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규학(李圭鶴)[1], 이백건(李白建, 李伯健) |
본관 | 경주 이씨(慶州李氏) |
출생 | 1914년 8월 30일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北內面) 내룡리(內龍里) 243 | |
사망 | 1964년 3월 12일 |
학력 |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제 16기 졸업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군령부 첩보참모 훈련반 수료 |
독립운동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위원 겸 정보조장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將)[2]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원[3]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과장[4]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장 겸 경위과장[5] 소·절(蘇浙) 지구 특파원[6]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65호[7] |
상훈 | 건국포장(1977) 건국훈장 애국장(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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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1년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위원 및 정보조장, 1944년 내무부 경무과 과장 겸 경위대 대장, 1946년 주화대표단 부주석2. 생애
1914년 8월 30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 내룡리(內龍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지일(李志一)·이백건(李白建, 李伯健)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국광복군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1941년 3월 1일 충칭(重慶) 우스예항(吳師爺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성립식이 거행된 한국광복군 제3분처 주임위원 겸 선전조장 김문호(金文鎬)의 ‘위원 겸 정보조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중국군 제 3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파견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징모처(徵募處) 제3분처’ 및 ‘한국독립당 광복군 제8지구 특별당부’라는 간판을 내걸고, 상하이(上海)·난징(南京) 일대를 무대로 광복군 모집활동을 벌였다. 또 중국군 제 3전구 특무단(特務團) 본부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상대로 한 심문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42년 4월말 제3분처는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역사학자 이현희와 인터뷰에서 안병무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김문호와 이지일과 사이가 벌어져 있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제 3징모분처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44년 7월 1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당시 맡고 있던 내무부 경무과 과장 겸 경위대(警衛隊) 대장 직위에서 해임당하였다. 이어서 7월 28일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사람을 구타하고 또는 외국 경찰원을 대동하고 정부에 침입하여 사람을 납치하려”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자의 자격’을 정지시키기로 의결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장과 경위대장을 맡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지만, 폭행·소란 사건의 경과나 이유 등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0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독립운동자 자격 정지’ 조처를 해제하기로 의결한 사실을 통해, 일제 패망기 임시정부 운영과 안전관리 업무 등을 담당한 실무인력의 일원으로 역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광복 후
광복 직후에는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 회장: 선우혁) 활동에 참여하여, 이강·장덕로·서병호 등과 함께 한인의 안전 도모와 귀국 지원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1946년 3월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동북대표부(東北代表部) 부주석으로 파견되어 공석 상태이던 주석을 대신하여 동북대표부를 이끌었다. 현지의 민회연합회(民會聯合會), 회장: 신숙(申肅)와 보조를 맞추어 교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귀국을 지원하는 등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 말 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東北總辦事處, 동북대표부의 후신) 부처장 직을 사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4. 참고문헌
이지일의 공적정보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36·314·471·608·715·726·77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6·828·829·85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11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 37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3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2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