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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5:31:25

재커리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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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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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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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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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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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탈 샤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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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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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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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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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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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
파일:Zachary Taylor.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84년 11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바버스빌
사망 1850년 7월 9일 (향년 65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기간 제12대 대통령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서명 파일:재커리 테일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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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리처드 테일러
어머니 사라 테일러
배우자 마가렛 테일러
자녀 앤 매컬 테일러
사라 녹스 테일러
옥타비아 판닐 테일러
메리 스미스 테일러
메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블리스 테일러
리처드 "딕" 테일러
학력 해당사항 없음
종교 성공회
신장 173cm[1]
소속 정당 [[휘그당|
휘그당
]]
문장 파일:Crest_of_Zachary_Taylor.png
군사 경력
복무 미합중국 육군
1808년 ~ 1849년
최종 계급 소장 (미합중국 육군)
참전 미영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achary_Taylor_by_Joseph_Henry_Bush,_c1848.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2]

1. 개요2. 생애
2.1. 군인으로서2.2. 대통령 테일러2.3. 사망
3. 일화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12대 대통령.

미영전쟁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함께 인디애나를 원주민들의 공격에서 지켜냈고 막바지인 1814년에는 존슨 요새를 점령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던 명장이다. 대통령이 된 후 얼마 가지 않아 체리를 과식해서 사망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테쿰세의 저주 대상자가 아님에도 임기 중 사망한 대통령이다.

2. 생애

2.1. 군인으로서

1784년 버지니아 주의 부유한 농장주 리처드 테일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후 민병대에 들어갔던 적이 있던 그는 교육을 마치고[3] 정식으로 미합중국 육군에 들어가게 된다.

입대하고 터진 첫 전쟁인 미영전쟁에서 윌리엄 해리슨과 함께 인디애나테쿰세의 원주민들의 공격에서 지켜냈고 막바지인 1814년에는 존슨 요새를 점령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차근차근 승진을 하면서 군인으로서 지내던 그에게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의 밀명이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국경을 넘어서 멕시코군을 도발하라!"는 내용이었고 그는 그대로 했다. 이렇게 해서 터진 전쟁이 바로 미국-멕시코 전쟁. 이 전쟁에서도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멕시코군을 격파하며 승장이 될 수 있었다.

2.2. 대통령 테일러

휘그당원 대다수는 전쟁에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의 인기를 높이 산 휘그당에서는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어쨌건 마틴 밴 뷰런이 경선에서 자꾸 미끄러지자 독자 출마하여 민주당이 분열된 틈을 타 손쉽게 당선되었다.

그의 취임식은 원래 일요일인데 테일러가 자신은 기독교인이어서 죽어도 일요일에는 취임 선서를 못하겠다며 거부해 결국 하루 뒤인 3월 5일에 취임 선서를 한다. 이렇게 되니 3월 4일 24시간 동안 미합중국 대통령직 자체가 아예 공석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겨, 임시방편으로 전임자 제임스 K. 포크에게 임기를 하루 연장해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포크도 자기 임기는 철저히 지키겠다고 거부해 결국 상원 임시의장[4]이었던 데이비드 라이스 애치슨이 24시간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되었다.[5]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전임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된 시점에서 테일러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가진다고 말한다. 하여튼 애치슨의 묘지에는 미국의 하루 대통령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그는 정치를 해본 적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무골이었고 그간 1848년 이전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나타내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어떤 대통령이 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선 출마가 기정사실이 되자 정치적 신념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기본적으로 군 출신답게 내셔널리스트였고, 주의 주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미합중국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깨져서는 안된다는 연방파였다.

비록 경제적으로 휘그당이 원했던 국가의 기반 시설 확충, 보호무역은 반대했으나, 정치적으로 대통령은 헌법에 관련되지 않는 이상 거부권을 사용하면 안 되고 의회에 맡겨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으므로 휘그당에서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게 된다. 추대될 때도 휘그당 전당대회에서 대놓고 "비록 휘그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무소속처럼 행동할 것이며 휘그당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휘그당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 공개적으로 휘그당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 침묵했지만, 사적으로는 대놓고 반대를 함으로써 자주 휘그당과 충돌했다.

테일러는 남부 버지니아 주 출신이었고, 노예를 부렸던 지주집안의 아들이기 때문에 남부 유권자들은 그가 노예제 확대 찬성파일거라고 착각했지만, 사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노예제 확대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해 남부인들의 배신감을 샀다.[6] 그는 취임 후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준주에 사절을 보냈고, 이 중 캘리포니아가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자유주로 받아들여지면서 자유주가 노예주보다 하나 많아지는 일이 일어났다. 북부 휘그당원이자 노예제 폐지론자 윌리엄 H. 수어드는 테일러의 주요 조언자가 되었고, 테일러는 노예제 확대를 반대하는 자유토지당을 자신과 휘그당 지지로 끌어들이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남부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는데, 남부는 캘리포니아 및 새로 편입된 영토와 주가 노예제를 합법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고 싶어했기 때문이다.서부 신개척지에는 남부인들보다는 북부인들이 주로 진출했기에 노예제에 반대하는 성향이 강했다.[7] 본인 역시 남부 출신이자 노예 소유주라서 남부가 노예제를 유지할 권리를 당연히 존중했다.[8] 그러나 이런 행동이 남부에서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졌고, 점점 남부 출신 정치인들이 미국을 갈라 독립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자 이에 헨리 클레이 등이 남부를 달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제시한 1850년의 타협안이다.

테일러는 클레이의 타협안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캘리포니아는 물론 뉴멕시코까지도 자유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등 북부 휘그당과 비슷한 입장을 가졌으며, 만약 정말 남부가 독립할 경우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반역자놈들은 다 목매달아 주겠다고 강하게 나갔다.[9]

참고로 한국사 시점으론 이 사람 때에 조선왕조의 헌종철종 무렵이다.

2.3. 사망

이 타협안을 놓고 의회에서 옥신각신하던 중 독립기념일날 테일러는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하필 그 날은 몹시 더운 날이었는데 상한 체리우유를 과식했다가 위장염이 나버렸고 그리고 5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테일러의 사후 남부에 유화적인 밀러드 필모어가 대통령이 되면서 뉴멕시코의 주 승격을 포기하는 등 양보가 일어났고, 타협안은 스티븐 A. 더글러스의 손질을 거쳐 겨우 통과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미국에서 독살설이 도는 대표적 대통령이다. 거기다 테일러가 타협안에 반대하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하도 소문이 끊이지 않자 사후 141년후 1991년 유해를 부검했다. 결과는 자연사였다. 그럼에도 이 떡밥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강직한 성품에 추진력을 갖추기는 했지만, 오래 살았다면 앤드류 잭슨 2기 정도 되었을 것이다. 본인도 남부 출신에 노예 소유주라 북부의 노예제를 없애자는 주장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군 출신에 열렬한 연방주의자였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을 계속했다면 임기 내에는 적어도 링컨 시절같은 피비린내나는 내전은 없었을 것이라는게 중평이다. 그러나 앤드류 잭슨이 예견했던 것처럼 노예 문제는 구실에 불과했고, 어쨌든 분리독립하고 싶어했던 남부가 언젠가 독립할 것이라는 건 예견된 바였기 때문에 시기만 늦춰졌지 남북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음모론이 나왔던 것이고.

이렇게 휘그당의 두 대통령이 모두 군인 출신으로 취임 직후 병사하면서 휘그당은 빠르게 몰락하고 민주당이 다시 8년간 대통령을 배출하게 되며, 결국 링컨 때 휘그당은 공화당으로 재창당되게 된다.

그리고 테일러가 상한 우유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이 2022학년도 수능특강 영어에 실려있다.

3. 일화

평생 군인으로 지낸 것 때문이었는지 죽는 순간에도 제법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I have always done my duty, I am ready to die. My only regret is for the friends I leave behind me."
"나는 항상 내 의무에 충실했으며,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게 걱정이 하나 있다면 내가 떠난 후 남을 친구들이다."

인상이 무섭게 생겼다는 평을 듣지만 대인배적인 성격에 잘 웃기도 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전쟁 등으로 명성을 높여서 얻은 별명은 "Old Rough and Ready(거칠고 노련한 준비된 지휘관)."

후일 아메리카 연합국 대통령이 된 제퍼슨 데이비스의 장인이었다. 항목 참조.

한 번은 미합중국 해군 사령관인 데이비드 코너 제독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코너 제독은 테일러와는 달리 복장에 대해 상당히 엄격한 군인이었다. 그래서 테일러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모처럼 군복을 FM대로 입고 코너 제독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막상 코너 제독을 만나자 테일러는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코너가 테일러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가벼운 사복 차림으로 테일러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참을 멍때리고 있다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서로에게 사과를 했다고.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당시 의사당에 있던 그의 흉상에 핏자국이 묻었다. 다른 흉상에도 핏자국이나 총탄 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그가 유일하다.


[1] 미영전쟁 당시 함께한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같다. 대통령 임기 도중 죽은 것도 같다.[2] 초상화에서는 주로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정작 군인 시절에는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병영에서 군복을 입는 것을 싫어했고 사복 상태로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 일화를 들면 테일러의 부대에 새로 부임한 신임 육군 장교가 늙은 촌부의 모습으로 술을 먹고 있는 테일러를 알아보지 못하고 테일러에게 "요즘 인디언들 때문에 고생이 많지? 내가 다 무찔러 줄게"라고 떠벌렸는데 테일러는 그 장교의 장단을 맞춰주며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습죠"라고 응수했다. 다음날 그 장교가 지휘관에게 인사를 하러 지휘관실을 찾아오자 군복을 입고 있던 테일러를 보고 깜짝 놀라 데꿀멍하며 사죄했지만, 테일러는 웃으면서 "처음 보는 사람을 옷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네. 친구"라고 충고를 해 주고 넘어갔다고 한다.[3] 당시 그가 살던 곳은 켄터키와 인접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직 학교가 없었기에 그는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4] 정식 명칭이 상원의장이 아니라 상원 임시의장이다. 미국은 명목상 부통령이 상원의장도 겸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통령은 캐스팅 보트만 할 뿐 평상시에는 상원의장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아 실질적인 상원의장을 따로 뽑고, 그 상원의장은 명목상 임시의장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 하원의장이 상원 임시의장보다 승계 서열이 앞서는 지금과 달리 이 시절에는 하원의장보다 상원 임시의장의 승계 서열이 더 높았다.[5] 애치슨은 자다가 판사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었고 그 판사는 애치슨에게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해달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캘빈 쿨리지와 함께 잠자다가 대통령이 된 사람 중 한명으로 소개된다. 한편 다른 일화에 따르면 애치슨이 평소 과로에 시달려 3월 4일 일요일 하룻동안 쭉 자고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일일 대통령으로 취임선서나 권한 행사 등을 해봐야 혼란만 빚어질 것이기에, 그의 처신은 꽤 현명했던 고도의 노림수였을지도 모른다.[6] 테일러 이후 대통령이 된 필모어, 피어스, 뷰캐넌 반대로 북부 출신임에도 노예제 문제는 각 주의 문제로 보는 견해를 표명해 남부에 유화적이어서, 북부의 불만을 샀다. 대통령이 되려면 어느 정도는 전국적으로 표를 받을 필요가 있고 또, 연방의 분열을 저지할 책임도 있으니 가급적이면 반대파에게도 유화적인 게 낫긴 하다. 노예제를 폐지한 링컨도 개인적 신념은 언제나 노예제 반대였으나 미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명백히 노예제 폐지를 입에 담은 것은 남북전쟁이 벌어진 후였다. 미국 정치사에서 볼 때 반대파를 대놓고 적대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상당히 특이한 사례이다.[7] 남부 입장에서는 1820년의 '미주리 타협'과 비슷한 원칙을 적용한다면 캘리포니아 등 멕시코로부터 새로 편입된 영토 상당 부분은 마땅히 남부가 원하는대로 노예제가 합법화되어야 했고 전임자인 포크가 북부로부터 비난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당시 노예제는 확대되지 않으면 언젠가 도태될 상황이었고 북부 온건 노예제 반대파들의 노림수도 비슷했다. 물론 북부 노예제 반대파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는데, 미주리 타협은 미국-멕시코 전쟁으로부터 획득한 영토가 아닌 루이지애나 구입 영토에 적용되는 것이었고, 정작 남부인들은 루이지애나 구입령이자 미주리 타협 경계선 이북인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꼼수를 쓰면서 북부인들의 반감을 샀다.[8] 당시 이런 경향은 상당히 흔한 것이었다. 당장 토머스 제퍼슨만 봐도 그렇다. 정계에서도 당장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소리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특히 연방파 성향이라면 노예제 문제를 건드렸다가 남부가 연방탈퇴 얘기 꺼낼까봐 더 그러했다.[9] 앤드류 잭슨과 비슷한 성향인데, 앤드류 잭슨 역시 남부 주들에게 동정적이었으나, 자꾸 찡찡대면서 독립하려고 하는 주들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테일러의 후임인 필모어도 마찬가지로 북부 출신으로서 남부에 편을 들어줬는데도 사우스 캐롤라이나(남부연합의 첫번째 주가 된 주이기도 하다)가 연방을 탈퇴할 기미를 보이자 그러면 군사조치로 답하겠다고 함으로써 찍어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