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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56:10

환남사변

1. 개요2. 배경3. 장제스의 최후통첩4. 다른 시각5. 결과

1. 개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1월, 장강 이남에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신사군안후이성 남부[1] 징현(泾县)에서 중국국민당국민혁명군 제3전구 제32집단군의 공격에 궤멸된 사건.

2. 배경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했고 국민당은 공산당에 국가 안의 국가와도 같은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는 통 큰 양보를 한 바가 있었지만 양측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애초에 둘은 서로를 믿지 않았는데, 장제스는 여전히 ‘붉은 고질병’을 뿌리뽑을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 마오쩌둥 역시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꿈을 단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공산당은 군사위원회가 지정한 팔로군의 활동 영역을 무시하고 화북에서 자꾸만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홍군의 활동은 항일 투쟁이 아닌 공산당 통치 지역의 확대였다. 홍군은 전쟁 초기에는 옌시산의 지휘 하에 배속되어 항일 투쟁을 하였고 평형관 등에서 승전보를 올렸지만 거대한 중일전쟁을 돌아보자면 보잘것없는 국지전에 불과했다. 해방구 확대에 나선 결과, 중일전쟁이 일어난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산당은 수만 단위의 소규모 군대에서 140만 대군을 보유하고 1억명의 인구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화북을 넘어 항일과 관계없는 서북 지역으로 뻗어갔고 장강 중, 하류에 미쳤다.

이러한 행보에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왕밍이 항전의 실질적 여력은 국민당에 있으며 항일의 역량을 위해 충칭정부에 복종함으로서 통일전선에 모든 일파를 결집시켜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는 그를 우경 투항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힘의 70%를 역량 확대, 20%를 국민당 투쟁, 10%를 항일 투쟁에 쓸 것을 지시했고 홍군은 이에 따라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이미 실각한 왕밍과 주더까지도 크게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1942년의 정풍 운동을 통해 자신의 반대파들을 남김없이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립했다.

3. 장제스의 최후통첩

항일보다 세력 확장에만 여념이 없는 공산당의 모습에 국민당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공산당이 항일 투쟁에서 한 것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공산당은 1940년 8월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크게 화를 냈고 작전을 주도한 펑더화이 등을 질책했다.

일단 1940년 시점에서 장제스가 가장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은 신사군이었다. 수가 장장 10만명으로 불어난 신사군은 국민당의 거점이던 난징, 상하이 등지에서 활개치고 다니며 국민당의 기반을 흔들고 다녔는데 이는 엄연한 협정 위반이었고, 장제스의 핵심 본거지인 상하이와 난징에서 공산당이 설치고 다닌다는 것은 다른 반장 세력의 반기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신사군을 치워버리는 것은 반장세력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1940년 9월 군사위원회는 신사군을 황하 이북으로 이동시킬 것을 공산당에게 요구했다. 공산당은 비정규군을 옮길 수 없다고 거부했고 군사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 신사군을 강북으로 옮기고 1월 30일까지 황하 이북으로 옮기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이충시는 신사군 축출에 무력이 필요하다고 단언했고, 장제스는 만약 신사군이 말을 듣지 않으면 섬멸해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더 이상 신사군이 설치게 놔두는 것은 자존심은 둘째치고 장제스 정권에 위협이 될 판이었다. 장제스가 정말로 열받았다는 것을 안 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통해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았고 이에 주더는 신사군을 철수시켰다. 만약 신사군이 협정을 지키지 않을 시에 즉각 공격하기 위해서 국민당 지휘관들은 눈에 불을 켰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1941년 1월 4일 신사군 사령부의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은 장시성의 옛 공산당 유격 요새로 향하는 듯했으나, 그 와중에 국민당 정찰대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즉각 항의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이 안전을 보장했다는 이유로 공격 보고를 거짓말로 치부했다. 굶주린 신사군 1만명은 안후이성 남부에 위치한 징현이라는 곳에 포위되었고 신사군 사령관 예팅은 장제스에게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전보를 보냈으며 징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장제스는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1941년 1월 12일 국민당 제3전구 제32집단군 소속 7개 사단 8만명의 맹공이 시작되었고 전투가 다 끝난 1월 14일에 마오쩌둥은 장제스와의 휴전이 합의된 것이란 전보를 보냈다. 예팅을 비롯한 3천명이 포로가 되었고 최소 3천에서 최대 7천명[2]이 살해되었으며 2천명만 겨우 도주에 성공했다. 포로들은 가혹하게 대우받았고 예팅은 5년간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에야 석방되었지만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이 참사는 국공합작의 숨통을 끊어놓는 계기가 된다.

4. 다른 시각

그러나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상해 사변 당시에 천두슈를 기반으로 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국제당(제3인터내셔널)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과 긴밀한 협력만을 강조하다가 한꺼번에 털렸기 때문에 당시 중공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언제든 다시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계심에 국민정부군 수준과 비슷한 항일전을 쉽게 치를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또한 위에 신사군의 병력이 10만이라고 쓰여진 것은 관련 국민정부 추정치가 있기 때문에 틀린 말이라고 볼 수 없지만, 중국 공산당 계열의 군대의 수가 2년 지난 시점에서 140만이라는 것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확실한 것은 당시 국민정부군의 군사력에 비하면 상당히 쪽수도 부족하고, 물자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다라는 게 정설이다.[3]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에게 국민당과 비슷한 수준의 항일을 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공산당에게 '자멸'을 요하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0년 5월 당시의 5.4 지시로 반공파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명도 있는데, 이는 6월에 다시 주은래를 기반으로 한 온건적 타협파(급진적 타협파는 왕밍이 아닌)들에 의해 철회된 주장이다. [4]

또한 위의 글 중에서 2차 국공합작 직후 공산당이 지방군벌들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감행했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안에서도 내부의 의견 차로 인해 사소한 다툼이 자주 일어났었고, 이러한 사소한 싸움의 시작을 일률적으로 모두 공산당의 탓으로 몰 수 있는 자료,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5. 결과

이 사건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해 관계가 얽혀 터진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먼저 대규모 공격에 나선 쪽이 국민당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이 사건을 반장 선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또한 국민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한 왕밍과 그 일파가 실각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따라서 '자주적 통일전선론'을 주장했던 마오쩌둥이 정풍 운동에서 더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 사건이 되기도 했다.


[1] 환남사변의 '환남'이 사건이 일어난 안후이성 남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환(皖)'은 안후이성의 약칭이다.[2] 필립 쇼트의 경우 9천 명이 살해되었다고 본다.[3] 강현사 저, 『抗日戰爭時期 新四軍 연구 : 統一戰線 정책을 중심으로』(고려대-박사, 2004년) p. 64[4] 강현사 저, 『환남사변과 통일전선 : 발발 원인을 중심으로』(중국근현대사학회, 2002년) p.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