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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정(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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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이효정.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춘식(李春植)
본관 진성 이씨
출생 1913년 7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 와단면 한수리
(現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동촌마을)[1]
사망 2010년 8월 14일 (향년 97세)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 인천광역시의료원
학력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81호
상훈 건국포장 수여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경성 여학생 운동2.3. 동맹휴업과 독서회2.4. 교사 시절2.5. 노동운동2.6. 건국동맹 활동2.7. 광복 후 행적
3. EBS 기획특집 독립운동가 이효정의 나의 이야기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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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옳지 않은 일을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했어요.
이효정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시인. 2006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이효정의 동상이 있다. 이관술의 제자. 또한 그녀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많은 독립운동가의 친척이다. 대표적으로 독립유공자 이병희가 그녀의 당고모. 독립유공자 권태규는 외사촌오빠이다.[2] 가장 유명한 친척은 시인 이육사인데, 항렬로는 할아버지뻘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녀는 퇴계 이황의 16대손이다.

그녀에 대한 자료로는 대표적으로 2009년 EBS에서 제작한 3.1절 특집 다큐멘터리가 있고,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배문석의 배문석의 장기 연재 기사가 있다. 박현주 소설가의 이효정 인터뷰도 있다. 그리고 안재성의 소설 <경성트로이카>에 거의 주인공급으로 등장한다. 안재성 소설가의 박진수(이효정 아들) 인터뷰

그녀를 주제로 하는 2022년 최신 논문이 나왔다. 원은희의 <여성독립운동가 이효정의 생애와 시에 관한 연구>.

2. 생애

2.1. 유년기

1913년 7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 와단면 한수리(現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동촌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이병룡(李炳龍)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중숙(權重淑)[3]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가는 구한말 이후 다수의 항일운동가 및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집안으로, 그 중 종조부 이동하(李東廈)와 이경식(李京植), 5촌 당고모 이병희(李丙禧) 등 세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에 서훈되기도 했다.

출생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봉익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 29번지[4]에 거주하면서 본적을 두었다. 이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88-2번지로 이주했다.

2.2. 경성 여학생 운동

파일:1932졸업앨범동덕여고.jpg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학교 전경
파일:이관술동덕여고.jpg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왼쪽부터 이관술,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이다.

이효정이 상급학교로 진학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는 경기도 경성부 관훈동에 있던 학교로 천도교 재단에서 설립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 운동을 이끌었던 손병희가 학교의 설립과 관련 있어 민족정신이 깃든 사립여학교를 표방했다. 조선어 교사였던 이윤재와 신명균, 수학교사 백남규, 지리와 역사 교사 이관술이 독립운동가였다.

이효정과 가장 절친했던 동기는 김갑화, 박진홍, 이종희 그리고 1930년에 편입한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이다. 선배들은 박선숙, 허복록, 박문진 등이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조응해 실행한 경성지역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을 주동했다.출처
파일:익선동이순금집.jpg
이관술과 이순금의 익선동 집. 이효정은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단짝 박진홍과 함께 매일 이관술과 이순금의 집으로 놀러 갔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은 이화와 숙명, 배화여고보 등과 12월 9일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미 12월 2일과 3일, 경성 시내 곳곳에 총궐기하자는 격문이 뿌려져 긴장이 고조됐다. 일제경찰은 서둘러 종로경찰서에 수사총본부를 설치하고 4일 정오까지 신간회 등 독립운동 단체 간부와 학생 총 127명을 검거하며 원천 봉쇄에 나섰다. 5일 아침 40여 명을 추가로 검거했지만 학생들은 굴복 않고 7일과 11일 경성에서 대규모 시위를 진행했다.출처

만세운동에 참가한 경성의 학교는 12월 5일 경성제이고보를 시작으로 7일 경신, 중동, 보성, 중앙, 휘문, 협성실업, 숙명, 근화, 배재가 11일에는 이화, 경성여상, 동덕, 실천여학교, 경성농업, 법정학교, 고등예비학교, 전기학교, 선린상업 등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측은 1차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동맹휴업을 막기 위해 겨울방학을 앞당겨 실시한다고 발표하고 휴교했다. 일제경찰의 압박에 학교 교주와 교장이 겁을 먹고 굴종한 것이다. 이효정이 다닌 동덕을 비롯해 배화, 진명, 중앙보육, 정신, 간이상공 등은 휴학을 결정해 조기방학에 들어갔다.출처 이효정과 가장 친했던 교사 이관술은 이런 분위기에 실망해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1930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다시 한번 2차 만세운동이 터진다. 이번에는 여성단체 근우회가 앞장섰다. 경성지역 여학교 대부분이 참여해 '경성여학생운동'으로도 불린다. 근우회 임원 허정숙 등은 겨울방학 내내 경성 시내의 동덕, 이화, 배화, 숙명, 근화, 경성여자미술, 경성실천여학교, 경성여상, 태화여학교, 경성보육의 여학생 대표들을 규합했다. 참가 학교 학생들은 1월 15일 아침 9시 30분에 일제히 운동장에 나와 만세와 구호를 외치기로 약속했다.출처

이효정이 포함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도 3, 4학년 선배들이 앞장서서 모든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모여 교문 밖에 나가려 했다. 그러자 학교 교장과 일부 교사들이 선수를 치며 박선숙 등 4학년 주동자 3명을 호출해 꾸짖고 급기야 교문 밖으로 쫓아낸 후 문을 잠갔다. 하지만 쫓겨난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구호를 외치자 잠자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날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은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의 거리 진출을 막기 위해 종로경찰서에서 기마경찰까지 출동할 만큼 급박했다. "학교는 경찰 출입에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각 학교 퇴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켜라!" 동덕의 학생들은 구호를 부르짖었다.출처

2.3. 동맹휴업과 독서회

전국적인 학생만세운동의 결과 중 하나는 참가한 학교 대부분에 사회주의 학습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효정과 동기 박진홍, 이종희 등이 경성RS독서회에 참가했다. 이효정과 박진홍 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운동을 주도한 독서회 학생들은 일제경찰의 감시를 피할 암호로 사용할 목적으로 에스페란토를 활용했다. 이효정은 YMCA회관에서 친구들과 에스페란토를 공부했다.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도 1930년 3월에 이효정의 동기로 동덕에 편입한 뒤 함께 어울렸고 독서회에 참여했다. 이들이 광주학생운동 1주년에 맞춰 펼친 백지동맹을 주도했다. 시험 답안지를 백지로 내는 것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출한 것이다.출처

1931년 6월 초, 또 한 번의 동맹휴업이 경성지역의 10여 개 학교에서 벌어진다. 이번에는 학내 문제 해결과 일본인과의 교육 차별 시정을 요구했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는 광주학생운동 때부터 일제의 압박에 눌려 학생들을 통제하는 쪽이었다.출처

이효정은 휴업 초기 부모님들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작성했다.[5] 내용은 일본인 학생들에 비해 형편없는 조선인 학생의 교육에 저항하고 일제경찰의 교내 출입금지를 요구하기 위해 동맹휴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효정은 성명서를 당숙 이병기가 가지고 있던 등사기를 빌려 친구들과 직접 만들어 배포했다. 동맹휴업은 졸업한 선배들이 동창회를 만들어 힘을 실어줬지만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아 장기화 된다.출처

학교 측은 동맹휴업을 주도한 3, 4학년 참가자 거의 대부분에 달하는 100여 명에게 제명 처분을 내렸다. 그 중 박진홍과 김운라 두 명은 퇴학, 이효정을 포함해 세 명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자 1, 2학년까지 휴업에 동참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신문에서 주요 사회 문제로 연일 보도했다.출처
파일:이관술교사사직선언.jpg
1931년 6월, 동덕 동맹휴업 동조 교사들 총사직 선언(왼쪽)과 학생 단식농성(오른쪽)

이관술과 신명균 등 교사들도 학생 처벌을 풀라는 요구와 함께 전원 사직 입장을 밝혔다. 그 뒤 학교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사들의 사직을 반려하고 제명된 학생들을 복교시키겠다고 방침의 전환을 내비쳤다. 이효정을 비롯한 주도 학생 10여 명은 6월 25~26일 이틀에 걸쳐 교주 이석구와 교장 조동식의 집 앞에 찾아가 세끼를 굶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날도 경찰이 출동해 단식 중인 학생 중에서 이효정과 이종희 등 다섯 명을 체포해 갔다.출처

결국 학교 측은 최종적으로 모든 학생의 처벌을 무효로 하는 결정을 내린다. 한 달에 걸린 휴업이 마무리된 후 학생들은 전원 등교했다. 그러나 퇴학 처분된 박진홍에 대해서는 끝까지 징계를 풀지 않았다.출처

일제경찰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등 잇단 동맹휴업의 배후를 찾겠다며 이효정과 박진홍 등 주도 학생들에게 끄나풀을 붙여 감시했다. 그 결과가 경성RS독서회에 대한 검거 사건이다. 이효정은 박진홍 등과 함께 다시 한 번 경찰에 연행됐다. 1932년 2월 박진홍은 구속 명단의 맨 위에 이름을 올렸고 이효정을 비롯한 나머지 동기들은 불기소로 석방됐다.출처

이효정은 동맹휴업 때는 학교 안에서 지도부 역할을 나눠 맡았고, 학교 밖에서는 경성RS독서회(협의회) 조직에 몸담았다. 이 때 일부 교사들은 이효정에게 '예술가는 예술이나 할 거지, 뭐 정치운동은 뭐 할라고 해'라면서 심한 타박을 했다고 한다.출처

2.4. 교사 시절

이관술은 제자이면서 친동생 같았던 이효정에게 무산아동에 대한 교육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효정은 이를 받아들여 울산 동면에 위치한 민족사립학교 보성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이효정이 서울을 떠날 때 이관술은 역까지 나와 직접 차표를 끊어줬다. 하지만 보성학교에서의 교사 생활은 1년밖에 할 수 없었다. 이효정은 사상이 불순한 교육을 한다고 일경 주재소로 자주 불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강제 해임 통지를 받았다.

2.5. 노동운동

이효정은 1932년 말에 서울로 되돌아갔다. 이관술이순금의 집에 찾아가보니 둘 다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체포돼 있었다. 박진홍은 1932년 봄 RS협의회 사건으로 구속돼 형기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있었다. 이종희 등 다른 친구들은 제각기 비밀리에 공장에 들어가 활동하느라 연락이 쉽지 않았다. 이재유 그룹과 잠시 연결되었으나 이효정이 학교 근무 중 항일수업 문제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돼 보름을 있다가 나오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이관술과 이순금, 박진홍을 만나지 못한 채 권영태가 이끄는 사회주의그룹과 먼저 연결된다. 이효정이 처음 만난 권영태 그룹은 자신들이 국제적색노조의 신임장을 받은 정통이고 이재유는 파벌이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이순금이 감옥 출소 후 이효정을 찾아오면서 이효정은 그룹을 이동하게 됐다. 이 때 이효정의 당숙 이병기, 당고모 이병희도 같이 이동했다.출처

이효정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친 곳은 종연방적(鐘淵紡績)이다. 이효정은 적색노조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출처

동 공장은 여공의 식사 대우가 저열타는 말을 들엇거니와 최근에는 나프탈렌 채소중독으로 십 여인의 환자가 발생되고 공장을 떠나는 자도 접종하는 형편이라니 식사대우가 심히도 조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금도 그 최고는 월 십원 남짓하나 최저는 월 이원, 이원 오십전 가량에 불과하고 시간은 5시 기상, 5시 40분부터 취업하되 주식 시간을 합쳐 40분을 쉴 뿐이며 저녁 7시에라야 손을 띠게 된다는 바이니 13시간의 노동을 매일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사실이랴. 그리고 동 소장 말에 의하면 전보다 식사는 오히려 개량된 셈이라 하였은 즉 개량되엇다는 것이 그러할 바에야 그 전에는 과연 어떤 것을 주엇을 것이냐.
1933년 9월 8일 <동아일보>의 사설로 보도한 방직공장 여공의 처우


1933년 6월 1일 편창제사부터 조선인 여공 320명이 회사 측 수위의 구타사건으로 파업을 시작했다. 그 뒤 이효정의 동기인 이종희가 일한 중앙상공회사(8월 17일), 소화제사(8월 22일), 고려고무(8월 하순), 조선견직(9월 7일), 서울고무(9월 19일), 당숙 이병기가 일한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9월 21일)으로 연쇄파업이 이어졌다.출처

이병희와 이효정이 관여한 종연방직은 1933년 9월 21일에 파업을 시작했다. 임금인상과 여공들에 대한 각종 부당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이미 4월 말에 메이데이(노동절)을 앞두고 배포된 격문으로 한 바탕 소란이 벌어진 경험이 있었다. 이곳에 이재유 그룹은 동맹파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종연방직 회사 측은 여공 500여 명 중 400명을 해고했고 기숙생 80명 중 절반을 해고했다. 게다가 여공들에 대한 폭행사건도 발생한다. 최종 해고로 52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출처

이효정은 종연방직 파업의 배후로 지목돼 1933년 10월 17일 당고모 이병희와 함께 검거됐다. 체포 후 둘 다 모진 고문을 받았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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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정과 이병희의 검거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1933.10.19.)

경찰에 잡혀가면 맨 먼저 뺨부터 맞았다고 한다. 불이 번쩍 나게 실컷 때리고 난 후엔 물을 먹이는 물고문을 했다. 그리고 뺨을 때리기를 반복하면서 얼을 빼놓고 나서야 질문을 했다. 그래도 말을 안 하면 협박과 함께 앞의 순서를 반복했고 '비행기태우기'(두 손과 두 발을 묶어서 매달아놓는 고문)를 비롯한 고문방식은 72가지나 됐으며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출처

위는 이효정의 고문 증언이고 같이 고문당한 이병희의 고문 증언에 따르면 물고문은 주로 고춧가루를 푼 물을 사용해서 했다고 하고, 수갑을 채운 팔에 대나무를 끼워 비틀어서 고통을 주는 고문도 있었는데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고 하며, 성고문은 달군 쇠꼬챙이로 했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모진 고문을 겪었지만 둘 다 실토하지 않았기에 일본 경찰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기사도 실렸다.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고문을 이렇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문데 이효정 집안에 이육사를 비롯해 유난히 강골 독립운동가가 많다. 독립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나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본인이나 가까운 동지 등이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 입을 열었다고 보면 될 정도로 드물다. 이효정의 경우는 혐의를 입증할 다른 증거가 없어 보름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추가로 체포된 이들이 늘어나고 수사가 진척되면서 적색노조의 파업사건을 묶어 이효정은 1934년 1월 다시 체포된다. 경찰서에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편도선염으로 몸이 상했지만 풀려날 때까지 자신이 만난 동지들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40여일의 독방 구금 뒤 이효정은 다시 석방된다. 그리고 1934년 9월 증조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경찰이 급습해 또 한 번 연행과 석방을 반복했다.
파일:이효정(1935년).png
파일:이효정(1936년).png
(왼쪽·가운데) 1935년 12월 14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오른쪽) 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 뒤 안승락·안창대가 주도하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협력해 연락 업무를 담당하다가 체포되어 1935년 9월 27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를 거쳐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치되었다. 역시 고문 취조를 겪으면서 1936년 12월 28일까지 옥살이를 했다.출처

2.6. 건국동맹 활동

1938년에 세상을 떠난 성세빈의 장례에 평소 고인과 교분이 깊었던 여운형이 조문 왔는데 그때 이효정은 시삼촌 박학규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 박학규는 여운형이 주도해 만든 조선민족해방연맹(朝鮮民族解放聯盟)과 건국동맹에 참여했고, 이효정이 울산과 서울을 잇는 연락책임자를 맡았다.

2.7. 광복 후 행적

너무 감격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한 달 후에 남편이 가족을 데리러 왔어요. 그때 세 식구였는데, 친정어머니까지 네 식구였는데 울산시내로 나왔어요. 집이 없어서 부녀동맹회관에서 살았어요. 여운형 선생 와서 강연할 때 울산 대표로 저하고 어떤 처녀하고 같이 갔었어요. 그때 서울서 활동하던 진홍이도 만나고…. 한 달 후에 이관술 선생의 따님이 아버지에게 돈을 전달해달라고 해서 만났지요. 그런데 정판사 사건이 나서 체포되어 이후에는 뵐 수가 없었어요.
2009년 8월 15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


이효정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은사 이관술은 해방 후 2달이 지나 1945년 10월께 고향을 방문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전부장에 호명됐고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을 맡은 뒤의 귀향이라 너무 많은 사람이 인사를 와 마을 잔치가 열릴 정도였다. 이때 울산군 인민위원장 고원우와 조공 울산군책 유종렬 그리고 이후 남로당 울산군책이 되는 강철, 언양지역 의사면서 인민위 농민조합장이고 이관술의 병보석 기간에 그를 치료해준 안효식 등이 참석했다. 이효정과 남편 박두복 역시 그 자리에 함께 방문했을 것이다.출처

아들 진수는 해방 뒤에 어머니 손을 잡고 방문한 입암 이관술 집의 나무 모습까지 70년째 잊지 않고 있다. 결혼해 살면서 몇 차례 오고 갈 만큼 이관술 집안과 정이 두터웠다고 한다.출처

광복 후 이효정은 부녀동맹에서 일했다. 이효정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동기들과 재회한 것은 서울에서 열린 부녀총동맹대회(1945년 12월 22일~12월 24일) 기간이다. 이순금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6명의 서기국 중 유일한 여성서기였으며, 박진홍은 부녀총동맹의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이었다.출처

그러나 좌익 탄압이 시작되고 이효정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이효정은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부정적으로 봐서 남한에 남았다. 이효정 집안에 북한 체제의 경직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는 아예 북한 지역에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가장 친한 친구 박진홍과 이순금은 각각 남편과 오빠를 잃고 남한에 있기 어려워 월북하고, 남편 박두복도 월북하고, 선생님 이관술은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으로 학살당해서 이효정은 평생 그리움으로 고통받고 살았다. 이효정은 죽는 순간까지 남편보다 동덕여고 시절을 함께한 동지들을 더 그리워했다고 한다. 또한 이효정과 이병희의 집안 친척들도 학살당했다. 같이 노동운동한 이효정의 당숙 이병기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으로 학살당했다. 이병기는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했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건 전향했다는 말인데도 서훈을 못 받고 있다. 그나마 이병희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효정은 2006년 건국포장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2010년 8월 14일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 인천광역시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그녀의 유해는 2010년 8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파일:이효정박진홍동상.jpg
서대문형무소에서 재회한 이효정과 박진홍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제공)

3. EBS 기획특집 독립운동가 이효정의 나의 이야기 전체보기









[1] 안동 권씨 복야공파 집성촌이다.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2] 권태규의 아버지 권중구(權重九, 1891 ~ 1940. 6. 4)와 이효정의 어머니 권중숙(權重淑)은 남매지간이다.[3] 복야공파(僕射公派) 권병하(權炳夏, 1871 ~ 1945. 4. 5)의 장녀이다. 권병하는 1901년(고종 38) 후릉 참봉임명된 바 있다.[4] 지금의 종로3가역종묘 사이에 있었다.[5] 안재성이 쓴 소설 <경성트로이카>와 <이관술 1902~1950>은 모두 박진홍을 작성자로 적었지만 책 출간 이후 진행된 구술에서 이효정은 본인이 쓴 것으로 증언해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