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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3:34:09

김포반도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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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김포반도 전투
파일:3149_16908_3652.jpg
<colbgcolor=#536349> 시기 1950년 6월 26일 ~ 7월 3일
장소 경기도 김포군, 강화군 일대
(現 경기도 김포시,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계인주 대령
김포지구전투사령부
1대 사령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우병옥 중령†
김포지구전투사령부
2대 사령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임충식 중령
김포지구전투사령부
3대 사령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영희 대령
김포지구전투사령부
4대 사령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임무열 소령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강문헌 대위†
독립기갑연대
제3도보수색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박태운 소령
제8연대 3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한순화 소령
제12연대 2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이재일 소령
제15연대 1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안광영 소령
제15연대 2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장춘권 소령
제18연대 2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안민일 소령
제18연대 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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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연대 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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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보국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장영문 소령†
육군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광정 소령
육군보병학교
후보생부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복수 중령†
육군 남산학교장 대리
파일:북한 국기.svg 김웅 중장
제1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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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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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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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김후진 대좌
제1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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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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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이민 중좌
6사단 포병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최율석 대좌
제203전차연대장
병력 병력 3천여명
(축차투입)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
60mm M9A1 바주카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
병력 1만여명
122mm 평사포 8문
122mm 곡사포 12문
76mm 자주포 11문
76mm 곡사포 28문
45mm 대전차포 36문
120mm 박격포 12문
82mm 박격포 54문
T-34 전차
도하장비
피해규모 불명확 불명확
결과 북한군의 김포 점령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지연전
북한군의 한국군 포위망 형성 실패

1. 개요2. 배경3. 상황
3.1. 북한군3.2. 한국군
3.2.1. 김포지구사령부
4. 작전 계획5. 전투
5.1. 6월 25일5.2. 6월 26일5.3. 6월 27일5.4. 6월 28일5.5. 6월 29일(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5.6. 6월 30일(오류동 전투)5.7. 7월 1일5.8. 7월 2일5.9. 7월 3일
6. 철수7. 평가
7.1. 북한군7.2. 한국군
8. 결론

[clearfix]

1. 개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강 하류인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김포지구 전투' 라고도 한다. 전투지역은 강화군, 김포시, 부천시,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일대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분전으로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의 진격을 지연시켜 한국군의 피해를 줄이고 북한군 6사단이 한강 남쪽을 장악해서 한국군을 반포위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2. 배경

한국군 제1보병사단이 100km에 육박하는 삼팔선에 모든 병력을 일직선으로 배치시켜서 방어한다는 말도 안되는 기존의 방어지침을 버리고 북한군의 전면침공시 청단, 연백, 개성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삼으면서 20km 정도의 상대적으로 짧은 방어선을 수비하겠다는 방어지침으로 변동한 것은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령의 지시였으며 해당 지침은 타당하여 채병덕 총참모장의 재가를 받고 실제 실행에 들어갔다.

해당 방어지침은 적절하였으나 유사시에 전방지역이 되는 강화도김포반도쪽 방어를 과연 누가 담당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과거의 지침대로라면 강화도와 김포반도는 후방이 되므로 일단 삼팔선상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 긴급대책을 세울 수 있겠지만 방어지침이 변한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육군본부가 대책을 수립해야 했다. 어차피 기존 방침대로 해도 청단, 연백지역은 방어불능상태라 순식간에 북한에게 함락당할 것이고 그 다음 목표가 될 지역이 강화도나 김포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포반도 북단의 한강 하구지역이 강폭이 2km ~ 3km에 도달하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도하작전을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지형적 조건을 과신한 육군본부는 해당 지역의 방어계획은 전혀 마련해놓지 않았다.

3. 상황

3.1. 북한군

북한은 6.25 전쟁을 기획할 때부터 전면적 침공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서 서울과 근방에 집결할 한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서 우회작전을 2개 준비했다. 그 중 하나는 춘천방면에서 한국군 제6보병사단을 돌파한 후 경춘로 등을 통해서 한강 남쪽의 수원까지 돌진하는 방안이며 해당 작전은 북한군 제2군단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옹진반도, 청단, 연백, 개성을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한 북한군 제6사단이 다음 목표로 강화도와 김포반도에 상륙한 후 남쪽으로 전진해서 인천과 서울을 연결해주는 경인로를 차단하고 김포비행장을 점령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수원까지 돌진해서 북한군 제2군단과 함께 포위망을 완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해당 작전을 위해서 북한군 6사단에게는 소련에게서 공여받은 도하장비를 집중시켰으며 사단장인 방호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비정규전에 능하고 실전경험이 풍부하므로 북한군의 작전본부와 연락이 잘 안되더라도 현지에서 임기응변을 통해 작전수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인선작업도 마무리해두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통해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남침을 시작해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곧바로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로 진입하려고 신속하게 남하하였다. 한강 하구의 김포 지역을 장악해 국군의 한강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영등포·인천·수원 방면으로 곧바로 나아갈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3.2. 한국군

개전 당시 강화도와 김포 지역에는 제대로 된 한국군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진지도 전혀 건설되지 않았고 방어작전 계획도 없었다. 말 그대로 병력의 진공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개성시가 너무 빨리 함락된 상황을 보고받은 육군본부는 그제서야 강화도와 김포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긴급하게 방어계획을 만들기 시작하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찾기 시작했다.

개전 이전에 김포반도에 투입가능한 병력으로는 김포비행장을 중심으로 육군 정보학교인 남산학교와 공병학교, 공군의 항공기지사령부와 공군사관학교 및 보급창과 공군 병원 등의 부대가 그 주위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보급기지인 부평에는 윤태인 중령이 이끄는 육군의 제1공병단과 김창배 소령이 이끄는 1기병대대 그리고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와 원태섭 대령이 이끄는 경리학교 및 이달고 소령이 이끄는 제1육군병원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체경계 능력조차 없는 교육기관이거나 지원 부대이므로 이들 부대로써 조직적인 지역방어란 기대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는데, 이 때문에 비행장으로부터 서북쪽 30km, 위도 상으로 의정부 - 봉일천선에 연하는 김포반도 북단지역에는 단 한사람의 경계 병력도 배치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공백 상태에 있었다. 강화도나 주변 도서도 한국군 병력이 전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개전 이후에도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김포반도에는 개성 지역의 38선 경계를 맡고 있다가 먼저 한강을 건너 퇴각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일부 병력과 김포비행장에 주둔하던 육군정보학교와 보병학교의 병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만으로는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육군본부는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의 병력을 김포 지역으로 증파하는 한편, 6월 26일에는 해당 지역에 있는 각각의 부대들을 통합해서 3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해 북한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3.2.1. 김포지구사령부

김포지구사 전력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개전 당시 모든 병력이 김포반도에 있던 것이 아니었고 다급한 상황속에서 축차투입된 것이 많다.

4. 작전 계획

당시 서부 전선의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육군본부가 38도선 방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고 있지 않았던 만큼 개성 정면에 대하여서는 적의 전면 공격시에는 해당 지역을 철수하여 문산 부근에 집결한 다음, 임진강 남안에서 적을 격퇴한다.는 자체방어 개념을 가지고 임진강 방어선의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1사단은 김포반도가 분명히 사단의 후방지역이기는 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방어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도 확실히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개전 직후 사단의 계획과는 달리 6월 25일 낮에 문산으로 갈 시간을 얻지 못한 제12연대 2대대는 김포반도로 철수하게 되고, 3대대는 분산철수한 후에 강화만을 헤매게 되고 말았는데, 그 결과 병력 대부분을 수용하지 못한 문산 방어선에서는 방어에 커다란 차질을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에 상륙한 병력 역시 사전에 명확한 행동지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비로소 김포반도가 적의 주공로로서 개방되어있음을 깨닫고 김포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남산 학교를 기간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하여, 김포일원의 각급부대를 통합, 김포반도로 상륙하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6월 26일 아침,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이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써 김포방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계인주 대령은 즉시 남산학교에 소속된 참모를 해당 사령부의 참모로 전환토록 하고, 지휘소를 김포읍의 김포경찰서로 이동하여 김포의 모든 육군부대를 통합지휘하기 시작했다. 26일 저녁까지 김포지구사령부가 확보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

5. 전투

김포반도 전투는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김포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와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진 경인가도 사수 및 한강방어선 전투의 서쪽 측면을 지키는 전투로 크게 나누어진다.

5.1. 6월 25일

이날 정오에 북한군의 Yak-9 전투기 김포비행장을 공습하여 연료저장고가 불길에 휩싸이며 검은 연기를 내뿜기도 했다. 이 당시에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와 항공기지 사령부 및 보급창과 헌병대등은 사관학교장 최용덕 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김포 경비사령부를 독자로 편성하여 육군부대와의 적정수집에 대한 정보교환 및 협력을 목적으로 오후 6시에 사령부와 2개 중대를 김포읍으로 추진한 다음, 병력을 읍 북쪽의 김포 - 통진도로 길목인 44고지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적정을 탐지하지 못한 채 밤을 새우게 되었다.

한편 육군부대인 남산학교는 교장인 계인주 대령이 보병학교에 교육 파견 중이었으므로 부교장인 최복주 중령의 지휘아래 기간요원 40여명으로써 개화산(130고지: 비행장 북쪽 2km)을 점령하여 지역경계에 임하였다.

공병학교는 그 일부가 남산학교 기간요원과 행동을 같이 하는 가운데 주력은 오후 3시를 전후하여 남산 장충단공원으로 이동하여 전선지원 태세에 들어갔다.

25일 오후 7시에 개성에서 철수한 후 시암리 부근에 상륙하여 하룻밤을 보낸 제12연대 2대대는 한순화 소령과 전자열 중위등 150여명의 소수 병력이었지만 시암리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강안을 경계하는 동안 청단과 연백에서 분산철수한 제12연대 제3대대의 일부 병력이 부대대장 박광윤 대위와 제11중대장 백문 중위등의 인솔 하에 합류함으로서 병력이 700여명으로 증가했다. 한순화 소령은 해당 사실을 제1사단에게 보고하고 향후 지침을 얻기 위해서 군용 지프로 밤새 운전하여 문산으로 향했으며 현지에는 부대대장인 전면식 대위가 전권을 행사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외에 서울에서 긴급출동한 독립기갑연대 소속 제1장갑수색대대 제1중대가 김포반도에 투입되어 오후 5시에 김포반도 서북단인 강녕포에 도달하였으나 기존 병력과의 연락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해당 투입도 매우 긴급한 투입이었는데 독립기갑연대가 보유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에 부착된 장거리용 무전기인 SCR-506은 통신범위가 넓고 남산의 독립기갑연대 본부의 통신소와 연결이 잘 되므로 육군본부가 각 지역의 부대와 연락을 제대로 받는 것이 1차 목적이며 장갑차의 화력 지원 및 부대 사기 상승이 2차 목적으로 삼아서 장갑차들을 각 부대로 분산시키는 와중에 투입한 것이었다. 워낙 긴급한 투입이었는지라 후속 부대는 다음날 보내기로 했다.

5.2. 6월 26일

파일:김포반도전투001.jpg
김포반도 전투 초기상황

임진강한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김포반도 북단 지역은 조강이라고도 불리는 지역으로 강폭이 2km ~ 3km에 도달할 정도로 넓으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유속이 밀물과 썰물시에는 최대 초당 1m에서 1.5m의 속도가 나올 정도다. 강바닥은 갯벌로 뒤덮인 상태로 갯벌의 깊이도 깊고 넓어서 도하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이미 예상한 북한군은 북한군 제6사단에게 소련군에게서 받은 도하장비를 집중시켰기에 T-34 전차를 포함한 중장비를 쉽게 도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포반도로 상륙시에 쓸 포구도 미리 지정해놓았는데 개풍군 영정포였으며 개전 초기에 빠르게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병력투입도 옹진반도 전투에 투입했다가 귀환하는 제1연대까지 합쳐서 북한군 제6사단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김포반도 상륙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6월 25일의 개전 당시 북한군의 성과 및 임진강철교를 한국군이 제대로 폭파하지 못한 탓에 북한군 6사단의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고 한국군 제1사단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북한군 6사단의 주력은 예정대로 영정포에 집결하고 있었다.

북한군 6사단이 세운 작전은 정면에서 김포반도 북부로 도하하는 작전과 강화도에 상륙한 후 갑곶과 염하 방면을 거쳐서 김포반도 서부로 도하하는 작전을 병행하여 김포반도의 서북쪽인 통진지역을 쉽게 포위해서 접수한 후 48번 국도를 통해 남하하여 김포비행장을 점령하는 동시에 일부 병력을 진출시켜서 경인로를 차단하고 서울과 인천과의 연결을 끊어놓는 것이 목표였다.

일단 옹진, 청단, 연백, 개성지역을 점령하면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포구들을 확보했으므로 6월 26일 오전 6시 30분까지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 휘하 1개 대대, 제13연대 휘하 1개 대대, 교육대대 및 76mm 야포 2문을 한강 남쪽으로 도하시킬 수 있었으나 주로 강화도에 상륙했으며 극소수의 병력만 김포반도에 상륙이 가능했다. 적절한 도하장비 부족과 도하훈련 부족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래서 북한군은 6월 26일부터 김포반도 북단의 월곶면과 하성면 지역으로 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진출하려고 시도했으며, 한국군은 문수산 등의 강안 고지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쌓아 북한군의 진출을 막으려 했다. 육군본부는 계인주 대령을 이날 아침 남산학교장으로 복귀시키면서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김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여 적의 도하를 막도록 하였다.

제12연대 제2대대가 김포지구사령부에 배속되는 과정은 복잡했다. 6월 26일 새벽 2시에 봉일천초등학교에 도착한 제12연대 제2대대장인 한순화 소령은 기존의 제12연대 연대장인 전성호 대령이 부상을 입고 후송상태라는 것과 제12연대 1대대의 병력 일부만 집결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아침 8시까지 파주에 있는 제1사단본부에 도착해서 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으로부터 김포반도로 철수한 병력을 이동시켜서 봉일천초등학교의 제12연대 본대와 합류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한순화 소령이 오전 11시에 김포읍으로 다시 돌아온 상태에서는 제12연대 2대대는 김포지구사령부의 소속 하에 들어간 상태였고 통진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막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육군본부와 제1사단본부와 김포지구사령부간의 연락소통이 잘 안되는 지휘계통의 혼란 그 자체였다.

그래서 제12연대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3대대와의 혼성병력 600명을 4개 중대로 재편하여, 대대본부를 통진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가금리(조강리 동쪽 2km)에서 강녕포에 이르는 강안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를 통진 북쪽고지(표고 170m 정도)에 예비로 확보하여 오후 2시에 진지편성을 끝내고 경계태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같은 시각 육군본부는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전력강화를 위하여 한국군 독립기갑연대의 일부 병력을 추가로 차출해 김포반도에 투입하였다. 그렇게 장갑대대장 박무열 소령의 지휘아래 일부 기갑병력이 김포반도로 증파되었다. 장갑 제2중대와 기병대 7중대는 장갑대대장이 이끌고 오후 1시에 김포로 향하였고, 도보대대장 강문헌 대위는 본부중대의 화기소대를 9중대에 배속 조치하여 2중대와 함께 오후 4시에 김포반도로 출동하였다.

육군보국대대는 1950년 2월 1일부터 한국군 제3사단에 배속되어 밀양에서는 공비 선무공작을 벌이다가 영등포로 긴급복귀한 부대로 귀순장병 174명으로 3개 중대를 편성하여 2개 중대를 제6, 제7 양 사단의 정찰대로 파견하고 1개 중대만 본부에 두고 있던 상태였다.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급보를 접하고, 출동 준비로 대기하였으나 종일토록 그들에게 별다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보국대대장 방원철 소령은 이날 아침에 육본에 자진 출두하여 남침저지를 자원한 결과 김포반도 방어선의 약점을 메우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대 전체가 100명도 채 안 되는 대원이었지만 99식 소총에 실탄 20발과 수류탄 1발씩을 나누어 가진채 오후 1시를 전후하여 민간용 차량을 사용해서 영등포의 본부를 떠나 오후 3시에 통진 남쪽의 180고지에 병력을 배치한 다음, 멀리 서북쪽으로 갑관 나루터를 굽어보면서 적을 막아보려 하였다.

민기식 대령이 이끄는 시흥의 보병학교는 전날 김병화 소령이 이끄는 교도대가 학생연대장 유해준 중령의 지휘아래 한국군 제1사단을 지원하고자 문산으로 출발한 것에 이어, 다시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학생연대의 후보생으로서 후보생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에 출동하게 되었다.

이미 갑종간부후보생 제1기는 문산으로 출발한 후였으나 갑종간부후보생 제2기 149명, 제3기 150명, 포병사관후보생 제1기 70명, 병기사관후보생 제4기 124명, 일반공병과 제5기 52명등 500여명을 모아서 4개 중대로 편성한 후 대대장은 장영문 소령, 부대대장은 김광순 소령, 제1중대장은 황의선 대위, 제2중대장은 이춘배 대위, 제3중대장은 하범수 대위, 화기중대장은 이승준 대위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긴급편성이라서 문제점이 많았다. 보병학교라서 교육용 81mm 박격포와 기관총은 보유한 상태라 장비가 가능했지만 M1 개런드 소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해당 소총들은 모두 문산으로 출발한 갑종간부후보생 1기들이 가지고 갔기 때문에 38식 소총이나 99식 소총같은 구식 무기들이 지급되었으며 사용방법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긴급화기교육까지 추가해야 해서 26일 저녁에야 중대편성을 마치고 징발한 차량을 사용해서 김포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갑종간부후보생 제3기는 M1 개런드 소총 훈련은 받았으나 실사격은 한번도 못해서 전장에서 M1 개런드를 획득하더라도 제대로 사용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급조한 보병학교후보생 대대는 김포지구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26일 야간에 통진까지 진출해서 육군보국대대 진지 동쪽인 야산지대에 우측으로부터 제3중대, 제2줃대, 제1중대 식으로 3개 중대를 배치한 후 화기중대를 약간 후방에 놓아서 81mm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6월 26일 밤까지 통진을 중심으로 하는 김포반도 서북단에는 총합해서 3개 대대의 병력이 배치되었고 김포반도 북부 방면은 제12연대 2대대를 주력으로 하는 부대가 방어하고 강화도 방면의 김포반도 서부 방면은 육군보국대대와 독립기갑연대 및 보병학교후보생대대가 방어하게 되었으므로 얼핏 보기에는 긴급배치치고는 제대로 부대를 배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투입된 부대 모두가 저마다 독립된 행동에 의하여 축차로 투입된 것이므로 사전에 부대 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일관된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각 대대장의 독단에 따른 부대 배치여서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이 그곳에서 대적하게 되는 것으로만 아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적진에 대한 정보의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신수단이 강구되지 못하여 그 정보가 김포의 지휘부에도 즉각 보고가 되지 않는 상태였으니 이러한 형편으로서는 적의 침공에 대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었다.

26일 오후 4시에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의 진지편성과 배치가 대충 끝나자마자 강녕포 등을 통한 북한군의 한강도하정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피난민을 가장하여 작은 어선 등으로 산발적인 도하를 시도하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는 발동선이 예인하는 도하주정을 이용하여 소대규모로 나누어서 강 건너의 석류포로부터 조강리로 상륙을 기도하였다. 이에 조강리로 증원된 곽응철 소위가 이끄는 장갑소대가 장갑차의 37mm 주포로써 도하중인 북한군 선박을 격침하니 북한군은 서문의 조강리로의 상륙을 포기한 듯 더 이상의 도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화도 방면의 염하 방면은 갑곶 방면에서 도하를 시도중이었던 북한군의 일부가 약간 우회해서 염하를 건넌 후 180고지 서쪽으로 침투하여 26일 자정에 육군보국대대 진지가 붕괴되고 만다.

5.3. 6월 27일

파일:김포반도전투002.png
김포반도 전투 중기상황

6월 26일 자정에 염하쪽으로 도하한 북한군이 육군보국대대 진지를 기습하여 새벽 쯤에는 육군보국대대 자체가 붕괴되었으며 한강 북쪽 방면에서도 북한군이 밤의 어둠을 이용해서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의 일부 지역에 상륙하여 강녕포 부근의 제12연대 2대대 1중대와 103고지의 3중대 사이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세웠다. 이미 한국군의 방어진지에 돌파구를 뚫어놓고 교두보까지 마련한 상태였던 것이다.

6월 27일 아침에 북한군은 한강 북쪽의 영정포에 122mm 야포를 방렬하여 조강리와 강녕포 일대를 강타하는 도하지원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미 개성의 제12연대 주력의 진지를 박살낸 전적이 있는 북한군 6사단의 포병의 엄호 아래 북한군은 각종 선박에 병력과 중장비를 나누어 탑재하고 강녕포 방면으로 일제 도하를 강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날 밤에 상륙하여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을 확보한 북한군이 강녕포 - 통진 도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그래서 한강 북쪽에서의 엄청난 포격과 일제 도하 및 측면에서의 후방 보급로 차단작전에 협격당한 제12연대 2대대 제1중대와 장갑소대는 통진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리고 북한군이 강녕포에 일제 도하를 성공함으로서 103고지와 가금리에 배치된 제12연대 제3중대와 제4중대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김포반도 북부에 교두보틀 크게 확보하면서 북한군의 한강도하가 크게 늘어났다. 북한군 제6사단 휘하의 제15연대와 연대포병 및 대대포병, 제13연대 주력, 제6사단 포병연대 휘하 2개 포대, 제17군단 포병연대 휘하 제2포대가 한강 도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외의 포병 주력, 자주포, 전차등은 아직 한강 도하에 성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침 8시에는 통진까지 후퇴한 12연대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강녕포에서 철수한 장갑소대와 전날 밤 180고지에서 붕괴된 후 재집결한 보국대대의 일부를 재편성한 다음 예비대인 2중대를 지휘하여 상륙한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강녕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노폭이 좁아 선두에 선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선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관계로 장갑차가 한번 도로에 올라서면 전진만 가능할 뿐 후퇴가 곤란한 지경에 놓였으며 북한군의 포격이 치열하여 장갑차의 없다시피한 장갑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장갑차를 지원화력으로 활용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고막리(통진 북쪽 1.5km)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문주산으로 밀려드는 적과 부딪친 결과 다시 통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렇게 김포반도 북쪽 방어선이 붕괴되는 동안 김포반도 서쪽의 염하쪽도 파탄이 발생하였다. 강화도에 120mm 박격포를 상륙시킨 북한군은 염하 동쪽의 선착장과 방어진지를 강타하는 한편 이미 확보한 교두보를 통해서 병력을 밀어넣었다. 독립기갑연대의 기병 7중대와 보병 9중대가 장갑소대의 지원하에서 방어전을 했지만 북한군이 교두보를 통해 우회기동을 시작하고 강녕포쪽에서도 북한군이 밀려와서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오전 9시에 통진으로 철수하였다.

통진에 집결한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은 장갑차의 엄호하에 통진에서 김포와 인천으로 갈라지는 도로의 삼거리인 장림(통진 동남쪽 6km) 부근으로 철수하였지만 이미 새벽에 180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의 일부가 통진 - 장림 도로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겉고개(통진 동남쪽 3.5km)를 차단하여 퇴로를 막고 있었다. 이에 장갑차를 선두에 내세워서 겉고개를 강행돌파하여 이들 혼성병력은 오전 11시에 장림에 이르러 그곳에 새로운 진지를 확보하고 건설하게 되었다.

한편 6월 25일 밤에 통진 동남족에 진지를 마련한 보병학교후보생대대는 26일 아침부터 북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면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26일 오전 8시에 북한군 정찰대가 1개 소대 규모로 대대의 좌측인 제1중대의 앞에 나타났으나 1중대는 북한군이 소총 유효사거리까지 근접하게 한 후에 일제사격을 가해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점령한 180고지에서 대대의 좌측방 방면으로 공격이 추가로 들어온데다가 후방의 화기중대 진지에 북한군이 침투해서 습격함으로서 대대 전체가 진지를 버리고 후퇴를 시작했으며 오전 11시에 장림방어선에서 제12연대 제2대대와 합류하게 된다.

장림방어선에서 기갑연대의 기병과 보병은 김포읍으로 철수하는 가운데 보병학교후보생 대대와 12연대 2대대가 장갑중대의 지원 아래 장림방어선을 맡게 되었는데, 후보생대대는 장림 삼거리 북쪽 구릉지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징림 - 김포읍의 도로를 제압하고, 제 12연대 2대대는 일부는 한강변에 분산되었으므로 2중대를 남쪽의 천마산(60고지) 일대에 급파하여 장림 - 양곡(장림 남쪽 4km)간의 도로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1개 대대 규모로 보이는 북한군이 중화기를 동원해서 문주산을 소탕한 후 통진과 김포를 이어주는 가도를 따라 집중공격을 해서 오후 1시에 장림방어선이 붕괴되고 보병학교후보생 대대는 김포읍쪽으로, 제12연대 제2대대는 양곡쪽으로 각각 철수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북한군은 6월 26일 낮에 김포평야 초입까지 진격하게 된다.

보병학교후보생 대대가 쉽게 무너진 이유는 그들이 보유하던 99식 소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M1 개런드 소총 훈련을 받다가 99식 소총을 지급받았으니 작동방식과 사격방법의 차이를 쉽게 극복하지 못했던 것도 크며 지급받은 99식 소총 자체가 오랜 기간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두었던 것이므로 손질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탓에 고물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므로 격발에 장애가 잦아 전투불능상태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소총사격전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쉽게 붕괴된 것이다.

후퇴하던 제12연대 2대대와 보병학교후보생대대는 김포평야를 지난 후에 오후 3시에 제12연대 2대대는 양곡 부근에 방어선을 만들고 보병학교후보생대대는 110m의 운유산에 방어선을 건설하였다. 독립기갑연대의 혼성병력과 남산학교는 김포읍 시가지에 집결했고 육군보국대대의 잔여병력은 영등포의 본대로 귀환하였다.

이렇게 점점 밀리는 상황에서 운유산의 보병학교후보생 대대에게 위기가 닥쳤다. 운유산에 도착해서 2개 중대로 일선방어를 하고 1개 중대로 예비병력을 확보하며 간신히 간이형 진지를 건설하던 중에 북한군의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데다가 여태까지의 후퇴길에서의 고생 및 99식 소총의 작동불량등 각종 악재에 시달린 병력들 중 일부가 진지를 이탈해서 탈영을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최일선에서 병력을 독려하던 대대장 장영문 소령이 북한군의 저격을 받고 머리에 관통상을 당한 후 전사하는 바람에 사기까지 급전직하한 보병학교후보생 대대는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이 틈을 노린 북한군의 기마대가 김포가도를 따라서 돌진함으로서 김포읍이 순식간에 함락될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그러나 김포읍에 있던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중대와 도보중대가 김포읍에서 출격해서 북한군의 기마대를 격퇴하고 보병학교후보생대대를 수습함으로서 간신히 운유산 방어선의 붕괴를 막았다. 그 후에 뿔뿔히 흩어진 보병학교후보생대대의 병력을 다시 모으고 부평의 제1병기대대에서 운반된 M1 개런드 소총을 지급하여 다시 전투력을 회복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김포반도 전투에 투입된 병력들의 이탈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병학교후보생중 일부는 시흥에 있는 학교로 무단으로 복귀하였으며 제12연대와 독립기갑연대 소속 병력도 부평으로 무단 철수한 병력이 점점 늘어났다.

한편 육군본부는 김포의 병력 증강을 위하여, 6월 27일 오전 10시의 육본작명 제97호에 따라, 대구에서 서울로 도착한 제3사단의 22연대 병력 중 제3대대를 손영을 소령의 지휘하에 김포지구에 출동하도록 했다. 대구에서 열차로 함께 수송한 자대차량으로 저녁에 김포읍에서 집결한 대대는 곧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운유산 동쪽(장림 - 김포도로 동측 한강변)의 73고지(운유산 동쪽 3.5km)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그 좌측의 보병학교후보생 대대 및 저녁에 다시 증원된 박태운 소령이 지휘하는 8연대 3대대와 더불어 김포읍에 대한 최후의 저지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포읍에 집결한 기병 제7중대는 김촌성 중위가 지휘하여 한강변의 63고지에 배치되었는데 목적은 제22연대 제3대대 전방에서 북한군이 한강으로 우회침투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양곡의 제12연대 2대대도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서 잔여병력이 150여명에 불과하여 김포읍으로 후퇴하여 재편성에 돌입하였다.

이날 부평의 잔류병력도 김포전선에 중원 되었는데, 윤태일 중령이 이끄는 제1공병단 산하의 일부는 부평 - 김포읍 사이의 계양산(395고지: 부평 북쪽 7km) 동녹의 방축리 부근으로 추진되고,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에서는 교관을 담당하던 기간장교로써 장교특전대를 편성하여 한강변의 전호(김포 비행장 북쪽 4km)부근에 배치하게 되었다. 장교특전대는 밤 10시에 행주 나루터 건너편에 강안진지를 점령하고 강변의 모래밭에 수류탄 100발을 인계철선으로 연결하여 간이형 지뢰밭을 설치한다. 다음날 새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강 건너편에서 도하를 시도해서 수류탄을 투척하였는데 이미 설치해둔 수류탄들이 연쇄폭발하는 소리를 듣고 도하를 중지한 후 더 이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군은 운유산 방어선에서의 기습 이후에는 다음날 아참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운유산 주변에 폭우가 내렸으며 장림방어선에서 김포읍까지는 평야지대라 움직이다가 반격타를 얻어맞을 가능성이 있으며 우회나 부분적인 침투가 곤란해보였기에 일단 장림방어선에서 부대를 재정비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리고 6월 27일 낮에는 미 공군의 공습으로 앞서 언급한 병력 이외의 포병같은 중장비나 전차가 한강을 도하하지 못했으나 야간을 이용해서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 연대포병 및 대대포병, 제6포병연대 휘하 2개 포대, 76mm 자주포 포대, 제17군단 포병연대 휘하 제2포대 잔여병력, 전차중대 등의 추가병력이 한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병력과 장비만 도하에 성공했을 뿐 탄약, 연료, 물자같은 보급항목은 제대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라서 삼팔선에서의 전투처럼 대규모의 탄약을 소모하는 공격준비사격같은 것은 불가능했고 상대적으로 탄약운반이 쉽고 수량이 많은 박격포 위주의 지원사격이나 중요 목표에 대한 저격식 포격 정도만이 가능하였다.

5.4.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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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공군의 김포비행장 공습으로 파괴된 C-54

6월 28일 아침부터 북한군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아침 6시, 어선으로 평도 동쪽의 한강을 도하하여 접근한 북한군이 선상에 82mm 박격포를 장치하고 사격을 가하면서 63고지의 동북쪽 강안에 상륙함으로써 이날의 첫 교전이 시작되었다.

전날 밤부터 강안을 노려보면서 밤을 지새운 김촌성 중위가 이끄는 기병 제7중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이에 대응하였으나 기본적인 전력차가 너무 컸고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집중됨에 따라 기병대에서 훈련 중이었던 말들이 그 포성에 놀라 날뛰기 시작함으로써 하는 수 없이 북한군과의 교전을 포기하고 이탈하여 63고지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63고지가 함락당하면서 해당 고지 남쪽의 72고지에서 진지를 건설한 제22연대 제3대대가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운유산 방면으로 1개 연대 규모로 추산되는 북한군이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오전 8시에 전차 2대를 선두에 세운 채로 개활지를 통괴해서 보병학교후보생 대대의 진지 코앞으로 접근했다. T-34-85 전차를 야간을 이용해서 한강 북쪽에서 도하시킨 효과는 탁월해서 보병학교후보생 대대는 타격을 크게 받았으며 이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전날 밤 김포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12연대 2대대의 잔여병력을 운유산으로 다시 추진하여 전력의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밤새도록 비가 오는 가운데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마저 거르게 된 상태에였기에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북한군의 화력이 김포읍 시가지에도 날아올 지경이 되자 오전 10시에 김포지구사령부는 공군의 경비사령부와 함께 지휘소를 김포읍 동남쪽 2km 지점으로 후퇴시키고 계인주 대령과 최용덕 준장등이 모여서 장차의 대응책을 협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한강인도교 폭파 소식이 전해졌고 전투상황이 매우 안좋게 변했다고 인식한 김포지구사령부는 북한군이 영등포 방면으로 도하를 할 경우에는 퇴로를 차단당할 것으로 예측한 다음 김포반도 중부에서 교착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후퇴시킬 수 있는 병력들을 우선 부평 방향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한국군이 차분한 대응을 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았다. 오전 11시에 운유산 방어선의 중앙부인 장림 - 김포가도에서 60mm M9A1 바주카의 집중공격을 튕겨내면서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가 진격하면서 파상공세를 펼친 것이다. 이미 한국군의 진지가 돌파당하고 일부 병력은 무단으로 분산철수가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오전 11시에야 도달한 김포지구사령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김포도로 서쪽지역 운유산 일대의 진지를 지탱중이던 보병학교후보생대대와 제12연대 2대대 및 기갑연대 도보중대는 김포읍에서 장릉산(146고지 김포읍 남쪽 1km)과 계양산의 동선을 따라 부평에 집결하고, 장갑차와 제8연대 3대대 및 제22연대 3대대의 일부는 사령부와 함께 김포비행장을 향하여 김포가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빠졌는데, 장갑차는 비행장 - 영등포 가도를 경계하면서 이동하였고, 보병 일부는 굴포천을 건너 개화산에 진지를 다시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6월 28일 낮 12시에 북한군 선견대가 김포읍까지 진격하게 된다.

오후 1시에 대한민국 공군의 경비사령부는 김포비행장을 비우고 수원비행장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비행장을 지휘소로 삼고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개화산 진지를 보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북한군을 김포에서 방어하는 외중에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 대령은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사라져버리는 아연실색할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다른 지휘관에게 지휘권한을 임시로라도 인수인계해놓고 몰래 사라진 것도 아니고 지휘소를 전황에 따라 이동시키는 와중에 아무 말도 없이 몰래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실종으로 판단되기까지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일단 급한대로 참모장이었던 최복수 중령이 임시로 지휘를 하게 되었으나 지휘체계와 명령전달구조에 심각한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다.

원래부터 계인주 대령은 군사정보쪽 분야에 능통한 인물이었지 야전지휘와는 거리가 먼 경력을 가진 인물이라서 김포지구전투사령관을 담당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중요 지역의 지휘관을 담당한 상황에서 본인의 능력을 무탈이탈 및 탈영에 써먹고 부하들을 버린 것은 진짜로 답이 없는 행동이었다. 계인주는 6월 28일에 가족과 같이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쳤으나 6월 30일에 부산에서 헌병대에 체포당한 후 대구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해당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6월 28일 늦은 오후부터는 행주와 이산포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한강을 도하해서 철수를 시작하면서 일부 병력은 영등포에 상륙한 후 시흥의 보병학교로 향하고 다른 일부 병력은 김포비행장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래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철수병력을 수습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렇게 한국군이 부산한 가운데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읍을 점령한 후 부대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했다. 북한군도 김포반도 북단에서 도하를 시작한 지 30시간만에 김포읍에 도착한지라 재정비와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는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도 영등포와 노량진 방어에 집중하는 상황이라 한국군은 김포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으므로 잠시동안이지만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북한군의 일부 병력이 김포비행장을 목표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쯤 계인주 대령이 없어진 것을 파악한 최복수 중령이 사령관 대리를 임시로 담당해서 방어전에 임했으나 애초부터 혼성병력인데다가 사기도 떨어진 마당에 사령관이 실종까지 당했으니 명령체제가 혼란에 빠지고 희생만 늘어날 뿐이라서 결국 경인로상의 소사읍으로 후퇴를 결정하게 되고 석양이 진 후에 김포비행장이 북한군에게 함락당한다. 김포비행장에서 시흥이나 한강인도교까지는 거리가 불과 14km 정도밖에 안되므로 경인로나 경부로를 차단당하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북한군의 진격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저녁 늦게서야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주민의 협력을 얻어 수용병력에 대한 급식을 서두르는 한편, 각 부대별로 밤을 세워 병력을 수습하였다. 그리고는 보병학교후보생대대와 기갑연대 도보대대 및 김억순 경감이 이끄는 부평경찰대를 동원하여 계양산 동쪽 능선에 배치하여 김포 - 부평 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제22연대와 제12연대 소속 병력을 사용하여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비행장 남쪽 4km)일대에 배치하여 김포비행장쪽에서 소사로 방면으로 북한군이 남진하는 것에 쐐기를 박도록 응급조치하였다. 이 때 제8연대 3대대는 비행장에서 영등포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새로운 활동무대를 얻게 되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에서 북한군 6사단의 동향은 아래와 같다. 북한군 6사단의 주력은 김포읍에서 머무르면서 지원부대의 후속 도착을 기다리면서 재편성하는 동안 정찰부대를 김포비행장과 계양산 방면으로 진출시켜서 한국군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김포비행장을 손쉽게 빼앗자 계양산 방면의 정찰이 늘어났으며 비행장쪽에서는 자정 이후에 추가적인 정찰대의 투입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본다면 북한군 6사단의 다음 목표는 부평의 군기지창을 공격해서 보급을 차단하는 동시에 경인로를 막고 영등포를 서쪽에서 공격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북한군 6사단이 한강 건너의 한국군 제1사단의 후퇴 및 한강 도하에 대한 방해를 일찍 시작하지 않은 점이 의외인데 이는 나중에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서 나온 것에 따르면 개전 직후 북한군 제1군단과 산하 부대간의 통신이 두절되는 등의 혼란이 있어서 북한군 6사단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전투를 진행하는 바람에 한국군 1사단의 후퇴를 6월 28일 자정까지의 시점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인 계인주 대령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 명확해지고 소사읍에 병력들이 집결하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변변한 저항도 없이 김포비행장을 내줬다고 질책하면서 최복수 중령을 직위해제하고 대신 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을 사령관 대리로 임명했다. 한국군은 장릉산·계양산·개화산 등에 진지를 쌓고 북한군이 부평과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또한 시흥전투사령부는 '화급히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시흥사령부의 비행장 탈환명령은 비행장의 적이 반드시 거쳐야 할 침공로상의 요지라는 점도 있지만 행주에서 도하철수중인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인 것으로 풀이되었다. 이리하여 신임사령관인 우병옥 중령은 가용한 모든 병력을 소사읍에 집결시키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5.5. 6월 29일(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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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

6월 29일에는 김홍일 장군의 명령에 따라 반격에 나서 김포비행장 탈환 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김포지구전투사령부 휘하의 병력이 이미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제22연대 제3대대와 독립기갑연대 도보대대 정도만 비교적 편제를 유지하고 병력소모도 적은 편이었고 보병학교후보생대대는 이미 1개중대 규모로 줄어든 상태로 대대장도 전사하여 부대대장인 김광순 소령이 지휘하는 상태였다. 한순화 소령이 통합지휘하는 제12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도 다 합쳐봐야 150명 미만이었다.

그나마 기동타격력을 줄 수 잇는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중대도 영등포 방면 방어로 인해 일부가 전환되는 바람에 2개 소대 미만의 병력으로 줄어들었으며 기병중대는 마초의 공급문제로 인해 안양에 있는 본대로 귀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포비행장을 탈환해야 하니 난이도가 크게 올라갔다.

오전 6시에 최복수 중령의 진두지휘 아래 소사 - 김포 도로를 따라 북진하여 공격개시선에 부대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때 비행장 북쪽에서 교전의 총성이 들렸는데 그것은 새벽에 행주나루터부터 도하에 성공한 18연대가 비행장을 급습한 것이었다. 원래 18연대는 부평을 목포로 이동하였는데 옥녀봉(79고지, 개화산 서북쪽 4km)에서 북한군의 박격포가 사격하여 이동을 막자 김포비행장 - 소사쪽으로 목표를 바꾸었던 것이다. 제18연대 2대대 5중대가 먼저 비행장 북단에서 철조망을 넘어 돌입한 뒤, 6, 7중대는 비행장 입구에서 돌격하게 되었는데 이때 B-29 편대가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순식간에 그 일대가 폭염으로 휩싸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폭격을 맞으면서도 김포비행장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7중대는 외발산 동쪽으로, 6중대는 내언리 쪽으로 탐색하였으나 돌파구의 전개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오전 10시 20분에 김포비행장에 돌입한 5중대가 북한군의 포로로 있던 한국군들을 구출하여 본대와 합세하고 다시 대오를 가다듬어 기관총 2정을 중심으로 내언리 정면을 돌파하여 진로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제18연대의 제2대대가 열심히 싸운 결과 오전 11시에 제18연대의 주력은 김포비행장 부근의 북한군 진지를 돌파하여 소사읍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비행장의 동북쪽에서 제18연대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18연대가 머지막 돌파구를 뚫을 때인 10시 30분을 전후하여 비행장의 서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격에 앞서 공습이 있은 후의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려고 최복수 중령은 안영작 대위를 정찰로 내보냈으나 안영작 대위는 비행장 남쪽 1km의 안오쇠 부근에서 북한군의 저격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전투부는 기갑연대의 도보(徒步)대대로 하여금 장갑차의 엄호하에 동남쪽으로 돌입하도록 하고 제 22연대 3대대로서 안오쇠 부근의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하고, 제12연대 2대대는 비행장의 서북쪽으로 우회케하여 적의 퇴로를 막게 하였다.

강문헌 대위가 통합 지휘하는 기갑연대 예하 부대들은 그때까지 타 부대보다 손실이 적었다. 이에 따라 강문헌 대위는 자신이 김포비행장 탈환전투를 주도하기로 했다. 기갑연대 제3도보수색대대가 장갑중대의 엄호를 받아 비행장 탈환에 나섰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제3사단 22연대 3대대, 제1사단 12연대 2대대 등도 비행장 탈환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력은 각각 1개 소대 또는 1개 중대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강문헌 대위의 부대를 엄호 및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점은 도보대대의 주력 운송수단인 M3 하프트랙이 다른 용도로 전용되는 바람에 하프트랙에 탑승하고 고속으로 돌진해서 기계화보병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도보대대가 일반 알보병처럼 개활지에서 아무런 은엄폐 없이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점이다.

김도경 대위가 지휘하는 장갑 2중대가 선두에 섰다. 그 뒤를 따라 대대장 강문헌 대위가 도보수색대대의 선두에 서서 비행장을 향해 진격했다. 비행장 주변에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고려해 은폐·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공격부대는 적의 사격에 노출된 채 돌격을 강행해야 했다. 북한군은 비행장 동북쪽 도로의 배수로에 매복해 있었다. 강문헌 대위가 공격을 시작하자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대대장은 대동한 정보장교 박영수 소위, 작전장교 김수동 소위 등과 함께 적에게 응사하며 전진을 계속했다.

북한군의 사격이 계속되면서 대대장 강문헌 대위와 정보장교 박영수 소위가 쓰러졌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장갑중대 제2소대장 김정운 소위의 장갑차가 달려나갔다. 그때 적의 대전차포가 장갑차를 명중시키면서 김정운 소위가 장갑차와 함께 산화했다. 뒤따르던 장갑중대 제1소대장 곽응철 소위의 장갑차가 부착된 기관총으로 매복해 있던 1개 분대 규모의 적과 군관 1명을 사살했다. 체코식 기관총을 비롯한 다수의 무기도 노획했다.

제8중대와 제9중대도 활주로까지 진격했으나 넓은 개활지에서 비행장 건물과 시설에 엄폐한 북한군과의 총격전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임기응변으로 활주로 주변에 있는 드럼통을 엄폐물로 굴려가면서 비행장 건물로 돌입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전사한 대대장을 대신해 제8중대장 김일록 중위가 분기탱천하여 공격에 나섰으나 전사하면서 공세는 실패한다.

이런 식으로 희생만 늘어나자 분노에 찬 최복수 중령은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차에 탑승하고 활주로를 고속으로 질주하면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돌파로를 열어보려고 했지만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맞고 지프차와 함께 화염에 휩싸이면서 전사하고 만다. 이로서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 결과 참모장 최복수 중령을 비롯하여 제3전투대대장 강문헌 대위, 박영수 소위, 김수동 소위, 김일록 중위 등이 전사하였다. 또한 전투 패배의 책임을 통감한 사령관 우병옥 중령이 권총으로 자결함에 따라 김포전투사령부는 그 기반이 와해됨으로써 사실상 통합사령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인 김홍일 소장은 소사지역에 집결중인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으로 하여금 지역부대를 통합지휘토록 긴급조치하였다.

5.6. 6월 30일(오류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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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동 전투

사령관 대리와 참모장의 죽음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통합지휘능력을 상실하자 김홍일 장군은 29일 아침 김포나루로 도하, 철수해온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이 지휘권을 이어받게 한다.

임충식 중령이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부임한 후 현황을 파악한 결과 북한군이 김포비행장을 요새화했으며 곧 소사읍 방면으로 공세를 실시하여 경인로를 차단함으로서 서울과 인천간의 교통을 차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자신이 이미 확보중인 제18연대의 제2대대와 제3대대를 사용하여 김포비행장에서 소사읍으로 가는 도로를 동남쪽에서 바라보는 원미산을 중심으로 한 고지군을 확보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잔여병력의 상태를 살펴본 결과 그 동안의 전투 및 김포비행장 탈환전투의 타격으로 인해 거의 붕괴직전이라는 것을 파악한 후 6월 29일 저녁까지 간단하게 정비를 대강 끝낸 후 보병학교 병력, 독립기갑연대 병력, 제12연대 병력 순으로 김포비행장에서 소사읍으로 통하는 도로의 서북쪽에 위치한 107고지에 배치시킴으로서 앞서 언급한 제18연대 소속 병력과 연계를 지어서 북한군의 침공을 막도록 조치했다.

여기에 더해서 제18연대와 함께 한강을 건넌 제22연대 제2대대는 비록 개화산에서 김포비행장 사이에 걸쳐있는 북한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다가 대대장인 신면호 소령이 전사하였지만 편제를 유지하고 있고 타격도 크지 않아서 소사읍에서 경인로의 확보와 후방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전선은 소사 북쪽의 고지대에서 경인가도의 확보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경인가도는 인천항의 생명선이기도 하거니와, 영등포쪽에서 한강방어선을 펴고 있는 시흥사령부 주전부대의 측방엄호를 위해서도 필요했으며, 또 이 곳의 확보 여부는 소사 동북쪽의 138고지(오류동 서북쪽 2km) - 원미산의 공방전 승패 여부도 달려있었다.

북한군은 6월 29일 밤의 정찰대 공격에 이어서 후방에서도 수색에서 난지도를 거쳐서 55고지가 있는 증산 방면으로 한강을 도하해서 북한군 제6사단에게 증원을 수행했다. 목표는 주력은 소사읍을 공격하여 경인로를 차단하고 일부는 오류동을 목표로 돌진한 후 시흥으로 남진하거나 영등포를 측면에서 타격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의 동향을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판단한 임충식 중령은 오류동을 방어하여 북한군의 우회를 막기 위해 제18연대 3대대를 오류동쪽으로 돌려서 안양천 서안의 77고지를 확보해서 영등포로 통하는 길목인 고척교를 통제하는 한편 제18연대 2대대를 오류동 북부의 고지대에 투입하고 제22연대 2대대는 기존의 제18연대 2대대의 진지인 원미산 진지를 인수하게 하여 방어에 임하도록 했다.

이 날은 날이 새기도 전에 북한군은 비행장 - 소사간 도로를 따라 전차 2대의 엄호를 받으며 107고지의 후보생대대와 도보대대의 진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0mm M9A1 바주카의 탄막을 뚫은 전차의 위세를 빌어, 138고지 - 시월리(원미산 북쪽 1.5km) 일대의 진지 일각을 수중에 넣게 되고, 소사 북쪽 2km까지 진출하게 되어, 이제 경인가도가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이에 사령관 임충식 중령은 오전 9시에 중앙일선의 제18연대 2대대로 하여금 138고지를 재탈환하고, 좌일선 부대로 하여금 원미산 북쪽의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138고지가 북한군 손아귀에 넘어감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빼앗김에 따라 한국군의 방어진지 상황이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격선두에서 지휘하던 제7중대장 이규대 중위가 전사하고 소대장 3명이 모두 부상을 입는 등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날 늦게 오류동·소사 방향에서 위협을 느낀 김홍일 장군은 제5사단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김포지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철수중인 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경인가도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최영희 대령이 확보한 병력은 제15연대의 제1대대, 제2대대와 제20연대의 제1대대, 사단공병대대등 4개 대대와 기존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있는 제18연대의 제2대대와 제3대대 등 6개 대대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최영희 대령이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부임한 후 현황파악을 한 결과 자신이 확보한 6개 대대를 주력으로 하고 기존에 김포지구에 소속된 부대는 원대복귀시키는 대신 장갑차 지원을 강화해서 받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다.

하지만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체제가 자주 바뀜에 따라 보병학교후보생대대나 제12연대의 병력중 일부는 소대나 분대 단위가 일부 남아서 최영희 대령이 확보한 부대와 같이 전투에 돌입하는 등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북한군의 경우에는 138고지에서 한국군의 역습을 막아냈지만 한국군이 추가로 공격할 기미가 보이자 일단 진격을 멈추고 138고지를 방어하는 쪽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6월 말의 마지막 밤을 간헐적인 소총 사격전으로 보내게 된다.

5.7. 7월 1일

밤 사이 증원부대를 오류동 - 소사간의 도로 남쪽에 전개한 최영희 대령은 이미 제공권이 미 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고 판단하여 시흥사령부가 목표로 하는 비행장은 확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공격의 발판에 대한 요지 확보가 필요하다고 보아, 비행장 남쪽의 138고지 - 107고지를 확보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이에 공격부대의 유일한 중화기였던 81mm 박격포는 138고지를, 장갑차의 37mm 주포와 기관총은 107고지를 각각 지원토록 화력을 안배하고 부평의 제1병기대대에서 보유중인 박격포탄을 오류동 일대의 경인가도 노상에 배치하게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오후 1시에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악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였는데 장갑차의 엄호를 받아 나아간 좌일선의 제1대대가 오후 5시에 공병대대의 협력으로 107고지를 점령한 것을 선두로 하여 의외의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고 각 목표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날 77고지 - 138고지 - 107고지선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경인가도의 위협을 제거하는 호전을 보이게 되었다.

다만 우일선에 배치된 제20연대 1대대의 혼성 중대장인 김주명 중위가 67고지를 향해 진격중에 머리에 다발총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5.8. 7월 2일

최영희 대령은 전날 확보한 138고지 - 107고지선에서 여세를 몰아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군을 138고지 북쪽의 126고지 너머로 몰아냄으로써 북한군의 침략노선에 쐐기를 박아놓기로 결심하고 날이 밝자 제 15연대 2대대로 하여금 126고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18연대의 2, 3 양 대대도 모두 전선에 투입되기에 이르렀으나 126고지 쪽에서 내민 적의 발길에 점차 138고지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듯 진전없는 공방전속에서 날이 저물고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7월 1일부터 여의도 - 영등포간의 한강방어선 전투가 북한군의 도하공격을 포함해서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오류동 방면에서도 북한군의 공세가 강화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서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차중 김포방면에 투입된 장갑차들의 급유, 탄약 재장전을 소사읍에서 하고 있을 때 미군의 아군 오폭을 받고 장갑차 3대를 상실하는 타격을 입었다. 당시 미합중국 공군은 한강 이북에서 자유로운 폭격이 가능하도록 지시했으나 미군 조종사들이 금강을 한강으로 착각하면서 한국군을 오폭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고 장갑차 파괴건도 그 중 하나였다.

5.9. 7월 3일

전날 밤부터 난지도쪽으로 한강을 도하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오류동 정면 전선으로 가세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공격에 앞서 김포비행장쪽에서 그들의 보병에 화력을 지원하던 전차 2대를 야음을 틈타 126고지 남쪽으로 추진한 다음, 그로 하여금 고척동 서쪽 계곡을 따라 경인가도에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고, 또한 북한군 전차에 태극기를 달아서 한국군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전도 구사하였다.

해당 작전은 제대로 먹혀서 60mm 바주카 사격을 뚫고 일선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의 전차는 오류동과 안양천 교량 사이에 있던 한국군의 후방 보급소를 모조리 파괴한 후 영등포 방향으로 진격하였으며 한국군 중 일부는 해당 북한군 전차를 인천에 입항해서 상륙한 미군 전차로 오인하고 접근하다가 공축기관총 사격을 맞고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60mm 바주카 부대가 북한군 전차를 추격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북한군의 위장전차 공격은 김포방어부대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영등포 방면을 방어하는 한국군 부대의 배후를 위협함으로서 한강방어선 전투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강북 지역의 한강 북쪽에 있는 신촌 부근에 자리잡은 북한군 중포를 사용한 포격으로 고척동 북근과 오류동 일대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한편 비행장 부근에서 박격포로 138고지 일대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북한군의 포화에 전열이 분열되었고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가 힘든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인 오전 10시에 시흥사령부에서는 새벽에 북한군 전차가 한강철교를 건너게됨으로써 혼성 제 7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어 시흥사령부의 철수도 힘들게 되었다. 이에 김홍일 소장은 '한강선이 적의 전차에 무너진 지금, 경인가도의 확보는 더이상 필요치 않다. 따라서 이대로 시간만 끈다면 영등포 - 시흥도로에 적이 먼저 들어서게 되어 오류동쪽 김포사의 퇴로조차 잃을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김포전투사령부 쪽 전투가 치열하여 기존의 통신망으로는 연락이 불가능했으므로 참모장인 박병권 대령을 오류동으로 급파하여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날 낮에 오류동에서 철수하여 안양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포전투사령부는 대대별로 적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다시 철수길에 오르게 됨으로써 6월 27일에 북한군이 김포반도에 상륙한 뒤로 1주일간 벌어졌던 지연전도 오류동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6. 철수

7월 3일 아침에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의 전차와 오류동에서 들어온 북한군 보병이 합류하여 영등포를 점령하게 됨으로써 김포 방면에서의 퇴각이 강요되었거니와 이날 밤 자정 무렵에는 6대의 전차를 앞세운 1개 대대규모의 적이 경인가도를 따라 인천을 점령하게 됨으로써 경인가도의 이북지역은 이제 모두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강과 오류동의 방벽이 동시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이날 중으로 선견대를 시흥으로 진출시켜 국군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력은 영등포와 오류동 부근에서 전열을 다시금 가다듬는 듯 하였는데 그들이 경부국도를 따라 전차의 돌파전을 시도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결국 7월 3일,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 일대에서 철수명령을 내리게 된다. 김포사는 오류동 전선에서 병력을 이탈하여 일부는 소사에서 소래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최종적으로 수원 혹은 오류동에서 양지산(오류동 남쪽 6km)기슭을 타고 안양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김포사의 철수명령은 일선 참호속의 각각의 병사에게까지 모두 전달하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어떤 병사는 아직 그대로 진지의 일각을 지키고 있었고 또 어떤 병사는 명령을 듣고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하여 참호속에 남아있기도 한 바 이 날 저녁 적의 전차가 경인가도를 돌진하게 되자, 그제서야 그 전차의 틈 사이를 뚫고 남하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인천으로 가서 마지막 철도편을 이용하여 수원으로 가기도 하였는데, 제12연대 2대대장인 한순화 소령 같은 사람은 인천에서 선박을 간신히 획득했으나 15일 동안이나 서해안을 표류한 끝에 군산에 도착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 김포사의 주력이 안양부근에 집결되면서 김포사령부는 개편을 하면서 해체하게 되고, 15,18연대가 연대별로 시흥사령관 김홍일 소장 하에 들어가 덕안(안양 서북쪽 4km)부근의 안양 저지선의 서쪽지역을 맡아서 다시 일전일퇴의 지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외의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소속의 병력 대부분도 수원과 안양 방면으로 후퇴한 후 부대를 재편한 다음 안양방어선 전투에 투입된다.

7. 평가

한국군과 북한군 모두 전략적으로는 실수를 한 것이 많고 전술적으로는 둘 다 잘 싸운편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전략적 승리는 한국군이 가져가고 전술적 승리는 북한군이 가져갔다.

7.1. 북한군

6.25 전쟁의 북한군의 대규모 남침 계획인 폭풍 작전은 소련군 고문관들이 작성에 깊이 관여한 관계로 상당히 체계적이고 잘 만들어졌으며 특히 한국군의 전력을 서울 주변에서 포위섬멸하는 작전은 전략적으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군 내부에서도 해당 작전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포위망을 구성하는 동쪽의 춘천방면은 북한군 제2군단이 직접 전차까지 대규모 지원받아서 돌파작전을 실행하게 하였고 서쪽의 김포방면은 북한군 6사단이 담당하게 했으며 이를 위해서 도하장비를 북한군 6사단에게 집중시켰다.

북한군 6사단도 사단장인 방호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과 병력들이 대부분 국공내전에서 전투경험까지 다수 보유한 비정규전 전문가들이라서 설령 상부와의 연락이 두절되더라도 스스로 판단해서 작전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기대를 받은 상황이었다. 여기까지는 북한군이 제대로 일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지자마자 전투의 혼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북한군 수뇌부와 각지의 현지 부대간의 연락, 통신이 불통상태에 가깝게 끊어지는 등의 대혼란이 발생하였다. 이건 특히 소련식 전술을 사용할 때 매우 치명적인데 상부의 지시가 없으면 현지 부대는 단편적으로 무지성적인 진격을 하다가 대손해를 입거나 빨리 전진해야 하는데 1차 목표만 달성하고 방어진을 펼친다던지 하는 부작용이 터지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군 6사단은 과거 소속이 팔로군이었으므로 상부와의 연락이 단절되더라도 현지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면서 스스로 문제를 개척해나갔다. 옹진반도 전투에서의 양동작전, 청단 - 연백지구에서의 심리작전, 개성시 함락에서의 경의선 철도로 병력을 적재한 열차 긴급투입등의 작전은 매우 참신하였으며 김포반도 전투에서도 강화도에 상륙해서 김포반도 서부를 협격하거나 한강을 어선으로 거슬러올라와서 상륙을 시도하면서 어선에 장착한 박격포로 포격을 가한다던지 태극기를 T-34 전차에 장착하고 한국군 전차인 척 하는 등의 창의적인 발상을 실행에 옮겼으며 대부분은 성공하여 한국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김포반도를 석권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임진강철교 확보같은 예상치 못한 호재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제1사단 정면 방면은 소수의 병력만 보내고 북한군 1사단이 주력으로 활동하도록 조치하였으며 북한군 6사단의 주력은 원래 작전 목적인 김포반도로 집중투입하여 병력의 우세를 확보한 것도 훌륭한 판단이었다.

다만 한계점도 존재했다. 국공내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비정규전 전문가이기 때문에 소련에서 받은 중장비와 특수장비를 활용하거나 이동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T-34 전차를 김포반도로 도하시키는데 시간이 걸렸으며 수량도 2 ~3대 수준의 소량이었고 120mm 박격포같은 중(重)박격포가 김포반도에 도하시켜서 자유롭게 운용가능한 한도인것처럼 보였으며 제대로 된 야포와 같은 중장비는 도하가 늦어지고 탄약같은 보급물자가 부족하였으며 상당수는 보급 문제등으로 인해 한강 북쪽에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도하에 성공한 중장비는 보급물자 부족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포격지원은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쏘아대는 방식으로 수행하여 비효율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한군 6사단에 소련식 운용훈련을 제대로 받은 기술전문가 집단을 추가했어야 하지만 소련의 위성국으로 막 탄생한 북한같은 신생국에게 그런 세밀한 점까지 제대로 챙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살펴볼 점은 의외로 소련이 준 도하장비가 한국의 지형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강 하구지역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벌이 넓게 펼쳐지는 지역에서는 효율성이 크게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보통 이런 거친 지형에서 쓰는 장비는 일본이나 영국같은 해양국에서 제대로 개발하는 편인데 소련같이 대륙국이며 주로 유럽같이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강의 수심이 크게 변동하지 않는 곳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하장비가 한국의 거친 지형에 맞지 않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북한군 6사단은 도하장비 부족을 호소하였으며 현지에서 조달가능한 어선, 뗏목을 많이 사용한 편이다.

그 외에도 상부와의 통신이 잘 안되는 통에 한국군 1사단이 한강을 건너서 후퇴하는 정황을 6월 28일 자정까지 알아채지 못하는 등의 사건도 터졌다. 통신만 제대로 되었다면 한국군 1사단이 한강을 도하하는 것을 강변에서 격멸하여 한국군 사단 1개를 제대로 붕괴시킬 호기를 놓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북한군 6사단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으나 북한군 상층부의 지원 부족 및 통신 마비로 인해 혼자서 독자적인 판단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핸디캡이 붙었기 때문에 김포반도를 점령하고 경인가도를 차단하며 영등포를 서쪽에서 협격하는 등의 전술적 승리는 크게 성공하였으나 한국군의 끈질긴 방어를 빠르게 붕괴시키지는 못해서 전략적인 승리요소인 한국군 포위망 완성은 실패하고 말았다.

7.2. 한국군

담당구역이 100km에 육박하는 수준의 삼팔선 경비를 한국군 제1사단이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기존 작전지침대로 하던지 백선엽 사단장이 건의하고 채병덕 총참모장이 재가하여 변경한 작전지침대로 하던지 간에 너무나도 명확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팔선이 무너지면 바로 다음 순서로 최전방이 되는 강화도와 김포반도를 현지의 자연조건인 넓은 강폭, 조수간만의 차가 큼, 유속이 빠름등만 생각하고 전혀 방어대책을 짜놓지 않은 것은 한국군 육군본부의 결정적 실책이 맞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의 전면 침공시 삼팔선에서 수백미터 밖에 안떨어진 토해선과 1km 근방밖에 떨어지지 않은 예성강철교 밖에는 육로로 철수가 불가능한 제12연대 제3대대를 억지로 개성시에 있는 제12연대 본대와 합류시킨다는 덜떨어진 작전구상도 큰 문제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해상철수를 생각해놓고 강화도나 김포반도에 집결하라고 했다면 김포반도 방어전 초반이 실제상황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었다. 제12연대 제3대대의 일부 병력이 김포반도에서 합류했지만 이것도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리고 제12연대 제2대대가 김포반도로 철수한 것도 우연의 일치였다. 원래대로라면 제12연대 주력과 같이 대부분은 임진강철교를 건널 수 있었는데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지시로 연대 주력이 임진강철교를 건널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다가 한강을 건너서 김포반도로 우연하게 철수한 것이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병력부족으로 인해 6월 26일 당일 아침에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김포반도 북부의 방어가 모조리 붕괴되었을 것이다.

긴급시 대응가능한 작전도 안짜놓은 데다가 개전시 긴급하게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하고 방어부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크게 터졌다. 솔직히 말해서 1일만에 방어작전이 완전실패하고 북한군 6사단이 6월 28일쯤에 경인가도를 차단할 정도로 전진해도 현지 방어부대는 죄가 없다고 평가받을 지경으로 상황이 개판이었다.

당장 초대사령관인 계인주 대령부터가 문제였다. 해당 인물은 경력상 전투부대를 이끌 사람이 아니라 정보나 다른 분야를 담당할 사람이었고 직책도 남산학교장이라 누가 봐도 야전지휘관으로 세울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을 억지로 긴급편성한 김포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했으니 지휘가 졸렬해지고 나중에 적전도주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2대 사령관인 우병옥 중령을 무리한 작전조건인 김포비행장 탈환에 몰아넣었다가 대피해를 입고 자살하게 만들어서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자체가 반신불수가 되는 등의 사태가 빈발하였다.

병력투입도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지만 보병학교후보생같이 당장 부사관으로 써먹어도 될 인원을 간단한 개인무장, 그것도 제대로 작동안하는 낡은 구식소총같은 거나 지급하고 투입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고 독립기갑연대같이 한국군 내에서 가장 훈련을 잘 받았고 기동타격대로 쓸만한 고급병력을 무작위로 분산투입한 것도 모자라서 M3 하프트랙 같은 기존 장비를 대한민국 정부 피난용 차량등으로 오용한 결과 기계회보병인 제3 도보대대가 알보병같은 신세가 되어 전투에 투입되는 등 전투력을 크게 깎아먹는 사태가 터진 것은 변명의 여지도 없다.

게다가 각기 다른 부대 소속의 병력을 현지에서 통합해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상태 그대로 축차투입하는 통에 서로간의 연락이 전혀 안되므로 병력 숫자에 비해 전투력이 크게 떨어질 뿐더러 한쪽 부대가 돌파당하는 동안 다른 부대가 상황도 모르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여 북한군의 전과만 크게 올려주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대전차 전투에 대한 준비가 가장 미흡했다. 그래서 대전차 장애물을 제대로 건설하지 못했고 특히 대전차호도 제대로 파놓지 않아서 북한군 전차 2 ~ 3대를 제대로 막지 못해서 북한군 전차가 후방을 유린하는 것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대전차화기도 한국군이 당시 보유한 것중 가장 성능이 나쁜 60mm M9A1 바주카 뿐이라서 북한군 전차가 바주카포 세례를 받고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커졌다.

이렇게 전략이고 전술이고 개판인 불리하기만 한 상황을 수습하고 전략적인 승리를 한국군이 가져온 것은 일선장병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일선 장교들의 사상률이 매우 높았고 병력들도 말이 대대지 실제로는 중대나 소대 수준으로 병력이 급감하여 평소라면 전멸 판정을 받아도 무방할 수준의 타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지연전에 돌입하여 말 그대로 맨몸으로 전차를 상대하는 꼴로 싸운 것이다. 물론 일부 병력의 이탈이 있었지만 이들도 그동안 많은 전투를 치른 상태였고 완전탈영이 아니라 원래 부대 주둔지로 가는 등의 행동이 대다수라서 상황을 참작할 여지가 충분하다.

8. 결론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병력과 장비가 모두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포반도 전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진격을 상당 기간 지연시킬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신속히 인천·수원 방면으로 진출해서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겠다는 북한군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활약으로 서부전선을 지키던 국군은 안전하게 한강을 건너 철수해 한강 방어전을 벌일 수 있었다.

한국군이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이 전투는 한국전쟁 초기 제6보병사단이 벌인 춘천-홍천 전투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2001년 공개된 소련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군은 김포반도를 통해 영등포를 점령하고 수원선으로 진출을 기도하는 제6사단과, 제12사단이 홍천을 돌파하면 이를 발판삼아 수원으로 돌진하도록 계획된 제603모터찌클 연대를 양익으로 하여 한국군 주력을 한강 북방에서 포위섬멸하겠다는 계산 하에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북한군 공세를 상당시간 지연시킴으로써 춘천-홍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부전선에서도 북한군의 작전적 의도는 좌절되었다. 춘천-홍천 전투가 북한군 2군단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며 춘천을 통해 수원으로 들이닥칠 북한군의 작전적 양익 중 왼날개를 꺾어버렸다면 김포반도 전투는 북한군의 오른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틀어막은 전투다.

거기에 초대 사령관 도주와 2대 사령관 자살이라는 답없는 상황 속에서도 장병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여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도 놀라운 평가를 받는다. 즉, 당시 한국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1] 전 15연대장, 훗날 국회의원까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