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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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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보병사단
{{{#FF0000 第二步兵師團}}}
The 2nd Infantry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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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百, ruby=백)][ruby(折, ruby=절)][ruby(不, ruby=불)][ruby(屈, ruby=굴)] [ruby(不, ruby=불)][ruby(退, ruby=퇴)][ruby(戰, ruby=전)] [ruby(常, ruby=상)][ruby(勝, ruby=승)][ruby(怒, ruby=노)][ruby(濤, ruby=도)]
창설일 1947년 12월 1일 (제2여단)
1949년 5월 12일 (제2보병사단)
해체일 2019년 12월 6일
상징명칭 노도부대(怒濤部隊)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3군단
규모 사단
역할 양구군, 인제군 지역 일대 수색 및 경계
초대 사단장 예) 중장 원용덕 (군영 1기)
해체 전 사단장 중장 장광선 (3사 25기)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1. 개요2. 특징3. 역사
3.1. 해방정국과 6.25 전쟁3.2. 산악사단 전환기와 스키부대3.3.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대항군 역할3.4.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개편
4. 보병사단 시절 예하부대
4.1. 사단 직할대4.2. 제17보병연대 쌍호4.3. 제31보병연대 백호4.4. 제32보병연대 독수리4.5. 포병연대
5. 출신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기타
6.1. 근무환경6.2. 유격 훈련6.3. 혹한기 훈련6.4. 사단가
7. 사건사고8. 전쟁범죄9. 여담

[clearfix]

1. 개요

1947년 12월 1일 창설하여 휴전 후 강원도 양구군, 인제군에 주둔했었던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 소속 보병사단. 별칭은 노도(怒濤, 성날 노, 물결 도).

국방개혁 2.0에 따라 2019년 12월 6일 공수사단 개념의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재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으며,# 예하부대와 소속 장병들은 같은 3군단 소속인 12, 21사단에 이관되었다. 이후 창설준비단을 거쳐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역사가 이어진다.[1]

2. 특징

보병사단 시절 주둔했던 곳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그래도 양구보단 나으리로 유명한 인제, 원통, 양구에 모두 걸쳐있었다. 그래서 (구)제2보병사단 주둔지에 대해 제12보병사단, 제21보병사단, (구)제2보병사단 전역, 관계자들 의견이 제각기 다 다르며, 심지어 이 사단 중 누가 더 빡센가로 병림픽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메이커 사단임에도 전방 철책 근무를 하지 않고 제3군단 예비대로 후방에서 굴렀는데, 산악전과 대침투작전 숙련도를 올린다며 계획된 훈련은 어떻게든 해치우고, 이것도 모자라서 이런저런 명분거리를 가져와서 훈련을 추가로 뛰었다. 일례로 북한이 무슨 도발을 했다, 아니면 옆동네 같은 예비대인 (구)제27보병사단[2] 이 훈련을 빡시게 했으니 우리도 질 수 없다, 아니면 누군가 '강한 군대' 드립을 쳤으니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기본 3박 4일 정도의 훈련을 잡고 뛰었다.

하여간 그래선지 보병 사단들 중 가장 많은 훈련을 행하는 축에 드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군 생활 중 훈련 일수를 계산해보면 대략 15일에 한 번 꼴로 훈련이 있을 정도. 특히 산악 행군과 산악 뜀걸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혹한기 훈련을 뛰어 보면 제대 후 한동안은 웬만한 추위에 끄덕 없게 된다.

훈련이 힘들고 자주 있는 만큼 전투력 또한 매우 높은 정예 사단이다. 참고로 예전 팀 스피릿 훈련 최다 참가 부대. 기본적으로 전투력 약한 부대를 한국군 대표로 보낼리가 없다. 그리고 옆에 주둔한 모 사단 연대들과의 연대 전투단 훈련에서 거의 항상 우위를 차지 한다. 제2보병사단의 32연대 수색중대(사단 수색대도 아니고 연대 수색중대가)는 옆 화천 모사단의 지휘통제실(대대나 연대도 아니고 사단 지휘통제실!!)을 턴적도 있었다. 군 생활 중 삽보다 총을 더 많이 들었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부대 중 하나.

참고로 민간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임팩트 없는 부대명과 마크로 인해 간부가 아닌 의무복무자들은 군대를 나왔음에도 잘 알지 못하기도 하는 부대. 복무 난이도는 차치하더라도 방패, 백골, 열쇠, 청성, 오뚜기, 백마 등의 특색과 특이함에 비교하면 양궁 과녁같이 단순한 마크와 노도라는 사회에서 생소한 단어 명칭은 아무래도 각인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간부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복무 여건이 빡센 만큼 진급도 잘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별 따는 코스 중 하나라고. 그 덕분에 후에 장군이 되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특전사에서 복무하던 간부들이 꽤나 많이 거쳐가기도 한다. 제2보병사단장을 역임한 이순진 장군은 육군3사관학교 출신 최초로 합동참모의장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예비군 훈련을 가보면 별로 안 보인다. 여튼 그렇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면서 역사가 길고 빡센 부대.

3. 역사

3.1. 해방정국과 6.25 전쟁

1947년 12월 1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제2여단을 모체로, 제2연대, 제3연대, 제4연대를 기간으로 대전에서 원용덕 대령을 초대 여단장으로 창설하여 1948년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1949년 5월 12일 제2사단으로 승격되었고 19일 유승렬 대령이 초대 2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순사건 진압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기세가 성난 파도와 같다고 하여 노도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5연대, 16연대, 25연대 구성으로 의정부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예하부대가 도착하는 족족 포천 전선에 축차투입하는 바람에 궤멸. 결국 한강 방어선 전투가 끝난 7월 24일에 사단이 해체되고 만다.

1950년 7월 25일 대구지구 방어사령부에 편입되었다.

이후 1950년 11월 17일, 2사단은 서울 성동공업중학교(현 성동공업고등학교, 광희중학교)에서 17연대, 31연대, 32연대로 재편성되었으며, 이 중 17연대는 개전 초기 백인엽 연대장이 지휘 하에 옹진반도 전투, 청주 전투를 치른 뒤 독립연대로 남아있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육본 및 1군단 직할을 왔다갔다 했다. 그 후 9월 중순 대한민국 육군 중 유일하게 인천 상륙 작전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그 뒤 1951년 5월 16일 용문산 전투의 뒤풀이인 파로호 전투, 9월 1일 강원 김화군 전선을 담당하다 1952년 10월 14일 저격능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1953년도에 제1야전군에 배속되었고, 화살머리고지 전투 2차전을 치르기도 했다.

3.2. 산악사단 전환기와 스키부대

그 뒤 1967년 국방부육군의 3개 사단을 각각 특정한 전투환경과 작전에 적합하도록 전문화/특화시키는 특성화 사단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중 제2사단은 산악사단으로 선정되어 1968년 1월 23일부로 당시의 미 육군 제10산악사단을 벤치마킹하여 산악전투에 특화된 산악사단으로 전환한 적이 있었다. 이외에 육군 제11사단은 상륙사단으로, 제5보병사단은 공정사단이 되었다. 이를 위한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1967년 12월에 2사단 수색대가 산악사단의 스키훈련 부대로 지정되어 진부령의 흘리 스키장에서 설한지 스키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로써 1961년부터 한국군 최초로 전투용 스키훈련을 시작한 육군 특전사에 이어 육군 2사단 직할 수색대대가 국군에서 두 번째로 전투용 스키훈련을 실시한 부대가 되었다.# 한편 세 번째는 1970년 1월부터 스키훈련을 시작한 해병수색대이다.

참고로 과거엔 이런 전투부대용 스키부대가 아닌 체육부대 개념의 스키부대도 있었는데 민간 스키선수들이 입대해서 군생활 동안 스키훈련을 하고 국내외의 스키대회에도 참가하였다. 육군의 스키체육부대는 1958년 3군단 직할로 창설됐었다. 과거엔 스키체육부대 뿐 아니라 축구와 야구체육부대 등도 각 군마다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체육인에 대한 체계적 훈련/관리를 위해 통합된 국군체육부대(상무)가 생기면서 각 군 별 체육부대들은 없어졌다.

이 육군 특화사단 체제는 2년도 못 가서 운용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2사단도 산악사단에서 도로 일반보병사단으로 원위치됐지만, 2사단 예하 부대의 스키훈련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976년부터는 32연대 3대대에 스키대대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32연대의 3대대는 특수부대/수색부대가 아닌 대한민국 국군의 일반 보병부대 중에선 유일한 스키훈련 부대가 되었다. 그후 겨울철 혹한과 갖은 악조건 속에서 노르딕 스키 활강과 스키를 이용한 전술훈련 등을 했다. 이 32연대 3대대는 국군의날 행사에도 참가하여 그 위용을 나타내었는데, 그 첫 번째 참가 행사로 예정됐었던 1976년은 8.18 판문점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한 비상 발령으로 행사연습 도중 참여가 무산되었고, 이후 1977년 건군 29주년과 1978년 건군 30주년, 그리고 1981년 건군 3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 분열/행진 부대로 참가했다.

노도부대의 스키부대 임무는 1981년 건군 33주년 국군의 날 행사를 끝으로 그 임무가 해제되었고, 그 후로는 육군의 스키훈련 임무가 특전사 한 곳으로 일원화되었다.

3.3.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대항군 역할

2001~03년까지 32연대 3대대와 소수의 사단 직할대와 포병들이 중대급 KCTC 대항군 부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전문대항군연대가 창설되자 일부가 남아 모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타 사단, 2사단 타 연대의 훈련실적이 좋았던 소대를 통째로 차출해가서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즉 전갈부대의 시초가 된다.

자세한 건 제32보병연대 참고.

3.4. 제2신속대응사단[3]으로 개편

2018년 11월 22일자 강원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방개혁 2.0에 따라 제2보병사단은 병력들을 인접 부대들에 나눠 보낸 뒤 경상북도에서 공정사단으로 재편될 거라고 한다.#

2019년 3월 28일자 아주경제 보도에서도 2사단이 공정사단으로 개편될 가능성이 높다고 나왔다.#

2019년 4월 16일 추가 보도에 따르면 예하 연대들을 인접 부대들에 통합시킨 뒤, 대신 제2작전사령부 예하에 있던 특공여단들을 사단 예하에 배속시켜 공정사단 개념의 '신속대응사단으로 개편할 것임이 확정되었다. 다만 사단 사령부는 이전 보도에서 경북으로 이전한다고 했던 것과 달리, 해체된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 사령부 자리로 옮겨갈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당시 기존 부대들을 어떻게 할 지 계획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부대 내외로 이와 관련된 많은 소문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 중 GOP 경비, 기계화보병,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관련된 게 많았는데, 특히 KCTC 대항군 경력이 있는 32연대를 과학화 훈련장에 병합하거나 각 부대들을 21사단, 12사단에 편입시키는 설, 아니면 이들 사단과 병력 및 장비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각각 경비 여단과 기계화보병사단으로 나눌 거라는 소문이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결국 17연대는 12사단, 31연대는 21사단으로 이관, 통합되었고, 32연대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대신 경북 경산 및 경남 사천에 주둔하고 있는 201특공여단과 세종 및 계룡에 위치한 203특공여단이 향후 재창설 때 배속될 예정이다. 또 현재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2사단 사령부는 11기계화보병사단과 통합돼 없어진 경기도 양평의 (구)20기계화보병사단 사령부 자리로 본격 이전하였다.

파일:2사-17사_해체.jpg

한편 사단이 주둔했던 인제, 양구 지역의 경제에 2사단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단이 해체 후 이전한다는 소식에 지역 주민들이 매우 강하게 반발하며, 똑같이 27사단 해체 직전의 화천군 같은 여타 전방지역들과 연계해 2019년 8월 말에는 병사 휴대폰 사용시간 축소 등 공동 민원을,# 9월 초에는 철원, 양구, 인제, 고성 등 도내 5개 시·군 접경지역 실무단들이 화천군청에 모여 각 부대 해체와 관련된 회의를 하며 공동 반발 움직임을 보였다.#

게다가 2사단 장병 입장에서도 2사단이 해체 후 이전해도 정든 부대가 사라지거나 뿔뿔이 흩어진다는 아쉬움은 있어도 양구에 대한 악감정은 드높아 양구 상권이 망하든 말든 별 상관이 없다. 사실 좋은 추억이 있어야 양구에 존치한다는 의견이라도 낼 게 아닌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지역 경제 지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4]

2019년 12월 6일 부대개편식을 갖고 해체되었으며, 추후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재탄생하면 제7기동군단에 배속될 것이라고 한다. 7군단 예하에 제2신속대응사단 창설준비단이 활동하고 있었다가 2021년 1월 1일에 제2신속대응사단이 창설되면서 제2신속대응사단 창설준비단은 해체되었다. 제2신속대응사단의 별명으로 노도부대를 그대로 쓰게 되었으며 이 외에도 통상명칭을 비롯해 전부 구)2사단의 것을 다시 사용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2신속대응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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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병사단 시절 예하부대

이 시절 사단 사령부 및 직할대, 예하 연대 대부분이 양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7연대와 포병연대는 1개 대대를 뺀 모두 인제군(정확히는 북면 원통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양구의 전방을 맡은 제21보병사단, 인제의 전방을 맡은 제12보병사단을 지원하는 예비 사단으로서 제3군단을 구성했었다.

참고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양구까지 차로 가려면 소양호 주변 지역을 빙빙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제102보충대대에서 제2보병사단으로 배치를 받으면 춘천 쪽 선착장에서 대한민국 육군LST 1척을 선박중대에 편성해 운용했는데, YTL30호 침몰 사건 때문에 탑승하자마자 전투화를 벗어야 했다.(...) 이후 소양호를 가로질러 양구 선착장까지 이동하면 K-511을 타고 사단 신병교육대로 이동했었다.# 그나마 이후 도로망이 확대됨에 따라 춘천에서 홍천을 경유하는 식으로 이동했으며, 양구로 직접 이어지는 배후령터널이 뚫린 뒤에는 46번 국도를 타고 이동했다.

또한 102보충대대에서 각 사단 신병교육대로 떠나보낼 때 제21보병사단 배속 장병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는데, 다들 제 갈길 찾아가는 와중에 버스가 올 때까지 혹은 버스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 볼수록 버려졌다는 왠지 모를 으스스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양구의 악명은 기간병들 사이에서도 유명한지 이따금 절대 21사단이나 2사단으로는 가지말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물론 2016년 11월에 제102보충대대가 사라진 뒤에는 직접 사단 신병교육대로 가게끔 바뀌었다.

4.1. 사단 직할대

  1. 본부대
  2. 공병대대
  3. 정비대대
  4. 보급수송대대
  5. 화생방지원대
  6. 수색대대 - #
  7. 의무근무대
  8. 정보통신대대
  9. 헌병대
  10. 전차중대
  11. 항공대
  12. 방공중대
  13. 무인항공대

4.2. 제17보병연대 쌍호

파일:17rgt.jpg
※ 2019년 10월 제12보병사단으로 소속변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7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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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31보병연대 백호

파일:31보병여단 마크.jpg
※ 2019년 12월 제21보병사단으로 소속변경

부대 예명은 백호부대. 1대대는 신병교육을 담당했었으며[5], 2대대와 3대대, 의무중대, 전투지원중대, 수색중대는 하나의 울타리안에 있다. 1대대와 2대대는 신막사이며 3대대는 현재 구막사이나, 수색대대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수색대대 막사가 개수되는 바람에 시궁창. 3대대도 신막사로 개수를 검토중인데 차일피일 미루고있는 중이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3대대가 단일건물 즉 아파트 식의 신막사였고 1대대와 2대대는 완전 예전 구형 막사였다. 나무 관물대에 침상마루.

여름이 되면 3대대는 물 부족에 시달린다. 또한 물탱크가 뒷산 중턱쯤에 있기 때문에 보일러병이 여름만되면 땀을 뻘뻘흘리며 물탱크에 있는 물을 확인하러 가러 올라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 글을 읽는 31연대 2대대, 수색, 의무중대 장병이 있다면 여름에 물을 아껴쓰자. 신병교육대대가 실거리 사격을 할 일이 있으면 나머지 대대 장병들은 도보로 1시간 거리에 있는 1대대 실거리 사격장까지 멀쩡한 인도를 두고 2대대 뒷산을 넘어서 가야한다. 배차신청을 해도 안내준다

부대가 한 울타리를 치고 사는데, 연대는 부대가 커지면서 주변 땅을 잡아먹은지라 군 부대 안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위병소 출입 및 보안 문제로 항상 주민과 위병소 근무자들간의 마찰이 잦다. 근무체계가 바뀌어 담당하던 전문팀이 빠지고 다른 팀이 해당 근무를 맡으면서 아예 관리가 안되던 시절도 있었다.

부대 입구에서 올라가는 중간에 교회가 있으며 백호연대 전 인원과 길 건너의 수색대대,화학지원대 장병들을 수용한다. 이는 성당과 법당도 마찬가지로, 31연대와 길 건너 수색대대, 화학지원대 장병들을 수용한다. 좀 기괴한 게, 교회가 언덕 맨 위에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성당이 자리한다. 성당에서 교회를 올려다보면 짓누르듯 자리잡고 있는 묘한 배치. 게다가 성당 옆에는 무명봉분이 하나 떡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예하 부대인 수색중대는 2 대대 → 본부 → (수색) → 3대대로 독립적으로 따로 막사를 운용하던 중대 였으나 (2006년까지) 이후 신막사 건립등의 이유로 타 부대와 같은 막사를 쓰게 되었다.

훈련이 미치도록 많은 연대. 특히 2대대의 경우 2000년대 초 당시 위관급 장교로는 건국 이래 최초로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김승겸합동참모의장이 중령 시절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사단 전체에서 악명높은 빡셈을 자랑했다. 일주일 내내 교육훈련에 수요일마다 분대단위 사격(사로내에서 빵야빵야가 아니다. 사로위에 도열하여 총 내리고 있다가 분대장 구령에 맞추어 3점사로 북한군 타겟을 개발살내는 그런 사격이다. K3 사수도 사로위에 서서 연사로 갈겼다) 훈련 마치고 주둔지 복귀하면 다음 훈련 준비하는 그런 대대였다. 후에 김승겸 중령은 사단 작전참모를 하다가 대령 진급 후 1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하였고[6], 이후 장성 진급 후 제28보병사단장으로 부임하셨다고 한다. 사고 많은 부대에 해결사로 가신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해결사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 중장진급과 동시에 제3군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9년 군단장 임기를 마치고 육군참모차장을 맡은 뒤 2020년 대장으로 진급,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부임했고 1년 반 후에 정권이 교체되자 합참의장으로 영전했다.

31연대는 사단 예비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소문이 나돌만한 것이, 17연대는 인제 원통 지역, 32연대는 양구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고 31연대는 가장 후미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1996년 대침투 작전시 17연대와 32연대는 일부 병력만 차출된 반면에 31연대는 신병교육대대와 주둔지 경계 병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연대가 출동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단 주력이라 여겨지던 17연대가 있음에도 주야장천 훈련에 불려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홍천에 위치한 군단 탄약고 경비중대로도 심심하면 불려다녔다.

게다가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작전 당시 2개월 넘게 X성산 - X대산 - X로봉 등으로 돌아다녔다. (구)제27보병사단(이기자부대)와 함께 그 가운데서도 차단선 최전위에 위치했다고 알려진다. 실제로 그 당시 전과도 있었다. 다만 전공을 올린 병사가 상근 예비역이어서 다른 현역들을 멘붕 시켰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7중대의 송관종 일병이 작전 중 전사하였으며 사후에 상병으로 진급되었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당시 전공을 올리면 남은 군 생활은 거의 면제 수준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최상급 부대로부터 중대장에 이르기까지 휴가증을 받아 한 동안 쉰 다음, 간첩을 사살했으므로 민간인보다는 못하지만 나오는 포상금도 챙기고 남은 기간은 이리 저리 강연하러 다니면서 군생활할 수 있다는 소문. 그런데 공로를 세운 병사가 상근 예비역에 남은 현역 생활도 채 2개월이 안 남은 상황. 다른 병사들의 심정을 짐작할 만하다.

페이스북 등 인터넷에서 떠도는 2011년 3월 외박나온 군인들을 민간 고등학생이 폭행한 사건에서 피해 군인들이 속한 곳이 31연대였다.

2019년 말 31연대는 제21보병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제21사단 예비연대였던 63연대는 31연대에게 신병교육대를 포함한 작전 계획지 및 인원들을 이관하고 해체 수순을 밟았다.

2000년대 초반 전투지원중대 막사 및 화장실 건물은 1960년대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을만큼 초구식이었으며 특히 화장실이 매우 낙후돼 겨울에 대소변이 얼면서 차곡차곡 쌓여 일명 '똥탑'이 변기 입구까지 생기기 때문에 막대기 등을 이용하여 무너뜨리고 이용해야 했다. 봄이 되어 대소변이 녹으면 신기하게도 고체와 액체가 완전히 분리된 형태가 되어 평소같았으면 진흙탕같아야 할 똥통이 윗부분엔 액체만 존재해 이 시기에는 대변을 보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엉덩이가 엉망진창이 되어 샤워를 해야만 했고 그런 이유로 다른 중대 화장실을 몰래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2000년대 초반 육사 수석 졸업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던 이○○ 연대장이 연대 연병장을 둘러싸고 있는 화단 정비에 집착이 매우 심해 전투지원중대는 봄부터 가을까지 늘 제초작업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제초작업 중 연대장이 지나가며 행정보급관 등에게 맨손으로 뽑으면 뿌리가 남아 도로 아미타불이니 모든 작업병력에게 호미를 지급하고 잡초 뿌리까지 제거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호미 부족으로 수 십명의 병력 중 약 절반 가량의 병력만 호미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맨손으로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이후 다시 연대장이 지나가며 호미 지급 여부를 확인했고 대노하며 모든 병사들을 막사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이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는 병사들은 완전군장을 한 채로 제초작업을 하고 있던 간부들을 볼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군단 선봉연대로 연대 전 병력이 양구에서 인제로 헬기를 타고 넘어가는 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 때 헬기는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주말에 간부 축구시합이 예정돼있던 어느 날 폭설이 쏟아져 경기를 못할 지경이었다. 어떤 간부의 아이디어인지 공병대 제설차를 불러 제설을 시도했다. 큰 덩어리들은 순식간에 밀어냈으나 제설차가 미처 건드리지 못하는 바닥에 깔린 눈들이 제설차 궤도에 눌려 얼음처럼 변해 연병장이 빙판길이 돼버렸다. 기계로도 인력으로도 제설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한 간부가 나서 병사들 앞에서 삽으로 얼음덩어리를 찍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시범을 보였고 이후 전 병력이 이를 악물고 삽질한 끝에 간부 축구시합은 예정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이 때 한 삽에 찍혀 나가는 얼음의 양은 손바닥 3분의 1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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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32보병연대 독수리

※ 2019년 12월 부대해체
2사단의 17,31,32연대는 창군기/동란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의 연대로서 32연대의 해체는 부대의 역사성을 고려할 때 매우 아쉬운 결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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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포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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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단 포병연대 71사단 포병연대 62사단 포병연대 61사단 포병연대 67사단 포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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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사단 포병연대 65사단 포병연대 70사단 포병연대 68사단 포병연대 69사단 포병연대
※ 둘러보기 : 해체·해편된 각급 육군 부대
독립연대 · 연대 | 해체된 독립연대 · 해체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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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연대의 예명은 사단예명을 빌려 노도포병, 예하대대는 무공훈장의 이름을 따서 18대대 '충무', 62대대 '화랑', 63대대 '인헌', 633대대 '무공'.

4개의 대대와 1개의 연대본부로 구성되어있으며 3개 대대와 연대 본부는 원통~인제에 주둔해있고 다른 1개 대대는 양구에 주둔해있다. 3개의 자주포부대와 1개의 견인포 부대로 구성되어있으며 모두 155mm이다. 선진병영(?)정책으로 유명한 동기 생활관을 맨 처음 시행한 부대가 여기 대대 중 하나이다(63대대). 막사는 위에 써있듯이 연대본부와 굴지의 1개 대대633를 제외한 전 부대가 신막사를 사용 중이다. 그러나 여기 부대에 배치되어 연대 내 다른 부대를 돌아다니다보면 1개 대대가 나머지 신 막사부대를 월등히 초월할 정도로 전방부대 치고 괜찮은 시설로 중무장되어있어 부러울지도 모른다. 18포병대대는 전군 최초 포병이라는 위업을 가지고있는데 이 최초 포병이라는 게 같은날 창설된 포병대대가 5개나 더 있어서 최초는 아닌 것 같지만 참 웃기게도 부대 창설식이 제일 일찍 시작하고 제일 빨리 끝나서 사실상 최초 포병이라는데, 사실 최초 창설 포병대대는 같은 날 같은장소에서 동시에 했었다(...). 6.25 전쟁 당시 부대재편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되었을 뿐이다. 18포병대대가 창설되었을때 제1야전포병대대였기 때문에...18포병대대는 창설당시에는 1포병대대라서 최초 창설 6개 대대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된 대대였다.
이름이 18포병대대인 이유는 이 1야전포병대대를 8사단에 배속시키면서 18포병대대로 명명했기 때문이다.최초 창설된 6개 대대 중 10포병대대는 수도사단 배속, 11포병대대는 1사단 배속, 17포병대대는 7사단 배속, 16포병대대는 6사단 배속, 50포병대대는 포병학교 배속이었다.


훈련 강도는 2사단에 걸맞게 한숨이 나올 정도로 강하다. 게다가 4개 대대중 3개 대대가 인제군에 주둔하고 있으며, 인제군이 주둔지인 12사단의 간섭을 심하게 받는다. 즉, 인제의 3개 대대는 12사, 2사 포병연대, 양구에 주둔하는 나머지 1개대대는 21사, 2사 포병연대가 있어 잦은 훈련과 검열로 인해 간부든 병사든 깊은 빡침이 올라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포병이라 총 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포병 1개 대대가 사단 전투력 순위 1위에 오른 적도 있을 정도로 보병 못지않게 삽보다 총을 잘쏜다. 그래도 보병에는 못 미치겠지만 보병 지원해 준다고 이리저리 차출되는 병사들이 있으니 따져보면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위수지역 자체가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각종 상황이 전술훈련날 포탄 쏘듯이 뻥뻥 터져서 근무자와 당직 계통을 상당히 힘들게 하는 것도 한 몫 한다. 그 당시 근무한 타 부대 병사들마저 상황전파로 그 상황을 들으면서 불쌍해 했으니 말 다했다(…).

부대 생활은 생각보다 단순한데 상급부대 지침을 매우 잘 따라서 일과 시간이 딱딱 맞아 떨어져서 군인들의 빛과 소금인 개인정비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예외적으로 62포병대대의 경우에는 개인정비 시간에 비사격 훈련을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제대로 된 개인정비시간을 가지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개인 정비 시간이 19시에 시작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

한때 후반기 교육을 받는 자주포 조종수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부대였다. 오죽했으면 육군포병학교의 비공식 군가의 구절 중 "노도로 가면 눈물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00년대 초반에 양구군 동면에 위치한 자주포 대대에서 한 병사의 결혼식을 올려준 일이 방송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해당 병사는 가정 사정으로 인해 식은 못 올리고 혼인 신고만 한 후 입대했는데 방송 촬영 중에 마침 좋은 소재이기도 해서 부대에서 가족을 초청해 결혼식을 올려준 것.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자주포에 타고 입장하는 신부의 모습이 압권이다. 당시 해당 부대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식 비용은 110억 200만 원이라고. 11억짜리 자주포 10대 동원. 이후 해당 병사는 부대에 계속 남아 부사관으로 임관하였고 부사관 장기복무심사 역시 통과하여 계속 복무 중에 있다.

18포병대대와 62포병대대는 21보병사단, 63포병대대는 12보병사단#으로 각각 예속전환되었다. 633포병대대는 2019년 12월 31일부로 포병대로 개편되어 12보병사단으로 예속전환되었다.#

국방개혁 2020이 발표된 후, 2사단 해체설[7]과 함께 군단 포병여단이나 타 사단 포병연대로 옮겨간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기 때문에 당연히 막사 신축계획도 전무했으나, 2012년 9월 기준으로 1개 대대와 연대 본부를 제외한 3개 대대가 신막사 사용 중에 있다. 연대 본부는 땅이 좁아서 신막사를 못 짓는다는 말이 있고 남은 1개 대대633는 가 보면 도저히 신막사를 지을 엄두가 안나는 고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라고. 사단 내에서의 소문에 따르면, 4월에 보일러가 동파된 적이 있다고 한다.소문이 아니라 진짜다 그렇다, 봄이 오고도 동파가 되는 한파와 고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형자체가 산 중턱을 깎아만든 곳이라 신막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경사 또한 없는 곳이 없다.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차리포대의 장병들은 행군 훈련시 45도 각도의 언덕을 0.7km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일명 눈물고개. 사실, 인근 부대로 넘어가는 3.5km 정도의 행군로가 있는데 부대 전체에서는 그 행군로는 눈물 고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차리 포대원들 마음속의 눈물고개는 포대로 복귀하는 그 길이 맞다. 복귀 중 다른 중대들이 중간에 줄줄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정말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한다. 2005~07년에는 둘팔고개로 불렸고 대공초소로 가는 길이었다. 참고로 둘팔의 뜻은 그 28... 재미있는 일화로 2사단 신병교육대에서는 633으로 배정받은 훈련병에게 박수를 쳐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다들 짐작 갈 것이다...

연대 본부는 독립부대로 포가 없는 본부포대가 있다. 포병은 알다시피 중대장이 아니라 포대장이다.
위치는 원통리에 있고 봉화봉 끝자락이라 툭하면 전투체육으로 봉화봉을 올라갔다.

5. 출신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2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원용덕 예) 소장 군영 1기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본부 헌병총사령부 총사령관
2대 채원개 예) 준장 육사 3기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지부장
3대 유승렬 예) 소장 육사 특8기 호국군 제102보병여단장,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대한민국 육군민사감 [8]
4대 송호성 예) 준장 육사 3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총사령관
5대 유재흥 예) 대장 군영 1기 합참의장
6대 이형근 예) 대장 군영 1기 합참의장
7대 이한림 예) 중장 군영 1기 제1야전군사령관 건설부장관
8대 함병선 예) 중장 군영 1기 제2군단장
9대 정일권 예) 대장 군영 1기 육군참모총장, 연합참모본부총장 前 국무총리, 국회의장
10대 강문봉 예) 대장 군영 1기 제2군사령관
11대 김웅수 예) 소장 군영 1기 육군본부 군수국장, 제6군단장 #
12대 강영훈 예) 중장 군영 1기 제6군단장, 제3군단 부군단장 대한민국 국무총리
14대 문형태 예) 대장 조선경비 2기 합참의장
16대 박기병 예) 소장 군영 1기 제5관구사령부 사령관
17대 문형태 예) 대장 조선경비 2기 합참의장
21대 송호림 예) 중장 육사 3기 육군본부 보병감, 제31보병사단 사단장 관선 전라남도지사
23대 김학원 예) 대장 육사 5기 제1야전군사령관, 육군군수사령관
27대 최성택 예) 중장 육사 11기 국방정보본부
32대 고진석 예) 소장 육사 16기 [9]
33대 박광영 예) 중장 육사 19기 수도군단장, 육군교육사령관
34대 도일규 예) 대장 육사 20기 육군참모총장,3군사령관,수도방위사령관
35대 이호승 예) 중장 육사 22기 제8군단장
37대 김희중 예) 중장 육사 19기 수도군단장, 육군교육사령관
38대 차원양 예) 소장 학군 6기 육본 지휘통신참모부장
39대 김병관 예) 대장 육사 28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41대 한기호 예) 중장 육사 31기 제5군단장
44대 이순진 예) 대장 3사 14기 합동참모의장, 제2작전사령관
45대 고현수 예) 중장 학군 20기 제2군단장
46대 이종섭 예) 중장 육사 40기 국방부장관제7기동군단장 [10]
47대 김종문 예) 소장 육사 42기 한미연합사령부 부참모장
48대 한영훈 예)소장 육사 44기 사단장, 육군보병학교
49대 장광선 예)중장 3사 25기 제2군단장 [11]

5.2. 장교/부사관

5.3.

6. 기타

2사단의 경례구호는 초창기에는 '당백'이었다. '일 당 백'의 준말이다. 당백 경례구호는 1981년 '단결'로 바뀌었다. 1997년까지 '단결' 이었는데 이후 '충성'으로 바뀌었다. 신병교육대에서 배우지만 자대로 가면 부대에 따라선 해당 부대의 자체 구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2000년 이전에 경례구호는 '단결' 이었고 지휘자급 상관이 지나가면 한 명이 "단결, 연대장님 화이팅" 을 외치고 나머지 장병들이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엄지손가락을 높이들어 3번 제창했다. 또 '노도의 얼'이라는 구호가 있다. 지휘자가 '노도의 얼'을 선창하면 나머지는 아래의 문구를 후창한다.
노도의 얼
우리는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우리는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자랑스런 노도부대 용사다~!

6.1. 근무환경

6.2. 유격 훈련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YA_NP_20130522_00770182.jpg




본래 2사단 유격장은 설악산 장수대에 있었던 3군단 유격장을 사용했었다. 양구에 위치한 사단 직할대와 31연대와 32연대 등은 광치령을 넘어 원통을 거쳐 설악산까지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행군해 가서 유격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1978년에 양구 사명산 아래 웅진리 골짜기에 유격장을 개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사단 유격장은 소양강 상류에 조성되었는데, 상수도 보호구역이므로 샴푸의 사용을 금지했었다. 지금은 샤워장이 마련되어있어 상관은 없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유격장에 들어서면 야영지가 점점 산 위로 올라가고 도대체 어디서 훈련을 받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산 곳곳에 유격 훈련장들이 숨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런 산중에 어떻게 훈련장을 만들었는지 처음 가면 궁금하면서도 섬뜩한 기분이 든다. 참고로 예전에 삼청 교육대 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격장은 산의 계곡사이에 있으며 연병장에서 대략 30~50분간 PT체조로 몸을 굴리고 오전조, 오후조로 나눠서 계곡 곳곳에 있는 유격 코스를 차근차근 밟으면 된다. 각 유격 훈련장들이 산속에 곳곳이 숨겨져 있으므로 이동간에 간단한 오리 걸음만 시켜도 아주 강도높은 얼차려가 된다.

게다가 이곳만의 백미는 부실한 안정망을 믿고 상당히 높은 절벽 사이에 설치된 도하선을 건너는 도하 훈련과 마지막 날 화생방훈련이다. 예전에는 11m 수직 하강과 수평 하강 훈련을 했었다. 하강 훈련전에 입수해서 사고나지 않도록 물에 적응을 시키는데 한여름인데도 피티체조로 이미 헐떡거리는 몸에다가 강원도 산골짜기의 차가운 계곡물이라서 조교들이 잠수를 시키면 10초도 못버티고 꼬로록 소리내며 물 밖으로 머리 내밀려고 바둥거리곤 했었다. 수직 하강의 경우 조교의 외침에 따라서 잡고 있는 줄을 놓고 물속으로 입수하는 방식인데 스스로 잡고 있는 줄을 놓는 그 기분이 심히 골룸했다. 줄놓는 게 무서워서 조교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도 끝내 입수하지 못해서 되돌아나와 다시 물먹고 피티 체조 복습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도하 훈련의 경우 절벽에서 저 아래의 저수지로 연결된 와이어에 의지하여 활강을 하는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 무섭다. 빨리 도하하라며 고함치는 조교들과 주저하는 교육생들의 향연이 끝나면 차타고 가는 게 아니라 대략 50km정도 복귀 행군을 하며 올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보통 일요일에 행군해서 도착해서 텐트치고 숙영한다. 특히 31연대의 경우 유격장까지 가는 행군과 주둔지 복귀 행군이 매우 힘들다. 유격장으로 가는 행군의 하이라이트는 대공진지를 넘어가는 코스다.

여기서 웬만한 이등병들과 81mm 박격포 탄약수들은 거진 다 낙오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끌고 들어서라고 끌고 간다. 그래서 나중에 애로사항 꽃피지 않으려면 평소에 체력을 길러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귀 행군은 한참을 아스팔트를 걷는 강행군이며 이때 병사들은 좀비같은 상태로 그저 걸어야 하니까 정줄놓고 걷는 기계가 된것처럼 걷는다. 그리고 복귀후엔 평균적으로 3~6kg이 빠진다.

유격의 꽃인 PT체조를 굴리는 연병장에는 '하면 된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상당히 기괴하다. 2018년에 사단장의 지시로 '또, 없는가'로 글귀가 바뀌었다.

숙영지의 위치가 무척이나 난감하다. 지옥의 경사도를 자랑하는 타이어계단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타이어 계단은 애교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무릎 높이만한 100정도의 돌계단을 올라가야되는 곳도 있다. 연도에 따라 중대규모로 숙영지 로테이션을 돌리는데, 운 없으면 최상층에서 D형 텐트를 쳐야한다. 식당으로 밥먹으러 내려가기 싫을 정도로 높다. 말 그대로 훈련이나 숙영 자체가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고 보면 된다. 맨 윗쪽에 텐트를 치게 된 중대는 대대 피엑스와 취사장이 아래에 설치되므로 물건을 사거나 밥을 타러갈때 등산을 한번 한다고 보면 된다.

인제군 원통 이북의 포병연대 병력은 유격훈련을 2사단 유격장이 아닌 12사단 유격장에서 받았었다. 인제에 주둔한 17연대의 경우에는 인제에서 양구 2사단 유격장까지 광치령을 넘어 걸어 간다. 31연대도 혹한기 훈련을 서화축선에서 하는 경우 광치령을 넘어간 사례가 있는 등, 2사단에서 광치령을 걸어 넘는 것은 그다지 엄청난 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군축령넘어 소양강따라 구비구비 돌아가는길도 있다. 어디로 가든 복귀할 때는 싸가지골을 넘어서 인제군내를 통과해서 오는 길이 있눈데 말그대로 싸가지가없을정도로 힘든 코스다.

양구 최전방에 위치한 1개 포병대대는 유격훈련을 부대위치와 가까운 21사단 유격장에서 받았었다.

2013년 당시 주특기 교육을 도맡아 했던 2신병교육대 편제였던 32연대 1대대가 7월에 일반 야전부대로 완전히 개편되면서 야전부대에서 받아야하는 훈련 일수와 행군 키로수 등을 채워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다보니 한 달에 한번 40km 완전군장 행군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야전부대 개편 몇 달전 해당 부대에서 훈련 받던 훈련병 중 32연대 1대대로 자대배치 받은 인원 중 몇명은 훈련병 때 40km완전군장 행군을 받고 2주도 안되어서 기간병 신분으로도 40km 완전군장 행군을 받기도 하였다. 야전부대 개편 이후 반 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일 년동안 받아야하는 모든 훈련들을 몰아서 받아야 했기 때문에, 사격집중훈련이 자주 있었으며, 행군, 전술훈련, 유격훈련, 혹한기 훈련 등 굵직한 훈련 들을 밥먹듯이 했다. 유격훈련의 경우 대부분 여름에 이루어지는데 이례적으로 그 해에는 10월에 사단 부대 중 마지막으로 유격훈련을 받게 되어 매우 추운 날씨에 훈련을 받았다. 복귀행군으로 부대에 복귀할 당시 특별히 사단 군악대가 부대에 사열하여 수고의 연주를 해주었다.

또한 2016년 당시 포병 출신 김종문 사단장의 지시로 포병은 주특기 임무나 충실하라며 유격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사실 포병 외에도 그 전인 2015년도부터 수색대(1개 소대병력 조교임무수행)를 제외한 각 직할대들은 자신들의 주특기나 잘하라고 유격에서 제외시켰는데 사단장이 교체되면서 포병의 유격 훈련도 부활했다.

6.3. 혹한기 훈련


6.4. 사단가

금수강산 수도에서 한뜻에 뭉쳐
조국의 통일위해 노도와 같이
원수의 괴뢰군을 쳐무찌르니
장하다 그의 이름 2사단 용사 앗!

사명산 정기받아 굳게 뭉쳤다
초전박살 굳센신념 노도와 같이
필승의 전기연마 전진 또 전진
산악의 천하무적 2사단 용사

선진조국 힘찬대열 선봉에 서서
조국통일 겨레소망 노도와 같이
백두산 상봉까지 쳐서 무찔러
내 조국 지키리라 2사단 용사
앗! 하는 부분은 보통 사단장급 지휘관이 참석, 참관하지 않는 한 잘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구보라든지
들어보기.

훈련소를 마치며 제창한다. 이때 힘차게 팔을 흔들며 부르는데, 훈련병 시점에서 봐도 한 기수 전원이 동작을 맞추며 우렁차게 부르는건 굉장히 멋있다. 자대에 배치받고도 보통은 잘 부르지 않아 거의 까먹는 경우가 많지만 종종 부른다. 제2신속대응사단으로 개편된 이후에는 4절이 추가되었다.

그 외 중대단위 소대단위로 부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10대 군가가 아닌 사가들이 존재했다. 일명 중대가 및 소대가. 최근에는 거의 부르지 않아 사실상 소멸 상태이다.
산악가

멸공의 산악에서 깃을 드높이
새벽의 힘찬걸음 고지를 탄다
승리의 깃발은 별빛을 향해
오늘도 노도와 같이 적군을 삼켜.
아아악! 산악의 노도부대
우리는 산악 사단 무적의 왕자!
사가를 부를때는 멜로디는 없고 리듬을 타면서 악을 쓰며 부른다. 10대 군가도 멜로디는 뺀채 악을 쓰면서 리듬만으로 부르는 전통이 있으며, 실로 그 패기가 대단하다. 2002년 경에는 군가를 제대로 불러라고 시정명령이 내려왔으나 쌩까고 계속 그렇게 불렀다.

7. 사건사고

8. 전쟁범죄

9. 여담



[1] 하지만 제2보병사단 - 제2신속대응사단의 역사가 이어진다고는 해도 주둔지와 예하부대, 역할 등이 모두 바뀌었기 때문에 별도의 문서로 분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두 부대를 한 문서로 묶어두었다.[2] 2022년 11월 30일에 해체된 사단으로 작전계획지와 병력을 각각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으로 단계적으로 이관하였다.[3] 당시에는 가칭이었으며 2021년부터 정식 명칭이 되었다.[4] 어디까지나 군 부대가 있어서 상권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 군 부대가 없으면 상권이 형성될 수가 없는 지역이 양구 일대이다.[5] 현재도 신병교육대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제63보병연대가 없어지면서 21사단 신병교육대대(제63보병연대 1대대)가 해체되고 본래 (구)제2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였던 제31보병여단 1대대가 제21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로 바뀐 것.[6] 전임 연대장이 김운용 대장(前 지상작전사령관)[7] 2000년대 후반 당시엔 소문만 돌았을 뿐 아직 2사단 해체계획이 없었다.[8] 제5대 사단장 유재흥의 부친이다.[9] 제3야전군사령관 고명승 대장의 동생[10] 예비역 중장 출신 제48대 국방부장관[11] 중령시절 31사단 예하 대대장을 역임했다.[12]전주대 장성 진급자, 두번째 학사장교 중장 진급자[13]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멤버 중 하나로, 동 단체 부회장을 비롯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이사, 청와대 정책자문위원, 법무법인 정평 대표변호사, 노동인권회관 이사장,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이사장, 법무법인 제이피 고문변호사 등지 역임.[A] 2019년에 제21보병사단으로 이관되면서 백두산신병교육대대로 변경.[15]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21p[16]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43p[17] 90년대 이전에는 내부의 적인 공산당을 상징하며 이들의 존재를 항상 잊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지만 2000년대 이후로 이렇게 바뀌었다.[A] [19] 공부하다가 늦게 입대한 30세 훈련병으로 속였고 그 대대장이 동안인 편이라 훈련병 뿐만 아니라 조교, 교관까지 속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