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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적명 | 황애덕(黃愛德)[2] |
출생 | 1892년 4월 19일 |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융흥부 대죽리·장찰방리[3] (현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 |
사망 | 1971년 8월 24일 (향년 79세) |
경기도 인천시 부평동 276번지 자택 (현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
본관 | 제안 황씨(齊安 黃氏)[4] |
학력 | 이화학당 (중등부 / 졸업)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중퇴) 이화학당 (대학부 / 졸업)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 석사)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여성운동가. 본관은 제안(齊安)이다. 교육자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황신덕이 둘째 여동생이다.2. 생애
1892년 4월 19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융흥부 대죽리·장찰방리(현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에서 아버지 황석청(黃錫淸)[5]과 어머니 홍유례(洪裕禮) 사이에서 1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 중등부[6]를 졸업한 뒤 평안남도 평양부 숭의여학교[7]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1913년 숭의여학교 동료 교사 김경희(金慶喜), 교회 친구 안정석과 함께 비밀결사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8]를 조직하여 여성들의 항일구국의식을 함양하고자 하였다. 이후 애국심이 깊은 중년층 여성과 젊은 여성을 고루 포섭하여 이른바 송형제(松兄第)와 죽형제(竹兄弟)로 각각 분류하는 등 조직을 확대하였고, 자회(子會) 설립을 지도하였다. 또한 대원들이 납부한 회비와 대원들이 따로 제작한 자수를 팔아 마련한 기금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중화민국에 위치한 독립운동기지에 송금하였다.
1918년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의 권유로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고, 이후 김마리아·현덕신·송복신·정자영(鄭子暎) 등과 도쿄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유학생 간의 친목 및 항일사상·애국심 고취를 도모하였다. 이후 도쿄 유학생들이 주창한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주동 학생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후 2.8 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지령문을 휴대한 채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 종로5정목[9] 20번지 방태영(方台泳)의 집에 주소지를 두었고[10], 국내 각지를 순회하며 비밀리에 항일선전을 유세하였다. 또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조선 여성 대표로 신마실라(申麻實羅)를 선정하였고, 프랑스 파리로 파견하는 데 소요되는 여비를 마련하고자 노파, 일본인 여성 등으로 변장해 지방 각지를 찾아 모금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에는 김마리아·박인덕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고, 부인 단체를 조직한 뒤 남성들과 제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방안과 각 여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통해 일본 제국에 항쟁하는 방안 등 두 가지를 결론으로 도출하였다. 이에 정신여학교와 신명여학교 등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로 인해 3월 2일부터 3월 3일까지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다수 인쇄, 배포하여 조선인을 선동할 때 사람들과 함께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되어 3월 19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보석 중이던 1919년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판결을 받아 곧 석방되었다.[11]
석방 이후 평안남도 평양부 관후리[12] 236번지로 본적을 옮겼고, 경기도 경성부 종로6정목[13] 20번지에 거주하였다.[14] 1919년 9월 김마리아와 함께 오현관(吳玄觀)·오현주 자매가 설립한 혈성단애국부인회와 종래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에 분개하였고, 이에 활동을 재개하고자 하였다. 1919년 10월 19일 경기도 경성부 연지동 정신여학교 내 미국인 부인 천미례(千美禮)의 집 2층 김마리아가 머무르던 방에서 김마리아의 석방을 위로하는 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 혈성단애국부인회 회원인 오현관(吳玄觀)·오현주 자매와 이정숙(李貞淑)·장선희·김영순(金英順), 지인인 이혜경·신의경·백신영(白信永)·정근신 등이 참석했는데, 처음에는 김마리아의 옥중 경험에 대해 들은 뒤 종래에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두 개의 부인 단체가 있으나 충분하지 않은 점이 있으므로 이 기회에 이 단체들을 통합, 계승하여 현실을 개선하면 어떻겠느냐 발의하였다. 이에 참석자 전체의 찬성을 얻어내어 명칭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정하고 본부와 지부의 규칙을 확립하였으며, 조선 독립을 위하여 크게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김마리아·이혜경·신의경·백신영과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또한 오현주가 회장직을 사임하기로 하여 같은 날 임원을 재선출하였는데, 이때 총무 겸 편집인으로 선출되었다.[15]
1919년 10월 20일[16]에는 회원들의 요청으로 김마리아와 함께 '본 회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는 데 있다. 결사부장은 전 회의의 결사 및 사무를 총리하고, 통신부장은 정부 이하 각 기관과 연락하고, 사업 진취의 계획을 도모한다. 이를테면 본 회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의무를 성취시키는 데 있으며 결사부장은 본 회의 결사 및 사무를 총리한다. 정부를 교섭할 때에는 반드시 본부를 경유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본부 규칙」을 작성하였고, 김마리아가 '국가를 가정과 같이 사랑하자, 가족으로서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가정은 이룩되지 않는다. 국민으로서 국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국가를 보전·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리석은 이들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슬프다!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구성원이다. 국헌과 인권을 회복할 것을 표준으로 하여 전진하되 후퇴하지 않는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떨쳐 그 이상에 상통하는 목적으로써 단합을 주로 하고 일제히 찬동하기를 천만 바란다.'[17]는 내용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설립 취지서」 초안을 작성할 때 이혜경과 함께 이를 도왔다. 이때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지부 규칙」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영순은 정신여학교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이 3종의 문서를 각각 약 7, 80장씩 등사하였고, 이혜경에게 한 장씩 건넨 뒤 등사한 문서 몇 장을 김마리아와 함께 경기도 경성부를 비롯한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을 재정비하여 그해 11월까지 조직이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어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와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의 역할을 대행할 수 있도록 확대, 개편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이로 인해 1919년 11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대구경찰서로 송치되었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18]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었다.[19] 이후 투옥되어 복역하였고, 형기를 1년 남기고 2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석방 후 이화학당 대학부[20] 3학년에 편입한 뒤 졸업하였고, 이화학당 사감 겸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박인덕·이선행(李善行) 등과 함께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여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28년 말 귀국하였고, 1929년 8월 우봉운(禹鳳雲)·김정원(金貞媛) 등과 함께 경성여자소비조합[21]을 결성하여 조선 여성들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1930년 박순보(朴順甫)와 결혼한 뒤 일본 제국의 탄압을 피하여 만주국 지린성 하얼빈시로 망명하였다. 이후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일본인 농장에서 고생하는 재중동포들을 위하여 야학을 열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여성단체협의를 조직하여 여성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다. 1950년 미국에서 6.25 전쟁을 맞았고, 미국의 12개 주를 순방하면서 구호품을 모아 한국에 기부하였다. 1952년 귀국한 후에는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하여 6.25 전쟁으로 배우자를 잃은 미망인과 고아, 부상자 등을 위한 기술교육을 하였고, 이들을 후원하는 복지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육영사업에도 투신하여 송죽학원 이사장, 추계학원 이사 등을 지냈다.
1971년 8월 24일 오전 9시 15분에 경기도 인천시 부평동(현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276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22] 유해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안장되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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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 12월 27일 형사사건부 #2에는 黃愛[2]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수형인명부에는 黃愛悳으로 기재되어 있다. 2003년 간행된 제안황씨 계미보에도 이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3] 1896년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대죽리·장찰방리 → 1914년 평안남도 평양부 대찰리 151번지 → 1946년 평양특별시 중구 남문리[4] 남파공파(南坡公派) 19세 氵변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오빠 황류(黃瑬)는 항렬자를 썼다.[5] 이명 황석념(黃錫念).[6] 현 이화여자고등학교[7] 현 숭의여자중학교·숭의여자고등학교[8] 송죽회(松竹會)라고도 한다.[9]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10] 1919년 8월 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1] 1919년 8월 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2] 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13]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14]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5]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에 이혜경, 재무부장에 장선희, 적십자회장에 이정숙, 서기에 김영순·신의경, 결사부장에 백신영이 각각 선출되었다.[16] 김마리아의 신문 조서에는 10월 22일로 되어 있었다.[17]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다만,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는 '본 회는 설치 이후 적의 압박을 받고 어떠한 고난,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장래의 국가사업을 준비했으나 이에 만족할 것이 아니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함을 표준으로써 전진하되 물러서지 않는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그 이상에 달하는 목적으로 단합을 주로 하고 일제히 찬동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적혀 있어 취지는 같으나 세부 내용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18]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19]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수형인명부,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집행원부, 1920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 #1, 1920년 12월 27일 형사사건부 #2[20] 현 이화여자대학교[21] 경성여자소비조합은 조선 각 방면의 여성들을 망라하여 회원들의 출자로 운영되는 조선 유일의 여성 경제기관이었다.[22] 1971년 8월 25일 조선일보 부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