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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 |
<colbgcolor=#00518f><colcolor=#ffffff> 미합중국 제9대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Ernest King | |||
본명 | 어니스트 조셉 킹 Ernest Joseph King | ||
출생 | 1878년 11월 23일 | ||
오하이오주 로레인 | |||
사망 | 1956년 6월 25일 (향년 77세) | ||
메인주 키터리 | |||
묘소 | 미국해군사관학교 묘지 | ||
재임기간 | 제16대 함대 사령관[1] | ||
1941년 12월 ~ 1945년 10월 | |||
제9대 해군참모총장 | |||
1942년 3월 ~ 1945년 12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518f><colcolor=#ffffff>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
1905년 ~ 1956년 | |||
최종 계급 | 원수 (미합중국 해군) | ||
주요 참전 | 미국-스페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 ||
주요 서훈 | 해군 십자장 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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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당시 미합중국 함대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이었다.[2]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홀시, 윌리엄 리히와 더불어 미 해군에서 단 4명만 배출된 원수 중 한 명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1901년을 군 경력의 시작으로 볼 경우, 자그마치 55년을 미합중국 해군으로 복무한 것으로, 미합중국 해군에서 킹 원수만큼 장기간 복무한 군인은 별로 없다.[3]2. 일생
그의 부친은 아일랜드계 이민자였다. 외조부는 영국의 선박공으로 일하기도 했고 그의 부친은 한때 이리 호에서 뱃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고등학교에 가는 게 고작이었고 가정 형편상 1897년에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재학 중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에 지원해 순양함 샌프란시스코에서 근무한다. 1901년에 졸업할 당시 67명 중 4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소위 후보생[4]이 된 이후 전함 일리노이에서 근무하나 부장과의 다툼으로 인해 순양함 신시내티로 옮겨간다.[5]전간기에는 파일럿 자격을 취득한 후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으로 근무한다. 근무 시기에 대일 전략을 검토하는 과제에 "적 오렌지[6]는 미국을 불리한 대외전으로 이끌어서 타격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오렌지는 필리핀, 나아가서 하와이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으며 미국은 오렌지와의 싸움에서 몹시 불리한 수단과 방법밖에 주어지지 않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예측해야 한다"라고 써냈는데,[7] 이는 그의 일본 여행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후 일본과의 전쟁은 저때의 예상과 아주 비슷하게 흘러갔다.
1933년엔 소장으로 진급, 1938년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39년에는 장관회의의 멤버가 된다. 원래는 퇴역을 기다릴 지위였지만 찰즈 에디슨 해군장관의 미합중국 함대 관열의 수행원이 되었을 때 함정의 대공포 대책을 명받았고 통상 3년이 걸릴 일을 겨우 3개월만에 끝낸 데서 칼 빈슨 미국 하원의원의 눈에 들게 된다. 1940년 7월에 양양함대법이 성립되어 대서양 함대가 발족하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대서양함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1941년엔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그 보고를 한 부관에게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941년 12월 16일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의 지명을 받아 미합중국 함대 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다. 이 때,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세가지 조건을 요청하였다. 첫번째는 함대 사령관 직의 약칭 변경,[8] 두번째 조건은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회에 불려나가 증언 등을 하지 않게 해줄 것'이었고 마지막 세번째는 '독립적인 봉건 영주 수준으로 해군 전반에 대한 권한을 줄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그대로 승인했고 마지막도 법률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킹에게 협조하지 않는 자는 즉시 잘릴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렇게 킹은 미 해군 사상 최대의 권한을 휘두르게 된다.
이후 태평양 전쟁 동안 미 해군을 지휘하게 된다. 과달카날 전역 이후에는 태평양의 주요 거점들만 돌파한 이후 대만을 점령해 해상 보급로를 끊은 뒤, 일본 본토로 진격하자는 의견을 내세워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대립하기도 한다. 꼭 이 문제가 아니어도 원래 불같은 성격이라 맥아더와는 상극이었고 이 둘을 중재하느라 니미츠가 고생할 수 밖에 없었다.[9]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45년 12월 15일엔 자신의 자리를 체스터 니미츠에게 넘기고 은퇴 생활을 보내다 47년 뇌출혈이 발생해 병원에 입원한 이후 일어나지 못한다. 결국 56년 6월 26일 77세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3. 평가
최악의 성격을 가진 최고의 사령관으로, 능력으로만 본다면 아주 우수한 제독이다. 잠수함, 수상함, 항공모함 근무는 물론 지휘관, 참모, 행정 업무 분야까지 다방면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졌음은 물론 전략적 안목과 그것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격화되고 과달카날 전투에 접어들자 대부분의 수상함 병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해 대서양에 많은 신경을 쓰던 조지 C.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언짢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동안 미군은 태평양을 안정화시켜 한숨 돌릴 수 있었고, 가장 위험한 시기를 넘긴 미군은 더욱 가열차게 스팀 롤러를 돌려 연합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가난한 집안에도 불구하고 만렙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도 평가할 수 있다.하지만 인격적인 면에서는 아주 평가가 극악이었는데, 고집불통에 말투도 영 좋지 않고 성격이 까다롭기까지 했다. 다른 제독들에 비해 웃는 얼굴이 나온 사진도 굉장히 적다. 오죽하면 "패튼과 그를 같은 방에 넣어 둔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냥 두면 대화하다가 패튼이 화가 나서 그를 때려 죽일 것이고 칸막이를 설치하면 패튼이 제 화를 못 이기고 자살할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이다.[10]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했고 본인 역시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싫어했다.
일본 본토 공습을 하던 커티스 르메이의 제21폭격기사령부를 빼내어 일본 근해에 기뢰를 살포할 때도 르메이를 중심으로 육군 항공대에서 징징대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사령관까지 불만을 표했지만 킹 제독은 이들의 투정에 대해 타협이나 설득 같은 거 없이 "그럼 해군 없이 싸워 보시던지."라며 배째라는 태도를 관철하여 육군 항공대를 당황케 했다. 결과론적으로 이는 가장 가성비가 우수한 작전이었지만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꼽힌다.
게다가 툭하면 마셜과 마찰하곤 했다. 물론 마셜은 과묵하고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이었기에 킹과 직접적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유럽을 주목한 마셜의 전략과 태평양을 중시한 킹의 전략은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고사령관 참모장[11] 윌리엄 리히는 각군의 최고 지휘관이던 마셜과 킹, 아놀드를 조율하는 데 있어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다만 서로의 능력 자체는 인정했는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셜과 아이젠하워의 보직을 서로 맞바꾸는 걸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을 때[12] 킹은 합참의 다른 구성원인 리히 제독, 아놀드 장군과 함께 뜯어 말렸다고 한다. 결국 리히 / 킹 / 아놀드의 충고와 아이젠하워,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셜 본인과 면담[13]을 끝낸 루즈벨트는 마셜과 아이젠하워의 보직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한다.[14]
연합원정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도 자신의 일기에 킹 제독에 대해 "정신적 깡패(mental bully)", "누가 킹을 쏴버리면 전쟁을 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적어놓을 정도로 그의 성격을 마땅치 않아했다. 아이젠하워의 일기에 따르면, 아놀드 장군이 작전에 관계된 편지를 킹 제독에게 보냈지만 킹 제독이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반송한 일이 있었다. 이유인즉, 아놀드 장군의 보좌관이 편지 수신인을 '어니스트 킹 해군 소장(Rear Admiral)'이라고 잘못 썼기 때문이었다. 킹 제독은 편지를 돌려보내면서 수신인란의 '소(Rear)'라는 어절에 화살표를 큼지막하게 쳐두고 '반송사유(THUS:)'라고 덧붙여 놨다. 즉, '대장(Admiral)'을 '소장(Rear Admiral)'로 격하시킨 것에 대한 항의로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반송한 것이다. 이 일화를 일기에 쓴 아이젠하워 장군은 "내가 이유없이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걸 보이려고 일화를 남긴다"고 덧붙였다. 물론 타군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쓰면서 계급을 2단계나 까버렸으니 평범한 장병이 썼다면 엄청나게 쪼여도 할 말 없는 대형사고이고, 아놀드 장군의 보좌관도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 본인도 이게 잘못된 거라는 것은 같이 적어놨다. 하지만 일단 편지는 읽고 답장을 보내면서 이 점을 지적하거나 해도 되는 걸 굳이 읽지도 않고 반송해버린 것은 킹의 깐깐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진급 이력
5. 기타
- 미군 역사상 최대의 권력을 가졌던 군인이었던 정말 왕(King) 같은 인물이다. 아주 작은 규모의 군대라면 몰라도 문민통제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민주국가의 군대에서 군정권과 군령권을 한 사람이 겸임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평시에도 그런데 하물며 저때는 전시인 데다 당시 미 해군은 전시 군대 규모의 팽창으로 병력만 해도 최대 400만 명이 넘게 증가한다. 일선 전역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같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같은 합참의 구성원이자 육군참모총장이던 조지 C. 마셜이나 공군참모총장이던 헨리 아놀드,[15] 심지어 선배 제독이자 합동참모의장이던[16] 윌리엄 리히조차도 킹만큼의 권력은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킹은 성격까지 격렬해서 마셜이나 아놀드와는 수시로 충돌했고, 수하 제독이던 체스터 니미츠나 윌리엄 홀시 같은 고위 장성들도 킹의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였다. 미국이 군사독재 국가라도 되지 않는 한 저 정도 권력을 가진 군인이 다시 나올 가능성은 없을 듯하다. 항목 작성은 전선 사령관이던 체스터 니미츠나 그 휘하 함대 사령관들이던 윌리엄 홀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같은 수하 제독들보다도 늦었지만 실제로는 미 해군의 최종 보스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인물이었다.[17]
- 위에서 나왔듯이 그는 일본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가 탄 함선인 신시내티가 일본에 입항했을 때 가마쿠라 대불을 보기 위해 가마쿠라로 가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표를 후불로 사려고 했으나 역무원은 그에게 굉장히 불친절하게 대했고, 그날 이후로 그는 일본에 상당히 나쁜 인상을 품게 되었다. 그가 일본 본토 공격에 찬성하자 니미츠 제독은 "40년 전에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셨나 보군."이라고 생각했다고. 물론 킹 제독은 이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예견한 만큼 그저 감정만 가지고 일본 본토 공격을 찬성할 사람은 아니다.
- 비록 건방진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남들의 능력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을 평가하길 "난 미 해군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스프루언스만 빼고."라는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 또한 대서양의 대 독일 잠수함 전략을 두고 영국 해군의 서부 해역 사령관 해군대장 맥스 K. 호턴 제독과 갈등하였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대 잠수함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그의 전략을 수용했다고 한다. 호턴 경은 1942년 11월 중엽부터 영국의 대잠 부대를 맡아 근해 접근로 방위, 원양 초계, 호송선단 작전 등을 총괄했다. 이에 대해 독일 해군 총사령관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은 "호턴 제독의 지휘 하에 영국 대잠 부대는 재료나 기술적인 면은 물론 전술과 정신적인 분야에서도 대단한 향상을 이루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독일 U보트 부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영국의 유명한 해전사가인 스테판 W. 로스킬 대령 또한 "과감한 결단력과 풍부한 식견으로, 호턴 경은 의심할 바 없이 되니츠 제독의 온당한 경쟁자가 되었다." 라는 평가를 남겼다.
-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고 상식적인 사람이기도 해서 비효율적인 무기들의 개선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어뢰에 문제가 있다며 함장들과 개발진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그는 함장들의 손을 들어 주었고, 분석 결과 개발진들이 어뢰값 아깝다고 폭약 대신 물을 채워 실험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18] 또한 한때 미국에서 '박쥐 폭탄' 같은 걸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소이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병기로 계획 자체가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원자탄도 완성된 마당에 그런 걸 더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여겨졌고 이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킹 제독은 즉시 그 계획을 중단시켰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킹으로 패러디하였다. 만화 특성상 태평양 방면의 다른 제독들처럼 비중이 매우 낮다. 고추병신의 플레처급 구축함 포터 만화에서도 킹으로 패러디되었다. 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 중에서는 저 킹이 제일 유명하다보니 저 외에도 국내 창작물에서 재규어 두건을 쓴 모습이 은근히 자주 보인다.
-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에 렉싱턴 함을 매우 아꼈고,[19] 그러다보니 1942년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을 지휘한 프랭크 플레처가 렉싱턴 함을 잃고 말자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플레처 제독이 뛰어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직만 전전하며 만년 중장에 머무르게 된 것도 이 때 킹의 눈 밖에 난 때문이라는 썰도 있다. 물론 해당 항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는 플레처 제독의 전장에서의 불운과, 항공모함의 전략적 가치가 급등하면서 항공 병과 출신 장교들의 입지가 초월적으로 높아진 전시 상황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킹이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이기로서니 개인적 감정만으로 인재를 썩힐 사람은 아니었다.[20]
- 킹 제독은 전쟁 중 기존의 CPO 이상 해군 장병들의 근무복 겸 하약정복인 카키색 군복을 검은색 부착물이 들어간 청회색 군복으로 바꾸어 피복비를 절감하려고 했다. 해군 내에서는 적십자 직원 제복이냐고 깔 만큼 인기가 없었고, 이들의 의사를 반영해 니미츠 제독은 기존의 카키 정복이 보다 해군스럽고 열대 환경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킹 제독은 회색 정복을 입고 카키 정복을 입은 니미츠 제독과 함께 기자들 앞에 나왔는데, 한 사진사가 킹 제독에게, "이봐요 거기 상사? 니미츠 제독 가리지 말고 좀 비켜요! 제독님 사진 좀 찍게!"라고 말해 킹 제독을 토라지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비가 오는 중이라 두 제독 모두 정복 위에 레인코트를 걸쳤는데, 여기엔 계급장을 달지 않게 되어 있어 정모 챙에 새겨진 잎사귀 자수와 모표, 턱끈 재질만으로 신분(CPO/준사관 및 위관/영관/장관급 장교)만 확인할 수 있었고, 회색 정모는 단가 절감한답시고 챙의 자수를 생략하고 턱끈을 CPO용 검은색을 달았기 때문에 이를 보고 사진사가 착각했던 것이다. 이 굴욕 이후 킹 스스로도 회색 정복을 점점 멀리했고, 1948년부터는 회색 정복이 아예 폐지됐다.
- 윈스턴 처칠과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는데,[21] 태평양 전선이 한참 격화되어 대서양 함대 대부분을 태평양으로 차출하자 유보트에 의한 피해가 극심해졌고,[22] 이에 처칠은 "킹이 영국을 말아먹는다!"며 킹 제독을 비난했다.[23] 그리고 2년 후 전황이 나아지자 처칠이 자존심을 회복하고 인도양에서 희대의 굴욕을 선사한 일본에게 복수할 겸 인도양 함대를 태평양에 투입하려고 했지만 킹 제독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려 하는 영국의 선택을 매우 반대했다. 사실 그 때문만도 아니고 당시 영국이 파견할 함대의 보급능력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수준이기도 했으며 니미츠 제독도 그것을 우려하여 영국측에 캐묻기도 했다. 그러나 처칠은 직접 루즈벨트에게 직접 함대 파견제안의 수용을 다짐받았고 영국 해군 태평양 함대가 신설되어 전개됐는데 그후에도 니미츠 제독이 영국 함대를 오키나와 전투에 기동부대로 참전시킨 것은 영국측이 보급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로 다짐한 뒤였다.[24] 그리고 사실 영국의 참여 요청을 탐탁치 않아 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국은 부족한 항공모함의 수로 인해 영국 동양함대에 항모 1척을 지원해주길 요청했는데 말레이 해전 등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은 인도까지 잃게 될까 두려워 딱 잘라 거절했다. 어려울 때는 매정하게 지원을 거절해놓고 이후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한 격이니 킹 제독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25]
- 의외로 군사적인 면에서 실수를 한 일이 있다. 영국은 미국에게 유보트에 대항하기 위해서 호송선단을 조직하고 호위함을 붙이는 방법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으나 꿋꿋하게 이를 거부하여 유보트들이 미국 동부 해안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킹은 유조선들이 대서양을 항해하는것을 중지시키고 유조선들을 항구로 밀어넣어버린다.[26] 다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있는게 당시 미 해군에서 대잠임무에 투입할 군함의 숫자가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영국이 없는 살림에도 쓸만한 대잠어선을 빌려줬다.[27] 참고로 영국은 전쟁 초반에 미국한테 구형 구축함을 50척 이상 얻어갔는데 나중에 미국이 급해지니 빌려주는게 어선. 물론 구축함을 얻는 대가로 카리브 해의 군항들을 넘겨줬으니 공짜로 받아간건 아니지만.
- 킹이 사망한 뒤 2차대전에서 같이 활동했던 어느 영국 제독이 킹의 딸에게 "아버님은 왜 항상 영국에 대해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하고 묻자 킹의 딸이 "아버지는 미국과 미 해군을 제외한 모든 것에 화를 내셨어요."라고 대답했다.[28]
- 얄타 회담 때 킹을 만난 소련 해군 대표 쿠즈네초프 제독은 당시 67세였던 킹의 첫인상을 '군살 없이 탄탄하고 키가 크며 바다 늑대[29]같았다.'라고 표현하며 평범한 노인같았던 영국의 커닝엄 제독과 대조했다. 얄타 때의 킹은 소련 태평양함대의 대일전선 참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45년 말에 나치가 항복하고 그 뒤에 일본이 항복할 거 같다."라고 말한 쿠즈네초프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 항복 이후 포츠담 회담 때 킹을 다시 만난 쿠즈네초프가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냐고 묻자 킹은 웃으면서 "늘 이런 식으로 예측이 틀렸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쿠즈네초프는 또한 "정치 외교 분야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든 우리 해군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진정한 우정을 쌓아갔다."라고 회고했는데, 포츠담에서 독일 함선 분할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렸을 때 킹이 "쿠즈네초프 제독은 해군 장관으로 우리 중 직급이 제일 높으니 그를 의장으로 추천한다."라고 하며 쿠즈네초프를 의장으로 추대한 것을 보면 실제로도 소련에 정치적인 감정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킹은 이날 회의가 길어지자 피로를 호소하며 "회의를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라고 하기도 했다.[30] 참고로 킹과 쿠즈네초프의 나이 차이는 26살이다.
- 커티스 르메이마저 능가하는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로, 미 해군의 전황에 대한 언론의 취재에 승패만 알려주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 자주 의견이 충돌했던 조지 C. 마셜과 달리, 태평양 전쟁 승전 후에는 해군 기록과 자서전 등의 저술 활동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는 킹이 전쟁이 끝나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점도 있었지만, 킹의 성격이 워낙에 정치에 부적합했던 이유도 크다. 해리 S. 트루먼은 킹의 성격을 껄끄러워 했고, 킹과 포레스털 해군 장관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 킹을 밀어줬던 루즈벨트조차 '매일 아침 토치버너로 면도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
- 미합중국 해군은 킹이 사망할 때 즈음해서 킹처럼 까다로운 성격과 뛰어난 능력을 동시에 갖춘 제독 덕분에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제독이 바로 하이먼 리코버다. 성질과 역량뿐만 아니라, 매우 긴 시간을 미 해군에서 복무한 것과 밀어주던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이 껄끄러워 했던 것까지 비슷하다.
- 직함이 Chief of Naval Operations(CNO)이고, 조직도 상 해군장관의 관할 하에 있다는 점 때문인지 다소 오래된 번역서에서는 저 명칭을 직역한 해군작전부장으로 번역되기도 했다.[31] 부장이라니 없어보이지만 참모총장이라 작전권이 없었던 육군참모총장과는 달리, 실제로 작전권을 가진 직책이었으니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32]
- 최악의 성격이라 혹평받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성 자체가 없지는 않았다. 전쟁중 진주만 공습으로 경질된 허즈번드 킴멜 제독의 장남이자 해군 잠수함 함장으로 종군 중이던 매닝 킴멜 소령[33]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보고받고, 역시 해군 잠수함 장교로 종군 중이던 킴멜의 차남 토마스 킴멜[34] 대위를 자신의 직권으로 후방 지상근무로 배치시켰다. 킴멜 대위는 전후까지 해군에 남아, 1968년 대령으로 퇴역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장에서만 까다로운 상사로, 나름대로 파티도 즐겼고, 다른 제독들의 부인들에게는 친절했다.
- 가족으로는 마사 에거튼과 결혼하여 1남 6녀를 두었으며, 아들 어니스트 킹 주니어도 미합중국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 타 자료를 인용한 영문위키에 따르면 킹은 아내와 더불어 성공회 교도였으며, 자식들도 성공회 방식으로 교육하였다. 그렇지만 가족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취미로 술, 도박을 즐겼으며, 바람둥이(womanizer) 기질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35]
[1] 최후의 함대 사령관이다.[2] 그보다 보직이 높았던 선배 제독 윌리엄 리히가 있지만, 그 양반은 대통령의 군사자문 역할을 맡는 합참의장의 전신인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이라서 논외.[3] 물론 미 해군이 세계 최강이 되는 데에 크게 일조한 이 노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이 노인의 복무기간은 무려 64년에 달한다.[4] 이 당시 미국에서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준사관 내지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1년 이상 복무하다 소위 임관 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소위가 될 수 있었다.[5] 신시내티에서 근무중에 목격한 것이 제물포 해전이다.[6] 일본 제국을 말한다. 이는 미국의 전간기 컬러코드 전쟁 계획에서 기인한 것인데, 미국은 각국에 색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전쟁 계획을 수립했다. 영국은 빨강, 독일은 검정, 자국인 미국은 파랑인 식이다. 참고로 영국이 왜 끼어 있나 싶을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영국 및 캐나다, 호주 등 식민지에 대한 전면적 공격 계획인 워 플랜 레드는 이 중에서도 가장 세심하게 계획되었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당시는 미국이 영국과 캐나다(전쟁 당시는 아직 영국 식민지였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지 불과 100여년이 지난 시점이고, 미국이 아메리카에서 패권을 잡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될 유럽 국가를 꼽는다면 단연 영국이었다. 다른 방해물인 스페인과는 근래에 미국-스페인 전쟁을 치른 바 있었다. 1974년 이 기밀이 해제되자 미영관계와 미국-캐나다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할 정도. 영국이 미국 대리인 비슷하게 된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7] 지금은 항공모함이 중심이 되는 항공전단이 해군의 핵심병기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까지 해군의 중심은 전함이었고, 항모는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거함거포주의가 종말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전쟁 초기 전함이 무력화된 미국이 항모로 일본을 역관광시키면서 항모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8] 당시 미합중국 함대 사령관(Commander in Chief of the U.S. Fleet)의 약자는 'CINCUS'였는데 이를 그대로 읽으면 'Sink us', 즉 "우리를 가라앉힘"과 똑같은 발음이 되어버려 이를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약칭은 'COMINCH'로 바뀌게 된다.[9]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전을 결정한 루스벨트가 참석한 진주만 회의에서 필리핀 루트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도중, "멍청한 정면공격은 평범한 지휘관만이 한다."라는 발언을 던졌다. 대만을 정면공격하자는 킹이나, 타라와 전투에서 닥돌했다가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홀랜드 스미스 등 해병대를 대놓고 깐 것. 심지어, 41년 바탄 반도 죽음의 행진도 해군이 무기력하게 먼저 전멸해서 그런거다라는 발언까지 했다. 이런 말 면전에서 하면 바로 멱살잡을만한 성깔의 킹은 그래서 진주만에 부르지도 않았는데, 킹 대신 듣고 있었던 니미츠 속이 어땠을지...[10] 실제로는 패튼과 킹의 성격을 이용해 패튼을 올려쳐 준 우스갯소리로, 킹은 조지 C. 마셜과 동급이었다. 패튼은 계급상 상관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영국군 원수와 대립했던 적이 있지만, 그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포함한 미 육군에서 패튼을 나름 지지했기 때문이다. 미군 입장에서 영국군은 중요한 동맹인 한편 전공 뺏어먹으려는 숟가락 든 약탈자이기도 했고, 이는 처칠이 대전 말기에 영국군 함대를 태평양으로 보내려 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미군 지휘부 입장에서는 맛난 공적 골라먹으려던 몽고메리를 제어할 인물이 필요하긴 했고, 패튼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패튼이 그 역할을 한 셈이다. 패튼이 킹에게 대들었다면 미 육군에서 그 편을 들어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커티스 르메이를 편들어주던 헨리 아놀드처럼 '해군 없이 잘 해보시든가.' 같은 소리를 들었을게 뻔하기 때문이다.[11] 알기 쉽게 말해 당시 합동참모의장이라고 보면 된다. 제복군인 중 최고봉이다.[12] 마셜은 계속해서 전선 지휘관으로 임명되길 원해 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런 마셜의 소원을 들어 주고자 했지만, 동시에 마셜이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속 자신을 보좌해 주길 바라기도 했다.[13] 마셜은 그 진중한 성격답게, 마셜 자신의 희망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14] 사실 당시 합동참모본부 자체를 제안하고 구성한 인물이 마셜이었기 때문에 마셜을 제외한다면 적임자가 없기도 했다. 42년 1월 23일 연합군 회의에서 영국군의 합동참모회의를 보고 42년 2월부터 합참 체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아직 육군 항공대의 헨리 아놀드를 구성원에 포함시켜 향후 공군의 발판을 놓았다.[15] 당시는 육군항공대사령관. 그러나 이때 이미 육군 항공대는 거의 육군과는 별도로 굴러가고 있었다.[16] 당시 명칭은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17] 사실 이 현상은 타군도 비슷한데, 육군의 조지 C. 마셜도 수하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등의 존재감에 묻혔고, 공군(당시 육군항공대)의 헨리 아놀드도 수하인 커티스 르메이에 비하면 인지도가 미미하다. 마셜, 킹, 아놀드 위에 있던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쯤 되면 전쟁사 계열에 갓 입문한 밀덕들은 아예 그 존재도 모를 정도.[18] 어뢰용 폭약인 Torpex의 밀도는 물의 1.6배이므로, 물 대신 폭약을 넣으면 어뢰가 실험 당시보다 무거워져서 발사시 예상 궤적보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실제로 불발이라고 생각되었던 어뢰의 상당수는 불발이 아니라 적 함선의 밑으로 쏙 빠져서 어이없이 빗나간 것이었다.[19] 사실 이건 킹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렉싱턴 자체가 미 해군 최초의 본격적인 항모라는 역사적 가치가 큰 함정이었는데다가, 순양전함으로 건조 중이던 함체를 개조한 배이다보니 세장비가 큰 길쭉하고 아름다운 외형을 지녀 미 해군 내 많은 렉싱턴빠들을 양산하곤 했다.[20] 스프루언스도 순양함 라인의 수상함 출신이지만 플레처 제독과 달리 부상으로 물러나는 일 없이 꾸준히 일선에 머무르면서 전공을 쌓았다. 플레처 제독의 경우는 부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회복하고 왔더니 일선에 자리가 없는 경우였다.[21] 킹 제독은 영국이 미국에 의존하는 경향을 꺼려 했다.[22] 이 때문에 미국도 개전 초 독일 유보트가 뉴욕을 기습하는 꼴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했고 유보트의 실적도 이때 순간적으로 뛰어올랐다.[23] 하지만 둘 다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긴 했다. 영국은 대서양의 유보트를 처리하지 않으면 국가가 말라죽을 상황이었고, 미국은 과달카날이 함락당하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잃고 미국 서부로 통하는 고속항로가 뚫릴 판이었다.[24] 사실 영국 태평양 함대의 참전을 숟가락 얹기로만 이해하는 것은 다소 피상적인 결론이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발생할 카미카제 공격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미 해군의 중대한 과제였고, 니미츠 제독은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썼다. 본래 합참의 직할로 일본 본토 폭격을 전담했던 르메이의 제21폭격기 사령부도 제독의 요청으로 전용되었던 마당에 영국 태평양 함대의 등장은 가뭄속의 단비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초기에 니미츠는 영국측 동격자였던 프레이저 제독(영국 해군 대장)과의 면담에서 영국 함대를 맥아더 휘하의 제7함대로 전속시키려고 했으나 정치적 후폭풍이 발생할 결과라 반려하고 대신 용도를 변경했다.[25] 영국 입장에서 약간 변명을 하자면 당시 영국은 일본이 인도양 쪽으로 추가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다가 실론 해전에서 패하면서 인도양 동부의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인도를 상실하는것은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타 크루즈 해전 이후 급한 상황에서는 빅토리어스를 빌려주기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킹 입장에서는 좋게 보기 힘든 것이 사실.[26] 덕분에 되니츠가 갑자기 격침시킬 배가 사라졌다고 당황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27] 당연히 영국이 선심 쓰듯 빌려준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건너가는 물자가 없으면 영국은 정말로 나라가 파탄날 위기에 처해있었기에 빌려준 것이다. 물론 미국도 영국의 항복만큼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물자 수송은 전쟁 중 계속되었다.[28] 여담으로 필립 비안 영국 해군 원수 역시 킹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남겼다. 여기서는 한 술 더 떠서 미 육군을 포함해 미 해군을 제외한 모든 것을 싫어하고 의심했다.[29] 노련하고 경험많은 뱃사람이라는 뜻.[30] 쿠즈네초프는 킹이 독일 함선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처음에 킹을 의장으로 추천하려고 했다.[31] 지금도 미 해군참모총장의 영문 명칭은 CNO이고, 지금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해군작전부장이라고 번역한다.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역시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32] 물론 현재의 CNO도 참모총장처럼 작전권은 없으나 직책명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33] 가토급 잠수함 SS-273 로발로(Robalo)의 함장이었다. 아버지 허즈번드 킴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전공에 너무 집착하다가 전사했다는 의견이 많다. 이미 상관들도 매닝의 이런 행보를 어느 정도 우려해,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 적용 안 할테니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수시로 설득했을 정도다.[34] 허즈번드 킴멜에게는 아들이 총 3명이 있지만, 이 중 막내인 매닝 킴멜 3세는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태어났으므로 당시에는 토마스가 유일한 자식인 셈이었다.[35] 단순히 바람을 많이 피운 게 문제가 아니라, 부하들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도 유럽에서 운전수와 불륜을 한 적이 있고, 패튼은 뭐 말할 것도 없으며, 브래들리도 패튼과 여배우 하나 놓고 싸우는 등 당대 미군 장성들의 불륜은 패시브에 가까웠다(...). 다만 킹은 이들 중에서도 심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