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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4년 3월 4일 |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입석리# (現 평안남도 문덕군 입석리) | |
사망 | 1973년 2월 29일 (향년 58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본관 | 평산 신씨 |
가족 | 배우자 오희영 (1968년 사별) |
학력 |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4분교를 13기생 |
이명 | 진경성(陳敬誠)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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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 오희영은 그의 부인이다.2. 생애
1914년 3월 4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입석면(立石面) 남단리(南端里)에서 태어났다. 이명(異名)으로 중국 활동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한 진경성(陳敬誠)과 송양호(宋洋浩)·신삼택(申三澤) 등을 사용하였다.3. 중국군/조선의용대 시절
어린 시절 중국으로 건너가 1926년 상하이(上海)에서 병인의용대 활동에 참여하였고, 1933년 광둥정치군사학교(廣東政治軍事學校)를 졸업하였다. 1936년 8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4분교를 13기생으로 졸업하고, 한국독립당 재건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7년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 간부훈련반을 거쳐, 같은 해 4월부터 중국 중앙포병(中央砲兵) 제 51단 소위로 임명 배속되어 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30년대에 우창(武昌)·한커우(漢口)·웨양(岳陽)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창사대회전(長沙大會戰)·링난대회전(嶺南大會戰) 등에서도 일본군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당원이던 1938년 10월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설에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 동료의 회고에 따르면, “평안도 사투리로 배뱅이굿을 기가 막히게 잘하였으며, 이 무렵 한커우(漢口) 청년회관에서 무한(武漢)을 지키는 시민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열린 서광(曙光)이라는 제목의 연극 공연에서, 중국 혁명군에게 사살당하는 특무(첩자) 역할을 맡아, 중국군의 총을 맞고 멋지게 죽어 넘어지는 장면에서 관중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1939년 6월 29일자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전문에 따르면, 조선의용대 1구 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 1941년 5월 작성된 조선의용대 편성표에 따르면 대원(隊員)으로 활동하였다.
4. 한국광복군으로 편입
1940년 말에서 1941년 봄에 걸쳐 조선의용대원의 다수가 중국공산당의 항일근거지인 화베이(華北)의 타이항산(太行山) 지역으로 옮겨간 후, 중국 국민당 정부 통치구역에 남아있던 대원들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 1월 한국광복군 제 3지대로 전입되어 시안전방사령부(西安前方司令部) 참령참모(參領參謀)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파견되어 징모처 제 6분처로 개편되면서,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지휘 아래 오광심(吳光心)·신규섭(申奎燮)·김광산(金光山)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942년 4월, 광복군 제 3지대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 점령지구를 돌파하여 산둥반도 방면으로 나아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중국군 유격부대[1]가 자리 잡고 있는 안후이성 푸양에 정착하였다. 푸양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대한 각종 공작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한·중 합작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때 지대장 김학규를 중심으로 푸양에 광복군의 초모공작을 위한 징모처 제6분처를 설치하고, 초모활동·선전공작·정보수집·유격전 등을 전개하였다.
1943년 5월, 김학규의 지시로 김국주(金國柱)·전월성(全月星) 등과 함께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의 중국군 유격대사령부로 밀파되어 적 후방공작을 전개하였다. 중국군 유격부대의 협력 아래 한인 청년과 일본군 내의 한적(韓籍) 사병에 대한 초모공작을 추진하며, 이들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1944년에는 일본의 「학도동원령」 등에 따라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노능서(魯能瑞) 등 학도병 30여 명이 쉬저우의 일본군 쓰카다부대(塚田部隊)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며 초모활동은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쉬저우에서의 이러한 활동은 징모처 제6분처의 초모활동에서 가장 큰 성과로 기록된다.
1944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에 병설된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약칭 한광반)의 교관으로서 초모한 한국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안후이성 푸양의 린취안(臨泉)에 설치된 한광반은 징모처 제6분처, 즉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설치 운영한 ‘임시훈련소’였다. 1944년 5월부터 11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초모된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광복군 간부로서 자질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5. 광복 이후
광복 후에는 충칭에 남아 교포들의 귀국을 도왔다. 1946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전원위원(專員委員)에 임명되어, 현지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3월 31일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中國總支部)에서 작성한 「한국독립당 계통일람표(韓國獨立黨系統一覽表)」에 따르면, 당시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의 사찰처장(查察處長)과 충칭 구당부(區黨部)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1947년 6월 귀국하여 한국광복청년회 전위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중화민국정부 국방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50년 2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6. 참고문헌
신송식의 공적정보사상정세시찰보고집 442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7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58·723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8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05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714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85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07·222·224·419·462·608면
[1] 국민혁명군 제51군 위쒜중 장군으로 조선혁명군 김학규와 일면식이 있던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