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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8 13:31:27

찰스 윌로비

찰스 앤드루 윌로비
Charles Andrew Willoughby
파일:1000137294.png
출생명 아돌프 카를 바이덴바흐
Adolph Karl Weidenbach
출생 1892년 3월 8일
독일 제국 하이델베르크
사망 1972년 10월 25일 (향년 80세)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소장
복무 기간 1910~1951
학력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중퇴
소르본 대학교중퇴
게티즈버그 칼리지
캔자스 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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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독일 제국 하이델베르크에서 셰페바이데바흐 남작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출신의 엠마 윌로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남작과의 로맨스가 시들해진 엠마는 열여덟살 된 아들 윌로비와 함께 미국 볼티모어로 돌아왔다. 윌로비는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미군에 징집되었으며, 이후 중사까지 진급했다. 1913년 민간인 신분으로 복귀한 윌로비는 게티스버그 칼리지에 등록해 학위를 취득했다.[1] 이후 교사로 일했다.

1916년 장교로 군에 재입대해 1916년부터 멕시코 베라크루스 원정대에 참가했고 1917년 대위로 진급해 1차 대전 유럽원정대 소속으로 서부전선에서 항공 지원대에 지원해 조종사 과정을 수료하고 프랑스 항공대에 배속되어 근무했다.

전쟁 이후에는 항공대를 떠나 지상직으로 복귀했고 포트 베닝에서 기관총 전술교괸으로 있다. 이후 몇 년 동안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주재 미국 대사관의 군무관으로 복무했다. 독일어 악센트가 강하게 섞인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1940년 포트 리벤워스에 있누 지휘참모학교를 졸업한 후 마닐라로 파견되어 맥아더의 병참담당 참모차장이 되었다. 그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는 필리핀 주둔 미군 야전사령관이었다.

필리핀의 맥아더 휘하에서 군수 업무를 담당하는 G-4를 맡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필리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1942년 초 맥아더, 리처드 서덜랜드등 여러 참모들과 호주로 후퇴했고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G-2 책임자가 되어 정보참모가 되었다. 일본 포로를 심문하고 일본계들을 활용한 번역통역국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특수작전까지 일임했다.

문제는 미군 역사상 그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정보 능력이 떨어졌다. 윌로비의 부하였던 연합국번역통역국장 시드니 매시버 대령은 "정보장교로서 윌로비는 없느니만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고, 맥아더도 역시 그의 정보장교로서의 역량을 낮게 보았다. 특작임무까지 못 미더워해 자신의 지인인 코트니 휘트니에게 특작임무를 맡겼다. 이에 윌로비는 항의했고 맥아더는 달래기위해 그를 장성으로 진급시켜줬다.

정보 참모로서의 능력은 꽝이었지만 맥아더에게 숭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아첨을 잘했다. 그에게 정보는 맥아더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이후로도 맥아더가 활동하는 전장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고 전후로도 맥아더의 극동사령부 정보부 소속으로 있었다.

6.25 전쟁당시 도쿄에 에서 참모임무를 수행하며 KLO를 세우는데 기여했으나 장진호 전투를 입안하기도 했다. 1951년 퇴역했으며 1972년 사망했다.

3. 여담



[1] 이전에 소르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나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중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