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오랜드 Henry Aurand | |
본명 | 헨리 스파이스 오랜드 Henry Spiese Aurand |
출생 | 1894년 4월 21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타마콰 | |
사망 | 1980년 6월 18일 (향년 86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구나힐스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915 ~1952 |
학력 | 섀모킨 고등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칼리지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타마콰에서 태어났고 펜실베이니아 주립칼리지를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으며 191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안포병 소위로 임관했다.[1][2]포트 먼로의 제169포병중대에 배치되었고 베라크루스 원정대에도 참가했다. 1917년 본인이 원했던 병기로 전과했으며 대위로 진급해 애버딘 실험장을 증축했다. 전후 포트 샘휴스턴에서 병기장교로 복무했고 소령으로 진급 후 육군본부 병기부에서 복무했다.
워터다운 군수공장에 배치되어 병기장교들을 육성하는 교관임무를 수행했고 MIT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전쟁부, 필리핀을 거쳐 병기부로 복귀했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지휘참모학교,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했고 중령으로 진급후 육군산업대학을 졸업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부에 속해있었고 월터 M. 로버트슨, 러셀 L. 맥스웰과 함께 일했다. 당시 브레혼 소머벨을 중심으로 전쟁장관 로버트 P. 패터슨과 로버트 A. 로벳과 함께 미합중국군수사령부의 일원이 되었다. 소머벨의 보호아래 전시계급 소장까지 진급했다. 1944년 빌헬름 D. 스타이어의 요청으로 유럽전선에 파견되어 유럽전선 군수사령관으로 노르망디에서 최전선까지 탄약보급을 전담했다. 전후 동성훈장, 육군수훈장을 수여받았다.
유럽전선이 끝나고 1945년 5월 25일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당군의 보급을 전담하기도 했다. 일본의 항복이후 귀국해 중장으로 진급했고 유럽으로 건너가 지중해작전사령관이 되었고 1947년 군수사령관으로 재직했다.
1949년 태평양육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52년 퇴역했다. 1980년 사망했다.
3. 여담
-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나온 아들 에반 피터 오랜드 역시 해군 중장까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