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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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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청천강의 옛 이름인 살수 일대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투에 대한 내용은 살수대첩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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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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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淸川江戰鬪
Battle of the Ch'ongch'on River
Ch'ongch'on Nehri Muharebesi
清川江战役 / 清川江戰役
시기 1950년 11월 25일 ~ 12월 2일
장소 청천강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백선엽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유재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점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월튼 워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존 B. 콜터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타흐신 야즈즈
파일:영국 국기.svg 버질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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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제 미8군
미1군단
미9군단
대한민국 2군단
중국 인민지원군 13병단
36군,37군,38군,40군,42군,50군,66군
병력 254,571명 약 230,000명
피해 한국군 피해 불명
미군 676명 사망, 3,034명 부상, 813명 실종, 2,055명 포로
터키군 218명 사망 455명 부상, 94명 실종
전투 사상자 최대 1만, 비전투 사상자 최대 2만
결과 미 8군 세력 축소
장진호 전투의 배경
1. 개요2. 상세3. 전투 전 상황4. 전개5. 패인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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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24일부터 11월 30일까지 청천강에서 벌어진 전투.

2. 상세

6.25 전쟁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임팩트를 발휘했던 전투로 인천 상륙 작전과 청천강 전투 두 가지를 꼽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이다.

전자는 제대로 된 카운터 한 방으로 전쟁의 판도를 어떻게 바꿨는지 보여준 멋진 승리라면 후자는 병력이라는 양과 훈련도의 질이 모두 잘 갖춰진 중공군을 우습게 본 결과 연합군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한강 이남까지 쫓겨나야 했던 뼈아픈 패배다. 하지만 그 중공군도 이 때가 전성기였고 포병과 공군력의 부족, 그리고 보급을 상대적으로 경시한 문제에 발목을 잡혀 어떻게든 정신줄을 잡아 반격에 나선 연합군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하였고, 다시 이북으로 밀려난 뒤 UN군과 국군의 화력전에 시달려가며 전선 유지에 급급한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후 북한, 중공, 미국은 어떻게든 출구전략을 찾고자 했다. 이승만스탈린 빼고는.[1]

다만 그 중요도에 비해 이 전투는 제대로된 이름조차 없어 관련 서적을 보면 딱히 부르는 명칭이 없다. 청천강 전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으며 장진호 전투 등 동부전선의 중공군 공세까지 합쳐 보통 중공군 2차 공세라고 부른다. 중공군 2차 공세에서 서부 전선에서 중공군 제13병단(사령관 이천우) 18개 사단이 미 8군(월튼 워커 중장)을 서울까지 밀어 붙여 1.4후퇴를 하게 만든게 청천강 전투이고, 동부전선에서 중공군 제9병단(사령관 쑹스룬) 12개 사단이 미10군단(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을 밀어 붙여 해상탈출하게 만든게 장진호 전투인 것.

1950년 10월까지만 해도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갔던 북한은 바로 이 전투 하나로 기사회생하였고, 승리를 목전에 두었던 연합군은 이 전투 하나로 평양 이북을 잃은 것은 물론이요 나중에 서울까지 잃었으며, 미군은 한반도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가 되었다.

미 8군의 예하부대와 배속부대인 터키여단, 영국군 여단, 한국군 2군단 등은 이 전투에서 대략 2~3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실종자를 기록했다. 이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던 유엔군과 국군은 평택-원주-삼척 선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때까지 무적을 자랑하던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 전역이래로 장진호 전투에서 전멸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나마 장진호 전투는 미 10군단 지휘부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의 분투 덕분에 졌지만 잘 싸웠다로 남았으나 청천강 전투에서는 손 쓸 새도 없이 중공군에 밀려났다. 이 패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베트남 전쟁이 있기 전까지 미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패+참패라고 할 수 있다.

미군 역사상 대 패배인지라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아무 지시도 못 내리고 두문불출 하는 추태를 부리다가 서울까지 내주게 되었고, 미8군 월튼 워커 중장은 그동안의 불독 이미지는 박살나고 일본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말만 읇조리다, 12월 중순, 38선 근방 전선시찰에 나섰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고[2], 군단장급으로는 청천강 전투의 관련 핵심 부대들을 통제했던 미 제9군단장 콜터 소장이 해임되었고[3], 장진호 전투의 발단자라고 간주할 수 있는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은 유임되었다. 사단장급으로는 미2사단장 로런스 카이저 소장은 즉시 보직해임되어 현직에서 물러났으며, 미 2사단의 2개 연대와 포병대, 지원부대들이 죄다 증발해 버려[4], 미 2사단 자체를 해산 시킨다는 말까지 나왔다. 또한 이후 신임 미8군 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이 임명되자 미군 사단장들을 대거 교체한다.[5]

실제 한국전쟁사 신판 중공군의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 편에는 7사단의 덕천 전투, 8사단의 영원 전투로 명칭을 소개한 뒤, 2군단의 전투 경과부터 패배 과정까지 설명하고 있다. 다만 과에 대해선 최대한 에둘러 서술하는 최신 전사 특성상 끔찍한 면이 보이지 않으나[6] 1.4 후퇴 이후 수습된 7, 8사단 병력을 각 6,000여 명, 7,000여 명 가량으로 소개하고 있어 피해가 적지 않았음을 적고 있다.[7]

또한 7, 8사단장이 패전하자 서울로 도주해 체포되었으며 본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것을 쉬쉬하고 군문에 복귀하였다면서 심지어 이들의 이름을 국군의 명예를 위해 가려졌다는 서술이 본 항목에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기록말살되었다는 7, 8사단장의 이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7사단장은 신상철 준장, 8사단장은 이성가 준장이다. 신상철 준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항대 조종사였다가 대한민국 국군 헌병대장, 육본 차장 등을 거쳐 사단장에 보임된 인물이며 이성가 준장은 이성가 항목이 있을 정도로 기록이 멀쩡하게 있다. 물론 잘 안 알려지고 쉬쉬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군사재판의 경우 둘 다 회부된 것은 사실인데 덕천과 영원에서 패주한 뒤 곧장 서울까지 도망쳤단 식으로 서술한 본 항목 내용과 달리 이성가 준장이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직접적 원인은 덕천 전투 참패 이후 1.4 후퇴 기간에 있었던 부대 지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의 경과에 대해 한국전쟁사 신판은 7사단은 경기도 연천으로 후퇴하던 중 부상자와 물자, 사단 지휘부를 차량으로 따로 이동시키면서 사단장 본인이 이 대열에 탑승하고 사단 주력은 부사단장이 아닌 연대장에게 일임했는데 이 주력이 우회를 하지 않았다가 매복한 북한군 패잔병(인데 규모가 크긴 했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은 이성가, 유재흥의 자서전에도 소개된다.[8] 이 일로 이성가 준장은 보직 해임되었다가 51년 3월 9사단장으로 재기용된다.[9]

신상철 준장의 경우 덕천에서 사단 지휘부가 위험해지자 미군 군사고문관과 함께 헬리콥터로 탈출하긴 했는데 이후 사단 후퇴간 지시를 내리며[10] 김포사 계인주처럼 마냥 무책임한 행태까진 하지 않았던 것 같고 1.4 후퇴 중 사단이 강원도의 동부전선으로 이동할 즈음에서야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복직 대신 사단장 보직 해임 됐다. 물론 이후 김정렬의 주선으로 공군으로 가서 소장으로 예편했다.

3. 전투 전 상황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은 북한군을 신의주까지 밀어냈다. 이때 중공군이 참전하여 운산군, 영변군 일대에서 처음 유엔군과 전투를 벌였는데(10월 25일 중공군 1차 공세), 전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유엔사령부는 유엔군을 청천강 선으로 물렸으며, 월튼 워커 중장이 지휘하던 미 8군을 주축으로 부대를 재정비하고 전선을 구축하였다.

당시 유엔군은 10월 말부터 중공군이 대거 남하하였음에도 그 병력을 과소평가하였다. 특히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적의 조직과 저항력이 완비 되기 전에 한만국경선으로 진격하여 조기에 6.25전을 종결지을 수 있다"고 속단한 나머지, 조급한 북진 명령을 미 8군에 하달하였다. 10월 25일 중공군이 1차 공세를 펼쳤지만, 미군은 그 직전까지 중공군의 공세 작전이 개시될 것이라는 정보는커녕, 중공군 정규군이 한반도에 배치된 사실 그 자체조차 알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1950년 11월 24일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덕천영원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도록 중공군에게 명령하였다.

4. 전개

11월 24일부터 크리스마스 공세에 따라 진격하던 한국군 7사단8사단은 25일 밤부터 중공군의 반격을 받고 병력의 수적열세와 야간 전투의 미숙함, 방어진지의 허술함, 지경선과 측면 돌파[11]등이 맞물려서 완전히 궤멸되었다.[12] 연대장 중 3명[13]이 생포되고 1명이 전사하였으며, 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당시 한국군 2군단유재흥은 자신의 예하인 7사단과 8사단의 와해 사실을 6사단이 중공군과 교전하기 전까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데다 파악한 후에도 전선 붕괴를 수습할 대책을 수립하지 않아, 그 몫은 터키군과 미군이 짊어져야 했다.

이렇게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되고 청천강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지자 미 8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1월 26일에 한국군 7사단이 지키던 덕천[14]이 중공군에게 떨어졌고, 이날부터 미군 선두의 중대, 대대는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좌우 협격을 받게 되었다. 얼마 후 미 9군단은 잠복한 중공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집중공격을 받았다. 이미 11월 28일에는 미 9군단과 한국군 2군단 등의 병력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미군 및 연합군에 평양까지 후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때 중공군 38군단은 한국군 2군단의 후방지역으로 계속 침투를 진행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확보에 나섰지만, 11월 26일부터 중공군은 대공세로 밀고 내려왔으며, 미군과 한국군은 물론이고 터키여단[15]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에는 미 25사단이 중공 39군의 침습을 받았으며, 영국군 27여단 역시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에 의해 삼면으로 포위되어 도륙을 당했다.

11월 27일에도 미 9군단은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혼전에 빠져 분란과 후퇴를 면치 못하였다. 11월 28일에 이르러서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전황의 급변과 중공 정예부대의 대거침략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새로운 전국의 돌발을 내외에 성명하였다.

11월 28일 당시 미 9군단은 한국군 2군단을 엄호하면서 퇴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중공군의 선두는 삼소리 일대에 침습하여 있었고, 중공군 주력은 덕천-영원선을 탈취하고서 덕천 남쪽 3.2km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한편 터키여단은 전날 와원 7km 동쪽에서 밤을 맞이했는데, 중공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등의 중장비 포함 집중 화력을 가한 기습을 받았다. 이로 인해 많은 터키군 병사가 전사하였거나 실종되었으며 통신차량도 적에게 피탈되었다.

11월 29일 아침부터 유엔군은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작전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공군과 도처에서 격돌한 끝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어쨌든 이날 일몰 무렵에는 대체로 유엔군 주력이 청천강을 건너 양덕-성천-순천-숙천을 연하는 선을 확보하였고 고수진지를 점령하였다.

11월 30일에는 미 9군단 주력이 신안주 비행장에서 철수하였고, 신안주-숙천-평양을 잇는 경의간선에는 미 1군단 주력의 남하 대열이 길을 메웠다. 이날 영국 29여단은 매복하였던 중공군으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에 의한 기습을 받아 순식간에 많은 손실을 입었고 공격력까지 일시에 상실하기도 하였다.

5. 패인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종결되기 전인 11월 4일, 펑더화이는 중앙군사위원회에 "만약 적(유엔군)이 다시 들어오면 적(유엔군)을 깊게 들어오게 한 후 섬멸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라는 건의를 보냈다. 이에 마오쩌둥은 "적(유엔군)들이 깊게 들어오는 기회를 기다려 적(유엔군)군을 섬멸하는 방침"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청천강 전투는 유엔군이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가 전면적으로 개시[16]된지 하루만에 시작되었다.[17]

사실 유엔군은 중공군의 함정에 빠져든 채 청천강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중공군은 처음부터 유엔군이 깊숙히 진격해올 즈음 역으로 공세를 가해 섬멸하겠단 구상으로 2차 공세를 기획했었다. 종전 공세였던 크리스마스 공세는 맥아더의 구상과 달리[18] 펑더화이의 손에 놀아난 셈이 되었다. 또한 미 8군 우익인 국군 2군단을 약점으로 지목하고 2개 군(군단)을 밀어넣은 결과 손쉽게 돌파망을 만들었고, 이후 2중 포위 기동으로 전환하면서 대승리를 일구었다.

청천강 전투 이후 1951년 5월까지 중공군의 공격 방식엔 2차대전 독소전에서 독일군이 구사한 기동방어와 유사한면이 많다. 중공군의 경우 반격부대의 편성과 그 기동을 거의 알보병 (산악기동 경험이 풍부한) 으로만 달성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곳곳에 있는 목지점들 (유엔군, 한국군의 퇴로 차단이 가능하고 전선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을 중공군이 배후기동으로 선점해 자신들의 방어에 유리한 참호를 구축하고, 한반도의 산악지형과 맞물려서 차량/기계화, 화력이 우세했던 유엔군의 장점을 교전에서 상당부분 감쇄시켜 돌파가 어렵게 만들고, 낮은 훈련도와 응집력이었던 당시 한국군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유엔군이 파훼법을 찾아 구사하기까진 몇 달이 걸렸고, 한국군은 밴플리트 장군의 주도로 51년 하반기 전선 후방에 설치된 재훈련과정을 통해 성장하기까지 중공군에게 계속 털렸다.

그렇다면 상황이 대재앙으로 향하는 동안 유엔군 사령부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으로 판단한 건가?

일단 유엔군이 중공군을 얕잡아보고 이동정보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었다. 사실 유엔군의 자신감은 제공권의 장악에 근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 6개 군단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에 포진할 때까지 유엔군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중공군이 대공세를 펼치는 와중에도 중공군 규모를 수 개 사단으로 오판하거나 정규군이 참전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는 등 정보 오판을 수정하는 과정이 너무 느렸다. 이는 중공군이 흰색 설상 위장복으로 유엔군의 항공 정찰에 완벽하게 대비한 데 기인했는데, 실제로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항공 정찰을 방해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만 부대이동을 실시했다. 해가 뜨기 전에 행군을 마치고 주간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철저한 행군 군기와 숙영 군기로 항공 정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것.[19]

또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은 중공군이 반격을 개시하기 전에 자리를 잡고 방어한 곳들(11월 24, 25일 시점)은 대개 매우 고지대였고 이에 반해 한국군과 유엔군은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있었고 해안가와 평지가 있는 전선의 서쪽을 제외하면 공격개시선을 나서면서 진격을 위해 계속 산을 타고 올라가야 했던 구조였고 이것은 전투에 큰 영향을 줬다. 거기에 중공군은 수적으로 열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악지형과 맞물려서 25일엔 한국/유엔군의 공격은 돈좌되었다.

그렇게 자신을 은폐한 중공군이 산길을 타고 미군 후방으로 침투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결정적인 교통로를 차단하고 갑자기 미군을 포위하는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산이 많은 한국의 특유한 지형에서 제한 없이 기동할 수 있는 중공군 보병은 주로 도로로만 기동하는 미군 차량 보급부대와 포병부대들을 요소요소마다 차단하며 포위를 시도할 수 있었다.

미 5공군 소속 전투기와 폭격기,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폭기는 청천강 전투 과정에서 지상군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고, 철수 작전에도 아군 피해를 줄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이들 항공전력이 전투의 승패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달리 말해 복잡한 한국의 산악지형은 단순히 화력으로 커버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다는 뜻. 압도적인 화력으로 산악지형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 하지만,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감시체계는 그 정도 수준이 되지 못했다.

미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로비 육군소장의 무능때문에 졌다는 견해도 있다. 혹은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의 책임을 거론하는 견해도 있다. 6.25 전쟁에 대한 미 육군의 공식 전쟁사 중의 하나인 ‘한국전쟁의 서부 전선’(원제 Disaster in Korea)에서도 워커 장군의 평양 방어전 포기 등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로 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나, 평양이나 그 주변에서 병력을 수습해 유엔군이 방어전을 펼칠 여지는 있었음에도 너무도 쉽게 평양을 포기했다는 이유.

미 8군과 10군단의 지휘가 분리되고 양 부대가 단일 전선을 형성하지 않은 점 등이 청천강 비극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혹은 워싱턴의 지휘부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대표로 하는 극동군사령부의 불화를 실패의 원인으로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맥아더 원수의 명성과 경력에 눌려 상급부서에서 위기 회피에 필요한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참화로 연결됐다는 해석.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는 저서에서는 미묘한 증언도 나오고 있다.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군 안팎에서 “지금 상황에서 공세를 재개하다가는 위기를 맞을 것”이란 경고가 여러 경로로 나왔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대표적이다.[20]

6. 결과

중공의 병력과 장비 그리고 그 전법과 투지를 경시한 오류가 빚은 손실은 참으로 컸다. 미 8군 지휘부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후퇴할 수 있었으나 그만큼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만약 미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하지 않고 전력을 보존했다면 현재의 남북군사분계선은 청천강이나 대동강을 경계로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의 주력인 8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미군 2사단의 병력 손실은 4천명에 달했고 국군 2군단은 사단 규모로 해체되었으며 2군단은 박살이 났다. 이때 중공군이 노획한 미군의 무기+탄약+차량+식량 등 군수물자는 이후의 전쟁에서 중공군에 의해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며,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에 보내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청천강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 후 계속 패주하던 미군은 12월 3일 싸워보지도 않고 평양 철수를 하고, 23일경에는 임진강, 한탄강에서 겨우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전선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국 연합군은 1951년 1.4 후퇴를 결정하면서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평택-원주-삼척선까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직후 매튜 B. 리지웨이 사령관이 신속히 미군의 전열을 수습하고 반격하지 않았다면(지평리 전투 참조), 미군은 아예 한반도 전체를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1] 그 정도로 청천강 전투는 미군에게 실로 어이없고도 심각한 피해를 안긴 전투라고 할수있다.

끝으로 청천강 전투에서 대승을 일군 중공군도 그 결말은 좋지 않았다. 청천강에서 대승을 거둔 중공군은 자신의 보급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빠르게 진격하여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9일 뒤인 13일 UN은 현 위치(37도선 인근) 휴전 및 외국군의 철수를 골자로 한 휴전안을 통과시켜 중국에 제시했다. 앞서 거둔 대승에 눈이 먼 마오쩌둥은 며칠 뒤 UN의 제의를 거절, 호기롭게 전쟁을 속행하여 한반도의 완전 적화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과 미군의 후방 폭격으로 극심한 보급 문제를 겪던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하고 북쪽으로 후퇴하여 3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엘리트들은 우직하게 남진을 몰아붙였고, 이것은 1951년 4~5월에 걸쳐 진행된 춘계공세의 실패와 뒤이은 UN군의 대반격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은 춘계공세 당시에 자체 추산 10만, UN측 추산 16만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고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와 강원도 대부분을 상실하여 38선 인근으로 다시 퇴각해야 했다.


[1] 이승만은 분단이래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외쳐댔고, 스탈린은 6.25로 소련에는 커다란 손실이 없는데다 미국을 공산권 견제에 집중할 수 없도록 묶어둘 요량으로 중국과 북한이 요청하는 정전 협정 진행에 지속적으로 딴지를 걸었다. 정전 협정 체결은 1953년 갑작스럽게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공산측의 방해 요소가 사라졌고, 연합군측에서도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키는 폭주로 미국과 서방을 기겁하게 만들며(이를 계기로 미국은 한 때 이승만의 제거를 검토하기까지 했다.) 이승만 정부가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빠르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되며 아예 이승만을 휴전협정에서 배제하는 강경책을 통해 휴전협상의 급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2] 만약 사고로 죽지 않았어도 워커의 연령을 감안할 때 1951년 시점 (1889년생, 62세) 에서 정년퇴역 (실제로 그의 동기들은 이 때 다 퇴역했고 계급이 낮았던 준장, 소장급은 2차대전이 끝나고 1949년까지 전역함) 이 예정되어 머지않아 직책을 이임해야 했으나 그 모습이 어땠을지는 의문이다.[3] 본국으로 소환되진 않고 한국 현지에 남아서 중장으로 진급, 미8군 부사령관 직책으로 한국 정부와 군의 연락책으로 지내다 1952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에도 한국과 밀접한 관계 속에 60년대까지 각종 재건 및 지원 사업의 후원을 맡았다.[4] 한국전 시기의 미군 보병사단의 총원은 18000명인데 미2사단은 9500명만 잔존했다. 사단 포병의 경우 72문 편제에 10문만이 잔존했고, 보병 연대들의 잔존 인원은 1500 ~ 2200명 수준으로 완편일땐 3천명이 넘는다. 대대급으로 내려가면 더 심각해서 장교가 아예 없고 10 - 40명의 사병(+ 장비/개인화기 모두 망실)만이 생존한 보병/포병대대들이 몇몇 있다. 군우리 전투에서 제일 후위에 있던 미2사단 의무대와 공병대는 고립/와해되어 죄다 포로가 되었다.[5] 이후 리지웨이는 이후 지평리 전투에서 처음으로 중공군을 상대로 대 승리를 거두어 분위기를 반전 시키는데, 이때서야 동경의 맥아더가 수원으로 날아 와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반격과 전세 역전이 자신의 공이라는 공치사를 하며 나타난다. 그럼 지난 패배는 누가 했니? 리지웨이의 사단장 및 참모진 해임과 교체는 단순한 패전 책임을 물은 것 보다 다양한 이유가 있다.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의 패배로 가장 윗선인 맥아더를 포함한 미군 고위 장교진 전반에 패배주의가 만연하여 이대로는 반격 작전을 세우기 어렵다는 점이 매우 컸고, 워커가 맥아더 입장에서 다루기 껄끄러워 하는 부류(자신과의 접점도 거의 없으면서 연령면에서 찍어 누르기가 쉽지 않은 노장)라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면도 있다.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친위 그룹에 속하지 않으며 직속 상급자인 맥아더의 본질이 막장 정치군인임을 알고 8군 사령관 취임 전 지휘권 간섭을 처음부터 차단할 목적으로 담판을 지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윗분의 의중을 전부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려웠다.[6] 특히 2군단의 예비대 동원 타이밍이 늦은 게 아닌가 싶은 부분에 대한 서술이 너무 점잖아 보인다. 물론 2군단 전방이 무너지고, 우측방에 이어 후방으로 진입한 적 주력을 1개 연대로 저지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을까? 터키군 여단처럼 군우리 진입을 저지하는 임무와 같지도 않고... 실종되고 포로가 된 연대장들의 피해도 한국전쟁사 신판엔 서술되지 않았다.[7] 청천강 일대서 벌어진 전투로 국군이 입은 병력 손실(사망, 실종)이 12,000명임을 감안하면 그 피해의 상당수가 7, 8사단이 아닐까 추측된다.[8] 사형이 선고되었다 2심에서 무기로 감형된 것은 유재흥이 이성가를 변호하는 등의 이유가 컸다는데 정작 유재흥은 자서전에서 사단을 우회시키란 자기 지시를 어기고 차량부대만 따로 이동한 데 대해 석연치 않다고 의심한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도 사단장이 연천에 먼저 가서 기동계획을 수립하라 지시했었기에 재판에서 자기책임을 주장했다고 한다. 백선엽의 자서전에도 이 사건을 소개하며 사단장이 부대를 이끌어 지휘해야지 어디 가냐는 식으로 비판한다. 이성가 본인은 사단 주력이 우회하지 않은 것에 대해 병력이 도저히 우회까지 하며 행군할 상태가 아니었다고 변호하였다.[9] 그는 9사단장에 보임되기 전 북한군 10사단이 동부전선 안으로 깊숙하게 침투, 유격전을 펼치던 것을 섬멸하여 나름의 설욕전을 치렀다. 그래도 북한에선 10사단 장병 중 1,000명이 복귀했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했지만 상급 제대인 2군단이 녹아버린것을 가리기 위함에 지나지않는다.[10] 가용 사단 예비대가 1개 대대 뿐이었고 덕천 일원의 탈출로가 일찍 봉쇄되면서 5, 8연대는 흩어지고 만다. 또 사단 서쪽에서 졸지에 퇴로가 깜깜해진 예하 3연대는 연대장의 결정으로 미 2사단으로 탈출해 그들 지휘하에 들어간다.[11] 특히 8사단의 경우엔 25일 오전부터 중공군 42군의 1개 사단이 우측면으로 산악 침투(지도상으로는 8군과 10군단의 지경선인데 배치된 병력도 없었고 거대한 공백지대였다.)해서 8사단의 후방지역이었던 맹산 북동쪽과 동쪽에 나타났고 이를 방어하던 한국군 16연대를 간단히 와해시키고 계속 진군해서 영원 후방을 차단했다.[12] 미국 군사역사학자 Appleman의 저서 Disaster in Korea: The Chinese Confront MacArthur (1989)에 따르면, 한국군의 괴멸은 미군에 상대적으로 적은 화력과 2군단이 유엔군 중 가장 험준한 지형 담당등이 원인이다.[13] 고근홍, 박승일, 김영노 대령[14] 2군단 사령부는 덕천 남쪽 10km 너머의 북창에 있었고 인근에서 대기하던 6사단의 존재과 미1기병사단의 긴급배치로 중공군이 바로 들이닥치진 않았고 군단의 후방부대들은 온존할 수가 있었다.[15] 여단장 준장 타흐신 야지치(Tahsin Yazici)[16] 소규모 공격은 20일부터 시작되었고 중공군도 역습해왔다.[17] 미 2사단이 역습을 받고, 이튿날 26일에 국군 2군단이 38군, 42군에 직격당했다.[18] 미 8군과 10군단의 협조로 평안북도의 중공군을 협격하려 했다.[19] 이걸 보건대 청천강 전투는 첨단 정보자산을 활용한 정보의 우위를 너무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통신정보와 휴민트 등 다른 정보 수집 수단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항공 정찰이나 위성 감시만으로 적의 동향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다는 뜻.[20] 물론 맥아더 원수를 옹호하는 견해도 있다. 중공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는 워싱턴 당국은 적 전투기가 압록강 북쪽으로 도주할 경우 아군의 추적을 금지하는 등 맥아더 사령관에게 각종 제한사항을 주지시켰다. 맥아더 원수는 그처럼 제한사항이 많은 상황에서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기 전에 신속하게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판단했고, 그 점에 집중하다 보니 무리해 보이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21] 실제로 미 육군 합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서 철군 승낙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리지웨이가 그에 대해 맹렬히 반대하고 죽어라 싸웠기에 철군 결정이 뒤집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