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0년 9월 25일부터 10월 7일까지 제7보병사단이 경주에서 서울로 진격한 전투다.2. 전투 전 상황
피말리는 영천·신녕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낸 데 이어 인천 상륙 작전에 의해 유리한 상황이 되자 국군은 서울로의 북진을 계획했고, 영천 전선에선 신상철 준장의 7사단이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1]9월 21일 주변 사단들이 북한군 잔병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7사단은 경주에 집결해 대대적인 반격을 위한 장비검열을 실시했다.
9월 22일 영천·신녕전투를 치르느라 여기저기 배속된 3연대와 5연대가 원대복귀했다.
9월 24일 8연대는 경주 일대에서 북한군 잔병들의 침투를 저지하였다.
3. 전투 경과 (1950.9.25 ~ 10.7)
참고: 전쟁기념관[2] 및 바토의 한국전쟁사 블로그9월 25일 7사단 본대가 안동으로 북진했고, 3연대는 그 뒤를 쫓아 안동역 철도관사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후속 명령을 기다렸다. 한편 8연대는 잔병들과의 교전이 끝나자 안강에 집결하였다.
9월 26일 5연대가 청하를 거쳐 안동으로 북진했다.
9월 29일 3연대가 안동을 출발해 오후 10시 쯤 예천까지 북진해 휴식 겸 상태 점검을 했다.
9월 30일 3연대가 밤샘 행군을 한 결과, 오전 10시 쯤 문경 남부 점촌까지 도달했다. 그 후 12시경 다시 북진을 시작해 오후 10시경 문경 북부에서 숙영했다.
10월 1일 오전 5시 3연대가 북진을 재개했고, 오후 3시 30분 쯤 충청북도 충주 최남단 수안보까지 진출했다. 그리고는 오후 5시부터 북한군 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추격전을 벌여 포로 17명, 소총 15정, 다발총 11정을 노획했다. 한편 5연대는 충주 사범학교에서 연대장의 이취임식을 거행했으며,[3] 8연대 역시 충주로 진출했다.
10월 2일 안동에 있던 사단 사령부가 예하 연대들이 있는 충주로 북상했고, 3연대는 수안보에서 충주읍까지 북진했다.
10월 4일 3연대는 오전 7시경 강원도 횡성을 목표로 북진을 하며 북한군 잔병들과 교전을 벌이며 엄정면 목계리를 거쳐 오후 5시경 횡성에 도착했다. 한편 이 와중에 5연대는 원주까지 북진했다.
10월 5일 사단 사령부가 경기도 이천 장호원을 거쳐 광주까지 다다르자, 장병들은 저 멀리 보이는 서울 시가지를 보며 감격의 고함과 눈물을 흘렸다. 이후 서울로의 북진을 계속해 종로 혜화동 동성중학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 부대들의 상황을 파악했다.
10월 6일 3연대가 횡성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평읍을 거쳐 청량리역까지 도달해 인근 고등학교에 연대본부를 설치했다. 한편 5연대는 원주에서 양평으로 이동했다.
10월 7일 최후미 충주에 잔류하던 8연대가 원주-횡성을 거쳐 서울로 진격해 성북구 한성여자중학교에 연대본부를 설치했다. 그 후 북악산에서 북한군 잔병을 토벌했다.
4. 후일담, 평강으로의 북진
10월 8일 다른 사단들이 재정비 후 꽤 많이 북진하자[4] 7사단 역시 평강군으로의 북진이 계획되었고, 이를 위해 우선 포천으로 북진해 거기서 병력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10월 9일 8연대가 포천으로 북진, 포천 전투가 벌어졌던 만세교로 진출했다.
10월 10일 양평에 있던 5연대가 포천으로 북진하였으며, 그 후 2군단 직속 예비대로 배속되었다.
10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에 의해 7사단이 평양으로 급선회해 8연대가 먼저 1사단 작계지를 침범해 들어옴으로서 평양 탈환전투가 시작된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