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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2:54:29

오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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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광심.jpg
출생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용건동
사망 1976년 4월 7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가족 배우자 김학규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독립운동2.3. 광복 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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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910년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용건동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 남만주로 이주했고, 1927년 흥경현 왕청문에서 설립된 하흥중학교 부설 사범과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을 길렸다. 이후 1929년 졸업한 그녀는 이듬해 통화현(通化縣) 반납배(半拉背)에 있는 초등학교인 배달학교(倍達學校)의 교사로 부임했다. 배달학교는 남만주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던 한족회(韓族會)에서 설립한 민족주의 학교였다. 또한 1931년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동명중학(東明中學) 부설 여자국민학교로 옮겨 여학생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여기서 동료교사와 두번째 결혼을 한다.

2.2. 독립운동

오광심은 배당학교 교사를 맡고 있던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정세가 급박해지자, 그녀는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에 가담해 처음에는 사령부 군수처에서 복무했고, 후에는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해 주로 지하연락 활동을 맡았다.

1932년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중화민국의 권력자 장제스는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인정하고 한인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을 허락했다. 이에 김구는 만주에서 악전고투하는 조선혁명군 등 무장독립단체들에게 관내 지역 이동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혁명군은 만주를 아예 떠나기보다는 관내 지역의 독립군 및 중국군으로부터 물자, 병력 지원을 받아 항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혁명군 사령부는 김학규를 난징으로 파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섭하게 했고, 오광심은 남편을 두고 김학규를 따라갔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위해 난징으로 가면서 자신의 심경을 <님 찾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노래로 표현했다.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난징에 도착한 김학규는 관내지역 무장독립단체들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그는 만주와 이들과의 연합이 이뤄지면 보다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본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분량이 200쪽에 달했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가서 만주로 갔다가 도중에 일본군에게 붙들린다면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컸다.

이때 오광심이 자신이 만주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그녀는 꼬박 며칠 밤을 새어가며 20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통째로 암기한 뒤 1934년 7월 15일 난징에서 출발해 신분을 숨긴 채 만주로 향했다. 무사히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이 외운 보고서를 구술했고, 본부는 그녀의 보고가 매우 세밀한 것에 대단히 만족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당 본부는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의 한 한인의 집에서 난징에 보낼 지령문을 작성했는데, 한 변절자가 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오광심을 포함한 겨우 3명만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심한 화상으로 3개월 동안 만주 산간의 바위굴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1935년 1월, 오광심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난징으로 가서 난징에서 추진하는 단일당 조직 운동에 대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비준서를 전달했다. 이로써 조선혁명당 대표 김학규최동오는 한국독립당(대표 김두봉, 조소앙), 의열단(대표 석정, 진의로), 한국독립당(대표 윤기섭, 지청천)과 미주 대한인독립단(대표 김규식, 신익희)의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1935년 7월 4일 민족혁명당을 창설했다. 남편 김학규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고 오광심은 민족혁명당에서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계열과 지청천, 최동오 등 만주 세력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계열과 갈등을 빛으면서 분열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그해 11월 난징이 함락 위기에 몰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커우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창사로 옮겼으며, 창사마저 공격당하자 7월에 다시 광저우로 이동했다가 그곳까지 일본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11월 광서성 유주로 후퇴했다. 임시정부는 1939년 2월 유주에 머무는 동안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 이 단체에 속한 대원 34명 중 1/3에 해당하는 11명이 여성들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광심이었다.

그러나 유주 역시 일본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임시정부는 1939년 5월 사천성 남부의 기강으로 후퇴했다가 1940년 충칭에 최종적으로 안착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녀는 광복군 창립식에 참석했고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전방인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했고 1941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기관지인 <광복>의 원고 작성과 편집을 지복영, 조순옥 등 여성 대원들과 함께 처리했다.

오광심은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 '한국 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들림'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그녀는 한국 여성이 20억 세계인 가운데 절반이 되는 10억 세계 여성 인구의 구성원이라고 밝힌 뒤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국여성의 존귀한 존재성을 강조했다. 이어 세계 흥망과 민족 존망의 책임 남녀 모두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서반아(스페인) 여성들은 자국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가 남자 못지않게 싸웠으며, 중국여성들도 맹렬하게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실제적인 사례를 밝혔다.

반면, 그녀는 국망 30년 동안 조국 광복의 자유를 위해 국내와 만주 및 관내에서 열렬한 활동을 하는 한국 여성이 극소수이니 참으로 부끄럽다며, 남녀평등과 여권을 찾으려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바로 지금이 여자들에게 그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서안에서 1년 반 동안 <광복> 기관지 간행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2월, 임시정부 군무부는 오광심이 속한 제3지대에게 산동반도로 가서 모병 활동을 벌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오광심은 남편 김학규 및 동지들과 함께 산동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산동반도의 전세가 매우 급했기 때문에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중간지점인 안휘성 부양에 거점을 두고 모병 활동을 전개했다. 오광심은 제3지대에서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 담당 비서로서 활동했다. 그녀는 대원 관리를 매우 세심하고 철저하게 했으며 새로운 대원들이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그들을 만나 격려했다. 그 결과 제3지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160여 명의 인원을 모집해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2.3. 광복 후 경력

1945년 8.15 광복 후, 오광심은 김학규와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김학규는 상하이에 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를 설치하고 판사처 처장에 취임했고, 오광심은 그를 도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상하이에 모여있던 3만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후 1946년 가을 만주 심양으로 간 오광심은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중국 공산군의 공세를 피해 국내로 들어와 사별한 김학규와 삼혼을 한다.

이후 오광심은 남편 김학규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다가 김구의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할 때 뒷바라지를 해줘야 했다. 그러다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남편이 풀려난 뒤에는 조용히 살다가 1976년 4월 7일 오전 6시 30분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광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6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