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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형석 | 2대 김봉철 | 3대 김계원 | 4대 정래혁 | 5대 이치업 | |
6대 박경원 | 7대 김동수 | 8대 전부일 | 9대 안광영 | 10대 이준학 | |
11대 임지순 | 12대 나희필 | 13대 윤흥정 | 14대 최영식 | 15대 김선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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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윤인하 | 22대 편장원 | 23대 양상태 | 24대 오형근 | 25대 김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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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김종태 | 37대 김정수 | 38대 허강수 | 39대 정해일 | 40대 정진팔 | |
41대 민인기 | 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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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6년 12월 6일 |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우각리 (현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 | |
사망 | 1982년 2월 20일 (향년 65세) |
서울특별시 | |
이명 | 김강(金剛)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경주 김씨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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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16년 경기도 인천부에서 태어났다. 1923년 아버지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운영한 인성학교를 졸업하였다. 1936년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제25사단에서 견습사관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난징으로 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1939년 박기성 등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해 나월환의 휘하에서 부대장(副隊長)을 맡았다.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후 제5지대 부지대장 및 제1구대장을 역임했다. 1942년 지대장 나월환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직후 사면되어 제2지대에서 활동했다. 1945년 4월 임시정부 경위대장을 맡았고, 해방 후 1946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교포의 귀환을 돕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 특임 5기를 졸업하였고, 6.25 전쟁 당시 8사단 16연대 연대장으로 안동·의성전투, 영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1950년 8월 제1기갑연대 부여단장을 역임하고, 직후 제1기갑연대장을 맡아 대관령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951년 3월 대관령에서 중공군과 맞서다 아군 80%이상 전멸하였다.
1952년 10월 박정희 등 고참급 대령들과 함께 포병 고등군사반에 선발되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1953년 제15포병단장으로 부임해 금성전투에서 활약하였다. 1954년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수송감, 고사포여단장, 제27보병사단 사단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전역하였다.
전역 후 광복전우회와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활동하였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인천중공업 감사로 활동하였다. 1970년 제2대 현충사 관리소장에 임명되어 1972년까지 근무하였다. 1982년 2월 20일 사망하였다.
사망 후 2012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