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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7:30:59

전략도서 확보 작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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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도서 확보 작전
戰略島嶼確保作戰
6.25 전쟁의 일부
파일:여도상륙.jpg
원산 앞바다의 여도에 상륙한 유엔군
날짜
1951년 2월 12일 ~ 1953년 7월 27일
장소
한반도 해상 전역
교전 국가 및 세력[[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유엔군사령부|
유엔군사령부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대한민국|]]
결과
1953년 휴전까지 한반도의 주요 도서 점유
서해 5도의 대한민국 귀속
병력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대한민국 해병대|]]
ㆍ제41독립중대
ㆍ제42독립중대
ㆍ제43독립중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조선인민군 육군|
조선인민군 육군
]]
ㆍ 제63보병연대
피해규모 전사 17명 전사 171명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서해도서 확보 작전3.2. 동해도서 확보 작전
3.2.1. 영흥만 도서 확보 작전3.2.2. 양도 확보 작전
4. 철수5.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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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당시 유엔군 해군과 대한민국 해병대가 서해와 동해상의 주요 도서들을 점령한 작전이다.

2. 배경

1.4 후퇴로 인해 37도선 부근까지 전선이 내려왔지만 이 시점에서 중공군의 공세는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한편 유엔군은 비록 육전에서는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났지만 해상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유엔군은 공산군 측의 항구를 봉쇄하고 추후 있을 공세를 위해 서해와 동해상의 주요 전략도서들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3. 전개

3.1. 서해도서 확보 작전

1951년 2월 유엔군은 서울 재탈환을 위한 선더볼트 작전의 기만전으로써 공산군측 방어선이 취약하다고 판단된 인천지역에 해병대를 비롯한 소규모 특작대를 상륙시키는 일명 2차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인천을 재탈환 하였다. 이후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서울을 재수복하고 전선이 임진강까지 올라가자 향후 있을 공세를 위해 서해안의 전략도서들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당시 유엔군이 철수하기는 했지만 제해권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서해5도를 비롯한 용매도, 대수압도 등의 도서지역을 점령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며 해당 섬들은 황해도의 피난민들과 반공자경단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해병대 제41중대가 해당 도서들을 확실히 점령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되었다.

1951년 4월 2일 해병대 41중대가 교동도에 상륙하였다. 상륙 자체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지만 이를 확인한 북한군이 다음날 새벽 3시부터 교동도와 마주보고 있는 연안 일대에서 포격을 하면서 쌍방의 포격전이 발생하였다. 전투는 5시간 넘게 지속되었지만 해병대는 교동도 북부의 고지에 방어진지를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해병대는 20일동안 주둔하면서 혹시 모를 공산군의 상륙전에 대비했으며 해당 지역 주민들을 위주로 유격대로 편성하여 치안을 맡기는 한편 해주, 연안 일대에 공작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1951년 4월 23일 해병대는 백령도에 상륙하였고 교동도와 마찬가지로 유격대를 편성하여 치안유지와 선무공작을 맡겼다.

1951년 5월 7일에는 대동강 하구의 석도를 점령하였다. 석도는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섬으로 해당 섬을 점령했다는 것은 서해의 북한해군을 감시하는 한편 진남포를 봉쇄하고 평양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51년 11월 29일에는 해병대 일부가 석도에서 이동하여 이미 인민군이 철수한 후 무주공산이 된 초도에 상륙했다.

3.2. 동해도서 확보 작전

유엔군은 흥남 철수 이후 공산군 전력을 분산시키기고 동해상의 주요 항구들을 봉쇄하기 위해 동해상의 도서들을 점령했다.

3.2.1. 영흥만 도서 확보 작전

원산 포위전의 전초전으로 유엔군은 영흥만의 도서들을 점령했다. 영흥만 일대를 봉쇄하고 향후 원산 상륙시에 방해가 될 기뢰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였다.

1951년 2월 12일 묵호를 출발한 해병대 42중대는 미 해군의 엄호를 받으며 영흥만에서 가장 큰 섬인 여도로 향했다. 2월 13일 여도 부근에 도착한 함대는 비행정찰을 하여 잔존 북한군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륙하였다. 사실 1월 16일 북한군이 유엔군의 감시를 피해 소수병력을 상륙시켰으나 해당 지역의 청년의용대와 피난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점령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였다. 2월 14일 오전 7시 30분경 미군의 함포사격을 시작으로 상륙전이 시작되어 1개 소대가 여도 동쪽에 상륙하였다. 오후가 되어 2개 소대가 여도 서쪽으로 상륙하였고 탄약과 보급품을 수송하면서 여도를 완전 장악하였다. 여도 상륙 이후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미해군은 원산에 함포사격을 하였고 갈마반도의 북한군이 응전하면서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흥만의 거점이 될 여도를 장악한 유엔군은 주변의 기타 도서들을 점령하기 위해 함재기와 함포사격을 통해 제반작전을 시행하였다.

2월 24일 2시간에 걸친 함포사격 후 신도에 상륙하여 점령했고 다음날 2월 25일에는 신도 서남쪽의 대도와 서도를 점령했다. 영흥만의 주요 도서를 유엔군에게 남은 것은 원산 본토에서 불과 2.7km떨어진 황토도 점령이였다. 황토도는 매우 작은 바위섬이라 제대로된 진지 구축은 할 수 없었지만 안변에서 원산항으로 향하는 도로와 원산시가지가 한눈에 보여 북한군의 수송현황을 감시할 수 있었다. 3월 4일 유엔군은 황토도에 진입했으나 갈마반도의 북한군이 포격을 해왔다. 이에 함포사격을 통하여 2시간 동안 교전을 벌인 끝에 황토도를 점령했다. 동년 11월 29일 북한군 1개 중대 병력이 황토도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방어부대와 교전 끝에 물러갔다. 이때 전투로 북한군 15명, 국군 7명이 전사했다.

이후에도 북한군의 해안포가 간간히 영흥만의 도서들에 포격을 가했으나 유엔군이 함포사격으로 대응하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3.2.2. 양도 확보 작전

양도는 함경북도 길주군명천군 앞바다에 떠 있는 3개의 작은 섬으로 길주양도, 명천양도, 강후이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성진항을 봉쇄할 수 있었다. 1951년 8월 28일 해병대 제43중대가 무혈입성 한 후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자 1952년 2월 20일 북한군 제63 보병연대가 양도를 탈환하기 위해 박격포를 발포하면서 상륙을 시도하였다. 주둔 해병대는 목선 2척을 격침시켰으나 북한군은 야음을 틈타 길주양도의 70고지와 명천양도의 47고지를 점령했다. 그러자 해병대는 직접 교전하는 대신 해군에 의해 북한군이 자동적으로 포위되도록 유도하기로 하여 적에게 반응하지 않고 방어진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않았다. 북한군은 때문에 아군의 초소를 찾지 못했고 해가 밝자 미해군 함정이 도착했다. 이때 해병대와 미군 함정이 공격하면서 북한군은 156명이 전사하고 14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해병대는 1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4. 철수

이들 작전 외에도 유격대들과 소규모 공작 등을 통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때까지 유엔군은 한반도의 모든 도서들을 점유하거나 통제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정전협상때 이들 도서들을 개성지역과 교환하기 위한 협상카드로 사용하려 했으나 공산군측이 거절했고 결국 개성을 확보하는 것보다 빠른 정전협상을 선택하면서 1952년 12월부터 해당 섬들에 대해 철수작전을 준비하였으며 결국 서해5도를 제외한 점령도서들을 포기하였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면서 초소를 철거하고 이북지역 도서들에 주둔한 인원들과 장비들을 챙겨 철수하였다.

5. 의의

분명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초창기에는 유엔군의 공세를 염두에 두고 시행한 작전이였지만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북한 해안을 봉쇄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유엔군이 점령한 동ㆍ서해의 도서들은 종전때까지 아군 함정들이 이들 도서들을 기점으로 하면서 해안봉쇄와 피난민 구조, 후방공작 등을 시행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 해당 작전을 통해서 공산군보다 빨리 재점령한 서해5도와 강화도 부근의 주요 섬들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영토로 남아있다. 경기만과 서해5도의 섬들의 전략성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해당의 결과로 얻은 이점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