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전선학(錢鮮鶴)[1], 김응삼(金應三)[2] |
출생 | 1910년 12월 |
평안북도 선천군 산면(山面) 성적동(聖蹟洞) | |
사망 | 1942년 6월 |
중국 저장성 란시시 란시역 전사 | |
학력 |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제 4분교, 제 9총대(總隊) 보병과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통계국 참모훈련반 졸업 |
경력 |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 조직부장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훈련조장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將)[3] |
묘소 | 중국 저장성 진화시 어딘가 |
상훈 | 대통령표창(1963) 건국훈장 애국장(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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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0년생으로 추정된다. 1935년 10월 김구(金九)가 난징(南京)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던 학생훈련소에 참가하였다. 학생훈련소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한인청년들을 일시 수용하여 사전 예비교육을 하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난징성 동관터우(東關頭)에 있었다. 이때 전선학(錢鮮鶴)[4]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1936년 7월,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을 결성하고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김구가 주도하던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일부 청년들의 탈퇴로 특무대독립군이 해산되자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생들과 학생훈련소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한국국민당의 외곽단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단장은 나태섭(羅泰燮)이었다.
한국국민당청년단 조직부장을 맡아 김인(金仁)·안우생(安偶生)·이재현(李在賢) 등과 광저우(廣州)로 파견되어 이곳에서 한국국민당 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을 벌였다. 광저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김덕목(金德穆)·이흥관(李興官, 이명 (馬超軍)) 등과 협력하여 조선민족혁명당 광저우지부 소속 안병무(安炳武)·한태인(韓泰寅) 등을 끌어들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37년 2월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으로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조직하였다.
1938년 8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제 4분교에 입학하여 제9총대(總隊) 보병과에서 훈련을 받고, 1940년 5월 김덕목과 함께 제 16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군으로 1940년 8월 지난(濟南)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중국군사위원회 통계국 참모훈련반을 졸업하였다.
2.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국광복군 창설 이후 중국 각 지역에서 한인청년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시작할 때, 징모 제3분처에 배속되었다. 징모 제3분처는 1941년 3월 성립되었고, 충칭 오사야항(吳師爺巷)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훈련조장을 맡아 주임 김문호(金文鎬)와 함께 활동하였다. 징모 제3분처에서 활동하면서 한도명(韓道明)[5]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1941년 4월 김문호, 정보조장 이지일(李志一, 본명 이규학李圭鶴), 회계조장 신정숙(申貞淑)과 함께 중국군 제 3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로 파견되었다. 상라오에 도착하여 왕자위엔(汪家園)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징모처제3분처’와 ‘한국독립당 광복군 제8지구 특별당부’라는 간판을 내걸고 공작 활동에 들어갔다. 제3전구 특무단본부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신문하여 적정(敵情)을 수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 대원 확보에도 힘써 짧은 기간 동안 2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군 제5전구 전시간부훈련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형석(金亨錫)·강치명(姜治明)·전복근(全福根)·유상공(劉尙功)·유상운(劉尙云)·유증영(劉增榮) 등을 포섭하여 징모 제3분처에 참여시켰다. 또 중국군과 교섭하여 중국군 부대에 포로로 잡혀 수용되어 있던 한인 병사 한진원(韓鎭源)·이명식(李明植)·이기수(李基洙)·정봉수(鄭逢水)·김운경(金雲慶) 등을 데려와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1942년 7월 광복군이 전면적으로 부대개편을 단행하면서, 징모 제3분처는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편제됨에 따라 그 분대원이 되었다. 분대장은 김문호였다.[6] 이들이 제 3전구지역에서 활동하였다고 하여, 제 3전구공작대라 부르기도 했다. 중국군 제3전구지역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전선의 변화에 따라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난핑(南平), 장시성 옌산(鉛山) 등지로 소재지를 옮겨 다니며 활동하면서 많은 한인 청년을 초모하였다.
3. 전사
1942년 4월 일본군이 왕징웨이(汪精衛) 군대에 합세하여 저장성(浙江省) 란시현(蘭溪縣)을 공격할 때 중국군 제 13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최일선에 나아가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 포로 신문 등을 수행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 저장성 진화시(金華)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4. 참고문헌
한도명의 공적정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7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11·234·236·615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32·44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2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71·910면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75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25·231·265·389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379면
[1] 첸시안허라고 불렀을 것이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때 사용한 가명[2] 본명[3]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강남분대)라고도 불리나 동명의 분대가 시안(西安)에 있었기 때문에 '제 3징모분처'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었다. 실지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제 2지대 본부가 있던 산시성 시안과 제 3분처가 있던 젠양과는 수천킬로미터에 있었기 때문에 통신연락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4] 첸시엔허[5] 한다오밍[6] 총사령부로부터 수천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관계로 왕래가 쉽지 않아 제 3징모분처 그대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