 한국인 탈출을 도왔던 사람이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교민들과 군속, 일본군대에 있던 한국인들은 민족의식이 그렇게 없었으므로 귀국해서도 백범 김구를 도와 일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광복군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만 광복이 늦었다면 우리나라도 류쿠국 처럼 오키나와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았었다. 1940년대에는 일본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던 시절이었다.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병사들을 수용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광복군복은 중국군복[135], OSS훈련 수료 후 받는 미군복과 일본군 병사였던 일본군복, 화평건국군 군복 등이 혼재되어있었고 총 한 방 쏘지도 못했지만, 미군과 중국군이 빌려준 소화기와 같이 찍은 사진들이 이 시절의 사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식 야전모, 샘 브라운 벨트[136], 부츠를 착용하였다.
한국광복군 사병용 전투복[137] | |
한국광복군 장교용 전투복 | 한국광복군의 동계 피복 |
임시정부군의 동코트. 전반적으로 폴로코트와 흡사하다. |
독립군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경우 엄연히 복제 규정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중산복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국민당군의 복제와 흡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었으며, 모표나 몇가지 부분[138] 을 빼면 대부분 국민당군 군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국민당국 군복은 손문이 만든 중산복(인민복)과 별 차이가 없는 흡사한 형태였으며[139], 인민복은 중국 공산당군의 제복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뒤 국민들에게 보급된 국민복은 가쿠란을 비롯한,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던 제복을 모태로 만들어졌는데, 이 제복들은 손문이 만든 중산복의 모태가 된다. 이로인해 광복군 군복과 국민당군 군복과 인민군 군복과 일제강점기 국민복은 디테일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비슷해보이는 결과를 낳는다. 광복군 군복 고증자료
모자로는 정모와, 국민혁명군의 전투모에서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식 야전모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모는 비전투시에 착용하였고,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는 대부분의 상황(평시 또는 전시)에서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장구류에 관해서는, 비전투시에는 단화, 또는 구두를 신은 것으로 보이며, 전투시에는 각반을 착용한 후 단화를 신거나, 부츠를 신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탄약, 권총집을 거치 및 휴대하기 위해 샘 브라운 벨트를 착용한 대원들의 사진 자료가 많이 보인다.
장교용 계급장 | 사병용 계급장 |
계급장의 경우 사병은 '八' 모양의 기둥형 계급장을 왼쪽 상박 팔뚝에 부착하였다. 부사관용은 병사용과 달리 계급장 밑에 작은 별이 들어가 구분되었다. 장교는 좌우 대칭 등변사다리꼴에 윗면이 곡선 모양으로 되어 있는 탈부착식 견장형 계급장[141]을 어깨에 부착하였다. 이 견장형 계급장이 조선인민군 계급장과 같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사각형 형태의 조선인민군 계급장과는 달리 광복군의 장교용 계급장은 말 그대로 사다리꼴이다. 또한 계급체계의 기원도 다르다. 광복군의 견장은 임시정부 설립 당시 제정된 대한육군임시군제의 계급체계를 따와 표시를 한 것이지만, 인민군 견장은 소련의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견장이다. 계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한국광복군 항목을 참조.
창작물에서..
여명의 눈동자 13화, OSS훈련장면 |
하지만, 고증이 틀린 점이 있다면 장석윤은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OSS에서 한국인 스파이 침투 작전이었던 냅코 프로젝트훈련에 참가했으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에서는 중국-버마-인도 전구 OSS 101분견대(China-Burma-India Theater OSS Detachment 101) 소속으로 훈련받는 것으로 나온다.[142] 당연 한국광복군의 OSS중국전구(China Theater OSS) 독수리 작전과는 별개의 조직들이며 아직 한국광복군에 대한 영화나 사람들의 무관심때문인지 아니면 중국과의 관계를 묘사해야하는 부담감인지는 몰라도 드라마는 제대로 나온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존인물 장석윤 1950년 6~7월까지 내무부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을 잠시 지내며 드라마 마지막 장면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하는 장면(최대치와 재회장면)은 조선의용대출신의 차일혁 경무관과 컨셉을 섞었다고 볼 수 있다.
1.2.5.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갈라져 나온 군대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개편된 것이다. 대체적으로 청색의 국민혁명군 군복을 지급받았으며 청천백일기 휘장을 달고 다닌 것으로 보인다. 1941년까지는 국공합작시기였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신사군, 팔로군은 편제상 국민혁명군에 있었고 따라서 군복과 장비, 총기도 같은 것을 차용했다.〈한국 임시정부 군사진행계획-지도 요령〉
③ 현재의 광복군으로 중국군과 협동 작전하고 동북 방면(만주)의 한국인 의용군[143]으로 동북 방면의 중국 의용군과 협동 작전한다. 이상 양군이 균일하게 작전하면서 일면으로 그 조직을 확대하여 국군의 기간 부대를 이루게 한다.
③ 현재의 광복군으로 중국군과 협동 작전하고 동북 방면(만주)의 한국인 의용군[143]으로 동북 방면의 중국 의용군과 협동 작전한다. 이상 양군이 균일하게 작전하면서 일면으로 그 조직을 확대하여 국군의 기간 부대를 이루게 한다.
일부 광복군 대원들이 증언하기로는 한국광복군도 두 갈래로 나눠졌고 충칭 임시정부에 있었던 조선의용군도 광복군의 일원으로 보는 증언도 있다. 조선의용대에서 공산주의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이념의 이론에 대하여 그렇게 심오하게 구분을 지으려고 했진 않았을 것 같다. 실제로 한국인 외에도 중국인 대원과 일본인 대원[144]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서 한중일 국제혼성의용군에 가까웠다.
조선의용군의 모습. 이화림 회고록에 의하면 하얀색 군복을 받았다고 한다. |
조선의용군의 정치토비 숙청 기념사진. 하얀색, 파란색, 검정색 혼재되어있다. |
후기 독립운동역사에서 교전기록이 있고 전신인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의 두번째 부인 박차정은 부상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후신인 조선의용군 지휘관을 맡은 김무정조차 여기저기 총상자국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1941년 12월 후좌장 전투, 싱타이 전투가 있었고 1942년 5월, 스즈링 전투를 경험했다고 한다. 화북으로 이동[145]했을 때 100여명 수준이었던 조선의용군의 숫자는 광복 직전 당시에는 대략 700~1,000여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규모가 커지고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오면서 조선의용군은 점차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갔다.
충칭에 있었던 조선의용대 본부와는 거리상 문제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는데, 1941년 1월, 환남사변으로 장제스의 중앙군 제 3전구에서 벌어진 일로 신사군(新四軍) 병력 10만명을 집단학살하다시피 공격한 사건이다. 먼저 대규모 공격에 나선 쪽이 국민당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이 사건을 반동 선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공교롭게도 팔로군에 진입한 조선의용대가 그 소식을 들었고 팔로군을 따라서 군정권과 군령권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1945년 4월 18일자 중국공산당 문서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성원들을 팔로군 내로 끌어들여 ‘정규 편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용군은 김무정을 사령관, 박일우를 정치위원 겸 부사령관, 박효삼을 참모장 겸 부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의용군 사령부를 구성하였다.
조선혁명군정학교에 집결한 조선의용군. 1945년 9월 출발 직전에 찍은 사진 |
조선의용군이 직접 운영한 군복공장#
이화림, 정율성등 현재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위해서 조선의용군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한미관계에 있어서 [146]백선엽을 기념하듯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설명하려면 조선의용군을 기념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42년 5월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개편되면서 사실상 자유진영에 온 것이나 다름없으며, 안춘생 지사가 독립기념관 설립을 위해 대만에 방문했을때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황푸군관 4기 동기생들의 증언이 있었다고 한다.
1.3. 현대
1.3.1. 국방경비대 시절
1945년 8.15 해방 이후 미군정은 재조선 일본인들을 쫓아냈고[147] 그들의 조선 내 자산의 반출도 불허했다. 일본인 사업가와 관리자들이 자기네 나라로 철수하자 노동자나 지역 인민위원회가 공장과 사업체를 관리하였으나(공장 자주관리운동)[148] 그해 12월 6일에 미군정은 군정법령 33호를 공포해 일본인 재산을 귀속시킨 뒤 노동자 관리위원회를 와해시키고 자본가들을 관리인으로 임명해 관리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이승만 정권은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해서 대부분의 적산을 사기업에 귀속재산 불하하였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불투명했고 불하방법은 일반 경매나 비공개 입찰 방식이었다. 이때 남한에만 불하된 적산 기업은 2,700여개였으며[149] 1인당 1개 사업체 이상을 불하받을 수 없도록 했다.[150]
특히 대부분의 토지와 공장이 헐값에 인수해갔다. 현재 대한민국 재벌들의 상당수는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시대 혼란한 상황 속에서 주먹구구로 진행된 적산불하로 한몫 잡아서 기반을 다진 곳들이다.[151] 당시 귀속사업체의 불하에는 불하대상인 적산의 이해당사자를 우선으로 하고 적산매각대금의 약 2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선납입해야 하는 등의 기본조건이 달려 있었지만 정치인과 커넥션이 있던 기업들은 정치인과 정권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여 해당 적산의 매각대금규모를 대폭 낮추는식으로 속여 터무니 없는 헐값에 불하받거나 이해당사자가 전혀 아님에도 불하받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설령 이렇게까지 면직 방적 사업체가 있다하더라도 문제는 대부분 수력발전소, 화력발전소는 북한지역에 있다보니 한국전쟁 터지기 전에도 북한에 전기를 받아서 쓰던 시절이라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갈리가 없다. 공장에 설비가 있다하더라도 전기가 없으면 방직물을 뽑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원단은 공장에서 광목(큰 폭으로 만든 원단이란 뜻이다.)으로 만든다하더라도 문제는 옷으로 만드는 작업 자체가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염색하고 찍어내는 일은 1980년대 이후 산업화를 경험하고 나서 1990년대에 흔한 일이지 이 당시의 옷들은 대부분 양복점[152]에서 수제로 맞추어서 입었다. 가격 또한 비쌌다.[153][154]
중국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듯이 옷이라는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달리 말하면 제대로 옷을 만들어 입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복을 받거나 경성방직[155], 조선방직[156]이 한국전쟁때 무명(린넨) 소재의 군복을 찍어내서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157]
따라서 국방경비대 초창기 시절에는 물자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옛 일본군 군복을 재활용했고 미군정에게서 받은 군복을 혼착해서 입었다. 정모에 있던 일본 육군 마크를 대한민국 육군 마크로 바꾸는 등 일본군 부착물을 대부분 한국군 부착물로 바꿔버리는 등 차별화를 꾀했다.
당연하게도 당시 인적 자원 측면에서 보다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158] 숫자보다 일본군 출신들이 많았고 미군정이 1945년 9월에 조선에 진주해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나온 총기나 군복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편 이를 알 리가 없는 한 일뽕이 일본군 전투복 입고 국방경비대 군복이라 우기는 병크가 일어나고 마니...
왼쪽은 국방경비대 사병용, 오른쪽은 참모용이다. 또 한국전쟁 개전 이전까지는 사병들도 정복을 지급 받았었다. #
이후 점차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미군복과 일본군복이 섞인 양상이 나오게 되는데, 하의에는 기존 일본군 피복을 활용한 당꼬바지(승마바지)와 부츠(사병들은 권각반+단화)를[159], 상의로는 미군에게 공여받은 아이크 자켓을 착용하는 식.
물론 춘추•동계시엔 미군식으로 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형식을 사용했다. 겉에 입는 아이크 자켓은 전투•근무복과 정복의 역할을 모두 했는데, 사실 이는 미군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또한 허리엔 일본식 소총병용 장구류를 착용하고 있는데, 즉 이게 전투복장 상태인 것이다. 반면에 근무복이나 정복으로 쓰일 땐 일본군 장교용 샘브라운 벨트를 찼다.
겨울엔 미군식 멜튼재질 오버코트를 입었다.
1.3.2. 대한민국 국군
1.3.2.1. 창군이후~6.25전쟁
남군용 동정복 | 여군용 동정복 |
하정복을 착용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 백선엽 장군 동정복 |
그러나 이러한 미군복의 수량은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였다. 미국이 원조해 준 전투복은 전체 소요의 30% 밖에 충당하지 못했다. 나머지 소요를 충족한 것은 "광목 작업복"[165]이라고 불리는 국산 전투복이였다. 디자인은 M43 전투복 혹은 울 근무복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광목 작업복이라는 이름처럼 무명(린넨) 원단으로 제작하였는데, 문제는 이 광목이 군복용으로 쓰기엔 너무 얇았고 활동적인 군인들의 군복엔 적합하지 않았다. 당연히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보면 군복이 찢어지기 일수였고 염색도 저질이라 몇번 세탁하면 물이 다 빠져서 하얗게 변해벼렀다고 한다.[166]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지만 6.25 이후 국내에서 제대로 된 전투복 원단을 생산할 때까지 계속 생산된 피복이다.
KLO같은 정보부대는 무장친위대의 오크리프 위장패턴 전투복을 입었다고 한다. 제일 오른쪽에 서있는 대원을 보면 왼쪽 팔뚝에 붙은 나치 독수리 휘장까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게 보인다.[167]
파카로는 M1941이 가장 널리 쓰였다. 상술한 울코트가 너무 무겁고 불편해서 나온 물건으로 면으로 만들어 비교적 가벼워서 큰 인기를 얻었다. 스키파카보다는 트렌치코트나 야전상의에 가깝게 생긴 디자인이다. 가장 널리 쓰였으며 역시 색상과 무늬만 바꿔 현역으로 뛰고 계신 피복 되시겠다. 장진호 전투 때 미 해병대가 이걸 입고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M1941보단 나중에 나온 물건으로 M1951이라는 스키파카도 있는데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아오시마 슌사쿠가 입고 나와서 유명해졌으며, 일명 아오시마 코트란 이름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아이템. 안감을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당시 현역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정전 이후 생산이 되지 않는 아이템이다.
앞서 말했듯 중공군 방한복이나 소련군의 영향을 받은 북한군 방한복과 너무 유사한 디자인이라 피아식별에 애로가 있었다.[169] 예를 들어 이 사진은 중공군 포로를 수색하는 터키군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진 속 병사들은 사실 누비방한복을 입은 국군 병사들으로 중공군으로 오인되어 잡힌 것이다. 그래서 종전 이후 빠르게 자취를 감추게 된다.
1.3.2.2. 휴전 이후~베트남 전쟁
휴전 이후에 쓰인 전투복은 그 이전까지 쓰이던 HBT를 1973년까지 계속 사용하게 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M1951 필드캡에서 리지웨이캡으로 바뀐 것이 큰 특징이다. 상세한 것은 전투모 문서 참고.
이때의 정복 색상도 흑갈색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건 의외로 흑색의 동예복일 가능성도 있다.
육군특수전사령부의 전신인 제1공수특전단의 경우 초창기인 1958년~1960년까지는 일반 카키색 전투복을 입었다가, 1961년~1963년 동안에는 덕헌터 패턴(58패턴 덕헌터)의 위장 커버올(이천 특수전사령부 역사관에서는 '원피스형 특전복' 이라는 이름으로 분류)을 민무늬 작업복과 함께 입었다.
해병대는 작업복이라고 하는 민무늬 전투복을 착용하였다.
해병대 완전무장 구보사진은 22대대 사진이다.
일반 민무늬 전투복이랑 다른점은 원단이 회색톤이 도는 쑥색이며 손목을 조절할 수가 있고 단추가 숨김식이라는 점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육군 등등에서는 리프철모피를 사용했지만 해병대는 덕헌터, 큰무늬 철모피를 사용해서 다른점을 볼수가 있다.
이 민무늬 작업복은 해병대가 60년대 부터 90년대 구형 3군통합복을 입기 전까지 계속 착용했다.
1.3.2.3. 베트남 전쟁 및 이후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대한민국 국군이 월남에 파병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HBT가 너무 덥다는 의견이 지적되면서 더운 인도차이나 기후에 맞춘 정글복이 나오게 된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나오는 특유의 후줄근한 전투복이 이것.
이때 육군 파병부대는 상술한 정글복을 입었지만 월남에 파병한 해병대 청룡부대는 한국형 덕헌터 패턴의 전투복을 입었다.[170]
특전사는 1961년~1963년까지는 민무늬 전투복 위에 덕헌터 패턴(58패턴 덕헌터) 위장 커버올을 겹쳐 입었고, 베트남 파병때에는 덕헌터(58패턴)[171], ERDL, 타이거스트라이프 등 현지에서 사제로 조달한 다양한 전투복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1964년 이후에는 덕헌터 패턴의 조약돌 무늬를 일그러뜨린 일명 '충정복' 을 입었는데 64년부터 71년까지는 4포켓 상의였다가 72년부터 2포켓으로 바뀌었다. 이 패턴의 전투복은 이라크, 에티오피아 등 중동, 아프리카 국가에도 수출되었으며, 그래서 서구권 밀덕들에게는 'noodle pattern camo'로 알려져있다. 특징으로는 바지 밑단 양옆에 지퍼가 달려있어서 고무링을 할필요가 없었는데, 실제 착용예를 보면 대부분 고무링을 차고 있다. 이러한 디자인은 초창기 공수특전단에서 착용하던 원피스 위장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충정복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특전사가 착용하고 온갖 말 못할 범죄와 패악질을 저지른 역사 때문에 매우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천의 특전사 사령부 역사관에서도 충정복(1972년~1981년 형)을 충정복이라 부르지 않고 개구리색상 특전복 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얼버무려 부르고 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쯤되면 사실상 특전사에서도 충정복은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복장으로 흑역사 취급받은 것이다.[172][173]
여담으로 당시 특전사에서 군생활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5.18 이후에도 충정복은 물량이 많이 남아 있었던 나머지 충정복은 공수교육생 훈련용 혹은 생존 훈련장 훈련용 등 대민 접촉이 없는 훈련 때에 입는 훈련복(즉 CS복) 용도로 사용하는 식으로 소모되었고, 대민 접촉이 많은 부대의 부대원들이나 훈련·외출·외박 나가는 부대원들은 이미지 때문에 착용을 자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고 한다.
특전사 외에도 1970년대~1980년대 기갑병과 역시 충정복을 지급받았는데, 전차 승무원을 위한 충정복 패턴 야전점퍼, 충정복 패턴 원피스형 승무원복 등을 지급 받았다. 또한 1979년 8월의 민방위 훈련을 담은 대한뉴스 제1253 호-수도권 민방위 훈련 동영상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 기갑병과 BGM-71 TOW 운용병들이 일반형 충정복을 입은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충정복은 무릎덮댐, 엉덩이덮댐, 팔꿈치덮댐 등 실용적이었다.(특이점으로 발목부근 지퍼가 있다.) 이후에는 무릎덮댐 등이 생략이 되었다.
70년대 중반~후반동안 잠시 해병대와 UDT 등 해군쪽 부대에서 착용한 레오파드 위장복이다.
당시에 조선의 관모인 사모에서 영감을 얻은 반깡통모도 처음 나왔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어 위세를 부리면서 대통령경호실 및 배속된 군 병력들에게 독자적인 정복을 지급하였다. 기본 디자인은 육군 장교 정복과 같지만 부착물을 다르게 하고 샘 브라운 벨트를 찼는데 샘 브라운 벨트 때문에 나치 친위대를 모방했다는 헛소문이 났을 정도.[174]
또한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 병력에게는 수도 서울과 대통령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주고 거북선을 만드신 충무공 정신을 본받아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로 거북 등껍질 무늬가 새겨진 유신복을 지급하였다. 이 패턴은 시가지를 무대로 전투를 벌이는 수경사의 특성에 맞춰서 제작되었는데, 이런 패턴은 위장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눈에 혼란을 주기 위함인 듯 하다. 일각에서는 적의 시야에 혼란을 주어서, 부대의 인원수를 파악할 수 없게 하기위해서라고도 한다. 유신복은 오로지 수경사에만 지급되었고, 그 이외의 국군의 그 어떤 부대에도 지급되지 않았다.
1973년 베트남전이 끝나갈 때쯤 국군은 새로운 전투복을 내놓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전투복에 견장대가 생기게 된다. 일반 병력에게는 충정복 등 위장복을 쓰지 않고 민무늬 전투복을 계속 지급한 것은 1970년대까지 유럽이나 미국도 그랬듯이 위장복은 특수부대의 상징이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위장무늬 전투복이 마냥 민무늬 전투복의 상위호환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전쟁할 때는 위장무늬가 확실히 월등하지만, 군인이 전쟁만 하는 기계가 아니란 걸 명심하자. 군인들도 사람이고, 휴가나 외박, 혹은 행사 땐 분명 전투복 말고 정복같은 옷이 필요하다. 이때 민무늬 전투복이 빛을 발휘하는데, 민무늬 전투복의 디자인은 당시 육군의 근무복 디자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고, 무엇보다 요란한 위장무늬가 없어서 단정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즉 이때엔 그냥 전투복을 잘 다려 입으면 그걸 병사용 정복으로 쓸 수 있었다. 물론 결국 일반 병력도 위장무늬를 채택하면서 이건 옛말이 되지만...
그 때문인지 민무늬 시절의 한국군은 근무복을 지급받는 육군 병들이 겨울철 야상을 걸칠 수 있도록 규정했었다. 본래 항공점퍼 형식의 겉옷은 간부에게만 지급하던 물건이기에 근무복으 입는 육군 병들은 야상으로 동계피복을 겸하게 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런대로 봐줄만 했었겠지만 문제는 얼룩무늬 전투복이 보급되면서 시작되었다. 보급품이 바뀌는데 규정은 그대로라 00년대 즈음에 이르러서는 근무복을 입는 육군 병들이 동절기에 얼룩무늬 야상을 근무복 위에 입고 근무 혹은 휴가외출을 나가는 참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 평소 병 복지나 대우에 관심 없던 높으신 분들 보기에도 정말 아니다 싶었는지 가급적 간부 동잠바를 구해다 입게 하거나 정 안되면 겨울철 한정으로 다른 야전부대처럼 전투복을 입고 나가도록 지시했다. 결국 현재에 이르러서는 근무복을 착용코 근무하는 육군 병들도 항공점퍼를 보급 받을 수 있게 규정을 변경했다. 현 대한민국의 드레스코드 상으로는 전투복도 그냥 경조사용 예복으로 쓸 수 있긴 하지만, 다들 단정하게 입고 있는데 혼자 요란한 무늬의 전투복을 입고 있는 탓에 위화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175]
그리고 과거 위장무늬의 대세였던 덕헌터나 우드랜드의 경우, 수풀 속에 은폐했을 경우 민무늬보다 월등한 위장력을 보였음에도 그 특유의 화려한 디자인 때문에 탁 트인 개활지에선 오히려 민무늬보다 더 눈에 띄는 문제가 있었다.[176] 물론 당시에도 일반 병력들의 위장과 은폐를 중시하긴 했지만, 항상 숨어서 움직이는 특수부대보단 아무래도 개활지에서 횡대 대형으로 움직이거나 돌격할 일이 많은 일반 병력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따라 오히려 민무늬가 효율적일 수 있다. 당장 이스라엘군과 오스트리아군은 특수부대에 위장무늬를 지급하고 일반 야전부대에는 민무늬를 지급하는 나라의 대표격이며 탁 트인 초원이 많은 곳에서 활동하는 러시아군도 민무늬나 다름 없어 보이는 디지털 플로라 전투복을 사용 중이다.
이 당시의 계급장은 노란색이었고, 이는 우드랜드 패턴 전투복으로 바뀐 뒤에도 이어져서 1996년까지 이어진다. 자세한 건 후술.
다만 이 당시 병역의무를 마치면 지금의 전역복 비슷하게 '예비군전투복'이라는 명칭의 위장복을 딱 한 벌 지급했다. 사진은 이 당시 예비군들의 모습. 현역에 비해 모든 장비가 뒤떨어지는 당시 예비군이지만 전투복만은 현역보다 더 나았던 셈이다. 하지만 아래에 나오는 '김일성 만세' 사건 때문에 1990년도에 폐지되고 현역때 전투복을 전역복으로 주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1.3.2.4. 제5공화국 시절
전투모의 경우 전투모가 반깡통모에서 야구모자로 바뀌었다는 점 외엔 큰 차이가 없다.특수부대의 위장복은 미군의 영향을 받아 교체되었다.
해군 정보부대에서 사용한 타이거 스트라이프 패턴 위장복이다. 해군 정보부대는 밑에 DPM 유사패턴 외 해병대 벽돌무늬 위장복, 특전사의 충정복, UDT의 해마복등등을 착용하기도 했다.
80년대 당시 정보부대에서 사용한 위장복이다. 사용한 붓으로 그은듯한 DPM위장패턴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특이하게 영국위장패턴 스타일에다가 위장패턴 종류만 조금씩 다른게 3~4가지가 있다.
파일:독사복항공잠바.jpg
특전사의 경우는 1980년대 초반에 충정복을 폐지하고, 미군 우드랜드의 영향을 받은 '독사복'을 도입하여 3군 통합 위장복 도입 때까지 사용하였다. 참고로 이 독사복 위장패턴은 3군 통합 위장복에 비해 많이 진하고 어둡다. 무릎 덮댐, 엉덩이 덮댐등등이 생략이 되었다.
UDT의 경우는 미군 ERDL 위장복 패턴을 변형한 '해마복'을 사용하였다. 위장패턴의 느낌이 약간 흐릿하다. 특전사의 독사복이 정식 인가된 위장복인 것과 달리 해마복은 착용이 묵인된 부대피복이었다. 특이하게 전투복 스타일이 정글 퍼티그 스타일이다.
전투복 디자인은 허벅지 부근에 담배주머니가 있는것도 있고 건빵주머니가 없는것도있고 담배주머니가 없는등등 전투복 디자인이 은근 다양했다. 이 전투복은 1994년 우드랜드 위장으로 바뀐 뒤에도 꽤 오래 살아남아 있다가 2000년대 들어 서서히 사라졌고, 2010년대에 디지털 위장으로 바뀌면서 해병대만의 위장무늬 전투복이 생기자 없어졌다. 2000년에 이에 대해 비판한 딴지일보의 기사가 있다. 여담으로 1980년대까지는 UDT/SEAL 및 UDU에서도 이 옷을 위장복으로 채택했었다.
대통령경호실 배속 병력은 미군 전투복처럼 상의를 내어입고 상의 아랫부분과 바지 옆에 주머니가 추가된 '엘리트복'이라는 전투복이 지급되었다. 엘리트복은 디자인만 바뀐 채로 21세기에도 지급되고 있다.
1.3.2.5. 1990년~2011년
마침내 대한민국 국군은 1980년대부터 꾸준한 연구를 거듭해 온 결과, 1990년 마침내 한국형 우드랜드 패턴 통합위장무늬 전투복을 개발해내는 데에 성공한다.[177] 군 내외에서는 일명 '개구리 군복' 혹은 "얼룩무늬 전투복"이라는 별명으로도 많이 불려지는 군복이며 2010년대부터 구형 통합 전투복(얼룩무늬 전투복) 대신에 디지털 무늬 전투복이 보급되어 2011년부터 2014년 8월 이전까지 구형 통합 전투복과 혼용 기간이 있었고 이후 2014년 8월부터 현역의 경우 구형 통합 전투복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2014년 8월 이후 현역이 착용할 경우 단속 대상이 되었다. 단 유격 훈련 등의 목적으로 착용하는 구형 통합 전투복 기반의 CS복은 예외이고 구형 통합 전투복을 받은 2012년 이전 시기의 예비군 역시 예외이다.
이 전투복 도입 때부터 정식 명칭이 "전투복"으로 정해진다. 그 이전에는 "작업복"으로 불렸다.
위에서 4번째 사진처럼 초기형은 많이 어둡고 갈색은 거의 고동색이였고 초록색은 어두운 녹색이였다. 후기형은 많이 익숙한 밝은 국방색, 갈색으로 색깔이 개편, 또한 단추, 재질이 개량되었다.
초기형의 경우 상술한 민무늬 전투복 시대와 마찬가지로 계급장이 노란색이었으나,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지고서 노란색 계급장이 시인성이 높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후기형에선 검은색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기타 사항으론 특전복, 기습복[178], 해군 특전복 등은 위장무늬는 똑같지만 주머니 모양, 담배주머니 추가되는 등 디자인은 부대마다 차별화되어있었다.
공군 CCT, SART등등에서는 작전복으로 더 진한 패턴의 독사복을 위장복으로 사용했다.
상의는 5포켓이고 하의는 특전복과 비슷하지만 특이점으로 허벅지 부근에 작은 칼주머니가 있다. 이 피복은 최소 2000년대 후반까지 존재한것으로 보인다.
90년대 각 정보부대들이 정보사로 통합된 시기에 입던 군복. 우드랜드가 파란색, 회색 등으로 배열되어 도시형 위장무늬처럼 생겨먹어서 어반 우드랜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7년 특전사에 디지털 픽셀 군복이 보급되었다. 미 해병대의 MARPAT 위장무늬를 참조한 형태에 녹색과 흑색이 강조된 무늬를 지니고 있다.
정보사의 어반 디지털 전투복. 특전사가 2007년에 디지털 특전복을 보급했고 위 사진이 2008년이다. 국군이 얼룩무늬에서 디지털 무늬로 개발하던 때이니, 특전사보다 조금 빠르거나 비슷한 시기에 보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91년~03년까지 파병부대가 착용한 사막6색 "초코칩" 전투복이다. 초창기에는 미군처럼 4포켓+무릎덮댐등등 미군 전투복과 비슷하고 무늬가 약간 어두웠고 자갈돌무늬가 적었다.
상록수부대부터 국군 전투복처럼 2포켓으로 변경되고 다산, 이라크파병 초창기당시 위장무늬가 밝아지고 무늬가 많아졌지만 얼마지나지않아 사막4색으로 변경되었다.
02년초반~08후반까지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부대가 착용한 사막4색 전투복이다. 보다시피 한국군 통합4색을 사막4색으로 변경한것이다. 해외의 군인들이 카페오레 데저트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전투복은 후에 일부 유격대에서 CS복으로 사용되었다.
08년 후반까지 착용한뒤 사막4색을 픽셀화한 사막픽셀로 변경되었다.
1.3.2.6. 2011년~현재
지난 2007년, 육군 특전사에 국군 최초로 디지털 픽셀 전투복(특전복) 도입 이후, 2011년부터 육해공 통합 전투복을 보급하면서 국군의 전투복이 모두 디지털 패턴으로 바뀌게 된다.[179]2009년부터 JSA 경비대대,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등 일부 부대에서 시범적으로 특전사의 특전복을 도입하였고 2010년부터 일부 부대 인원만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시범 착용하였다.
디지털 패턴으로 바뀐 이유는 한반도 지형과 색상 분포 변화에 따른 위장 성능의 한계 발생과 야간투시장비의 발달 등으로 기존 얼룩무늬 전투복의 근적외선 반사율 범위의 효과가 떨어지면서 개발됐다.
육군만 군모가 베레모로 바뀌었지만 2020년부터는 차양형 전투모도 추가 보급한다. 다만 해공군과는 달리 제식 군모는 아니다.
육해공 구형 얼룩무늬 통합 전투복을 마지막으로 입었다 할 수 있는 세대(2010~2011년, 일부 2012~2013년 군번)[180]들은 이미 민방위에 진입한 상황이라 이제 예비군에 가도 볼 수 없을 것이며, 길에서 구형 전투복을 입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매우 드물 것이다.
디지털 군복 보급 초기에는 육군훈련소를 포함한 여러 부대에서 기초군사훈련, 유격 훈련 등의 각종 훈련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반납된 구형 통합 전투복을 CS복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부대마다 달라서 재활용으로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디지털 무늬 전투복 보급이 완벽하게 보급된 지금은 CS복도 구형 통합 전투복을 쓰는 신교대/훈련소는 없다. 시간이 너무나 흐르면서 상태가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육해공 통합 전투복 대신, 물결무늬 전투복이라는 별개의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입는다.
2014년부터 해군 특수전전단은 독자적인 특전복을 입는다.
2015년에 왼쪽 가슴 부분에 소속군 패치[181]와 오른쪽 팔에 태극기 패치[182]가 생겼다.
2018년부터 해군 해난구조전대도 다른 전투복을 입는다.
2021년부터 해군 함정 근무자들은 함상 전투복을 입는다.[183]
2. 분류
2.1. 군복
군인복제령에 의하면 군복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군모: 예모, 정모, 전투모, 특수모
- 제복
- 군화: 단화, 전투화, 특수화
- 계급장: 정장, 약장, 군모장, 견장, 수장
- 표지장: 모표, 휘장, 정근장, 완장, 상장, 명찰, 견식, 금장, 장성급 장교 표지 및 특수복에 다는 표지
- 예식도
- 특수군복
군인의 복장의 구분과 차림새는 원칙적으로 다음과 같다.
예장 | 정장 | 전투장 |
예모 | 정모 | 전투모 또는 특수모 |
예복(만찬 또는 연회에 참석하는 경우에는 만찬복을 착용한다) | 정복 | 전투복 또는 특수복 |
외투(겨울철로 한정한다) | ||
와이셔츠 및 넥타이 | ||
단화 | 전투화 또는 특수화 | |
배낭 및 개인장구 | ||
계급장 및 표지장 | ||
훈장·포장 및 기장 | ||
예식도(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
2.1.1. 현용 군복
2.2. 군복이 아닌 것
2.2.1. 활동복
자세한 내용은 활동복 문서 참고하십시오.2.2.2. 군용속옷
전적으로 남군의 것이므로 여군용은 남군용과 차이가 있다. 속옷하의는 과거 브레이브맨이라 불렸다. # 현재는 딱히 브랜드라고 할만한 건 없어 그냥 일반적으로 보급 팬티라고 지칭하지만, 속옷에 각 군별 영어 이니셜인 ROKA, ROKAF 등이 써있기에 직관적으로 로카 팬티, 로카프 팬티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육군의 경우 디지털 무늬 면티, 삼각팬티, ROKA 티셔츠, 드로즈 팬티, 사각 면팬티가 지급되고 있다. 공군은 2010년도 후반 기준 면티 면팬티 이외에도 기능성 디지털 티셔츠(속칭 디티)와 기능성 드로즈팬티(속칭 로카프팬티)도 4착씩 지급해준다.
육군 보급 드로즈 | 공군 보급 드로즈 |
2.2.3. 기타 집단
2.2.3.1. 사관생도
육/해/공군사관학교 생도 근무복 |
육사 근무복은 녹색 하의에 검은색 상의로, 이 사진에서 생도들 대부분이 근무복 위에 점퍼나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유독 한 생도만 동근무복만 입고 있어 튀어보이는 것이다. 스웨터를 입은 생도들의 근무복 옷깃을 잘 보면 그 생도와 마찬가지로 상의가 검은색임을 알 수 있다.
3사 생도의 경우 장교용 근무복과 동일한 근무복을 입는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육사 생도들도 장교용 근무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예복 |
해군사관학교 예복[185] |
공군사관학교 예복 |
육군3사관학교 예복 |
국군간호사관학교 예복 |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사관학교에는 제복이 존재한다.위에 것들 보다는 근대적 느낌이 풍기는데 대한제국 군복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 육해공사나 국간사의 경우는 4년, 육군3사관학교의 경우는 2년 동안 입게 되지만 일반적인 제복과 예복이 같이 지급된다. 보통 학과출장 때는 일반적인 제복을 입지만 각종 행사나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를 경우 예복을 입은 상태에서 행사에 참여한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정복은 구조가 특이하다.
- 상의가 단추가 아닌 지퍼식으로 되어 있다.[186] 그런데 진짜 특이한 이유가 뭐냐 하면 지퍼의 방향. 아래에서 위로 채우는 일반적인 지퍼상의와는 정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채우는 구조로 지퍼가 달려있다. 이유인 즉 생도제복을 츄리닝 상의처럼 지퍼를 반만 채워서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또한 지퍼를 옷 하단에서 결합할 때 필연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사관생도가 고개를 함부로 숙이면 안된다 하여 지퍼를 옷 상단에서 결합하도록 했다고 한다. 가입교 훈련 때 적어도 두 번은 듣는다.
- 바지에 앞주머니가 없다. 이유인 즉 입수보행을 막기 위해서이다.
철저하게 장교의 기본품위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옷이기 때문에 구조가 다른 일반적인 옷과 다르다.
반면에 해군사관생도의 평상 제복은 해당 군 장교 정복·근무복과 구조가 같고 부착물만 다르다. 예복은 3군 모두 구조가 동일하다.
생도 각자의 사이즈에 정확히 맞춰 제작했기 때문에 소위 임관 후에는 집에 가져가고 반납받지 않는다.[187]
2.2.3.2. 학군사관후보생
몇몇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군단의 제복은 단복이라고 한다.육군 학군사관후보생 단복
해군/해병대 학군사관후보생 단복
공군 학군사관후보생 단복.[188]
육군과 공군 학군사관후보생의 제복은 모자와[189] 와이셔츠의 색깔만 다를 뿐(육군 흰색, 공군 파란색) 구조나 디자인이 동일하고 해군과 해병대 학군사관후보생의 제복은 해군/해병대 장교의 정복, 약복을 그대로 카피했다.
이 단복은 졸업 후 임관할 때 반납하는 품목이 아니다.
2.2.3.3. 사회복무요원
사회복무요원은 기초군사훈련 3주 후 이등병 계급을 달고 사회로 배출되기 때문에, 훈련소 퇴소 시 새 전투복 1벌을 지급해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훈련 1~2주차에 바로 지급하고, 이것을 CS복과 달리 A급으로 구분해서 휴일용으로 입게 하기도 한다. 이유로는 종교행사 때 현역과 마주치게 되는데, 꿀리지 말라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는데, 반대로 정작 현역 훈련병들은 CS복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명찰 오바로크까지 되어 있는 사회복무요원 훈련병들 A급에 기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걸 입고 예비군훈련을 받으면 된다. 물론 훈련소를 수료한 사회복무요원이 예비군훈련을 받게 되는 것은 최소 1년 8개월 후이니 그 때 받은 그 군복이 맞지 않거나 어디에 짱박아 놨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개구리 예비군 마크도 나눠주는데 오바로크 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군복을 입고 전역하는 전역자와는 달리 훈련소 수료자는 군복을 입고 집으로 가지 않는다. 보통 3주 전에 입고 온 사복을 그대로 입고 가기 때문이다. 사실 훈련소 퇴소일 자정까지는 법적 신분 상 군인이기 때문에 입고 가도 상관은 없다. 단, 육군훈련소의 경우 부대 내 사병이 퇴소식 당일 계급장과 사단 마크 떼고 수료자들과 섞여 나갈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퇴소자들에게는 사복을 입게 한다. 게다가 군사경찰대가 우글거리는 터미널 같은 곳에서 개구리도 없고, 사단 오바로크도 없고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다니는 짓은 매우 귀찮은 사단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교관도 "너 군사경찰한테 잡혀서 훈련소로 다시 오고 싶으면 한번 전투복입고 집 가봐" 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육군훈련소 외에도 일부 지역방위사단의 경우 군복을 입은 채 수료식을 진행한 후 즉시 퇴소하는 경우가 있다. 12년도 11월 입대자들은 수료식 후 생활관에 복귀해서 30여 분을 기다려서야 개인 소지품을 넣어둔 가방을 받아 퇴소한 바 있다.
좀 특이한 예로 산림청 근무요원은 2017년 근무복 통일 전까지는 전용 리자드 패턴 전투복을 근무복으로 입고 다녔다.#[190] 국가정보원 근무 요원은 시티어반 패턴 전투복을 근무복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져 있다"인 이유는 기밀유지를 요하는 근무지 특성상 언제부터 도입했으며 그 이후에 교체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 2020년 기준으로 국정원에는 사회복무요원이 더 이상 배정되지 않는다.
2.2.3.3.1. 사회복무요원 제복
자세한 내용은 사회복무요원/유용한 정보 문서 참고하십시오.2.3. 군장
- 군장/대한민국 육군 참조
3. 기타
3.1. 앞가리개의 정체
전세계 군대의 전투복 중에서 현재까지 한국군만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채용하고 있는 의복 장식이다. 한국 군대에서는 춘추동에 전투복을 착용 시 앞가리개를 꼭 채워야 한다. 그리고 여름[191]인 6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는 더위를 이유로 앞가리개를 풀어야 한다.[192] 따라서 용도만 놓고 보면 마치 보온용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국방부의 설명에 따르면 위장 시 가슴 피부 노출을 막는 장치라고 한다.하지만 국방부 의도와는 다르게, 일부 부대에서는 지휘관이나 부대방침에 따라서 전시 전사자의 한에 넋을 기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193], 앞가리개 단추를 채우는 것을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앞가리개의 본래 정체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의 '가스 플랩(Gas flap)'이었다. 목부터 셔츠 하단까지 이어진 가스 플랩은 화학가스가 전투복 목과 단추 틈으로 침투하여 피부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도입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 OG-107 전투복의 세 번째 개량형부터는 제거되었다. 이는 화학신경 가스의 발전으로 인해, 더이상 전투복 수준의 방어복으론 가스를 방어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194]
그러나 한국전을 거치며 공여된 미군 전투복의 가스 플랩을 국군은 목을 가려주는 용도로 이해하였고, 그 결과 타셔츠 없을 때 쓰기좋은 앞가리개가 장착되었다.[195][196]
3.2. 사실 아무 때나 입을 수 없다.
군복 및 군용장구의 단속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역 후 예비군훈련 등을 제외하고는 전투복을 포함한 각종 군복이나 군장구류 등을 착용할 수 없다.1968년 1.21 사태와 같이 진짜 무장공비들이 자주 침투해서 보통 국군으로 위장을 하고 침투하고 오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경우 현용국군복을 입고 침투하기 때문에 함부로 현용군복을 입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다.[197]
우리군이 창군부터 지금까지 군인사칭으로 사기, 횡령, 공갈, 납치, 폭행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정권의 권력이 치솟을 때 군인들이 민간인들의 위에 서다보니 생기는 현상인데, 이런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공무원자격사칭죄외에도 군복 및 군용장구의 단속에 관한 법률이라는 처벌 조항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1949년 | 육군 소령이라 사칭하고 학생총연맹위원장이라고 정계요인의 집에 출입하는 사건 |
1952년 | 군인가족 상대로 수백만원 사기친 가짜육군대위 |
1954년 | 특무대원가장 미군수품 약탈사건 |
1962년 | 중앙정보부 이소령 사칭 사건 |
1968년 | 휴가병 돈 뜯어 상납하게 한 사건 |
1973년 | 가짜 수사원 갈취 사건 |
1984년 | 대령사칭해서 조경공사 교제비 횡령사건 승용차를 훔친 사건 |
1989년 | 군수사관을 사칭하여 여대생 납치 폭행사건 |
1990년 | 헌병사칭 휴가병에 금품갈취 사건 |
1991년 | 청와대 사칭 토지사기단 예비역 소령 구속 |
1992년 | 가짜 육군 중위 사기사건 |
1997년 | 장교사칭 총기탈취 사건 |
대충 추려보면 다음과 같으니 이런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2020년 들어 일부 군사 컨텐츠 유튜버가 디지털 전투복을 입고 촬영한 영상이 고발이 들어가 기소유예를 받는 경우가 생겼다. 직접 단속은 하지 않더라도 제3자의 고발이 들어오면 일단 수사해야 하는 게 원칙이고 또 군복을 마음대로 입었을 경우에는 거의 확실히 유죄에 해당하므로 기소유예를 피할 길은 거의 없으니 주의하자.
2023년 할로윈 때는 코스튬 목적으로 전투복을 입고 활보하다가 질서 유지 차원에서 투입된 경찰관들에게 적발돼 입건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전투화는 2021년을 기점으로 조금 애매해졌는데, 일부 차이점이 있는 사제 전투화의 중고 판매를 적발하여 기소유예 처리한 사례를 헌법재판소가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군인복제령에 나와 있는 전투화 관련 규정이 너무 포괄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판례가 생겼기 때문에 관련 규정이 수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확히는 법제상에 현용 한국군 및 동맹군인 미군 등의 전투복을 포함한 군복과, 이와 비슷하게 생긴 유사군복 및 유사군장구류를 이유없이 입고 다니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휴전국가이지 정전국가가 아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단속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사건에 HID대원들이 동원된 사건이 있었다. 북한군복(HID훈련복)입고 침투한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의 특작부대는 한국군이나 동맹국인 미군 전투복을 입고 침투하게 되어있다.[198] 전쟁이 일어난다면 군복단속법이 아니더라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1996년에 있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같은 사건이 없어서 그렇지 이 사건의 경우 북한승조원 중 북한군 전투원들은 세탁된 M16소총과 얼룩무늬의 한국군 전투복을 입고 침투해서 교전했었다.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이런 현실에 개선하려 노력하려면 방법은
1. 평화통일을 한다.
2. 정전협정에 서명.
3. 군부독재 또는 독재가 안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정전협정에 서명.
3. 군부독재 또는 독재가 안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3.3. 내게 맞는 군복 사이즈 찾기 - 군용 피복류 표기법
과거엔 전투복과 같은 군용 피복류 사이즈를 1호, 2호, 3호 식으로 1호부터 10호까지 분류하여 숫자가 클수록 작은 사이즈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피복류 국방규격'을 전면 개정하여 과거 1호, 2호식의 분류가 아니라 '90M160' 과 같이 새로운 분류로 규격을 전면 개정했다. 개정된 [국방규격]에는 피트(fit)성 분류에 따라 피복류의 표기를 다르게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피트성으로 분류된 전투복류와, 중피트성으로 분류된 야전상의만 서술한다.3.3.1. 전투복, 훈련복류 (고피트성)
고피트성인 전투복류는 상의는 '가슴둘레-사이즈-신장(키)'로 분류한다. 남군용 전투복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인 '90M160'의 경우 '가슴둘레 90cm - 중간사이즈 - 키 160대'라는 표식이다. 이전에는 '가슴둘레-성별[199]-신장(키)'였다.전투복 하의의 경우 '허리둘레-사이즈-신장(키)'로 분류한다. 남군용 전투복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인 '70M165'의 경우 '허리둘레 70cm (28인치) - 중간사이즈 - 키 165대'라는 표식인 셈이다. 이전에는 '허리둘레-성별[200]-신장(키)'였다.
남군 상·하의 공통으로 가운데 들어가는 사이즈는 S, M, L 3종류인데 상의는 팔길이에 따라, 하의는 다리길이(밑위와 인심)에 따라 구분되며 S와 M, M과 L의 차이는 신장 한 치수 정도 차이이다. 예를 들어 하의의 경우 80-L-173과 80-M-178은 전체 길이(신장)는 178이 더 크지만 부위별로 보면 80-L-173이 밑위만 좀 더 짧고 다리길이는 둘이 거의 같다. 평균적인 성인 남성 체형이면 M이 대부분이겠지만 본인이 평균 키에 비해 다리가 길거나 짧은 경우 S, L을 선택할 수도 있다.
3.3.2. 야전상의, 우의, 점퍼류 (중피트성)
중피트성인 야전상의류의 경우 '성별-가슴둘레-키구간'으로 분류한다. 키구간은 '소, 중, 대, 특' 4개 분류로 나뉘며, 남군용 야전상의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인 'M90소'는 '남성용 - 가슴둘레 90cm - 작은키'라는 표식이다.3.3.3. 특수 사이즈 표기
여군용이나 특제 사이즈의 경우 성별표기가 다른데, 여군용은 '85W155'처럼 'W'이 붙는다. 예를 들어 전투복 상의의 경우 '85W155'는 '가슴둘레 85cm - 여군용 - 키 155cm'이고 라벨에 한글로 '여군용'이라는 표식이 추가로 붙는다. 덧붙여 85W155사이즈는 전투복 상의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이며, 야전상의의 경우 'W85소'가 가장 작은 사이즈이다.가슴둘레 110대부터는 특제사이즈인 'S'라는 표기가 붙는데, 현 규격상 가장 큰 전투복 상의는 '125S180'이며 야전상의는 'S125특'이다.
2013년 국방부가 전투복 치수 규격을 다시 개정할 계획이라고 언론에서 밝혔다. 그러나 기본적인 표식방법은 크게 바뀌지 않을 듯. 당분간은 이 규격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3.4. 예비군복에 '김일성 만세'가?
흑역사가 있는데, 1987년 '김일성 만세' 무늬 사건이 벌어져 1990년 초에 완전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찾아낸 게 대단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일화. 아무 의미가 없는 무늬에서 의미를 찾는 파레이돌리아의 예시인데, 지금이라면 어떻게 저게 '김일성 만세'냐며 코웃음치며 끝날 일이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와 사람들의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다. 심지어 '붉다'라는 말 자체도 함부로 말하거나 노래 가사에 넣으면 '공산당 찬양'이라면서 금지곡이 되고 잡혀가던 시대다.
과거 고등학교 교련 수업용 훈련복 위장무늬는 글자를 가지고 도안된 경우가 많았다. 해당 제작사 이름이나, 해당 학교, 고등학생을 뜻하는 한자 高 등등.
3.5. 하복?
원래 전투복엔 하복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하/동 구분 없이 여름엔 긴 팔을 걷어올려 입고 다니고들 했었는데… 원래 천이 얇고, 뒤집어 안감을 자세히 보면 바둑판 무늬가 새겨진 간부용 전투복이 2004년 7월 입대자들부터 1벌씩 지급되기 시작했다. 2007년 4월부터는 두벌씩 지급. 그간 은근히 두꺼운 '동복'으로 여름을 나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디지털무늬 신형전투복을 처음으로 지급받던 2010년대 초반 군번도 똑같이 이어져(...) 디지털무늬 하복없이 “사계절용”으로만 전투복을 지급받았다.일단 하복의 경우 동복과 비교해서 굉장히 가벼운 이유로 아무래도 교육&훈련용으로 선호받지만, 두께가 얇은 만큼 내구력이 부실하여 자주 꿰메입는 일이 발생한다고. 게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로 전투복 한벌(보통 동복)을 A급으로 빼놓게 되니 겨울에 전투복을 빨 경우 하복을 입고 근무를 나가야 하는 지옥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덕분에 전투복 빨래를 함부로 할 수 없는 불편함이 생겼다.
3.6. 윗도리 좀 꺼내 입으면 안 되나요?
신형전투복이 지급되는 지금이야 전투복 상의를 내어 입게 되어있지만 개구리 군복 시절에는 육군 규정상 유격 훈련 중을 제외하면 전투복 상의를 하의 속에 넣어서 입어야 했다. 물론 병장, 고위 부사관, 그리고 예비군은 상의를 꺼내입길 즐겨했다. 이 경우 짬을 먹은만큼 좀 규정에 버팅기고 싶은 심리도 있겠지만.실제로는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어 입는 것이 기능상으로도 우수하다. 상의를 넣어 입고 군장 착용시 허리띠 위에 바로 탄띠를 두르게 되는데, 여기다 완전군장 배낭까지 메게 되면 허리에 가해지는 피로와 압박이 상당하다. 상의를 내어 입게 되면 허리띠와 탄띠 사이에 한겹 완충재를 대는 셈이니 그런 기능성 면에선 더 낫다. 실제로 미군 연구결과에 의하면 허리에 가해지는 하중을 10~20% 사이 수준으로 줄여주고 기온이 높아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각개전투 등의 구르고 뛰는 훈련 시 상의를 내어입는 편이 바지 속으로 흙 등의 이물질 유입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1971~1973년 사이엔 기능성 문제로 상의를 내어 입는것이 정식 허가되기도 했었지만. 결국 다리가 짧아 보이고 불량해 보인다는 높으신 분들의 어이없는 논리로 1973년에 폐지되어 무려 40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내어 입게 되었다.
미군 장군들도 금색 버클에 검정 유광가죽으로 만든 장군용 벨트가 있다. 사실 한국군 장군벨트가 미군 장군벨트를 본떠 만든 것이다. 야전 훈련 시에는 일반 탄띠를 차지만 부대 행사 시에는 ACU 전투복 위에 장군용 벨트를 차며, 이 벨트는 상의를 빼입어도 상의 위에 차기 때문에 한국군 장군들이 벨트를 드러내기 위해 상의를 넣어입는다는 군대 속설은 틀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시상황을 가정한 훈련에서 번쩍번쩍한 표적을 달고 나오는것은 절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국방일보 기사에 의하면 기능상의 이유로, 그간 여러 번 상의를 꺼내입게 해달라는 청원이 상부로 제출되었지만, 여전히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고. 그러나 2006년 특전사에 지급된 신형 특전복이 처음부터 상의를 내어입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등, 드디어 차세대 전투복부터 내어입기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그렇다고 상의를 넣어입는 것이 꼭 케케묵은 구식은 아닌 것이, 타국 군의 경우 러시아군은 2018년 현재 평시 영내근무 때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에 넣어입고 훈련이나 전투 등 군장 착용시에만 상의를 바지 밖으로 꺼내게 한다. 영국군도 20세기 말까지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으로 넣어서 입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대신 영국군은 탄띠가 바지 허리띠를 겸한다. 미군도 1980년대 BDU가 제식 채용되기까지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으로 입고 다녔고.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어서 입는 것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병력에게만 한정적으로 지급된 '정글 퍼티그' 전투복에만 허용되었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더운 곳에서 상의를 바지에 넣어입으라는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지. 1971~1973년까지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입도록 한 한국군 복장규정도 미군의 정글 퍼티그를 베트남에서 보고 유래된 것이다.
참고로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스라엘군은 복장 규정이 없다. 군복만 걸치고 있으면 어떻게 입든 아무도 상관 안한다. 대부분 넣어 입기는 한다. 이스라엘군이 군복을 바지에 넣어 입는 것은 영국군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2013년부로 예비군도 현역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빼고 입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202] 훈련의 효율성과 신형 전투복을 입는 현역과의 형평성을 위한 것이라고.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 중 '이젠 상의를 넣어 입어야겠군'이 있다
개구리 군복 마지막 세대조차 예비군이 끝난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옛날 얘기가 되었다.
모두가 간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내어 입는 전투복 상의들이 4포켓이 아니고 위에만 2포켓인 이유는 실제로는 평소에도 아래 포켓을 잘 사용하지 않는 점과 보통은 바지 포켓에 손을 집어넣는게 더 편하다. 주머니가 달린 전투조끼를 착용하기 때문이지만 유사시 걸리적거리는거 없이 하의에 바로 집어 넣기 편하기 때문이다.
3.7. 적외선 위장
적외선 위장의 원리란, 가시광선 영역에서 단색 전투복보다 위장패턴이 들어간 전투복이 시각 분산효과로 위장이 더 잘 되는 원리와 동일하다,[203][204] 적외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반 염료로 염색한 원단은 위장패턴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색으로 보여지며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못하여 돋보이게 된다. 이를 해결하고자 위장패턴을 구성하는 각 색상을 특수염료로 나염해 적외선 반사값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은 냉전 당시 미소 양측의 야간투시경이 점점 발전을 거듭하게 되자 감시수단에 대한 대응으로 발전하여 미군 BDU의 우드랜드 패턴에도 적용하게 되었고, 각 선진국들도 동일한 개념을 채용하게 된다.적외선 위장 염료에는 내구연한이 있는데, 빨래하면서 물이 빠지면 옷에 염색되어 있던 염료가 감소되면서 위장효과가 저감되기 때문이다.
구형 전투복을 처음 받게 되면 통칭 '짬내'라 불리는 냄새가 났는데 이는 주로 폴리에스터 계열 합성섬유에 의한 냄새로 추정되며, 적외선 위장 염료와의 관계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소설 데프콘에서 적외선 위장 코팅이 언급된 이후로 밀덕들 사이에서는 '적외선 위장 = 코팅'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있으나 그 출처나 원리는 불분명하다. 그렇게 비실전적이라며 욕 먹는 다림질과도 별 연관이 없다.
3.8. 다림질
구형 전투복을 입던 시절에는 다림질해서 줄을 잡고 맞후임병들에게도 다림질을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신병이 전입하면 전투복과 약복을 다리느라 다리미가 남아나지 않아 약복만 다려입고 나가면 되는 선임병들이 맞후임을 받은 병들에게 빨리 하라고 갈구곤 했다.장교들은 오히려 줄잡기를 하지 않았으며 만약 줄잡기를 하면 '병사 같은 놈'이라는 욕을 먹었다.[205]
신형 전투복의 경우 다림질을 금하고 있으며, 전투복 안에 포함된 사이즈 및 세탁법 표기란에 '다림질 금지'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심할 경우 군기교육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야 약복 다림질은 해도 전투복은 다림질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한때 다리미질이 적외선 위장 코팅을 벗겨버린다며 비실전적인 행위라고 욕을 먹었는데, 이는 상기한 대로 소설 데프콘의 영향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다리미질은 적외선 위장과는 별 연관이 없다. 최신 전투복 경향에 의하면 기본적인 방습/투습 기능은 물론, 사용군의 환경과 목적에 따라 방수/방충/방염/방오 기능 등을 다양하게 적용하기 위해 각종 기능성 원단을 사용하거나 특수약품처리를 하게 되는데, 이런 원단에 다리미를 갖다대면 성능저하가 일어나니 당연히 다림질을 금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어텍스 원단에 다리미 갖다대는 멍청한 짓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신형전투복에는 기본적인 방습/투습 기능이 적용되었으니 다림질을 금지했지만 구형전투복은 위장패턴을 적외선 위장염료로 염색한 것을 제외하면 그런 기능 같은 거 전혀 없었다.
사실 이 다림질도 쌍팔년도 미군의 영향이다. 대략 베트남전 당시의 미군들을 보면 전투 중이 아닌 후방부대의 경우 각 잡아놓은 모습들이 보이는데, 특히 영화 사관과 신사 같은 걸 보면 해군 수병복 칼라에 국군마냥 다섯 줄(...) 잡아놓은 것도 보인다.
미군의 경우 지금도 예복은 칼같이 다림질이 되어 있고, 군대 외에도 민간 경찰관들도 근무복, 특히 밝은 색인 하근무복 상의도 양쪽 주머니 단추를 수직으로 다리는 두 선과, 등판도 어깨선 수평선, 여기서 내려오는 세 선이 칼같이 내려오는데 이는 단추 달기, 옷 다림질 등 섬세한 작업을 잘 못하는 그쪽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특성 상 우리같이 옷감 색이 누렇게 뜰 때까지 직접 다리미로 반복해서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세탁소에서 큰 스팀 다리미로 한 번에 누른 것이다. 이게 오히려 변색될 걱정도 없으며 잡힌 줄도 더 빳빳하고 단정해 보인다.
4. 관련 문서
대한민국 국군의 제식 군모 | |||||
군 | 육군 | 해군 | 공군 | 해병대 | |
간부용 | 병용 | ||||
정모 | |||||
육군 정모 | 해군 정모 a | 공군 정모 | 해병대 정모 | ||
근무모 | |||||
베레모 | 근무모A형 | 근무모B형 b | 개리슨모 | 개리슨모 | |
전투모 | |||||
국군 통합 전투모 c | 팔각모 | ||||
a 사진의 정모는 장교용으로, 부사관용은 장교 정모와 전체적인 형상은 동일하나 다른 모표를 쓴다. 장교용이 교차된 앵카를 배경으로 한 거북선 위로 무궁화가 있는 모표를 쓰며, 부사관용은 앵카 하나를 배경으로 하는 은색 무궁화가 그려진 모표를 쓴다. 근무모에 부착하는 모표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 게다가 부사관용 정모는 육해공군 공통으로 금색 월계수 잎이 없다. | |||||
b 표 구획이 나눠져있어 근무모 B형은 마치 병만 쓰는 모자로 오인할 수 있으나, 참모총장부터 이등병까지 같은 형상의 모자를 쓴다. 또 정식명칭은 "근무모 B형"이지만 실무장병들 사이에선 "흑색모" 혹은 "체육모"로 불리며 함정근무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1] 간부의 경우 근무복 착용 시 개리슨모를 착용하고, 병의 경우엔 빵모를 착용한다. | |||||
c 2020년 7월까지 육군은 야구모자 형상의 전투모를 쓰지 않고 활동모와 부니햇(일명 정글모)을 사용하였으나, 7월 6일부로 해공군과 같이 국군 통합 전투모를 재도입하고 베레모는 근무모 용도로 변경하였다. | |||||
[1] 그나마도 육상에 나갈 때는 100%, 현문당직 등 함 외부에 노출되는 당직의 경우 혹서기 시 함장재량으로 흑색모나 함모를 착용하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얄짤없이 개리슨모 또는 빵모 착용이다. |
[1] 다만 군모의 경우 기존 별기군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2] 별기군 시절엔 녹색.[3] 일반 병사들은 1개.[4] 단, 사진에서도 보듯이 바지의 경우 전통적인 흰색 한복바지를 혼착하기도 한 모양이다.[5] 군모를 보면 별이 아니라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이 있다.[6] 예복엔 해당 단락 상단에 나온 예식 견장을 착용하도록 되어있다.[7] 사진에서는 예복이라 되어있지만 정복이다.[8] 김병화 군복의 사례처럼 간혹 대수(Sash)로 오인되어 잘못 복원되는 사례도 있다.[9] 출처 딱 봐도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복과 매우 유사하다. 차이점이라면 견장이 없고 수장이 달려있다는 것.[10] 지나가는 사람 불러다가 강제로 상투를 잘라버렸다.[11] 고급관료도 예외는 아니어서 상투를 보전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는 관료들이 많았다.[12] 주로 조정의 민비파임과 동시에 친청파였다.[13] 동학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 민비가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는데 텐진조약에 의해서 일본군이 먼저 상륙하게 되고 경복궁은 일본군과 교전끝에 점령이 되어 조선 조정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디.[14] 포군은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였다.[15]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상권 을미년 12월 초5일조.[16] 리볼버[17] 현재 효창공원역 6번 출구에서 지상에 있었던 경의중앙로 철길 따라 가면 효창역 폐역 부근으로 추정되고 처형장소는 마포구 마포삼성아파트 주변 상업시설이다.[18] ≪정토일록(征討日錄)≫국역[19] ≪면암선생연보≫ 동상조 및 ≪갑진일기≫ 중 병오년 2월조 참조.[20] ≪이등박문전≫ p.761.[21] 한일협약(韓日協約)[22] ≪한국독립운동사≫ ① 국사편찬위원회 편 p.p.231~233.[23] ≪한국독립운동사≫ ① 국사편찬위원회 편 p.p.231~233.[24] 11.7km[25] 예컨데 지청천 장군의 일본 육사 동기인 이응준 장군이 대표적이고 광복 후 친일장성 중 제일 높은 계급이었다.[26] 일본 육사 26기 지청천과 동기인 이응준 장군이 있었고 마지막 황태자 이은이 일본 육사 29기 의친왕의 장남 이건이 42기, 차남 이우가 45기가 된다.[27] ≪일본공사관기록≫ 고비(顧秘) 제 7224호 1907년 10월 5일.[28] 포군(砲軍), 포수들로 독립군/광복군 오광선의 아버지 오인수 의병장, 홍범도 장군이 대표적인 예[29] 러시아 영토[30] 이런 경우 봉천군벌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31] 광복군 총사령관[32] 광복군 제 2지대장[33] 광복군 제 3지대장[34] 이마저도 사진은 광복군때 찍은 사진이 많다.[35]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곳은 길림성장(吉林省長)은 중국군 영장(營長), 멍푸더(孟富德)의 지원을 받았고 후반부 조선혁명군 김학규는 동북 제 1군단 유쉐충(于學忠) 장군과 안면이 있었다.[36] 러시아 공산계열인데, 당시 백군 러시아는 일본 제국과 협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지원을 받는다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게 이들에겐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0~22년 베르사유 강화조약과 워싱턴 군축회담 회담장에도 못들어갔기 때문에 외교파의 실패였다. 중국 또한 무수히 많이 쪼개진 군벌로 분열상태였고 일본제국에 대응할 국가가 사실상 소련 밖에 없었다.[37] 사진상의 군복은 천안 독립기념관 제5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군복이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블로그.[38] 글과 대략적인 삽화를 통하여 재현된 복각품이다 보니 견장의 크기가 실제 부착되었던 견장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게 묘사되었다. 실제 견장의 크기는 아래의 사진 참조.[39] 이화일 (李化日) 모티브 1919년 홍범도(洪範圖) 휘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에 입대하여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1920년 7월 7일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시도할 때 이화일부대는 고려령(高麗嶺) 서쪽고지에 매복해 있다가 급습하여 일본군 전위중대(前衛中隊)를 전멸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일련의 전투가 한국독립운동사상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40]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일본의 밀정으로 변절해, 1911년 무렵부터 일본측에 독립운동의 정보를 제공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대양보」의 활자 1만 5000개를 일본측의 지시에 의해 절취해 그 발행을 중단하게 했다. 1911년 6월초에는 독립운동가에 체포되었던 밀정 서영선을 탈출시키는 등 밀정을 탈출시키는데도 관여했다. 이와 동시에 1911년 조직된 권업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경찰부에서 활동했다. 1920년 15만원사건 과정에서 일제의 밀정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1936년 사망했다.[41] 물론 그 전에 1938년에 우한에서 창설한 조선의용대도 있었다.[42] 지복영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민연주식회사, 2015, p. 200[43] 난징에서는 독일 지멘스 수력발전소가 있었다.[44] 김준엽의 『장정(長征)』 중에서[45] 한국광복군훈련반[46] 장쑤성에 있다.[47]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부, 2010[48] 지역 소수민족이 되기도 하지만 국민혁명군 부대가 토비부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49] 푸양은 평지였다.[50] 독립운동사 제 6권:독립군전투사(하), 국가보훈처, p.438[51] 출처 : 이현희,한국독립운동 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305쪽[52] 중국은 물이 더러워서 세탁이 불가능하거니와 무명소재의 옷을 세탁하려면 물을 많이 흡수하는데다 마르는 과정에서 옷이 수축된다.(못믿겠으면 직접 만들어서 입어보는게..) 그래서 몇 개월 정도 입다가 해지면 실과 바늘로 기워입거나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지면 버리고 새 옷을 받아 입는다. 이는 한국전쟁때 국군에게 지급된 군복도 그랬으며 따라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군복이 거의 없다. 어디서 오랜기간 동안 창고에 박혀있는게 아니라면 말이다.[53] 장준하의 『돌베개』 중에서[54] 치자염색으로 노랗게 물들이고 청대염색으로 파랗게 섞으면 녹색에 가깝게 나온다. 염색상태에 따라 색이 다르게 느껴지는 오묘한 색이다. 1938년에 결성된 조선의용대가 녹색 계통을 입었다.[55] 염색재료가 없다면 하얀색 옷을 입었다.[56] 중국 경찰이 착용[57] 군복을 무명이나 삼베천으로 제작했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의 대도시 지역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지자 농촌지역에서 군복을 만들다보니 치자, 청대, 숯 등 자연에서 얻는 염색재료로 염색을 했다고 한다. 내구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3개월마다 한 번씩 갈아입는 경우가 많았다.[58] 장준하, 김준엽 회고록 참조[59] 해평 이재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저자(글), 한국광복군 제2지대사, 선인, 2022.에 언급, 강시 영화에 나오는 영환도사가 입는 옷이라고 보면된다.[60] 전선지역에서는 충칭 국민정부 군대였는데 부대장이 화평건국군에 투항해버리면 부대 전체가 왕징웨이의 화평건국군이 되어서 화평군 장교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제 3지대에서 화평건국군 황색 군복을 입은 사진들이 그 영향이다.[61] 창사 9전구공작대와 제 3징모분처에선 전투기록이 있다.[6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권, 임시의정원 Ⅱ, 우리 통신(조선의용대 통신)에 따르면 호가장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중무장 하기도 했다.[63] 여군들은 소련식 개리슨 모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의용대 여군들도 소련식 개리슨 모를 착용했었다.[64] 한양조 88식, 중정 24식으로 추정된다.[65] ≪소앙문서≫ 제81호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1945)에 따르면 중국경내에서 작전은 초모처를 설치하여 모집한 한국인을 군사훈련반에 집중하여 훈련을 실시하고 중국군과 합동으로 한반도로 진입할때 광복군이 전투원으로서 활동했었다.[66]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2권, 장호강[67] 이현희, 한국독립운동 증언자료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68] 장제스가 전선 후퇴하면서 낙양군관학교, 중앙군관학교라는 명칭도 있다[69] 송호성 장군이 나온 곳[70] 광동대사두비행학교 황포중앙군사정치학교(黃埔中央軍事政治學校)의 조선인 입학생 모집에 조력[71] 레닌그라드 항공학교 훈련, 항주항공학교 교관, 한국혁명당,1943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항공기로 전단을 살포하여 대일선전활동[72] 의열단, 조선의용대 제1지대장, 창사 제 2차 전투 참가 후좌장, 반소탕전, 조선의용군[73] 민혁당 창당,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선전부 부주임[74]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1지대장[75]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광둥 잠편지대[76] 의열단, 민혁당, 임시정부 내무부차장[77]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1지대 총무조장, 2대 제 1지대장,임시의정원 의원[78] 본명은 김용재, 김준,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1지대 1구대장[79] 1928년 만주무장단체 국민부[80] 의열단, 한국혁명군 간부양성훈련반 교육주임, 광복군 1부지대장[81] 중국군 헌병사령부, 헌병 제8단 소교단(少校團), 동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대일전선통일동맹 후원, 민혁당 감찰위원[82] 제 9전구 공작대장 창사 3차, 4차전투[83] 재학중 사망[84] 광복군 제 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박동운에 의하여 암살됨[85] 한인애국단, 한독당, 제 2징모분처 간부, 임시정부 군무부 간부[86] 광복군 제 2징모분처, 군무부원,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 민정과장, 심리작전연구실[87] 광복군 제 1징모분처, 광복군 제 2지대 1구대장[88] 광복군 제 2지대 제 2구대장[89]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부대장, 광복군 제 5지대 1구대[90] 조선의용군[91]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총사령부 참모, 미 5공군 특파원 선전공작[92] 조선의용군[93] 조선의용군[94] 1936년 8월 14일, 군관학교 동기생 김순곤(金順坤)·김학무(金學武)·김파(金波) 등과 함께 중국 상해의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고 불란서조계 환룡로(環龍路) 태흥방(泰興坊)에서 폭탄 2개를 완성하고 3개째를 제조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순국하였다.[95] 남목청 김구 피격범[96] 조선혁명군, 조선의열단, 민혁당 통신 특파원[97] 이봉창에게 군자금과 권총 전달, 맹혈단(盟血團) 옥관빈 사살, 상해 일영사관 투탄, 일 유길명(有吉明)공사 암살계획 중 체포, 1937년 6월 5일순국[98]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제 5지대 2구대장[99] 의열단, 중국군 제 6사 제 17여 제 31단 제 2영 제 6연장, 한커우 전선에서 체포 순국[100] 제 1징모분처, 제 2지대 3구대장, 총무조장[101] 귀주(貴州)포병학교 교관, 1942년에는 연합군 사령부 제16연대 소교[102] 민혁당, 조선의용대 제 1지대, 광복군 제 3지대, 한광반 교관, 참모처 제 1과[103] 총사령부 참모, 제 2징모분처[104] 제 3징모분처 정보조장, 군무부원, 군무부 군사과장, 내무부 경무과장, 경위과장[105] 한인애국단, 제 3징모분처 훈련조장, 절동전투 란씨역에서 부상 후유증으로 1942년 란씨역 전투에서 전사[106]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주임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 및 선전부위원 1944. 8. 21 광복군 O.S.S. 정보파괴반[107]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제 2지대 산시, 허난지구[108] 광복군 제1지대 1구대 초모공작대원[109] 광복군 제 3지대 화중지구[110]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 한미전차훈련반 대기 중 광복을 맞이함[111] 광복군 제 3지대, 지하공작원[112] 1932년 상해사변 참전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활약, 민족혁명당 후보위원, 1944년 10월 임시정부 참모부의 참모,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113] 광복군 총사령부 근무[114] 1930년 도쿄서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朝鮮共産黨再建鬪爭協議會를 결성, 1932년 5월 조선공산당재건투쟁위원회 일본출판부를 결성,1932년에 피체 순국[115] 한국혁명청년당(韓國革命靑年黨)에 가입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지회를 설립하는데 주력하였다. 1928년 10월 26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다.[116] 북벌에 참전 후 소위로 임관, 중국 반란군 토벌 등에 참전[117] 소령[118] 대령[119] 명칭은 지역마다 다르다[120]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고도 불림.[121] 구대장, 계급은 소교~상교[122] 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라고 하는데 이범석 장군 휘하 시안의 2지대에도 똑같은 이름의 분대가 있어서 제 3징모분처라고 불렀다. 일명 '강남분대'라고도 불린다.[123] 분대장, 계급 소교[124] 광복군 제 1지대 1구대장으로 장준하, 김준엽 회고록에서 라오하커우를 경유할때 등장한다.[125] 김승곤 지사 증언[126] 조선의용군으로 합류하기 전이다.[127] 국민혁명군 소령계급[128]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을 공훈록을 검색해보면 각 지사마다 중국 장교 계급이 명기되어있다.[129] 서류상으로 그렇지만, 실제로는 기름, 쌀, 간장 등 부식으로 월급이 나오거나 화폐를 받았어도 전시중이라 하이퍼 인플레이션인 상황에서 제대로 살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30] 문응국 지사 증언 : 그래서 (영국사람에게) 매일 (한국어) 가르치는데, 거기서 영국으로 가게 된 계기가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다 버마 루트가 막히기 시작했어요. 왜놈이 그 당시 버마에 침공해 들어갈 때입니다. 그래 안우생씨하고 이루어진 것이에요. "몇 명을 인도에 보내고 싶은데 어떠냐?" 안우생씨는 학자 타입이거든요. 안우생씨는 안공근씨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한지성씨가 안공근씨의 사위에요. 그러니 안우생씨하고 처남간이죠. 한지성 그 사람이 경북 성주 사람일 거야.. 그 때 약산의 직계라고....네, 부인 이름이 금생(錦生)이에요. 비단 금(錦)자. 무엇이나 하면, 자기 매부하고 나하고 인도에 가는데 한 조로 편성해 보라는 거에요.[131] 1950년 6.25 전쟁때 납북된다.[132] 출처 : 김택곤,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맥스미디어, 2021[133] 따지고 보면 친일파들이다.[134] 공훈전자사료관에 공적인정을 받은 분들을 말한다.[135] 1945년부터 중국군복 어깨에 견장이 달린 버젼이 나온다.[136] 권총집이 달려있고 권총 무게로 벨트가 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권총집 부위에서 권총집 반대편 어깨를 두르는 사선의 띠가 달린 벨트이다. 이 벨트가 만들어지게 된 일화가 하나 있는데, 1857년 영국령 인도에서 발생한 세포이 항쟁 기간 동안의 전투 도중, 부상으로 왼팔이 절단된 영국군 장교 샘 브라운 경이 군도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벨트에 군도를 고정시킨 채로 패용하여 남아 있는 오른손으로 군도를 바로 뽑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다. 즉, 고안 당시에는 권총이 아닌 군도를 패용한 벨트가 쳐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한편, 한국에서는 영화, 드라마, 사진 등의 매체에서 이 벨트가 일제 강점기의 일본 순사와 일본군 장교, 6.25 전쟁 당시의 북한군 장교들과 소련군 장교들, 2차대전의 나치 장교들이 착용하는 모습으로(그리고 타 군이 사용하는 모습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보여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왠지 '사악한 군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은 독일군, 미군, 영국군, 일본군 등 2차대전기 추축군과 연합군, 냉전시기 공산권과 자유진영 가리지 않고 여러 군대에서 폭넓게 사용된 장구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제4공화국 시대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된 군 장교들에게는 샘 브라운 벨트가 지급되었다.[137] 왼쪽이 남성 병사, 오른쪽이 여성 병사용이다.[138] 청천백일기 모표가 태극무늬로 바뀌고, 카라에 부착하는 금속제 계급장이 견장 형태의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병과장을 카라에 부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139] 옷의 외형 자체는 차이가 없고 계급장이나 병과 표식 등의 군용 부착물을 추가적으로 붙이느냐 안 붙이느냐의 차이가 있었다.[140] 1945년 이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의 계급을 사용하였다.[141] 대부분의 국가에 적용되는 전투복-견장 일체형 옷과는 달리, 광복군 견장은 소련군, 또는 인민군과 비슷하게 견장과 옷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142] 1990년 당시 모든 사람이 다 알았던 것도 아니었고 광복군에 대한 연구도 빠르면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143] 조선의용군을 말한다.[144] 중국에서 유학하던 일본인 대학생들이 일본군 징집을 피해 자진 지원했다고 한다.[145] 조선의용대 화북지대[146]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든 싫든[147] 또는 8월 15일 되기 전에 피난선에 몸만 싥고 부랴부랴 떠났다고 한다.[148] 부산역사문화대전과 한국현대사회운동도 참고해 볼 것.[149] 현재 이 적산기업들은 폐업한 곳도 있고 인수합병을 거쳐서 여전히 50개 내외가 존재한다.[150] 다른 사람이 적산 받은 기업을 인수해서 받는 방식으로 기업을 여러채 소유할 수 있었다.[151] 심지어 당시 정치깡패로 유명했던 임화수도 적산으로 풀린 극장을 헐값에 인수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인물이다. 이 시대의 부자들은 대부분 이 루트를 통해서 재산을 모았다고 보면 된다.[152] 1990년대까지는 양복점을 한다고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는 자영업 산업이었다.[153] 나일론 혼방의 질긴 전투복은 90년대 중반들어서 보급이 된다. 그 이전엔 신축성이나 내구도가 부족했었다.[154] 조선총독부가 광복 직전에 귀국하려는 일본인들을 위하여 조선 엔화를 무작위로 발행해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박살내고 가버린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서 발행한 조선 엔화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실물자산인 쌀이나 옷감은 상당히 고가의 화폐대용으로 쓰이게 된다.[155] 지금은 형식적인 법인만 있다. 현재는 의류가 사양산업이라 퇴출[156] 부산에 있었다.[157] 이 당시 린넨 소재의 옷이 조금만 입으면 풀어지기 때문에 현재 원형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고 사진을 보고 수작업으로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158] 대한민국 진영에 온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있다.[159] 사실 미군도 기병 등 일부 병과에선 사용한 스타일이지만, 일자바지+각반(물론 일본식 권각반과는 형태가 다른 미국식)이 가장 보편적이었다.[160] 무장친위대 위장복의 경우는 정규군 보다는 KLO측에 주로 지급되었다. 문서 참조[161] 6.25 전쟁당시의 국군 군장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고싶으면 기타자료들을 참고[162] 허리까지만 오는 짧은 자켓[163] 카키색에서 국방색(올리브 그린)으로.[164] 전투복 하의의 경우 간소화를 하여 양 옆면의 주머니가 옆트임식 주머니가 따로 없고 건빵주머니 형태로 약간 높게 달린 큰 주머니들만 두 개가 있었다. 카키색 장교 하정복에 구두를 신고 후퇴하던 백선엽 장군이 철모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다.[165] 광목(廣木)은 "큰 폭"이라는 뜻으로 일본식 기계방직 무명천을 주로 일컫는 말이다. 전통방식으로 무명천을 짜면 폭이 좁다.[166] 광복군 군복도 거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군복이 대부분 천연염색이라 세탁하면 물이 빠졌고 그래서 좀 입다가 찢어지면 버리는 식이었다.[167] 참고로 위 사진에서 KLO 부대원이 입고있는 독일 군복은 무장친위대 dot44 군복이다.[168] 출처[169] 게다가 군복 부족에 시달리던 중공군이 이 누비방한복을 노획하는 경우도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170] 일부 해병들의 경우 무더운 날씨 때문에 덕헌터 정글복 상의의 소매를 모두 때어내어 나시같이 만들고, 바지도 무릎 부근에서 잘라 반바지로 만들어 입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육군도 비슷했다. 영화 알 포인트에서 M60기관총 사수인 이재필 상병(정경호 분)이 대검으로 본인 전투복 상의의 소매를 뜯어내자 장영수 병장(오태경 분)이 왜 멀쩡한 소매를 뜯어내냐고 하자 이재필 상병이 실제 전투는 해 본 적이 있냐고 핀잔을 주는 부분이 그것이다.[171] 1961년~1963년에 입은 원피스형 커버올이 아니라, 일반적인 셔츠와 바지로 구성된 전투복 형태.[172] 광주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의 자유관에는 아예 이 충정복이 전시품으로 전시되어 있으며(다만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인지 위장패턴은 오리지널 충정복의 그것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광주에서 열리는 5.18 전야제의 재현 행사에서도 소품으로 충정복 위장 커버 헬멧과 충정복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2006년 전야제 2010년 전야제) 다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로, 5.18 당시 특전사의 정확한 복장은 일반 보병용 한국형 리프패턴 철모(충정훈련용 방석망을 붙인) + 충정복 조합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이 복장을 (방독면을 제외하면) 거의 정확하게 고증했다. 다만 사령부 마크는 당시 달지 않았다. [173] 기록에 따르면 5월21일 광주에서 물러날때까지는 충정복을 착용하였으나, 마지막 5월 27일의 도청진압작전에 참여한 특전사는 일반 보병 복장(송정비행장에서 작전 대기중 모 부대에서 보유하던 cs복과 월남전 방탄조끼 등을 싣어와 구제옷 창고 모양으로 부어놓고 사이즈에 맞는 걸 대충 골라 입었다고 함. 급하게 임시로 지급받은 복장이라 부대 마크나 표식 등이 없음. 방탄조끼가 없거나 표식이 있는 전투복, 야전상의을 착용한 부대는 보병부대)으로 위장하고 작전에 참여했고, 실제로 당시에 찍힌 컬러 영상기록들(출처 : KBS의 5.18 다큐멘터리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174] 샘브라운 벨트가 나치, 일제, 북한 등 악당의 상징으로 유명한 것과는 별개로 딱 봐도 멋있고 실용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 세계 각지의 군대에서 널리 쓰였다. 애초에 첫 발상지도 이러한 이미지와는 별 관련 없는 영국이기도 하고.[175] 미군은 이 문제점을 일찍이 인식해서, 아주 옛날인 1950년대부터 직업군인이 아닌 징집병들에게도 정복을 지급하며 외출 휴가시 입도록 적극 장려했다. 번쩍번쩍하게 입고 나가야 선전효과와 함께 청년들을 낚아 군대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 이걸 우습게 볼 수가 없는게, 실제로도 미 해군과 해병대는 정복으로 대표되는 대양선원에 대한 로망이나 마린 블루 드레스에 대한 막연한 공명심을 가지고 지원했다는 청년들이 꽤 많다. 특히 미 해병대의 경우 타군이면 30줄을 바라보는 자원자가 상당함에도 홀로 20대 자원자가 넘쳐날 정도다. 근대의 유럽도 모병관, 징집관들이 마을을 돌며 선전할 때에도 그 효과를 보기 위해 일부러 더 좋은 재질과 장식이 달린 군복을 입게 했었다. 나치 독일이 일부러 화려한 전투복을 채용한 것처럼, 10년도 이전 징병제 시절의 독일 연방군이 꼴랑 9개월 있다 집에 가는 징집병들에게도 굳이 정복을 지급해줬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176] 이 탓에 가까이에서 보면 얼룩덜룩하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색이 뭉게지게 만들어지는 효과를 노리고 픽셀무늬가 개발 되었고, 21세기 특수부대의 상징과도 같은 멀티캠조차도 멀리서 보면 민무늬로 보일 정도로 무늬 별 색감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177] 기본적인 우드랜드 형태의 군복보급은 1980년대 중반서부터 최전방에서 시범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되었다.[178] 해병대 특수수색대[179] 다만 공군의 특수임무부대인 CCT, SART도 특전사의 특전복을 입었으나, 2015년부터는 멀티캠 전투복을 입는 중이다.[180] 2012년 ~ 2013년 일부 군번의 경우 기존의 전역 직전의 선임들이 남겨놓은 구형 통합 전투복을 받아 입기도 했었다.[181] 예를 들어 육군이면 '대한민국 육군 ROKA'라고 적혀있다.[182] 평상 시에는 원색, 훈련과 전시에는 위장색을 부착한다.[183] 해군의 기본 전투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육지 근무자는 기존에 입었던 통합 전투복이다.[184] 대한민국 해병대 포함.[185] 2014년 기준으로 바지의 옆줄이 빨간색으로 변경되었다.[186] 공군 여생도 정복은 단추식이다. 그러나 그것만 다를 뿐 다른 특징들은 타 생도 복장과 공유한다.[187] 때문에 가끔 해외 밀리터리 관련 중고장터에 생도 예복이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것도 군복이므로 중고로 판매하면 위법인데다가, 장교의 명예가 걸린 옷이기에 전역하더라도 팔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망이나 이민 등의 사유로 인하여 헌옷수거함 같은 곳에 버려진 것이 해외로 팔린 뒤에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대다수다.[188] 2013년 한국교통대학교 학군단 창설 때의 사진으로 지금은 모자가 개리슨모로 바뀌었고 육군 학군단처럼 왼팔 어깨 쪽에 학군단 부대마크가 부착된다.[189] 현재는 개리슨모를 쓰고 있다. 베레모가 전멸한 것으로 보아 완전히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190] 국내생산품인 이 전투복은 원래 원단이 로디지아군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내전 이후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면서 수출이 중단되자 처치곤란이 된 남은 재고 원단을 사회복무용으로 도입한 것이다.[191] 최근 하복에는 앞가리개가 없다.[192] 여군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채워야한다.[193] 전시 사망할 경우 위로 하는 마음으로 앞가리개 단추를 채워주는 행위[194] 미군은 2차대전때 이미 티셔츠를 입었으며 안에 아무것도 안입고 다니는 일도 많았다.[195] 옛날 50~60년대의 육군 장교, 부사관들의 사진을 보면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모습들도 있다. 특히 특전사의 경우 낙하산 천 비슷한 것으로 된 얼룩무늬 머플러를 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196]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장성급 장교의 모습. 해당 인물은 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197] 김신조 일당은 26사단 마크 달고 왔었고 자하문 통과할때는 방첩대라고 둘러대다다 들켜서 궁정동과 인왕산 일대에 산개 교전이 일어난다.[198] 반면 우리군에서는 북한군복을 입고 북한으로 침투시킨다.[199] 남군은 M, 여군은 W[200] 남군은 M, 여군은 W[201] 하복의 경우 기존 전투복보다 얇은것은 물론이고 좌우 팔에 달려있던 주머니가 삭제되어 기본적으로 소매를 접어올리기 편한 형태로 되어있다.[202] 이때는 아직 현역조차 개구리 군복이 남아있었으니 예비군은 당연히 전원 개구리였다.[203]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842958[20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560259[205] 현역 장교 또는 예비역 장교 아버지들은 병인 아들이 칼줄 잡는다고 심지어 바둑판 위에 전투복을 펴 놓고 자와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다리미로 탄내가 날 때까지 문지르는 것을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받은 멀쩡한 전투복을 망가뜨린다고 영창감이라고 하며 끔찍이도 싫어했다. 장교들이 보기엔 그저 사병들의 똥폼 잡는 짓거리일 뿐이다. 그럴 시간에 병기 손질이나 더 하라는 것. 군복무를 마친 후 노가다 작업복으로 입으면 얼마 못가 다림선이 주욱 찢어지는 것을 보고 왜 장교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전투복에 다림질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을 깨닫게 된다. 결국 동원훈련을 가려면 예비군 전용 군장점을 수소문해서 찾은 다음 안쪽에 진짜 "예비군 전투복" 택이 붙은 전투복(싸제가 아닌 진짜 국방부 정품이다.)을 사서 입고 예비군 훈련에 나가야 한다.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장성급 장교의 모습. 해당 인물은 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197] 김신조 일당은 26사단 마크 달고 왔었고 자하문 통과할때는 방첩대라고 둘러대다다 들켜서 궁정동과 인왕산 일대에 산개 교전이 일어난다.[198] 반면 우리군에서는 북한군복을 입고 북한으로 침투시킨다.[199] 남군은 M, 여군은 W[200] 남군은 M, 여군은 W[201] 하복의 경우 기존 전투복보다 얇은것은 물론이고 좌우 팔에 달려있던 주머니가 삭제되어 기본적으로 소매를 접어올리기 편한 형태로 되어있다.[202] 이때는 아직 현역조차 개구리 군복이 남아있었으니 예비군은 당연히 전원 개구리였다.[203]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842958[20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560259[205] 현역 장교 또는 예비역 장교 아버지들은 병인 아들이 칼줄 잡는다고 심지어 바둑판 위에 전투복을 펴 놓고 자와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다리미로 탄내가 날 때까지 문지르는 것을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받은 멀쩡한 전투복을 망가뜨린다고 영창감이라고 하며 끔찍이도 싫어했다. 장교들이 보기엔 그저 사병들의 똥폼 잡는 짓거리일 뿐이다. 그럴 시간에 병기 손질이나 더 하라는 것. 군복무를 마친 후 노가다 작업복으로 입으면 얼마 못가 다림선이 주욱 찢어지는 것을 보고 왜 장교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전투복에 다림질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을 깨닫게 된다. 결국 동원훈련을 가려면 예비군 전용 군장점을 수소문해서 찾은 다음 안쪽에 진짜 "예비군 전투복" 택이 붙은 전투복(싸제가 아닌 진짜 국방부 정품이다.)을 사서 입고 예비군 훈련에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