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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0:58:08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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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준장
마크 클라크 | 돈 프랫

||<tablewidth=100%><tablebgcolor=#eaeaea,#1f2023>※ 문서가 있는 인물만 2차 대전기 당시 계급으로 서술함
※ 윗 첨자 : 전사, 윗 첨자 : 육군 항공대, 윗 첨자 해병: 해병대, 윗 첨자: 전시 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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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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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942년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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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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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종전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파일:Time_Inc_whit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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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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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50년

6.25 전쟁
1951년
1952년
1953년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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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55년
1956년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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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авалеры ордена «Побед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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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장 수훈자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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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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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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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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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안토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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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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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메레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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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로코솝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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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묜 티모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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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톨부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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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고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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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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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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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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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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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브로즈 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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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1]
파일:드와이트 아이젠하워.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890년 10월 14일
미국 텍사스 주 대니슨
사망 1969년 3월 28일 (향년 78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기간 제34대 대통령
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서명
파일: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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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데이비드 제이콥 아이젠하워
어머니 이다 엘리자베스 스토버 (1862 ~ 1946)
형제자매 첫째 형 아서 아이젠하워 (1886 ~ 1958)
둘째 형 에드가 뉴턴 아이젠하워
남동생 로이 아이젠하워 (1892 ~ 1942.6.7)
남동생 얼 듀이 아이젠하워
남동생 밀튼 스토버 아이젠하워
남동생 폴 D. 아이젠하워 (1894 ~ 1895)
배우자 매미 아이젠하워 (1896 ~ 1979)
자녀 다우드 아이젠하워[2], 존 아이젠하워[3]
학력 에빌린 고등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신체 179cm / 체중 78kg / O형
소속 정당

문장 파일:Dwight_D._Eisenhower_Arms.png
군사 경력
임관 미국육군사관학교 (1915년 임관)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15년 ~ 1953년[4]
1961년 ~ 1969년[5]
최종 계급 원수 (미합중국 육군)
주요 보직 연합군 총사령관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6][7]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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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vy_Distinguished_Service_Medal_ribbon.svg.png해군수훈근무훈장
파일:800px-Legion_of_Merit_ribbon.svg.png공로훈장
파일:멕시코국경근무메달 약장.svg멕시코국경근무메달
파일:제1차세계대전승전메달 약장.svg제1차세계대전승전메달
파일:미국국방근무메달 약장.svg미국국방근무메달
파일:유럽-아프리카-중동전역메달 약장.svg유럽-아프리카-중동전역메달
파일:제2차세계대전승전메달 약장.svg제2차세계대전승전메달
파일:점령군메달 약장.svg점령군메달
파일:국방근무메달 약장.svg국방근무메달
파일:해방자 산 마르틴 훈장 약장.png해방자 산 마르틴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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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쟁십자가(벨기에)(1944) 약장.svg전쟁십자가
파일:남십자가국가훈장 약장.svg남십자국가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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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운희휘장 1급.gif운희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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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wight_D._Eisenhower,_official_Presidential_portrai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군인으로서의 평가3.2.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3.2.1. 문민통제 확립 및 군산복합체 견제와 대소련 군사 전략
4. 선거 이력5. 개인사6. 대중 매체에서
6.1. 영화6.2. 만화/애니메이션6.3. 소설6.4. 게임
7. 기타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34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8]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애칭은 아이크(Ike).[9]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자, 고국으로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5성 장군이었다. 대통령 재임 당시 극심했던 인종 차별을 연방군 투입으로 저지시킨 또 다른 의미의 영웅이기도 하다.[10] 초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직도 지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군 장성 출신 대통령 중 초대 대통령이였던 조지 워싱턴과 함께 군인으로서도 대통령으로서도 평가가 좋은 편이다.

3.1. 군인으로서의 평가

세계사에 기록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장군. 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상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역시 아이젠하워를 자기가 만난 사무원 중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1]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횃불 작전, 시칠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리더십 역시 괜찮은 인물이었다.

사람들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타협하는데 능했고, 이 점은 여러 국가들의 군이 동참하는 연합군의 지도자로서 매우 적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훗날 군인을 넘어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서도 이를 수월하게 수행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3.2.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집권기였던 1950년대 미국을 상당히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기를 맞아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으며[12] 일자리도 완전 고용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덕분에 지금도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10위 안팎의 상위권에 오르내리며, 공화당에서 자당 정치사의 주요 아이콘으로 내세우는 대통령 중 한 명이 되었다.

다만 아이젠하워는 본래부터 정치인은 아니었던데다, 정책적으로는 중도적 성향이 강해서 반대로 공화당원으로서의 당색은 약한 편에 속한다. 그래서 직전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도 일부 계승했고,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사실 애초부터 아이젠하워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영입하고자하는 거물급 인사였고, 공화당이 20년간 대통령자리를 뺏겨왔던 탓에 더 절박하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의 공화당은 신보수주의 운동을 거치면서 1950년대보다 보수화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와 안 맞는 점도 있다. 공화당에선 자기네들 역사가 길어서 그렇다고 때우고 있고, 반대로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호감도가 매우 높고 괜찮은 대통령 축에 속한다.

대한민국에 2번이나 방한하였으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한민국의 안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재임 기간 동안 행운도 따랐으며 특히 외교 분야가 그런 편이었다. 예를 들어서 임기 말년에 쿠바 혁명이 터졌는데, 그 대책 마련을 주문해놓고 퇴임해버려서 후임인 케네디에게 도착한 것이 피그만 침공 계획서와 노스우즈 작전 계획서였다. 피그만 침공이 케네디 집권 3개월차에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도 도미노 이론에 따라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휴전안의 조건이었던 남북베트남의 통합선거를 거부하게 하고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지원한 것이 아이젠하워 정부의 정책이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야 하고 군대 파견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남베트남의 상황은 미국이 발을 빼면 그대로 망할 판이라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부통령으로는 리처드 닉슨이 있었다.[13] 하지만 닉슨이 자신의 뒤를 이어 공화당 대표로 출마할 때 그에게 명확하게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이것이 닉슨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기도 했다.[14] 존 F. 케네디와의 대선에서의 득표 편차는 표 수로는 약 20만 표였으나 비율로는 고작 0.1%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명확한 지지를 표명했으면 닉슨이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후 다음 68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여기서도 0.7%차로 신승한다. 결국 닉슨은 재선을 위해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아이젠하워가 개인적으로 닉슨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도 닉슨이 항상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충실했음에도[15]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직접 닉슨을 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는 이 시기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력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5년에는 심각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뻔했고, 56년에는 크론병으로 인한 장 폐색으로 대수술을 받았으며, 57년에는 뇌졸중이 터져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고 이 때문에 금연했다. 다행히 금연을 하고 건강 관리를 받으면서 이전 시기보다는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이젠하워는 2번째 재임 기간 동안 몇 번씩이나 심장 마비를 겪었다. 이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가 맞붙던 시점에는 영부인이나 대통령 주치의 모두가 닉슨의 선거 운동을 돕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만약 아이젠하워가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도왔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닉슨도 "아이젠하워가 방문했다면 표심이 바뀌었을 주가 몇 곳은 되었을 것"이라는 회고를 하기도 했다.

반면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는 다르게 젊고 활동적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써먹었고,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매일 골프장이나 전전하는 퇴물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2.1. 문민통제 확립 및 군산복합체 견제와 대소련 군사 전략

아이젠하워는 먼저 느슨했던 문민통제를 확실하게 했다. 현역시절 보너스 군대 사건을 지켜보면서 폭주한 군부가 어떻게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군부와 산업계가 상호 의존하는 이른바,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다만,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처음 꺼내든 것은 아이젠하워가 아닌, 찰스 트레벌 영이었고 군산복합체란 단어를 연설문에 집어넣은 것도 대통령 연설문 작성가였던 랠프 윌리엄스와 맬컴 무스였다.

다만, 그의 군산복합체론은 군부와 산업계가 결합한 거대한 이익 집단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군수 산업계에 대해서 강력한 규제와 통제를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군산 복합체란 개념을 말한 영의 주장은 군수 산업을 국영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아이젠하워의 주장도 일부에서 제기하는 수상쩍은 악의 단체가 미국을 배후 조종한다는 식의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사예산을 삭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군산복합체 항목 참조.

그의 발언은 시대상을 읽을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전세계의 군수공장"[16] 역할을 한 미국이 전후에 대대적인 군축을 시행했고 한국 전쟁을 시작으로 50년대에 다시 군비를 키울 때였다.[17] 그러다 재임 후반기에 오면서 다시 군축을 해야할 시기가 다가왔고 이 때 나온 것이 퇴임사의 군산복합체론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기는 어떠한 가치 재생산도 하지 못한다. 단기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자국에 유리한 협정을 맺는다면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쓰이지 않는다면 고철로 폐기되기 마련이다. 제국주의 시대까지는 아편 전쟁을 비롯하여 단기간의 전쟁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지만, 양차 대전 이후로 세계 주요 국가들은 전쟁이 갖고 오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인식했고 국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전쟁의 규모가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다.

그래서 전쟁을 원치 않는 여론과 자칫 잘못하면 정권은 물론, 국가 위기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정치인들을 사로잡았고 결과적으로 냉전 기간 동안 열강들 간의 전면전은 없었다. 그래서 팔리지 않는 구형 잠수함면도기 회사에 고철용으로 팔아 치운 사례도 있을 정도로 군수 물자와 무기에 대한 수요가 떨어져 버렸다. 따라서 평시에 과도한 군사비 투입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다만 "어차피 전쟁 안 할 거면 국방비에 투자할 돈을 모두 그냥 민간 기업에 투자하면 기술 개발도 더 효과적인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보통 민간 기업은 회장 개인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상 단기간에 경제적인 성과가 확실하지 않은 기술에는 잘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지만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는 연구 개발 분야 정부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아직 군수 산업이 민간 산업에 기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첨단 과학 기술의 최초 수요자가 군수 산업이고, 그렇게 연구 인력을 유지하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키워 민간에 상용화된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식으로 군수 산업이 의도치 않게[18] 군수 산업이 과학 기술 발전의 마중물로써 작용한다거나, 전자파나 인터넷처럼 군수 산업에서 출발해서 민간 부문으로 확장된 사례도 많다.

그 예시로, 스페이스X같은 민간 로켓 개발 회사들이 그나마 NASA의 지원을 받아 위성 발사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반 세기 동안의 국가 주도의 연구 개발 "낭비", 엄청난 숫자의 대륙간 탄도탄과 그것을 관리, 발사, 유도하는 시스템을 생산하며 발전한 결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NASA의 천문학자와 다른 과학기술자가 한 일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바로 미국 서민의 "빵"이나 "달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달 탐사와 외행성 탐사를 위해 NASA가 얻은 예산 역시 냉전 시기 미소 경쟁과 군사 기술 개발 요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만약 미소간 경쟁이 없었다면 GPS 위성 발사는 훨씬 늦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상 기지국 기반의 위치 추적 시스템을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의 예산 수준으로 위성 기반 위치 추적 시스템은 지금도 힘들다. 한반도 인근에서 사용할 용도로 겨우 시동을 걸고 있는 정도고 그나마 이것이 더 미래가 아니라 요즘 예산을 얻은 것도 국군의 필요가 반영된 것이 크다.

이렇듯, 군산 복합체에 대해 견제하긴 했지만,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비를 대폭 증강해 소련을 견제했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소련 군사 전략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국경을 맞댄 우방국에 미군 군사 기지와 공군 기지를 건설하고 핵폭탄과 폭격기를 배치해 둔 다음, 소련이 서유럽 침공을 시작하면 핵으로 먼저 대응한다는 식의 대량 보복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아이젠하워는 서유럽 우방과 전세계 진보 세력들의 격렬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스페인 프랑코 정권과 수교를 맺고 그들을 지원하는 대가로 사라고사를 위시한 스페인의 주요 도시에 군사 기지와 공군 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선은 핵 만능주의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핵무기 의존으로 이어졌다. 이는 수백 만에 달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양적 열세를 갖고 있으니 핵으로 메우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판단과 소련에게 핵 투발 수단이 없다는 자신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이 미국 본토를 직접 핵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케네디 정권 시기부터 시작하는 핵 위기 상황은 소련의 ICBM로 촉발되었고, 미국은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정권 동안 미국은 절대적인 세계 초강대국이었고, 소련의 우주 항공 과학과 미사일 부문 발전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어 미국인들은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정권은 U-2로 소련 전역을 훤히 보고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못하고 스푸트니크 쇼크를 맞이했으나, 핵 위기에 대한 불안은 후임인 케네디 정권이 떠안아야 했다.

아이젠하워 정권 막바지에 있었던 대선 기간 동안, 민주당 대선 후보 케네디는 선거 운동 도중 소련의 핵 미사일 전력이 미국의 핵 미사일 전력보다 앞서 있다는 내용의 미사일 격차(Missile Gap) 이슈를 내세워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미국의 안보 태세가 약화되었다고 선전했는데,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소련의 거대한 핵 미사일 전력이라고 알려진 수치는 흐루쇼프가 공갈을 치기 위해 과장한 블러핑이었다.

실제 핵 미사일 전력은 미국이 크게 우세한 상황이었던 것. 그러나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국가 기밀들인 소련의 군사력이나 미국의 군사력을 밝힐 수도 없었던 관계로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

도리어 아이젠하워 정권은 터키를 비롯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에 공군 기지와 핵 전력을 배치하여 소련을 핵무기로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U2로 소련 전역을 훤히 내다 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밝힐 수가 없었고 아이젠하워와 백악관 수뇌부들은 선거 기간 동안, 매우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52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34,075,529 (55.18%, 442명) 당선 (1위) 초선
1956 미국 대통령 선거 35,579,180 (57.37%, 457명) 재선

5. 개인사

훗날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롤스로이스측에서 한 대를 의전 차량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아이젠하워는 "장군 시절에는 무시하더니 대통령이 되니까 아부떠는 거요?"라고 말하고는 롤스로이스와 상종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 하지만 사실 '2차 대전 말'의 아이젠하워는 단순한 4성 장군이 아니라 유럽 연합군 사령관에 5성 장군, 즉 원수로 진급한 상태였다. '일개' 군수품 납품 업체에 불과했던 롤스로이스 따위가 유럽의 해방자 아이젠하워를 저딴 식으로 건방지게 대했다가는 아마도 회사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실제로 영문 구글에서 아이젠하워와 롤스로이스를 연관시켜 검색해보면 저 일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롤스로이스 측에서 "우리 차로 천조국의 대통령을 모셨다!" 식으로 자랑하는 기사만 나온다. 실제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후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롤스로이스로 의전 퍼레이드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의 의전에 쓰인 롤스로이스는 기록사진으로 남겨서 롤스로이스 측에서도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하다못해 아이젠하워보다 사실상 계급이 아래였던 몽고메리 장군도 롤스로이스에서 제공해 준 1936년형 팬텀 모델을 사용했으며 이 차로 아이젠하워와 같이 타고 댕기던 일도 간간히 있었는데, 이 차의 경매 기록에는 "이 차량은 몽고메리 장군과 아이젠하워 각하를 모신 그 차량이다"라는 얘기가 빠짐없이 소개되고 있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1965년 윈스턴 처칠이 별세하자 그 장례식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시 다른 국가에서 대부분 국가 원수 수준의 인사들을 조문 사절로 보냈고, 아이젠하워도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인 전쟁 영웅+전직 미국 대통령, 그리고 무엇보다 2차 대전기 처칠과는 연합군 수뇌부로 동고동락했던 사이라 미국의 공식 조문사절로 파견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가 아닌 당시의 주영 미국 대사에게 조문 사절을 맡겼고, 그로 인해서 미국은 처칠의 장례식 당시 별다른 주목을 못 받았다. 이 때문에 존슨은 미국 국민들에게 상당한 눈치를 받아야 했다.* 워싱턴 D.C.의 백악관 바로 뒤에 있는 아이젠하워 행정청사(Eisenhower Executive Office Building)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명명했다. 건물 자체는 1888년에 설립한 건물로, 처음엔 국무부와 전쟁부(국방부), 해군부 등이 위치해 있었으나 이후 부서들이 대부분 다른 청사로 이전하고 현대에는 주로 부통령 및 백악관 직원의 사무실들이 위치해 있다. 모두 합치면 수천명에 달하는 백악관 직원들이 모두 백악관 건물 내에서 일할 수는 없으므로 이 아이젠하워 빌딩 및 신행정청사(New Executive Office Building) 건물에 분산해 있다.

6. 대중 매체에서

6.1. 영화

6.2. 만화/애니메이션

6.3. 소설

6.4. 게임

7. 기타

파일:$1 Eisenhower.png*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 1달러 주화에 얼굴이 새겨져 있기도 했으며, 해당 주화는 아이크 달러(Ike Dolla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유통용 주화는 니켈을 도금한 구리이고, 기념 주화는 구리에 은 도금을 하여 은의 비율이 4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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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경력 제2차 세계 대전 · 횃불 작전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노르망디 상륙작전
대통령 재임 리틀록 사건 · 머큐리 계획
외교 한미상호방위조약 · 미중상호방위조약 · 제네바 합의 · 신 미일안전보장조약
선거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스푸트니크 쇼크 · U-2 격추 사건 ·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1] 스위스미국인으로 원래 성의 철자는 Eisenhauer였으나, 발음만 똑같게 Eisenhower로 바꾸었다. 참고로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성을 Huber에서 Hoover로 바꾸었다. 이처럼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해외 독일어권에서 귀화한 가문 출신의 많은 미국인들이 가문의 성을 영어식으로 개칭했다.[2] 1917 ~ 1921. 성홍열로 요절했다.[3] 1922 ~ 2013. 6.25 전쟁 참전 용사로, 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4] 대통령 출마로 임시전역[5] 대통령 퇴임후 예비역 종신원수 복귀[6] 1944년 ~ 1945년에는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 공격에 대한 책임을 맡아 공격을 계획하고 감독했다.[7] 남서태평양지역군 총사령관은 자신의 옛 상관이자 10년 선배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8] 자세히 들어보면 취임 선서를 할 때는 정석적인 군인 발성을 쓰는 반면 연설을 할 때는 평범한 발성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9] 애칭이 아이크가 된 이유는 원래 태어났을 때 이름은 데이비드 드와이트였지만 데이비드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라서 혼동이 생겼다. 때문에 집안의 아들들은 전부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형인 에드거는 '큰 아이크', 드와이트는 '작은 아이크' 이런 식으로. 아이크는 성인 아이젠하워를 축약해서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드와이트만이 아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선 후보 당시 선거구호도 'I like Ike'였다. 꽤 적절한 언어유희를 사용한 셈.[10]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발생한 흑인 학생 등교 거부 사건에 아이젠하워는 연방군을 투입하여 막았으며, 당시 주 방위군과 연방군 사이에 심각한 수준의 긴장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이러한 결단으로 인해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 철폐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리틀록 사건은, 이후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인종들이 잘 융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11] 다만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모양으로, 그는 일기장에 상관인 맥아더 욕을 써놓기도 했다.[12]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0여 년만에 세계 대공황이 터진 것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공황을 기대한(?) 스탈린의 바람과는 반대였다. 다만, 집권 말기에는 일시적인 경기 불황에 시달렸는데 이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존 F. 케네디의 당선 요인 중 하나가 된다.[13] 사적으로는 아이젠하워의 손자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딸인 줄리에 닉슨이 결혼한 관계였다.[14] "부통령 닉슨이 8년 동안 어떤 주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면 아마 한 가지 쯤 기억이 나겠지요."라는 농담으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케네디 측에서 네거티브 선거 운동을 하면서 이 말을 써먹어서 닉슨에게 타격이 되었다.[15] 특히, 아이젠하워는 본인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닉슨을 민주당을 때리기 위한 "맹견" 역할로 자주 사용했다. 그래서 닉슨 행정부에서 부통령 시절 닉슨과 유사한 일을 한 스피로 애그뉴의 별명이 "닉슨의 닉슨" 이었다.[16] 총력전 중이어서 자동차 부품 회사, 가전 제품 회사, 타이어 회사까지 전차와 포탄,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했다. 그런 회사들이 생산 시설을 전용해 만든 물량이 전쟁 전부터 전투기, 전차를 생산한 군수 산업체들이 생산한 것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이 군수 기업들은 50년대 중반 이후, 점점 군수 사업을 접거나 다른 기업에 합병당하는 방식으로 소멸했다. 전쟁 때야 "우리 회사에 좋은 무기 있어요"하고 시연하면 채택해주었지만, 전시에 설립된 여러 군수 기업들이 입찰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야 했고, 두세 번 떨어지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17] 2차 세계 대전과 그에 뒤이은 한국 전쟁을 겪으며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군사 기술이 대폭 발전해서 기존의 군수 물자와 장비들이 모두 구식이 되어 버렸다. 그 예시로 2차 세계 대전 동안만 해도 항공대와 해군의 전투기는 프로펠러기 였으나 한국전쟁부턴 제트기가 등장하여 프로펠러기를 구식으로 만들었으며 해군의 전함 또한 태평양 전쟁 초기까지 해군의 가장 중요한 함종이었으나 항공모함의 등장으로 4년만에 현대 전투방식에 맞지 않은 함종으로 전락하였다.[18] 국방비에 예산을 많이 쓰고 싶어하는 정부는 없다. 이익이 아닌 리스크와 생산 단가가 늘어나는 걸 좋아하는 군수 회사도 없다.[19] 아이젠하워의 조상들이 종교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독일어식 철자인 Eisenhauer를 발음하기 편하도록 영어식으로 Eisenhower로 고친 것이다. 참고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조지아식 본명 주가시빌리도 '철사람', 즉 대장장이란 뜻이었으나 러시아식으로 바꾸면서 '강철인간' 스탈린이 된다.[20] 미국 대통령 아들이 백악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군생활하면 적성국의 납치나 암살 표적이 되기 딱 좋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2차세계 대전때도 연합군 사령관 아들이라고 본국에서 일부러 후방으로 뺐다. 정작 필리프 드골 제독아버지가 자유 프랑스 수반 시절일 때 그 위험한 해군 코만도 소대장으로 근무했고,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해군 항공대조종사, 호위함 함장 등을 지내며 최일선에서 근무한 덕에 프랑스 해군 대장까지 이르렀다.[21] 비서였던 케이는 회고록에 아이크와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있기는 한데 고령이라 아이크와 활발한 성관계는 갖지 못하였다고 밝혔다[22] 로버트 듀발과 리 리믹(Lee Remick)이 두 주인공으로 열연하였다.[23] 두 사람의 출연 빈도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24] 제2차 세계 대전동안 아이젠하워의 상관이자 전우였고, 아이젠하워가 평생 존경했던 인물이다.[25] 비슷한 일화를 후임자인 JFK도 남긴 적이 있는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의회 수뇌부와 언론, 군부가 다같이 케네디의 (공습 대신 선택한) 봉쇄정책이 너무 유약하다고 비판하자, “대통령 자리 하고 싶은 놈 있으면 가져가라고 해, 전혀 안달가운 자리니까.”라고 말한적이 있었다.[26] 일단 그 당시에 롤스로이스 차량을 구매하려면, 보유한 총 자산도 아닌 '유동 자산'이 최소 3,000만 달러(한화 약 330억 원)가 넘어가야 했다. 쉽게 말해 롤스로이스를 소유하려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와 자산이 필요했다는 소리다. 게다가 자격 요건에 부합하더라도 시원찮은 지도자나 고위층들,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 철권 통치를 한 독재자들에게는 판매를 불허했다. 이렇게 까다롭게 판매를 거부하다 보니 이런 썰들까지 생겨 회사에 역으로 먹칠을 하기도 했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이 롤스로이스를 대한민국 국가원수 의전차로 도입하려고 문의하였으나 거절당해서 캐딜락을 의전차로 썼는데 그 후 이기붕IOC 위원으로 위촉되자마자 롤스로이스에서 의전차를 제공하겠다고 바로 연락이 와서 이기붕이 아주 난감해했다는 설도 있으며(자칫 잘못했으면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더 좋은 차를 탈 뻔한 셈),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려고 했을 때 우리 차는 딴따라들 타라고 있는 차가 아니라고 하며 거절했다가 정작 똑같이 딴따라짓 하면서 돈 벌던 비틀즈존 레논에게는 가장 먼저 차를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 설들은 모두 부풀려진 것으로 엘비스와 존 레논 모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여 인증샷을 남겼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애초에 아이젠하워에게 한미 수교 기념으로 캐딜락 플리트우드 방탄의전차를 제공받았기에 롤스로이스에 대해 관심도 주지 않았다. 다만 존 레논은 롤스로이스 사의 행보에 불만을 품어 작은(?)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존 레논 항목 참조.[27] 비록 한 명(테디 루스벨트)은 밀랍인형으로서였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 대통령 두 명을 맡게 되었다.[28] 보통 코믹한 연기자로만 기억할 로빈 윌리엄스의 드문 정극 연기 캐릭터이기도 하다. 한국 명화극장에서는 로빈 윌리엄스의 전담 성우 배한성이 더빙을 했다.[29]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1선급 동맹국에도![30] 다만 1943 정복에서는 기본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31] 2차대전기 1차대전에서 출세하고 구식 전술을 버리기를 거부한 원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는 원수가 4명이나 있는데도 죄다 쓰레기이다.[32] 이 시기 북한의 국가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김두봉에서 최용건으로 바뀌었다(1957년). 다만 당시 북한의원내각제였기 때문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지닌 '국가원수'직은 사실상 형식적인 지위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는 수상이었던 김일성이었다. 북한이 의원내각제에서 전제군주제가 된 것은 김일성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한 시점부터이다.[33] 당시 매카시 의원은 미국을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미명 하에 '묻지 마 여론몰이'식 매카시즘 색깔론 광풍을 주도하다 온갖 허위와 날조, 과장이 밝혀져 각계에서 역풍을 맞은 상황이었다. 여론의 역풍으로 자신이 궁지에 몰리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 이전까지 인생을 바쳤던 군대에 색깔론을 들이대고, 군 현대화 전략을 설계해 존경을 받았던 조지 마셜 국방장관까지 비난하는 등 막장 행보를 보였다.[34] 이 일화는 도널드 트럼프을 세우면서 다시 회자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