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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산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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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제12연대의 중공군 제1제대 돌파 저지3.2. 중공군 제2제대 투입과 제15연대의 역습3.3. 제11보병연대 vs 북한군 제1군단3.4. 글로스터셔 대대 D중대 구출과 철수3.5. 델타선-골든선 전투
4. 결과5. 같이 보기

1. 개요

파평산 전투는 한국 전쟁이 진행중이던 1951년 4월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문산-파주 파평산을 잇는 선에서 중공군 5차 공세(4월 공세)의 주공 임무를 맡은 중국 인민지원군 제19병단 예하 제64군과 조선인민군 제1군단의 공격을 저지한 전투다.

2. 배경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 4차 공세를 막아낸 유엔군은 곧장 주도권을 탈취하고 반격으로 전환, 차근차근 전선을 북상시켜 나갔다. 그 결과 1951년 3월 15일에는 서울을 탈환했으며, 4월 중순에는 38선을 돌파해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목전에 이르렀다.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펑더화이를 위시한 중공군 수뇌부는 유엔군이 진남포를 목표로 또다른 상륙작전을 벌여 안주-원산선을 장악한 뒤 중공군과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게 됐다. 중공군 수뇌부는 이를 타개하고자 6개 군 규모의 증원병력이 도달하는 4월 하순부터 서부전선의 유엔군 섬멸을 목표로 강력한 공세를 실시, 진남포 상륙을 미연에 예방하고 주도권을 재탈취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1951년 중공군 춘계공세(중공군 5차 공세)다. 특히 중국측 1차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근의 한국전쟁사 연구 저작들에 따르면, 중공군 5차 공세 1단계, 즉 "4월 공세"는 중국군 공간사의 서술과 달리 단순히 상륙작전 예방과 주도권 탈취만이 목표가 아니라 서부전선의 미 1군단을 포위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여 전쟁을 공산군의 군사적 승리로 종결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파일:20230208_120012.jpg

중공군의 작전기도는 19병단과 북한군 1군단이 의정부시-동두천시/포천시-연천군 축선을 따라 돌출된 미 1군단의 측방을 임진강 하류 파주-문산선에서 돌파하여 의정부를 장악하고 미 3, 24, 25사단, 터키 여단의 퇴로를 차단한 후 차례로 분할 섬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미 1군단 정면에서는 3병단과 9병단이 고착견제를 수행하는 한편 9병단에 배속된 제40군은 사창리-가평 축선으로 강도 높은 조공을 가해 전선을 절단,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의 증원을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공격 개시 시각은 4월 22일 황혼이었다.

중공군 주공부대인 19병단 정면은 문산-파평산의 국군 제1사단과 적성면-감악산-금굴산의 영국군 제29보병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중 1사단은 64군과 북한군 제1군단의, 29여단은 63군의 공격 목표로 할당됐으며, 65군은 제2제대로 63, 64군이 전선을 돌파하면 임진강 남안으로 후속 도하해 유엔군을 섬멸하도록 했다. 1개 사단 + 1개 여단의 담당구역을 1개 병단 + 1개 군단이 공격한 결과 이 지역의 피아 병력 비율은 최소 8 대 1에서 최대 10 대 1에 육박했다. 전선 전체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격차였다.

국군 1사단은 3월 말 임진강 남안의 사단 주저항선을 점령한 이후 접적을 상실하자 수색대를 임진강 이북으로 진출시켜 적정을 수집했으나 초기에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4월 11일~14일부터는 중공군 소부대와 산발적 교전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4월 20일경 이후로는 중공군의 공세 징후가 뚜렷해져 21일~22일에는 공세적 정찰을 수행하는 1사단 수색중대 및 각 연대 수색대와 이동하는 중공군 사이에 소규모 교전이 연이어 벌어졌다.

파일:파평산전투1사단배치.jpg

사단 정면에 중공군이 집결하는 정황이 명백해지자 1사단은 문산 북방의 고지군에 11연대를, 파평산 일대에 12연대를 배치하고 봉일천 이남 죽원리의 15연대예비대로 삼아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강폭이 넓고 도하에 불리한 임진강 하구에는 대전차대대를 배치하여 사단 좌측방의 경계를 맡겼다. 이처럼 고조되는 전운과 함께 22일의 태양이 저물었다.

3. 전투 경과

3.1. 제12연대의 중공군 제1제대 돌파 저지

임진강 북안의 1사단 수색부대는 22일 22시경부터 64군 예하부대의 포위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중공군 192사단이 야음을 틈타 12연대 전방의 고랑포, 석포, 자지포 등 도하지점을 점령했다. 23일 자정 무렵 사단/연대/대대 수색대가 각자 포위망을 뚫고 임진강을 건너 복귀하자 사단포병이 적 도하 저지를 위해 탄막사격을 실시했으나 중공군은 새벽 02시 30분 즈음 도하를 개시해 강 남안 장좌리 부근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날 중공군의 도하작전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64군 1제대 191, 192사단은 공격개시시간에 맞춰 조급히 임진강으로 진출한 탓에 제대로 된 지형정찰을 실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조석간만의 차로 발생하는 물때를 잘못 맞춰 도강에 심각한 지장을 겪었다. 특히 191사단 572연대의 경우 23일 01시에서 02시 사이 4.5미터 이상 급격히 상승한 수위로 인해 수백명이 강 한복판에서 그대로 익사하는 블랙 코미디를 찍었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온 중공군이 2개 사단이라는 순수한 질량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소대 단위로 강변에 배치돼 있던 1사단 전초부대는 일단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파평산전투12연대23일새벽.jpg

사단 우인접 영 29여단 구역에서도 중공군 63군이 공격을 시작하여 임진강변의 글로스터 대대 전방 중대들을 밀어냈는데, 이 중 1개 대대 가량의 병력이 그대로 남하해 04시 무렵 사단 최우익의 12연대 3대대 9중대 진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개전 당시부터 1사단에서 복무한 덕에 파평산 근방 지리를 훤히 꿰고 있던 9중대장은 마지리 일대의 개활지에 사전 설정해놓은 살상지대로 적을 유인한 뒤 전 화력을 집중, 막대한 타격을 가해 패주시켰다. 3대대 좌일선 10중대 역시 중대 전초소대를 추격해온 중공군을 주진지 전방에서 07시경 격퇴했다. 12연대 1대대 정면에서는 주저항선 상의 공방은 없었으나 장파리 남쪽 53고지에서 3중대 전초소대의 저항을 돌파한 중공군 1개 대대가 1대대-3대대 전투지경선 사이의 공간을 타고 침투해 23일 새벽 파평산 자락의 400고지를 점령했다.

사단 좌전방 11연대의 전선은 고요한 가운데 우전방 12연대가 집중적인 공격을 받자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은 날이 밝는대로 반격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1대대는 400고지를 탈환하고, 연대 예비 2대대는 사단을 지원하는 미 제73중전차대대 C중대와 연대 전초지대로 보전협동공격을 가해 재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2대대의 빈 자리는 15연대 2대대가 법원리로 추진되어 메우기로 했다. 이 와중에 다시 29여단 글로스터 대대와 12연대 9중대 사이로 침투한 중공군 187사단 일부 병력이 3대대 우측방을 위협하자 3대대 예비 11중대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다.

파일:파평산전투23일주간.jpg

23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3대대 11중대의 역습은 성공적이었다. 중대는 9중대 우측방의 357 고지를 탈환한 후 전과확대를 실시하여 그 500m 북쪽 무명고지까지 진출, 오후 내내 역습해오는 중공군 증원부대를 격퇴하고 상당한 사상자를 안긴 후 15시 30분경 최초 집결지로 철수하였다. 14시 30분 공격개시선을 넘은 2대대와 73중전차대대 C중대의 보전협동공격 역시 원 목표였던 150고지(국사봉)를 되찾고 중공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중공군의 도하가 이날 오전 11시 즈음 근접항공지원포병 사격 탓에 중지된 가운데 2대대는 공습, 포격, 보전조 공격으로 임진강 남안의 적 병력을 강타해 약 3,000명의 추정 살상 전과를 올렸다. 다만 150고지 동쪽 128고지에서 중공군이 끈질기게 저항하여 경계지대 전부를 확보하지는 못한 상황에서 대대는 19시 30분경 중공군의 야간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금곡리의 집결지로 철수했다. 유일하게 1대대 3중대의 400고지 공격만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단 수색중대를 파평산 정상에 배치하여 추가적인 침투를 저지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3.2. 중공군 제2제대 투입과 제15연대의 역습

제1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전선 돌파가 실패하자 제19병단장 양더즈(楊得志)는 "오늘(23일) 저녁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의정부로 들어가 예정 목표를 점령하라"며 "실패에는 혁명적 규율에 의거한 가혹한 처벌이 있을 것"으로 "어떤 공격 실패도 죽음을 의미한다"고 제64군장 쩡쓰위(曾思玉)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64군은 191사단 우익에 군 예비 190사단을 투입, 3개 사단으로 한층 강화된 공세를 가해왔다.

23일 22시경 철수하는 12연대 2대대를 뒤따라온 2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10중대 방어진지를 공격했다 맹렬한 기습사격에 황급히 물러난 것을 신호탄으로 자정을 넘어서부터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1사단의 주저항선에 몰아닥쳤다. 24일 01시경 방축동 도하지점에서 임진강을 건넌 190사단의 1개 연대가 임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03시경 11연대와 12연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들었고, 고랑포에서 도하한 1개 연대 규모의 적 병력은 파평산 정면을 공격해왔다. 사단 우일선의 12연대 3대대도 05시 무렵 고사동-마지리 일대에서 적 1개 연대의 공격을 받는 것과 동시에 사단 전투지경선을 우회 침투한 중공군의 측후방 위협에 노출되었다.

파일:파평산전투24일새벽.jpg

일선 연대간 간격을 파고들어 두포리-마산리-법원리 축선으로 돌파를 시도한 190사단 예하 568연대 일부 병력은 돌파구 확장을 위해 11연대 3대대의 11중대와 10중대를 공격했다. 대대 우일선을 맡은 11중대는 진지를 고수해냈지만 측후방의 10중대는 격전 끝에 주진지에서 물러나 저지진지를 편성해야만 했다. 다행히 연대 예비 7중대와 대대 수색소대의 증원을 받은 3대대는 추가적인 철수 없이 날이 밝을 때까지 돌파구 좌견부를 고수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전날부터 연이어 격전을 치른데 이어 또다시 방어선 전체에 집중공격을 받은 12연대는 사정이 좋지 못했다. 우선 정면과 좌우측방에서 모두 적을 맞이해 포위 위험에 빠진 3대대는 일단 철수하여 212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재구축했다. 눌노리 일대 중공군 2개 대대의 정면 공격에 맞서던 좌전방 1대대 역시 적 190사단의 일부가 마산리로 진출해 대대의 측후방을 위협하자 연대 예비 2대대 일부의 마산리 전개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정면의 적 부대가 계속 증원되어 주진지 곳곳이 돌파당하자 더는 견디지 못했다. 대대는 24일 09시경 파평산 5부 능선으로 후퇴한 데 이어 오전 11시에는 다시 산 정상으로 물러나 거점방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1연대와 12연대 사이의 돌파구가 위험할 정도로 확장된 것이다.

파일:파평산전투24일돌파구.jpg

568연대를 포함한 중공군 190사단 주력이 1사단 중앙 전투지경선을 따라 4km 이상 돌파에 성공하자 1사단장 강문봉 준장은 사단 예비 15연대 투입을 결정했다. 다행히 이즈음 날이 밝아 포병화력과 공군 근접지원 운용이 용이해지면서 중공군의 공세는 큰 피해를 입고 급격히 둔화되었다. 중공군 190사단은 더 이상의 전진을 중단한 채 영평산과 그 일대의 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전 8시 이동을 개시한 15연대(-)는 정오 무렵 전날 법원리에 추진배치된 15연대 2대대와 합류했다. 이 중 2대대는 미 73중전차대대 B중대와 함께 마산리-두포리 축선으로 역습을 실시하고, 3대대는 그 좌측방에서 영평산과 123고지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한 중공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24일 14시 30분경 마산리에 진출한 2대대는 전차중대의 엄호 아래 중공군을 깔끔하게 제압하며 전진하여 19시 즈음 두포리 일대의 279고지를 탈환하고 임무를 완수했다. 영평산과 123고지를 차지한 중공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3대대의 공격을 일시 지연시켰으나, 2대대의 역습이 주저항선을 향해 순조롭게 진행되자 퇴로 차단을 우려한듯 북서쪽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결국 3대대 역시 19시 30분 양 고지를 점령한 뒤 파평산 자락의 261고지까지 전진하여 야간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다. 11연대도 15연대 역습이 성공적으로 흘러감에 따라 반격 기회를 포착, 지난 밤 빼앗긴 10중대 진지를 회복하고 6중대 1개 소대와 미 전차소대로 임진강변을 따라 퇴각하는 중공군을 추격했다. 이로써 사단 중앙에 뚫린 돌파구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파일:파평산전투24일주간역습.jpg

그러나 12연대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파평산 정상의 12연대 1대대는 17시부터 400고지를 발판으로 한 중공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대대는 19시까지 진지를 고수했지만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현 위치를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대장의 결심으로 파평산 남쪽 동령말까지 물러나 저지진지를 꾸렸다. 12연대 우전방 212고지의 3대대 역시 14시경 연대 명령에 따라 금곡리로 철수하였다. 3대대의 원 주저항선 회복을 위해 역습하던 2대대와 미 73중전차대대 C중대는 400고지에서 내려온 2개 중대 규모의 적을 격퇴하는 사이 해가 저물어 공격 실시가 어려워지자 불가피하게 노파동 일대에서 야간방어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사단은 좌전방 및 중앙과는 달리 파평산 일대의 동측 주저항선 대부분이 피탈된 채 25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3.3. 제11보병연대 vs 북한군 제1군단

24일 저녁 12연대의 주저항선 피탈로 영 29여단과 사단 사이에 간격이 확대되자 강문봉 준장은 다음날 아침 06시 30분을 기해 12, 15연대가 공격을 실시할 것이니 양 연대는 이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22일 밤부터 25일 새벽까지의 전투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오히려 중공군 쪽이었다. 1사단과 영 29여단의 고군분투로 19병단의 신속한 의정부 탈취 및 미 1군단 퇴로 차단 기도가 좌절 직전이었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병단 제2제대 제65군의 상황이었다. 64군이 형성한 돌파구를 통해 의정부로 전역우회를 실시하기로 되어 있던 65군 예하 2개 사단은 24일 임진강을 도하했다가 아직도 1사단의 방어선 앞에서 버벅대던 64군 병력과 뒤엉켜버렸다. 장파리-마지리 사이의 약 20km²에 불과한 좁아터진 교두보에 5개 사단 병력이 과밀집되자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유엔군 포병 화력과 근접항공지원이 중공군을 난타했고, 19병단에는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다.

64군 예하 3개 사단이 제시간에 돌파구를 확보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19병단 2제대 65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은 공산군은 결국 북한군 제1군단(제8, 제19, 제47사단)을 추가로 동원했다. 북한군 1군단은 원래 서울 점령과 이후의 방어전에 투입될 예정이던 부대였는데, 이들에게 문산 돌출부와 임진강 하구로 공격하여 64군의 임무를 도우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은 중공군 4월 공세가 계획에서 급격히 탈선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파일:파평산전투25일새벽.jpg

24일 저녁, 그간 책임구역 오른쪽 끝의 11중대와 10중대가 중공군 190사단과 벌인 전투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고요했던 11연대 정면에서 북한군 1군단의 활동이 관측되기 시작했다. 특히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적정이 활발하자 문산 돌출부로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연대장은 예비 2대대의 5, 6, 8중대를 좌일선 1대대 바로 뒤 선유울과 상독서동으로 진출시켜 전투에 대비했다.

하필이면 24일 밤-25일 새벽은 안개가 유난히도 짙게 끼어 5m 앞도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이 안개를 방패삼아 25일 자정 임진강을 건넜다. 임진강 철교 부근의 전초소대가 이를 감지하고 사격전을 벌였지만 얼마 못 가 탄약 부족으로 철수했고, 25일 02시 30분부터 11연대 1대대 정면으로 북한군 8사단 주력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대대 방어진지에서는 불량한 시계로 인해 격렬한 혼전이 벌어졌다. 대대 좌전방 1중대는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에 맞서 백병전을 벌이다 고지 정상 부근의 2차 방어선으로 후퇴했는데, 북한군은 방어선 돌파에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정상으로 접근하다가 기습적인 수류탄 투척과 지근거리 일제사격을 얻어맞고 패퇴했다. 한편 1중대 우측방으로는 또다른 북한군 종대가 진지를 지나쳐 문산으로 향하다 종대 후방의 1중대, 좌측방의 3중대, 전방의 2대대 6중대에 포위되어 집중사격을 받고 문장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러나 우전방의 2중대는 불운하게도 북한군 8사단의 1개 연대와 우인접 3대대를 공격중이던 북한군 47사단 일부 병력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중대는 백병전을 불사한 혈투 끝에 가까스로 진지를 사수해냈지만, 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연대 우일선 3대대 역시 청운동 일대에서 도하한 북한군 47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임진강변을 따라 남하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은 대대 중앙의 11중대 진지에 수차례에 걸쳐 정면공격을 가해왔다. 중대는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번번이 격퇴했지만 10시간에 달하는 사투 끝에 25일 아침 결국 주진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11중대는 후방 진지를 다시 점령함으로써 좌우 중대와 연결을 유지하고 북한군의 추가적인 침투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날 정오 즈음, 드디어 기상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유엔군 포병 사격과 항공지원이 집중되자 북한군 1군단의 안개를 방패 삼은 맹공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공산군은 북한군 1군단까지 동원하는 강수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결정적인 돌파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3.4. 글로스터셔 대대 D중대 구출과 철수

중공군 4월 공세가 4일차로 접어든 25일 새벽, 공산군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미 1군단은 전열을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캔자스선(Line Kansas)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창리 전투로 노출된 군단 우측방의 공간과 미 25사단이 받고 있던 강한 압력, 그리고 1사단과 영 29여단 사이의 틈새로 느리게나마 어떻게든 병력을 밀어넣고 있던 중공군 등의 요소를 종합한 군단장 프랭크 밀번(Frank W. Milburn) 중장은 더이상 캔자스선을 고수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군단에 좀 더 후방의 성동리-덕정동-포천읍을 잇는 델타선(Line Delta)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미 24사단과 미 25사단은 08시를 기해 델타선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단에는 철수가 불가능한 부대가 하나 있었다. 설마리에서 중공군 63군의 맹공에 맞서 놀라운 분전으로 진지를 지켜내다 적중에 고립된 영 29여단 예하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1대대였다. 어떻게든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인접부대인 국군 1사단과 미 3사단에는 "글로스터셔 대대를 구출하기 전까지는 현 진지를 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특히 영 29여단을 배속받은 미 3사단은 "사단이 역습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글로스터셔 대대를 구출할 것"이라는 엄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5연대 2대대는 06시경 전날 저녁 받은 명령에 따라 두포리, 금파리의 방어편성에 유리한 지형 탈환을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방면의 중공군 역시 사단 주저항선 돌파를 위해 전날보다 증강된 병력으로 재차 공격을 준비하던 중이었으므로 목표 탈취가 여의치 않았고, 전투는 곧 쌍방간의 격렬한 사격전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파평산 정상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감행한 3대대도 마찬가지로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5부 능선 근처에서 돈좌되었다.

새벽 03시쯤 파평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침투하는 중공군 2개 중대를 야간매복으로 격퇴하느라 준비가 지연된 사단 우전방 12연대도 09시를 기해 공격개시선을 통과했다. 원 주저항선 탈환과 영 29여단과의 연결 회복 임무를 부여받은 12연대는 1대대를 예비로 둔 채 좌일선 3대대가 파평산 북동쪽 능선을, 우일선 2대대가 357고지를 목표로 하여 양 대대 병진대형으로 전진했다. 이중 2대대의 공격은 수월하게 진행되어 만월봉에서 저항하는 중공군을 몰아내고 정오 무렵 357고지 남쪽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파일:파평산전투25일주간역습.jpg

파평산 북동쪽 능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3대대는 근접항공지원과 미 73중전차대대 C중대(-)의 화력지원을 이용해 파평산 동측 사면에서 저항하는 중공군 1개 대대를 제압하고 11시경 212고지로 진출했다. 그 순간 212고지 쪽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수십명의 사내들이 달려내려왔다. 중공군의 돌격이라고 생각한 미군 셔먼 전차들이 불을 뿜자 상공에서 선회하던 관측기가 다급히 저공으로 내려와 쪽지를 투하했다. 이들은 중공군이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아군 전선으로 탈출에 성공한 글로스터 대대 D중대의 잔여병력이었던 것이다.

왜 D중대가 하필 여기에 있었냐면, 이날 오전 탄약 고갈로 더이상의 전투력 발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영 29여단 글로스터 대대장 제임스 칸(James P. Carne) 중령이 10시를 기해 대대에 방어진지 포기와 분산 철수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때 대대원 대다수는 최단 경로인 남서쪽 방향으로 퇴각하다 적 포위망에 걸려 포로로 잡혔지만, 중공군의 허를 찔러 북서쪽으로 크게 우회한 뒤 눌노천(노리천) 계곡으로 남하하는 경로를 택한 D중대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고비에서 D중대원들에게는 불운과 행운이 교차했다. 불운은 사격전이 벌어지는 전장 한복판으로 들어온 탓에 오인사격을 당한 것이고, 행운은 천만 다행으로 오인사격 피해가 부상자 여섯으로 그쳤던 것이다. 중대원들은 쪽지를 전달받고 뒤늦게나마 이들의 정체를 깨달은 미 전차중대에게 구출되었다.

글로스터 대대 D중대의 후송을 끝낸 12시 30분경 3대대는 공격을 재개했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혔다. 그 와중에 400고지에서 남하한 중공군 증원병력이 대대의 좌측 후방을 위협하여 대대 예비 9중대가 저지에 나섰으나 대대 OP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고, 357고지 목전에 다다른 2대대 역시 만월봉에서 물러난 중공군 병력의 곰소(웅담리) 방향 후방 우회 공격으로 퇴로 차단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때마침 군단에서도 델타선으로의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분산철수가 확인된 이상 더는 1사단과 미 3사단이 주저항선을 고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2연대는 전차중대의 엄호 하에 금곡리 일대로 물러나 델타선으로의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3.5. 델타선-골든선 전투

4. 결과

4월 공세에서 임진강 하류를 돌파해 미 1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분할섬멸하겠다는 중공군 사령부의 야심찬 의도는 1사단과 영 29여단의 분전으로 완전히 좌절되었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조차도 1951년 4월 26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보고에서 "3일 동안 불철주야로 공세작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의정부를 우회하여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실패하였다"며 공격 실패를 자인했다.

특히 1사단은 중공군 1개 군과 북한군 1개 군단 도합 2개 군단 규모의 적 주공부대에 맞서 나흘 동안 방어선을 사수하며 군단 주력이 철수할 시간적 여유를 보장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만약 중공군이 전선을 돌파해 의정부를 조기에 탈취할 수 있었다면 미 1군단 예하 미 3사단, 미 25사단, 미 24사단이 포위당해 서부전선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함은 물론 서울 실함은 불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러나 1사단이 군단 좌측방을 지탱한 덕분에 미 1군단은 델타선-골든선으로 이어지는 사전 준비된 축차진지를 점령하여 중공군의 마지막 서울 점령 시도를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중공군 4월 공세가 1사단의 용전분투 덕분에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음을 입증하는 가장 명확한 근거 중 하나는 후일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오르는 19병단장 양더즈의 회고록이다. 그는 4월 공세에 대해 "제19병단 예하 제64군은 동문리(법원리 북서 4km)를 공격하던 중 적(1사단)의 강력한 역습으로 방어진지를 돌파하지 못하였고, (중략) 이로 인해 제64군이 계획된 시간 내에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여 지원군사령부로부터 나를 포함한 여러 책임자가 엄격한 비판을 받았으며 제64군의 2개 사단장과 정치위원은 강등되었다"고 증언하였는데, 이는 파평산 전투가 중공군 내에서 사단장급 지휘관들조차 다수 강등될 정도로 심각한 패배로 인식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4월 공세 기간 1사단이 전사 154명, 부상 477명, 실종 317명의 상대적으로 적은 손실을 입는 동안 공산군 측에서는 북한군 1군단을 제외한 중공군 64군에서만 약 10,000여명의 사상자가 집계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도 부여된 임무인 방어선 돌파는 완전히 실패했으니 사단장과 정치위원 목이 뎅겅뎅겅 날아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1사단의 방어선 중앙에 일시적으로 돌파구를 뚫었던 군 예비 190사단만이 전연 2개 사단이 받은 것과 같은 처벌을 피해갈 수 있었다.

심지어 내부 보고나 개인 회고록에 비해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 용문산 전투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 중국군 공간사 "중국군의 한국전쟁사(抗美援朝戰爭)" 역시 "장파리, 고토동 일선을 공격 점령한 후에는 강 남안 미타사[1] 이북 지구에서 저지를 받아 한국군 제1사단 주진지를 신속하게 돌파할 수 없었다", "전역 우회를 담당한 지원군 부대가 돌파 후 저지를 받아 제 시간에 지정된 위치에 도달하고 전역 포위를 할 수가 없었다"고 서술하여 우회적으로나마 중공군이 패배했음을 암시했다.

동시에 1사단은 4월 공세에서 엄청난 병력 열세 하에서도 절대 물러나지 않고 방어진지를 사수했으며, 불가항력으로 진지가 피탈되면 끈질기게 역습을 가해 추가적인 돌파를 저지하고 적 공세탄력을 꺾음으로써 왜 1사단이 "미군이 가장 신뢰한 한국군 사단"이었는지를 입증함은 물론 같은 기간 벌어진 사창리 전투의 패주로 땅에 떨어질뻔한 국군의 명예를 지켜냈다.

파평산 전투에 대한 미 육군의 높은 평가는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중장은 1사단이 중공군 5차 공세 기간 미군 사단 수준의 전투수행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으며, 미 1군단 참모장 해럴드 K. 존슨 대령 역시 이에 동의했다. 미 육군의 한국전쟁 전반기 공간사(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를 쓴 로이 애플먼은 중공군 춘계공세를 다룬 Ridgway Duels for Korea에서 사단 중앙 돌파구 형성과 이어진 15연대의 역습 상황을 서술하며 밀번 중장의 판단을 인용하여 1사단이 훌륭하게 싸웠다고 호평했다.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역시 중공군 4월 공세가 사실상 종료된 29일 기자회견에서 "국군 제1사단이 지난 1주일간에 발휘한 전투는 그 어느 때의 전투에 비하여도 훌륭한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 밤마다 적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과감히 전투를 벌였고, 작전지역 내의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고 1사단의 전투 수행을 공개적으로 극찬했다.

5. 같이 보기



[1] 파평산 정상 부근의 사찰. 한국전쟁 기간 파괴되었으나 이후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