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지휘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냈다. 유엔군은 38선 근처에서 휴전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은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3차 공세를 감행하였고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면서 1.4후퇴를 하게 된다.2. 상세
1, 2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된 유엔군을 보고 서방 국가들은 지레 겁을 먹고 중국과 협상하려 했다. 이때까지 서방 국가들이 주축이 된 유엔에서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목적이 단순히 '자국의 국경선 방어 또는 북한을 도와 전쟁 전의 영토인 38선 근처 영토까지의 회복'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중국과 휴전협상을 하려 했으나, 중국이 유엔 측의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제3차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전술(前述)했다시피 중국의 진정한 참전 목적이 유엔군의 한반도 축출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중국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제3차 공세를 펼쳤으며 이 공격에 미군과 한국군은 맥없이 밀려났다. 유엔군의 경우, 38선에 방어선을 펼치긴 했지만 전선이 망가진데다가 워낙 병력이 부족해서 1개 대대가 10km 정도를 담당해야 할 정도로 중공군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방어선 곳곳이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가 펼치는 공세에 뻥뻥 뚫리면서 무너지게 된다. 미8군사령관인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은 이대로 있다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중국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 1월 3일에 서울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미8군에 내린다. 여기서 중국군에 포위당해서 전멸한 부대도 있다고한다.
결국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북중연합군에 함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 번 37도선(평택-원주-삼척 방어선)을 향해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고, 미8군사령부도 대구로 후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