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앗카 류보(安家龍鳳) |
이명 | 김상수(金尙洙, 金相洙)·김성수(金性洙)·김학주(金學周) 김학동(金學童)·김학수(金學壽)·김수개(金壽介) 안승현(安承賢)·김명산(金命山)·김달문(金達文) 김종수(金鍾洙) |
호 | 소천(素天) |
본관 | 순흥 안씨[1] |
출생 | 1912년 4월 1일 |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2][3] | |
사망 | 1950년 7월 24일[4] |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삼정자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삼정자동) | |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화양리 봉록원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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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2년 4월 1일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안임상(安任相, 1892 ~ 1943. 10. 26)[5]과 어머니 절강 팽씨(浙江 彭氏, ? ~ ?. 7. 20)[6] 사이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창원군 창원면 반계리(현 창원시 의창구 반계동)[7]으로 이주했다.가정 형편이 빈곤한 관계로 8살 때부터 빈농인 아버지를 도와 농업에 종사했고, 1922년부터 3년간 사립 퇴촌야학회(退村夜學會)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1928년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의 한 방직공장에서 직공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야마현 도야마시 시미즈마치(淸水町) 제1에 있던 라미노 방직주식회사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그 뒤 1930년 8월 다시 조선으로 귀향해 잠시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1930년 9월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가회동(현 종로구 가회동)·봉래정2정목(현 중구 봉래동2가)·봉래정4정목(현 중구 만리동2가)·고시정(현 용산구 동자동),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현 마포구 아현동)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용직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 사이 22촌 지간의 족제(族弟)이자 동향 출신인 공산주의자 안승락을 만나게 되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1933년 6월부터 경성부 계동 61번지 등지에서 안승락에게서 22촌 지간의 족형(族兄) 안창대, 강귀남(姜貴男) 등과 함께 『자본주의에서 온 제2 빈핍물어(第二貧乏物語)』 등을 교재로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 및 실천에 관한 교육을 받은 뒤 공산주의에 감화되었고, 그해 9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검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모두 가까스로 면했다.
1934년 3월에는 시흥군 영등포면 영등포리(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에서 일하던 중 우연히 김희성(金熙星)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 9월부터 경성부 봉래정2정목에서 김희성에게 공산주의 이론 및 그 실천에 관해 교육을 해준 뒤 동지를 포섭해 소개해달라는 권유를 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 뒤 1935년 1월 경성부 봉래정1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1가) 봉래교(蓬萊橋)[8] 위에서 김희성의 소개로 정재봉(鄭載鳳)과 알게 되었고, 봉래정4정목 124번지[9] 등지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이때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파벌 운동에 대한 비판 및 지금부터 바뀌어야 할 운동 방침, 국제정세에 대한 검토, 이후 있을 자본주의국가 대 소비에트 전쟁에 대비한 적색 노동조합의 필요성 등을 논의했고, 이러한 논의의 실행에 관해 협의를 하며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을 모색했다.
한편, 1934년 가을 고양군 한지면 상·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도선동)에서 안창대의 소개로 경성고무공업(京城고무工業)[10] 합자회사에서 여공으로 근무하던 맹계임(孟桂妊)을 소개받아 1935년 봄부터 봉래정4정목 124번지 및 고시정 5번지에서 동거하기 시작했고, 친밀한 관계를 맺은 뒤 공산주의 이론 및 실천에 관한 지도를 했다.
또 1935년 2월에는 경성부 봉래정2정목에서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으로 통하는 도로[11]에서 정재철(鄭載轍)의 소개로 안(安) 아무개와 권우성(權又成) 등을 알게 되었고, 그해 3월 말까지 태평통2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2가) 115번지 조선신문사 앞에서 여러 차례 만나 파벌을 멀리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할 것, 코민테른이 발표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이론을 채용할 것, 비합법적 적색 노동조합을 조직할 것 등을 협의했다.
1935년 4월부터는 경성부 청엽정2정목(현 용산구 청파동2가)과 금정(현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등지에서 이와무라(岩村) 제사공장의 직공으로 근무하던 김희성과 여러 차례 만나 김희성에게 같은 공장 내 직공들을 포섭할 것을 권유했는데, 때마침 그해 7월 19일 김희성에게서 회사 측이 남자 직공 15명과 여자 직공 50명을 해고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고수당 3개월분의 요구를 구실로 공장 내 모든 직공들을 규합해 동맹파업을 이끌어냈다.
또 1935년 5월 초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147번지 김낙기(金洛基)의 집에서 첫째 남동생 안용대(安龍大, 1916 ~ 1946. 3. 15)[12]와 동거하던 중, 김희성의 소개로 이영섭(李永燮)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에 동생 안용대와 이영섭에게 『자본주의에서 온 제2 빈핍물어(第二貧乏物語)』를 비롯한 여러 종의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교재로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실시했고, 그해 7월 동맹파업 직후 퇴직한 김희성도 함께 살게 되자 김희성과 함께 안용대와 이영섭을 가르쳤다.
그 뒤 1935년 8월 초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62-1번지 김희성의 아지트에서 7일간 억류되어 있던 김희성에게 '이번에 이와무라 제사공장에서는 직공들이 불법으로 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단결과 훈련 없이 아무렇게나 투쟁을 해 버렸다. 이후에는 이와 같은 실패가 없도록 교육훈련을 거쳐야만 한다.'고 하면서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진보적 학생제군에게 격문」·「동지 로죠후스키 및 헨케츠토의 보고에 기초로 함.」 등의 펜으로 쓴 격문을 건네고 격문의 내용을 실행할 것을 권유했으며, 자신이 경성부를 떠난 뒤에는 안임균(安任均)의 지도하에 안용대를 지도할 것을 김희성에게 부탁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해 1935년 8월 중순부터 이와무라 제사공장의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그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이를 피해 고향 창원군(현 창원시)과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등지를 전전하며 숨어다니면서도 번번이 체포를 면했고,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이론을 채용해 적색 노동조합 또는 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그 내부에서 우수한 구성원을 발탁해 조선공산당을 조직한 뒤 공산당 중심의 폭력 혁명을 통해 조선을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이탈하고 독립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공산주의 운동에 임했다.
그 뒤 1936년 6월 말에는 경상남도 부산부 영주정(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442번지 안치원(安致遠)의 집에서 경성부로부터 검거를 피해 도피 중이던 김희성과 만나 은신처와 숙박료 2원 40전을 제공했고, 잠시 상경해 경성부 내수정(현 종로구 내수동) 명남여관(明南旅館)에 이틀간 묵으며 김희성과 함께 경상남도 부산부와 경기도 경성부 중 관내 모든 지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편한 곳을 정하기로 했다. 이에 경성부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한 뒤 김희성에게 경비 3원을 제공하고 상경할 것을 권유해 승낙을 얻어냈다.
이렇게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산주의 선전 및 항일 투쟁에 종사했다.
1940년 12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그러나 1940년 9월 검거된 그는 1941년 3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법정 공소취하로 인해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 뒤 17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942년 10월 30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47년 창원동공립국민학교(현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서, "지금의 해방은 껍데기 해방"이라며 연설을 했고, 이듬해인 1948년 5월 10일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남과 북으로 영원히 가르기 위한 선거"라고 평가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를 확고히 했다.
이에 당시 이승만 정부의 미움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는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여러 차례 진해경찰서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진해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 뒤 재판절차 없이 결국 그해 7월 24일 창원군 상남면 삼정자리(현 창원시 성산구 삼정자동)의 어느 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사후 유해가 수습되어 창원시 의창구 동읍 화양리에 안장되었다가, 2003년 3월 15일 공원으로 재조성되어 '봉록원(鳳綠園)'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 뒤 일남일녀의 장남 안인영(安仁榮, 1936. 7. 23 ~ )[13]의 갖은 노력으로 2006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직장공파(直長公派) 27세 승(承) 항렬. 족보명은 안승봉(安承鳳).[2] 순흥 안씨 직장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승락·안창대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출생지인 퇴촌동 311번지는 현재 마산가포고등학교 부지에 있던 마산대학(현 창원대학교)가 1983년 현재의 캠퍼스로 이전해오면서 창원대학교 부지에 편입되어 사라진 지번이 되었다. 대충 창원대학교 운동장·사회과학대학(22호관) 사이에 퇴촌동 311번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6년도 지적원도에 따르면 당시 상남면 퇴촌리 311번지는 조부 안치용(安致庸, 족보명 안교석安敎奭, 1856 ~ 1947. 9. 24)의 소유였다.[4] 순흥안씨대동보 18권 588쪽 참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57년 8월 2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족보명 안유호(安有鎬).[6] 팽관석(彭寬錫)의 딸이다.[7] 당시 거주하던 반계리 1017번지는 현재 팔용동 차룡단지에 편입되어 그 일부가 되었다.[8] 염천교 동쪽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9] 현재 만리동2가 124번지. 서울역 센트럴자이가 들어서 있다.[10] 당시 경성부 강기정(岡崎町,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5번지에 있었다.[11] 현재의 만리재로로 추정된다.[12] 족보명 안승태(安承泰).[13]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교사 출신으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2019년에는 순흥안씨대종회 부회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