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0년 10월부터 1953년 12월까지 이루어진 북한의 수도 평양 폭격작전.2. 상세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유엔군은 공중폭격 정책을 과감히 수정하여 기존과는 완연히 다른 노선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그렇게 된 것이 초토화 정책에 기반한 무차별 폭격이다.1950년 12월 북한군과 중공군이 다시 평양을 재탈환하자, 맥아더 사령부는 평양에 대한 폭격을 다시 했다. 그렇게 해서 1951년 1월 3일 평양을 다시 폭격하기에 이른다. 1951년 1월 3일 평양에 가한 폭격으로 당시 엄청난 불길과 건물 잔해 아래에서 산 채로 파묻혀 죽거나 질식해 죽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1950~1951년 겨울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실제 자신의 거주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던 소이탄 폭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일순간에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한줌의 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공포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생존을 위한 피난'을 감행하기도 했다.
1951년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이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리지웨이 또한 극동공군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폭격을 지속했다. 당시 극동공군의 여러 보고서들은 1951년 6월에서 1952년 6월까지 공격작전의 핵심이 철도 및 도로교통 차단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전회담을 위한 첫 연락장교 준비회담이 있었던 1951년 7월 8일 13대의 B-29기가 순안, 순천, 풍동의 조차장에 약 92톤의 고성능폭탄을 투하했다. 7월 10일에는 7대의 B-29기가 225kg 폭탄 70톤을 신포에 투하했고, 7월 11일과 13일에는 13대의 B-29기가 황주와 흥남 조차장에 225kg GP 폭탄 110톤을 투하했다. 7월 13일 또 다른 13대의 B-29기 또한 오파리와 순천에 130톤의 고성능폭탄을 투하했다.
1951년 7월 13일 리지웨이는 개성 정전회담에서 공산 측의 강경한 태도를 접한 이후 "현 교섭기간 중 한국에 와 있는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든 공군력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라"고 명령했다. 극동공군사령관 웨일랜드는 즉시 제5공군에 긴급 전문을 발송하여, 적의 부대, 보급품, 시설 같은 목표를 향한 전폭기, 경폭기의 활동을 한층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극동공군은 일주일도 안 되어 적의 병력과 보급품 증강을 뿌리뽑고 북한정권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평양폭격계획을 수립했고, 7월 30일 전폭기 354대를 투입하여 평양을 공격했다.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가 쓴 책에 따르면, 공중폭격은 전쟁과 휴전회담의 진행에 영향을 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1951년 7월과 8월에 평양 공습이 고조되자 회담이 결렬되기도 했다. 미군의 폭격이 다시 가속화 되면서, 평양시의 인구는 전쟁 전의 50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줄어 들었다. 당시 이를 묘사한 공식적인 미 해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