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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버러디 계획(Plan Everready)은 미국과 유엔군사령부에 의한 이승만 대통령 축출을 목표로 했던 쿠데타 계획이다. 1975년 뉴욕 타임스에서 처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뉴욕타임즈 아카이브
2. 배경
미국은 6.25 전쟁 이전에도 틈만나면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도 한미관계는 그렇게 원만하지 않았다. 개전 직후야 당장 한국이라는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이승만도 한국 정부도 미국과 미군의 행동에 군말없이 따랐으며 이대로였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분고분 미국의 말을 따를 인물이 아니었다.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하자 남침 이전의 영토를 회복하고서 이승만은 두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북한군 주력을 궤멸한 상태에서 한국군이 북한군의 소규모 공격에 대한 대응을 명분으로 38선을 은근슬쩍 넘었다. 미국은 원래 대한민국의 생존이 목표였으나 북한군이 소멸된 상황에서 중국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에 같이 북진했다. 공산권을 몰아내고 좀 더 중국쪽으로 국경을 밀어내면 좋을테고 이대로면 별 피해없이 정리가 가능하니까. 그러나 중국의 개입과 1.4 후퇴 이후 미국은 별 피해없는 북진통일이라는 승리가 불가능해진 마당에 3차대전 위험성을 생각하면서 전쟁 지속에 대해 여론도 회의적이었다. 이미 38선 근처까지 회복하였고 대한민국도 살아남았으니 무의미한 소모전을 끝내고 여기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고 전술재정립과 인해전술 파훼법을 찾아내면서 중국 인민군의 공세기세가 뚝 떨어지며 큰 피해를 입자 땅굴 버티기로 치고 박고 있었다. 물론 미국과 연합군은 싸울 여력이 더 있었지만 5년만에 벌어진 국제전으로 인한 전쟁피로를 호소하는 여론과 3차대전 위험성을 고려해 휴전으로 가고 있었다. 미국의 정치여론도 전쟁 의지가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만주 핵 투하 등 극단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개겼다가[1] 모가지가 날아가며 끝장났다.
여기서 북한과의 휴전이라는 이름의 불편한 동거가 점점 확실해지자 이승만은 다시 소련이나 중국에게 지원을 받아 빠르게 군사력을 회복한 북한의 재침공을 우려하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북진통일, 아니면 적어도 다시는 북한이 침공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 확실한 구속구가 필요해졌다. 반면 미국은 "그건 너희들 사정"이라 여겼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빠른 휴전에만 관심을 지녔기에 이렇게 양자의 생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전사(戰史)를 보자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뒷목을 잡게 했던 명과 왜의 휴전 합의에 버금가는 수준의 물밑 접촉이 오고갔다. 실제 교전 당사자인 중국과 미국은 휴전을 원했고, 소련은 제2 공산국가인 중국이 더 피를 흘리고, 미국이 여기서 국력을 소모해서 동유럽에 신경을 못쓰게 하기 위해 휴전을 방해했다. 여기에 남한도 휴전을 반대했다. 북한의 경우 일본 제국이 남긴 공업 지대들이 전부 미 공군의 융단 폭격 아래에 증발당해 이를 아득바득 갈았던 김일성은 저우언라이가 차관 공급과 같은 사탕으로 잘 어르고 달래 주었으며 어차피 북한군이 증발한 마당에 중국이 빠지는 걸 막을 수도 없어 휴전을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북진통일이 아니면 안 되고 북진통일이 안 된다면 최소한 안전보장책인 상호방위조약이나 맺어주거나 그것도 안된다면 한국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며 허구한 날 미국 관계자들에게 이야기했고 미국 관계자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승만을 불편해했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던 와중 이승만이 2만 5천명의 반공성향 포로들을 멋대로 석방해버리면서 갈등이 폭발하게된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휴전협상에서 발언권이 없던 이승만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으로 휴전협상을 고의로 방해한 사건이며, 이로 인해 미국은 통제할 수 없는 이승만에게 넌더리가 나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에버레디 계획이다.
3. 전개
에버레디 플랜의 '원안'은 1952년에 먼저 등장하였으나 유엔군과 영미 지도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 이후 1953년에 드디어 '에버레디 플랜'으로 불릴 수 있는 이승만 제거 및 정권 교체 작전의 입안이 구체화되었다.3.1. 1차: 1952년 발췌 개헌
1952년 5월 26일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고 다수의 야당 정치인들이 체포되자 6월 25일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마크 클라크 UN군 사령관에게 극비전문을 보내 비상시 한국 정부를 장악할 상세한 정치, 군사적 계획의 수립을 요구했다. 합참의장이 극동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보 7월 2일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 7월 5일 마크 클라크는 이승만 체포를 포함한 일련의 군사 계획안 수립이 끝났음을 보고했다. 유엔군 사령관이 합참의장에게 보낸 전보 그러나 미국의 외교적 압력에 굴복한 이승만이 체포한 국회의원과 야당 정치인들을 석방했고 8월 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자 한국 국민 전부를 적으로 돌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이 계획이 결국 실행되지는 않았다.다만 당대 인물들의 전후 증언을 보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된 1월 이후로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무언가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장면의 2대 총리 재임 시기(1950.11.23~1952.4.23) 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선우종원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이 총리를 사직한 직후인 1952년 5월 10일 새벽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이 자신의 자택을 방문하여 갑작스레 쿠데타 동참을 요청받았다는 것이다.[2] 이는 선우종원이 이용문의 평양고보 2년 후배라는 점을 이용해 장면을 포섭하여 추대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때 이용문은 쿠데타가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의 동의를 받은 사안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이용문의 주장이 동조자 확보를 위한 뻥카인지, 아니면 실제 동의를 받은 것인지는 불분명하다.[3]
3.2. 2차: 1953년 휴전협상 반대 및 반공포로 석방
195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대선 공약은 일관되게 한국전쟁의 조기종결과 미군의 조속한 귀환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주구장창 북진통일만을 부르짖으며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이승만이 반대하던 말던 1953년 3월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었고 소련에서 그 후계를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장 권력투쟁을 벌이던 베리야, 흐루쇼프, 말렌코프는 한국전쟁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4]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들은 이미 북한의 영토를 38선 부근까지 확보하여 전쟁목표를 달성하였고, 이는 유엔군도 마찬가지었다. 직접 전쟁당사자인 중국과 유엔군 모두 대략의 목표를 달성한 시점에서 이미 한국전쟁에 피로감을 토로하던 상황에 휴전협상을 방해하던 소련도 스탈린 사후 적극적으로 나오니 슬슬 휴전 가능성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승만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북한은 예측불가능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신의 반공 성향에 더해 무언가 북한을 막아줄 확실한 안전장치 없이 휴전이 맺어지면 신생 대한민국의 미래도 폭풍 앞의 촛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전쟁 이전부터 미국이 없어도 대한민국 혼자서라도 쳐들어가 북한을 끝장내겠다며 하도 떠들어댔고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을 때까지도 좁아터진 산악지형인 한반도의 형세에서 기동전을 정식 교리로 채택한 미군에게 있어서 지옥 그 자체였다는 것에 더해 미국이 "저 인간한테 군사원조를 해줬다간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라며 미군을 주둔시켜 주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걸 생각하면 이승만에게 있어서 멸북 북진통일이 아닌 휴전으로서의 북한과의 불편한 동거는 자살행위 그 자체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과 한국 정부의 휴전 반대 의사가 명백해도 한국군 작전권은 미국에 있었고, 발언권도 없었기에 미국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5] 그런데 이승만이 계속 어깃장을 놓자 미국은 원치 않게 전쟁이 지속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중국이 이를 문제삼아 휴전 협정이 수포로 돌아가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공산진영에서는 '휴전한다 해놓고 왜 대한민국은 혼자 저러고 있는가? 혹시 다른 맘 품고 있는 거 아닌가?' 하면서 전쟁을 계속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을 이대로 무시하고 진행하기에는 뭔짓을 해서 휴전협정을 물먹일 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발언권이 없더라도 대한민국은 전쟁 당사자였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여차하면 군사력으로 한국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궁리를 했는데 발췌개헌 시기였던 바로 작년에 수립했던 계획이 남아 있었다. 미국은 이때 계획을 약간 수정보완하여 꺼내들기만 하면 되었다.
1953년 5월 4일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휘하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추상적인 수준으로 최소 UN군정 실시, 최대 이승만 축출 및 친미적인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비상계획을 수립했다. 이때 비로소 구체적인 작전명인 '에버레디(Everready)'가 등장하여 6월 8일 UN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에버레디 플랜을 승인했다. 다만 이 승인은 바로 작전을 실행하라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1953년 6월 8일 유엔군사령관이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보
며칠 뒤인 6월 18일 이승만은 UN군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일제히 석방했다. 후일 아이젠하워는 회고록에서 임기 8년 동안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이라고 언급했고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아침 면도 중에 보고를 받고 화들짝 놀라 얼굴을 베었다. 처칠은 매우 분노하여 이승만이건 뭐건 다 박살내고 한국에 신정부를 세우자고 아이젠하워에 요청했을 정도였다. 에버레디 플랜의 발동은 시간 문제였다. 미국 대통령이 처칠 같은 인물이었다면 바로 실행되었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신사로 유명했던 아이젠하워였고 아이젠하워는 일단 참은 뒤 국무부 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한국에 급파했다.이런 상황에서 이승만도 자기가 계속 미국과 척을 지면 어떻게 될지 아주 잘 알았다. 이미 저지른 반공 포로 석방은 어쩔 수 없다 치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기로 로버트슨과 합의했다.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의 대화 메모랜덤 그렇게 휴전이 되었음에도 이승만은 공공연히 휴전을 인정하지 않자 테일러는 자체적으로 10월 28일 에버레디 플랜의 수정안을 준비하고 신임 UN군 사령관 존 헐의 승인을 받았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에버레디 계획 개정안 보고
해가 바뀐 1954년 11월 8일 도쿄에서 헐, 테일러 등 군부 인사와 주한미국대사 엘릭스 브릭스 등이 모여 이승만이 계속 휴전을 거부할 경우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는 데 동의하고 본국에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말로만 휴전 불인정을 외치고 실제로는 한국군에 휴전을 무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고 딱히 군을 움직이지 않는 등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백악관, 워싱턴의 관료들은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4. 실행되지 않은 이유
이승만은 실질적으로는 휴전 협정에 도전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이 휴전을 거부하고 한국군이 계속 교전행위를 할 경우 바로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려 했으나 이승만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았다. 또 그가 원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보장받자 바로 휴전에 동의하고 그의 임기 내에 북진을 한다든가 하는 도발조차 걸지 않아 개전 명분조차 주지 않았다.미국이 직접 개입으로 한국의 민주정부를[6] 엎어 버리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것도 중요했다. 당시의 이승만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원수였다.[7] 1952년에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긴 했으나 국민들은 그런 이승만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이는 에버레디 플랜을 준비하던 미국에게 상당한 고심거리였다. 미국에겐 이승만을 안정적으로 대체 가능한 국민적 지명도와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한 정치지도자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8]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암살당했는데 그게 미국이 사주한 것이라는 것이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남한이 반미로 돌아서고 스스로 적화되어도 이상할 게 없으며 어찌저찌 허수아비를 세워 놓는다 한들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거나 미래의 이란 혁명처럼 이후 자생적 반미 운동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았다.[9] 실제로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의 전횡이 너무 심해서 미국이 개입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이후 더욱 막장이 되었고 사실상 미국의 괴뢰국 신세가 되었다.
미국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라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런 세세한 정치공작과 개입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내할 사람이긴 했지만[10]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러 방면으로 생각과 검토를 거친 후 참모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들어보며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처칠이 반공포로 석방 때 격분하여 강력한 개입을 주장했으나 아이젠하워는 간신히 참고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어 이승만과 협상하는 쪽을 택했다.
더불어 미군은 한국군을 장악할 수단이 없었다. 군사적으로 한국 정부에 개입하자면 전쟁으로 그 수가 급격히 불어난 한국군을 통제해야 하는데 미군에서 한국군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권력과 카리스마를 가졌던 미국 군인은 다름아닌 더글러스 맥아더뿐이었다는 게 문제. 트루먼과의 갈등 끝에 해임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해 겨우 맥아더의 폭주를 진정시키나 했는데 여기서 맥아더와 한 몸이었던 이승만까지 같이 제거하면 그로 인해 맥아더가 정치적 희생양처럼 비춰지며 맥아더가 강력한 대선후보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맥아더의 부관을 수 년간 해 온 아이젠하워야말로 정치군인 맥아더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테니 맥아더&이승만 커넥션은 건드릴 수 없었던 것. 그래서 한국군은 한국 군인이 직접 통제해야 했는데 여기도 사람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군부의 대표로 명망 높던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발췌 개헌 과정에서 해임되어 미국은 이종찬을 보호하기 위해 1년간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으로 도피성 유학을 보냈다. 1952년에 쿠데타를 준비했던 이용문은 휴전을 1달 앞두고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나마 한국 군부의 대표자로 거론되던 사람 중 백선엽이 있었고 미국도 백선엽을 활용할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은 휴전을 두 달여 앞둔 1953년 5월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갑작스런 초청으로 한 달여간 전선을 비우고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를 에버레디 플랜을 앞두고 한국 군부를 통제하고 협조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백선엽 역시 견제하고 있었고 백선엽 또한 무리하게 정면에 나서서 이승만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5. 내용
한국군 합참의장에게 유엔군이 조치를 따르도록 한다.
이승만 정권을 따르지 않는 군 사령관들을 회유, 군사행동을 자제하도록 하고 이들과 반 체제 지도자들을 보호한다.
한국군에 대한 일체의 육 해 공군 지원을 중단하여 한국의 수송로와 전력시설을 장악한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부의 정책노선을 따르도록 하고, 이 노선을 지키도록 한국군에게 명령토록 한다.
만약 이승만이 이를 거부할 경우 이승만 정권의 승인을 취소하고 한국군을 유엔군에서 축출한다.
이승만 정권의 승인을 취소하며 유엔군으로부터 한국군을 축출한다.
해안봉쇄를 단행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행동방침인 「상비」 계획 개정안에 대한 국무부 내의 논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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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한국군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이승만 정권을 따르지 않는 군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며 독단으로 행동할 경우 한국군을 유엔군 소속에서 추방한다는 것이다.
6. 기타
이승만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중 하나가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인데 에버레디 계획은 이를 반박하는 증거 중 하나이다. 이승만이 정말 미국의 꼭두각시나 허수아비였다면 이승만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미국이 그를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친미성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북한군의 남침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선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계산하여, 정확하게 미국이 자신을 밀어내기 직전 수준까지만 미국과 문제를 일으켰다.반대로, 한국인들이 갖는 오해인 전후 70년 내내 한미관계가 확고한 동맹관계라는 것도 이것과 배치된다.[12] 이승만은 이런 미치광이 전략과 자신의 처세술을 다양하게 이용해 미국에 하나라도 더 뜯어내기에 집중했고, 임기 내내 한미관계는 미국에서 골칫거리였으며 그것에 학을 뗀 아이젠하워는 임기내내 이승만과 거리를 두다 이승만이 축출된 이후인 1960년에서야 한국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의 후폭풍으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이때가 절호의 찬스구나 하고 골칫덩이였던 이승만을 곧바로 버렸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시위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이승만을 찾아가 "미국은 더 이상 당신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점을 본다면 결국 이승만의 운명의 일부는 미국이 쥐고 있었다고 봐도 완전 틀린 말은 아니다.[13]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그를 꼭두각시마냥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협박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1]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령관이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의 입을 빌려 대통령의 정책결정에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켰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맥아더는 핵신중론자고 핵 사용을 지지한건 트루먼과 본토의 미 군부였다.[2] 이용문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패잔병들을 모아 서울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패한 후 서울시내에서 은신하고 게릴라전을 펼쳤던 장군인데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남았다는 이유로 북한에 협력한 거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방첩부대의 조사를 받았다. 그나마 일반 시민들 다수가 부역혐의로 처벌받던 와중에도 장군이라 조사만 받고 풀려났는데 이런 일을 겪었으니 이승만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3] 참고로 이용문의 쿠데타 계획에서 No.2가 당시 작전교육국 차장 박정희 대령이었다. 우리가 아는 그 박정희 맞다.[4]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이 이득이었다. 제2 공산국가인 중국의 힘을 빼고, 미국의 동유럽 전선 강화를 약화시킬 수 있었는데, 정작 소련은 6.25 전쟁에 제3차대전을 우려한다며 대규모 물자공급은 자제하는 등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탈린은 휴전협상을 방해하기만 했는데, 스탈린이 죽자 휴전협상을 방해하던 원인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되었다.[5] 휴전협정서에도 오직 유엔군 사령관의 서명이 있지 대한민국 대표의 서명은 없다. 중국군과 북한군 서명이 같이 들어간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다.[6] 이승만 정부는 점점 권위주의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지만,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지지는 넉넉히 받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에게는 경쟁자가 없었던지라 집권이 가능했던 것.[7] 1952년 2대 대선에서 이승만은 (좌파 진영의 궤멸로 경쟁자가 전무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득표율 74%로 당선되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2대 대선은 3대 대선과 달리 무효표가 3% 수준에 그쳤다.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유효투표 기준 70%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이때는 제1야당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투표 10일전 급사하면서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신익희 추모표라고 할 수 있는 무효표가 20%나 발생하였다. 또한 원내에서는 아무 세력이 없는 진보당의 조봉암한테도 30%나 내줬으며, 이기붕이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하는 등 전쟁 중과는 달리 현격한 인기하락을 실감했다. 이는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라는 무리수로 이어진다.[8] 중도좌파지만 미국과 관계가 원만했던 여운형은 정부수립 이전인 1947년 암살, 민족주의 우파 김구는 전쟁 전인 1949년 암살, 이승만-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불렸던 미국유학파 출신의 온건우파 김규식은 한국전쟁 초기에 납북되었다. 이승만과 지명도와 정치력에서 맞설 만한 이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중에 단 한명만 멀쩡했어도 이승만이 독재로 흑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외에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1953년 4월에 작고, 2대 부통령 김성수도 투병중이었고 1955년 별세하였다. 신익희도 건강이 안 좋았고 결국 1956년 3대 대선 유세 중에 죽었다. 이때 신익희와 함께 출마했던 부통령 장면이 좀 더 정치적 힘을 갖췄다면 과감하게 장면을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그 시점에서 장면은 이승만에 1대1로 대적할 만한 정치력과 지명도를 가진 정치인이 아니었다. 조병옥은 현직 내무장관으로 아직 이승만과 대립각을 세우기 전이었다. 조봉암은 좌파라서 아예 미국이 선택할 대안이 아니었고, 마지막 유림 김창숙은 70대의 고령에다가 선비정신이 충만한 사람이라 정치인보다는 사회운동가에 가까웠다.[9] 당시 미국은 이란에서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모사데크를 영국과 공조한 에이젝스 작전으로 실각시키고 팔라비 2세를 확고한 친서방 인사로 만들었지만 되려 이란의 반서방 정서만 키워 버렸다.[10] 실제로 에버레디 계획을 검토하던 1953년 바로 그 해에 이란에서 모사데크 내각을 축출시키는 공작을 최종승인하기도 했다.[11]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12] 서울대 박태균교수가 2006년 출판한 '우방과 제국 - 한미관계의 두 신화'가 이런 측면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미관계는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식민지나 일방적인 예속 관계도 아니었고, 또 일부가 말하는 것처럼 언제나 같은 가치관과 국익을 공유하는 공동운명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현대의 국제관계에서 양자 모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13] 다만 이것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명의 독재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세 명 다 미국이 묵인했기에 집권했고, 미국이 묵인했기에 독재로 치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