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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0:07:19

홍가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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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파일:홍가륵(프로필).jpg
홍가륵의 수의사자격증에 부착되어 있던 사진.
1946년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홍가근(洪加勤)·원세무(元世武)·원홍무(元弘武)
김웅진(金雄鎭, 金雄眞[1])·김수환(金秀煥)
홍가동(洪加董)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출생 1913년 10월 19일
경기도 남양군 음덕리면 동양동
(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3]
사망 1950년 7월[4] (향년 36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종교 기독교(개신교, 감리교)
묘소 [5]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3년 10월 19일 경기도 남양군 음덕리면 동양동(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의 양반가에서 감리교 목사인 아버지 홍형준(洪亨俊, 1888. 5. 25 ~ ?)과 어머니 경주 김씨애서덕(金愛西德, 1889. 10. 25 ~ ?)[6]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홍수정(洪水晶)이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 홍옥정(洪玉晶), 남동생 홍성달(洪性達), 여동생 홍석정(洪石晶), 남동생 홍성만(洪性萬)이 있었다.#

조부 홍승하(洪承河, 1863. 7. 15 ~ 1918. 1. 1)는 경기도 남양도호부 영흥면 내리(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내리) 출신으로 일찍이 감리교에 입교하였고 1903년 하와이에 선교사로 파견갔다가 그곳에서 윤병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교포의 지위향상 및 권익옹호, 항일독립운동 등의 목적을 위해 진력하였다.

아버지 홍형준은 당초 농업에 종사했으나 1918년 조부 홍승하의 별세 직후 그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으며, 1935년부터 1948년까지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면서 창씨개명·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다가 진천경찰서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는 등 3대가 민족운동에 종사하였다.

1922년 아버지가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현 오산시 오산동) 소재 오산예배당으로 전근가자 그곳으로 이사하여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오산 성호초등학교)에 진학하였다. 1927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내내 가난한 집안 사정[7]으로 인해 당시 교장이었던 헨리 닷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8]의 사택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이때 민족의식을 자각하여 이후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다.

1932년 3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같은 해 8월 말~9월 초 사이 조부의 옛 친구였던 정재관(鄭在寬) 목사의 소개로 하와이에서 갓 귀국한 경성부 교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북동) 거주 김기순(金基淳)의 외동딸 김은혜(金恩惠)의 가정교사가 되어 근무하다가, 그 해 11월 초 김기순이 황해도 안악군에 땅을 구하여 이사하게 되면서 실직하였다.
● 마도 나오하루(馬度直治) 순사 : 어째서 조선독립운동을 할 마음이 생겼는가.
● 홍가륵 : 그것은 일시 작심이 아니라, 오랫동안에 걸쳐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는 당위성이 내 자신의 심정으로 온양되었으므로 그 경위를 진술하겠다.
전술한 바도 있지만, 우리 집은 조부 시대부터 기독교에 열중 귀의한 관계로 나도 유년 시절부터 성서를 배웠다. 유년 시절은 그저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익히고 있다가, 철들 무렵이 되고서는 자신이 사회적으로는 불우한 처지임을 알았고, 이어서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이 윤택한 생활을 하는데, 반대로 조선 민족대중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극히 불우한 처지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 부자연한 사리를 깊이 궁리해 본 결과 조선민족이 그러한 불리한 지위에 있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 탓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싹터오고부터는 성서를 공부해도 그 때까지는 그저 정신적 하늘나라를 설교하는 것으로 교리 그대로 순종하며 해석했으나, 그 뒤로는 현실사회에 비추어서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馬太」 「馬可」 「누가」 「요한」의 네 가지 복음 중 아마 「마태」의 어느 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에 있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하는 구절[9]에서 교의의 실제는 그 나라 즉 「천국」의 뜻, 즉 「대의명분」을 구하여라. 「그러면 사람 세상의 만사는 해결되리라」라고 한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 대하여, 이것은 조선의 현상에 비추어 조선민족은 지상천국을 먼저 건설함에 있어서 빼앗긴 조선국을 탈환 독립케 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것이 나의 조선에 대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조짐이었고, 그것은 내가 배재고등보통학교 2, 3학년생 때의 일이었다.
1934년 11월 14일 경기도경찰부에서, 사법경찰관 사무취급 경기도순사 마도 나오하루의 신문 내용 중.참조

이때 그는 항일운동에 가담하기로 하고 1932년 11월 평안북도 의주군만주국 봉천성 봉천시를 경유하여[10] 1933년 9월 13일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김원봉과 접촉하여 난징으로 갔으며 그해 9월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동시에 조선혁명간부학교[11]에 2기생으로 입학하여 정치교육 및 정신교육, 그리고 법령·군사지식·정보·폭파·전술 등 각종 군사기능 숙련을 골자로 하는 군사교육을 받았다. 또 이 즈음에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홍가륵은 6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20일 졸업했다. 같은 해 5월, 교관 윤세주로부터 2기생의 선발대로서 조선에 침투하여 동지 규합 등의 공작 활동을 수행하라는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였으며, 당시 아버지 홍형준이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현 아산시 온천동)의 예배당에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기에 홍가륵 또한 아산에 체류하면서 본적을 두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추진하고 반제국주의자들을 규합하여 반제동맹을 결성하여 국내에 의열단 선전 조직을 구축하려고 도모하였으며, 또 그해 9월부터 11월 일본군 순사, 아산군 면사무소 서기, 철도종업원 등의 채용 시험에 지원하여 일제 당국의 기밀을 탐지하고 행정기관에 지하조직을 결성할 것을 꾀했으나 앞서 검거된 동지의 자백으로 그해 11월 11일 온양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파일:홍가륵.png
1935년 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는 이후 1935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12] 같은 달 25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36년 9월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었다. 1938년 2월 14일 출옥한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충청북도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진천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6년 2월 미군정청 후생부에서 주관한 수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진천군청 축산계에 근무하였다. 또 여운형이 주도한 근로인민당에 입당하여 진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때를 기하여 좌익 활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는데, 1946년 9월 27일 이월국민학교에서 박용출 등의 좌익세력과 함께 신탁통치 지지대회를 개최하여 출동한 경찰과 충돌을 빚었으며, 1947년 8월 15일경에는 좌익세력을 선동하여 진천읍 및 이월면 소재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진천군지부와 청년단지부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이에 노달선(盧達先) 등 우익청년단 간부들이 좌익을 공격하기 위해 충주군 청년단체에 지원을 요청, 8월 28일 충주 청년단체 대표인 김기철은 청년단원 210여 명을 동원하여 이월면으로 진격했다가, 사곡리 거먹바위 앞 고개에서 매복 중이던 좌익에 의해 기습을 당해 황급히 음성군으로 병력을 철수했다. 이곳에서 박명섭(朴明燮)과 김장렬(金章烈) 등 두 청년이 전사하였고 진천청년단은 청주반공청년단에 지원을 요청하여 사태가 격화되는 등 약 7일간 좌익 세력과의 폭력사태가 연이어 일어났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국가보안법이 공포되면서 홍가륵은 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49년 4월 20일 소요·상해치사·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4년(미결 구류일수 1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청주형무소에 이감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 직후, '북한군이 남하하면 좌익 성향의 정치범들이 조선인민군에 협력할 것'이라는 당시 이승만 정부의 판단이 있었고, 이에 따라 그는 그해 7월 초 충청북도지구 CIC의 지휘 아래 2사단 16연대 헌병대 및 기동대, 충청북도경찰국 및 청주경찰서 경찰 등에 의해 연행되어 청원군 낭성면(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에서 총살당했다.#

3. 여담



[1] 의열단에 처음 가입할 때 이 가명으로 가입했으며, 본적지는 경기도 광주군(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56번지로 가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번에 현재 분원감리교회가 자리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 홍형준 목사가 실제로 시무했던 교회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2] 참의공파(參議公派) 30세 성(性) 용(容)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남동생 홍성달(洪性達)과 홍성만(洪性萬)은 항렬자를 썼다.[3] #. 인근의 시리·안석리·활초리와 함께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4]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64년 7월 20일 별세했다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5] 위 사망지에서 그의 유해가 아직 수습되지 못했다.[6] 김항식(金恒植)의 딸이다. 愛西德(애서덕)은 에스더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7] 조부 홍승하는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감리교 목사로 재직하면서 자선사업에 종사하는 동안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하였다.[8] 아펜젤러의 아들이다.[9] 마태복음 6장 33절.[10] 의주군에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시절 친구인 홍순강(洪淳強)의 계모인 나춘자(羅春子)의 집에 일주일간 머물렀고 11월 10일경 펑톈에 도착해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시절 친구의 사촌으로서 알게 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부속지 서탑대가(西塔大街)[13]에서 조선요리집 김해루(金海樓)를 경영하는 홍순문(洪淳文)을 방문하여 1933년 9월 5일까지 머물렀다.[11] 정식명칭 : 중화민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12] 공소 및 상고할 권리를 포기하는 신청서에 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