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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머리고지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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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차전 (1952.10.6 ~ 10.10)
2.1. 전투 경과
3. 2차전 (1953.6.29 ~ 7.11)
3.1. 전투 전 상황3.2. 전투 경과
4. 남북공동유해발굴 사업5. 기타

1. 개요

화살머리고지 /Arrowhead Hill
파일:화살`머리_지도.png
출처 - 서쪽 고지는 화살머리고지, 동쪽 고지는 백마고지다.

1952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미합중국 육군 제2보병사단 및 여기 배속된 프랑스 대대,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 제2보병사단중국인민지원군과 화살머리고지(Arrowhead Hill, 281고지)를 두고 벌인 고지전.

해당 고지는 1951년 10월 ‘코맨도 작전’ 때 점령한 고지 중 하나로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에 있으며, 1차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2. 1차전 (1952.10.6 ~ 10.10)

참고자료1 참고자료2

1952년 미 2사단 23연대에 예속된 프랑스 육군 대대가 중공군 제113사단 제338연대와 맞서 싸운 전투.

1952년 10월 당시 프랑스 대대의 3개 중대는 화살머리 고지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살머리고지는 역곡천이 남쪽을 에워싸고 흐르고 있어 이곳을 지키던 1중대와 공병 소대는 고립되기 쉬웠다. 게다가 상류엔 중공군이 점령한 저수지가 있어 유사시 물을 방류하리라 예상되었다.

그리고 중공군은 10월 3일 2백발, 10월 5일엔 3백여발의 포격을 이 고지로 가해 미 육군 관측장교가 전사했고, 프랑스 1중대장 리롱(Liron) 중위가 중상을 입었다.

2.1. 전투 경과

10월 6일 새벽 중공군은 예상대로 저수지의 수문을 열고는 프랑스 1중대와 공병소대가 있는 화살머리 고지를 향해 1천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이로 인해 고지 위에 구축된 교통호, 철조망, 안테나, 보급트럭, 전차 등이 포연 속에서 망가졌으며 상당수가 사상당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이날 저녁 전방초소를 포기했는데, 중공군은 이 틈을 타 2중대가 있는 278고지를 공격했고, 가브릴로프(Gavriloff) 상사가 지휘하는 선발대는 야간에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한편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4개 포병대가 이날 밤 시간당 6천발의 포탄을 쏘아댔고, 경전차 소대는 76.2mm포 1200발을, 지원중대 또한 81mm 박격포 800발과 75mm포 150발을 발사했다. 또한 프랑스 대대의 좌측에 위치한 미 23연대 1대대도 지원사격을 했으나 이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공병소대의 전초진지들이 하나 둘 뚫려 고지는 피탈 위기에 놓이게 된다.

10월 7일 자정 무렵 프랑스 1중대는 역곡천을 건너온 미군의 중무장 1개 분대와 대대장행정병들로 구성된 1개 행군분대, 그리고 프랑스 2중대로부터 1개 분대를 지원받았다. 이후에도 셔먼 전차 두 대, 4.2인치 박격포 분대, 그리고 지원중대의 다른 1개 분대가 후속 합류했다.

이후 중공군은 두 차례에 걸쳐 대대, 중대 규모로 프랑스 1중대와 2중대 사이에 침투하려고 기습을 감행했고, 이를 프랑스군과 배속된 한국군,[1] 지원 온 미군이 막아내는 과정에서 난전이 펼쳐졌다.

10월 8일부터 9일 사이 중공군의 공세는 점차 동쪽의 한국군 9사단 30연대가 지키는 백마고지 방면으로 집중되었다.

10월 10일 새벽, 결국 지쳐버린 중공군은 시체 6백구와 야포, 기관총, 소총 그리고 경기관총 등을 남긴 채 물러나야 했고, 고지는 다시 프랑스군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지를 되찾기까지 프랑스 대대는 전사 47명, 부상 144명이라는 손실을 입었으며, 이 소식은 화살머리고지 동쪽 백마고지에서 여전히 분투중인 국군 9사단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켰다.

이후 프랑스대대는 이 고지를 미 육군 38연대 3대대에 인계한 뒤 재정비를 위해 전선에서 8km 떨어진 신탄리로 이동하였다.

3. 2차전 (1953.6.29 ~ 7.11)

지금도 생생한 화살머리고지의 전투.. - KBS 스페셜
참고자료

1953년 6월 29일부터 7월 11일까지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23군 예하 제73사단을 상대로 벌인 고지전.

이 전투는 크게 2단계로 구분된다. 6월 29일부터 30일까지는 각 전초진지들을 중심으로 찔러보기식 전투가 벌어졌다면, 7월 6일부터 11일까지는 가용 전력 대부분을 동원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3.1. 전투 전 상황

1952년 12월 29일부터 철원의 미 육군 3사단과 임무교대한 국군 2사단은 1953년 6월 당시에도 31연대(조성래 대령)를 우측에, 좌측에 32연대(강홍모 대령)를 배치하고 17연대(김필상 대령)를 예비로 삼아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3월 23일 남서쪽의 올드 발디(늙은 대머리) 고지가 탈취당했고, 26일 탈환이 포기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6월 12일 이 무렵 중공군은 철원 백마고지를 공격했으나, 한미 육군의 5개 포병대대, 항공 지원과 풍족한 보급을 등에 업은 국군 32연대의 우주방어로 돈좌되었다. 그러자 중공 37사단으로 하여금 화살머리고지를 우선 점령시켜 남서쪽으로부터의 증원을 차단시킨 뒤 백마고지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바꾼다.

3.2. 전투 경과

6월 29일 국군 2사단 32연대는 37사단의 공세를 맞이해 화살머리고지 전방 6∼700m 능선에 전초진지 두 개(좌측은 B진지, 우측은 A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면서 고지 서북쪽으로 800m 떨어진 방송고지[2]를 공격해봤지만 이 와중에도 중공군은 오후 11시경 국군 32연대의 전초진지를 공격했다.

6월 30일 새벽 국군 32연대 2대대는 동굴작전[3]에 돌입 후 진내사격을 요청할 정도로 처절하게 방어했고, 이 틈을 타 17연대 3대대가 화살머리고지로 올라가 적군을 격퇴한 뒤 재탈취 시도를 한번 더 격퇴했다.

7월 6일 오후 11시 중공 37사단 218연대 1개 대대가 야음을 틈타 아군 전초 2개를 공격하면서 재공세가 시작되었다.

7월 7일 새벽 3시 50분 중공군들이 두 전초진지들을 피탈했다. 이에 국군 2사단은 17연대 3대대를 32연대에 배속시켜 방어를 굳혔고, 가용부대로 우선 좌측(B) 진지를 탈환했다.

7월 8일 우측(A) 진지 탈환을 위해 국군 2사단 31연대 2대대 6중대가 진지 동쪽에서 정면 공격을 감행해 어그로를 끌었고, 이 틈을 타 7중대가 B진지 방면으로 우회 공격해 결국 우측(A) 진지도 탈환했다.

7월 9일 중공군의 재공세에 진내사격을 요청해가며 버텼음에도 또다시 두 진지들을 피탈당했다. 또한 이 와중에 31연대는 1대대로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김웅수 2사단장은 야음을 틈타 공격하는 중공군의 수법을 역으로 이용해 31, 32연대에게 11일 새벽 1~2시, 각자 2개 중대를 선발대로 삼아 피탈당한 전초진지와 그 북쪽의 중공군 중간 거점들(방송고지, K고지)까지 탈취하라는 과감한 역습작전을 지시한다.

7월 11일 오전 1시부터 국군 2사단 31, 32연대가 포격 지원 속에 일제히 돌격해 31연대는 K고지 방면의 우측(A) 진지를 탈취했고, 32연대는 2개 중대로 전방 1.5km 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탈환 시도를 돈좌시킨 뒤 일대의 진지들을 뭉개고 철수함으로서 화살머리고지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후 양측은 추가 공세 없이 위력수색 내지는 정찰만으로 일관하며 휴전을 맞게 되었다.

또한 이 쟁탈 과정에서 2사단은 중공군 1,300여명을 살상하였으나 아군 전사 180여명, 실종 16명, 부상 770명 가량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이 고지를 어떻게든 지켜낸 공로로 김웅수 사단장은 1954년 7월 6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4. 남북공동유해발굴 사업




5. 기타


* 1951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참전해 지평리, 화살머리고지 전투 등에서 활약한 장 르우(Jean Le Houx) 프랑스 육군 병장은 2016년 84세로 타계하기 전 옛 동료들이 잠든 한국의 전적지에서 영면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은 프랑스 참전용사협회와 한국 대사관을 거쳐 한국에 전달되었고, 2017년 11월 화장된 그의 유해가 화살머리고지 부근 285고지 기념비 옆에 안장되었다.

[1] 사실 이들도 격전지마다 배치되어 싸운 탓에 많이 사상당했고, 이를 프랑스의 후속 증원군과 한국군들로 채웠다. 다만 한국군들은 의사소통 문제로 분대나 소대를 따로 만들고 프랑스 장교가 지휘하는 형태로 운용했다.[2] 공산측이 심심하면 여기서 대남방송을 해 붙여진 이름.[3] 동굴에 숨듯 유개호(지붕이 덮힌) 진지와 참호에 틀어박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