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안철부(安哲夫)·김능선(金能善)·김탁근(金卓根) 김택근(金澤根)·이우점(李愚点)·정수현(鄭秀鉉) 강영근(姜永根)·김택진(金澤振)·김진선(金振善) |
호 | 은국(隱國) |
본관 | 순흥 안씨[1] |
출생 | 1908년 12월 3일[2] |
경상남도 창원부 남면 도상일운 퇴촌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3][4] | |
사망 | 1943년 6월 18일[5] |
함경남도 함흥부 함흥형무소 | |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하계리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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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안승락은 그의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2. 생애
1908년 12월 3일 경상남도 창원부 남면 도상일운 퇴촌리(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안상호(安尙鎬, 1889. 8. 6 ~ 1943. 5. 4)와 어머니 안동 권씨(1887 ~ 1956. 7. 2)[6]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화원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예관동)에 거주했다.일찍이 남면공립보통학교(현 창원상남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중퇴했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살 때 일본 도치기현 가미쓰가군(上都賀郡) 가누마정(鹿沼町) 니시가누마(西鹿沼)[7]으로 건너가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이었다. 22살 때 귀향해 다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3년 1월 상경해 신문배달 및 각종 육체노동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편, 그는 상경한 뒤 줄곧 6촌 재종제(再從弟) 안승락이 거주하던 강귀남(姜貴南)의 집에 기거했는데, 이때 공산주의자 정칠성 등과 친해지면서 점차 공산주의에 감화되었고,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했다.
이에 1934년 7월 20일부터 그해 8월 말까지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389번지 최성호(崔成浩)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허균(許均)[8]과 3차례 만났고, 9월 초부터 9월 23~24일까지 경성부 청엽정3정목(현 용산구 청파동3가) 121번지 한창숙(韓昌淑)의 집에서 허균과 같이 기거하면서 '과거의 공산주의 운동은 지식인 계급만의 운동으로 대중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로지 대중들의 마음을 얻어 공장 내 조직을 만들어 파업 등 기타 실천 투쟁을 통해 대중의식의 표준을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직은 통일되어 쉽게 혁명적 노동조합도 결성되고, 나아가 조선공산당 재건도 가능할 것이다.'·'이전과 같은 파벌 투쟁은 배척해야 할 것이고, 공산주의 운동은 오로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행해져야 한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나눴고, 이때 허균은 안창대에게 '지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파업을 일으켜 실천 투쟁을 통해 우수한 지도자를 얻고 그 지도하에 활동해야 한다.'며 대륙고무공장에 취직해 많은 동지를 포섭하고 조직을 결성할 것을 권유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 뒤 그는 최성호의 집과 한창숙의 집에서 최성호와 여러 차례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먼저 혁명적 노동조합 또는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준비공작으로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접촉해 동지를 포섭하고 공산주의 운동 그룹을 결성, 확대 및 강화하기로 협의했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항일의식 및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34년 10월 위 일로 인해 검거되었고, 1934년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5년 1월 초 귀향해 최성호의 집에서 최성호와 만나 앞으로 서로 연락하고 협력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함께 전개해나가기로 하면서, 비밀리에 통신, 연락하기 위해 그 수취인 이름 및 주소를 각각 홍파정(현 종로구 홍파동) 5번지 서강억(徐康億)으로 하기로 협의했다.
또한 그해 5월까지 최성호에게 '우리의 운동은 대중의 신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스스로 대중 가운데 들어가 실생활을 하면서 일상투쟁을 해야 한다.'·'혁명으로 나아가기까지 지식인 계급의 참가가 필요하긴 하지만, 다만 실천적·혁명적 지식인을 요구하되 문예 동아리와 같이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최성호로부터는 통신, 연락의 수취인을 서강억에서 조선일보 내 이기표(李起豹)로 변경하고 동지들에 대한 공산주의 의식 고취를 위해 적합한 서적을 보내야 하며, 지식인들의 문화운동에도 중요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대중에게 주입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이에 찬성 및 협의를 끌어냈다.
그 뒤 1935년 6월 초 상경해 그때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 경성부 재동(현 종로구 재동) 교차로, 서대문정2정목(현 종로구 신문로2가) 7번지 운수통신사 앞, 송월동(현 종로구 송월동) 경성측후소 앞산, 태평통1정목(현 중구 태평로1가) 경성일보사 부근 등지에서 최성호와 10여 차례 만나, 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준비로 관련 서적 연구를 위한 아지트를 물색할 것, 파벌투쟁을 배척하고 동지 김명순(金明順)을 파벌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여 최성호와 연락하게 할 것, 지식인 계급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케 하되 운동의 헤게모니는 노동자들에게 파악하도록 할 것, 서로 뜻이 맞는 여공들은 그 의식정도와 교제 관계 등을 미리 조사해 교제해 둘 것을 협의했다. 또한 최성호에게 대동제사의 여공 정순(鄭順)[9]을 따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더이상 노동자들은 포섭하지 말고 지식인 계급의 동지들을 포섭하는 데에 전념, 노력하도록 협의하기도 했다.
1935년 7월 말에는 다옥정(현 중구 다동) 43번지 유해길(柳海吉)의 집에서 안승락으로부터 이주몽을 소개받아 이주몽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지도할 것을 요청받아 이 사항을 서로 협의했다. 이후 이주몽과 두 차례 더 만나 냉동(현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던 대창직물(大昌織物)공장 내부 상황을 조사할 것, 최경창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지도할 것, 8월 1일 있을 반전의 날의 의의를 동지 및 노동자들에게 선전하고 공산주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도록 할 것을 명해 승낙을 받아냈다.
1935년 12월 14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그러나 곧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고, 1937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재차 검거되었고, 1943년 6월 18일 함흥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했다.
2005년 3월 1일 3·1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직장공파(直長公派) 27세 승(承) 항렬. 족보명은 안승철(安承哲).[2]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0년 12월 1일생, 순흥안씨대동보 18권 463쪽에는 1910년 7월 22일생으로 각각 다르게 등재되어 있다.[3] 순흥 안씨 직장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승락·안용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출생지인 창원부 남면 도상일운 퇴촌리 829번지는 사실 현재 의창구 퇴촌동이 아닌 의창구 사림동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1916년 지적원도에 따르면 퇴촌리 829번지는 당시 큰할아버지 안교우(安敎佑, 1855. 12. 14 ~ 1915. 1. 29)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5] 음력 5월 16일. 순흥안씨대동보 18권 463쪽에는 5월 26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6] 권시술(權時述)의 딸이다.[7] 현 도치기현 가누마시 니시가누마정(西鹿沼町).[8] 이명 허마리아(許馬尼阿).[9] 이명 정인정(鄭寅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