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2-06 14:21:54

신악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11, #a11 20%, #a11 80%, #a11); color: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김철호 나석주 남정각 박문희
박자혜 박재혁 박차정 박희광
배동선 배중세 배치문 서상락
송천흠 신악 신영삼 신채호
신철휴 오성륜변절 유자명 윤세주
윤치형 이구연 이병철 이병희
이성우 이수택 이육사 이종암
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 펼치기 · 접기 ]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 펼치기 · 접기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 펼치기 · 접기 ]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동화(李東華)·신영삼(申榮三)·신창우(申彰雨)·신뇌호(申瀨湖)
출생 1893년 3월 18일[1] [2]
경기도 양근군
(현 경기도 양평군)[3][4]
사망 1941년[5]
1942년[6]
1944년[7] (향년 53세)
중화민국 충칭시
본관 고령 신씨[8]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9]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901 의열기념관
상훈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여담5.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27년 8월 황포군관학교 졸업, 의열단 가입 후 1931년부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과 학생대장으로 활동, 조선혁명당 중앙검사위원, 민족혁명당 서기부 재무과장 등을 역임, 1941년 이후 충칭에서 조선의용대 부대장, 광복군 1지대 대부로 활동

2. 생애

1892년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아버지 신병휴(申炳休, 1854 ~ ?)와 어머니 밀양 박씨(1854 ~ 1891)[10]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정2정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46번지[11]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신악의 집안은 직계 5대 내에 고조부 신현록(申顯祿, 1743. 7. 27 ~ 1789. 4. 24) 외에 4대가 벼슬길에 나아간 당대의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 신병휴는 1887년(고종 2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한 뒤 사간원 대사간(정3품)과 병조 참의(정3품) 등에 올랐고, 조부 신만구(申萬求, 1806. 12. 26 ~ 1884)는 1840년(헌종 6) 식년 진사시에 3등 68위로 입격한 뒤 음서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3품)에까지 올랐다. 생조부 신헌구(申獻求, 1823. 5. 7 ~ 1902)는 1862년(철종 13) 정시 문과에 병과 5위로 은사(恩賜) 급제한 뒤 예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증조부 신응모(申應模, 1784. 9. 21 ~ 1864)는 1822년(순조 22) 식년 진사시에 2등 7위로 입격한 뒤 음서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올랐다. 5대조 신택권(申宅權, 1722 ~ 1802)은 1763년(영조 39) 증광 생원시에 2등 25위로 입격한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에 올랐다.

3. 독립운동

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26년 11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 5기생[12]으로 입교하였다. 장흥(張興) 안유재(安維才) · 장익(張翼) · 김호원(金浩元) 등과 함께 보병과 소속되어 교육받고 1927년 8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하였으나, 곧 중국 군적을 포기하고 의열단(義烈團) 활동에 합류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운영에 있어 중심 인물로 참여하였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열단간부학교·조선혁명군사훈련반·남경선인군관학교(南京鮮人軍官學校) 등으로 불린 이 학교는 1932년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과 조선혁명당의 조직 강화와 전위혁명가 양성을 위해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한 일종의 군사·정치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의 대부실(隊附室)에서 근무하며 보병조전·부대교련·군제학 담당 교관을 맡았으며, 학생대장도 지냈다.

1934년 4월 20일 거행된 2기생 졸업식에서, “나는 20여 년간 해외를 유랑하며 혁명에 몸 바쳐 왔지만, 하등의 내세울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 부끄럽게 생각한다. 혁명을 위해서 죽겠다는 마음을 갖고, 특히 작년부터 군관학교를 세워 혁명운동에 종사할 간부를 양성하여 침체해 있는 민족운동의 근본을 확립하려고 한다. 교관으로서 제군들에게 혁명운동의 경험을 얘기하고 지도하고 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훈화를 하였다.

한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검사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며, 1935년 7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결성 후에는 서기부 재무과장을 맡았다. 1935년 10월 21일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8월 29일에 열린 남경한족회(南京韓族會) 제5차 대회에서 교제위원(交際委員)으로 선정되었다. 이어 1937년 1월에 열린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윤기섭(尹琦燮)·윤세주(尹世胄)와 함께 남경구(南京區) 대표 구제위원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상반기 조선의용대 주력이 중국공산당 항일근거지로 이동한 후에는 충칭(重慶)에 남아 조선의용대 기요조(機要組) 조장으로 활동하였고, 이어 조선의용대 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뜻을 따라 조선의용대 일부 부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합류하고 나서는 광복군 제1지대 중교(中校)[13] 지대부(支隊附)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파일:qRd1W0Eew6.jpg

1944년 6월 2일 오후 스촨성(四川省) 바둥현(巴東縣)에서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4. 여담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 제 1지대 본부구대장을 했던 김승곤지사의 기억에는 얼굴에 흉터가 선명했다고 한다.[14]

5. 참고문헌

신악의 공적정보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18·301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0·426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7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184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18 549·602·679·685·715·716·748·977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151 26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7·78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39 74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89 373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52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1 466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5권 81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408·722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59 862 863 88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132면


[1] 공훈전자사료관과 독립기념관 자료에 의거함.[2]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는 1890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독립유공자 공훈록[4] 용의조선인명부에는 평안도 숙천도호부 우상방 도덕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가 출신지 겸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다.[5]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사망날짜가 1941년 3월 7일[6]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는 1942년 봄에 충칭에서 전사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7]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1944년 6월 2일[8] 귀래정공파 24세 우(雨) 항렬. 족보명은 신창우(申彰雨).[9]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10] 박기회(朴氣會, 1817 ~ ?)의 딸이다. 박기회는 1858년(철종 9) 식년 진사시에 3등 16위로 입격한 뒤 안산군수(安山郡守, 종4품)와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종4품) 등을 역임했다.[11] 현재 이 지번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작가갤러리가 위치해 있다.[12] 공훈전자사료관에는 4기로 오타.[13] 국민혁명군 중령계급[14]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 광복군편, 면담자 | 김행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부장) 면담일시·장소 | 2001년 12월 1일, 12월3일·서울보훈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