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F. 윙 Leonard F. Wing | |
본명 | 레너드 피시 윙 시니어 Leonard Fish Wing Sr. |
출생 | 1893년 11월 12일 |
미국 버몬트주 아이라 | |
사망 | 1945년 12월 19일 (향년 52세) |
미국 버몬트주 러틀랜드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버몬트 주방위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918~1945 |
학력 | 러틀랜드 고등학교 노리치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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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버몬트주 아이라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카운티의 중심도시인 러틀랜드에서 성장했다. 노리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법조계에서 일하다가 1차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중위로 임관해 보급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다.종전 후 법조계로 돌아왔고 러틀랜드 시법원 판사로 근무했다. 1925년부터 공화당 소속으로 당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또한 주방위군으로 전환해 군 경력을 이어나갔다. 172버몬트보병연대 소속으로 1933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연대장이 되었다. 종종 파업 진압에 동원되었다.
1933년부터 주지사 스탠리 C. 윌슨의 보좌로 임명되었고 1938년 준장으로 진급해 제86버몬트보병여단장이 되었다. 이 여단은 다른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방위군이 (메인, 버몬트,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편제된 제43보병사단으로 편입되었고, 전쟁 직전인 1941년 2월에 제43보병사단이 현역으로 소집되어 윙은 사단을 따라 여러 기동훈련에 참여했고, 개전 직후인 1942년 2월에 사단의 3각 편제화로[1][2]부사단장으로 보직되었고, 10월부터 해외파병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3]이후 1943년 소장으로 진급하며 사단장으로 영전했고[4] 뉴조지아 전투를 시작으로 오하이오 주방위군으로 편성된 제37보병사단장인 로버트 S. 바이틀러와 함께 필리핀 탈환전 루손섬 전역까지 참가했다. 훌륭한 지휘력을 보여줬지만 심혈관질환으로 인해 종종 후송되기도 했다.
전후 점령군의 일원으로 사단을 이끌고 45년 9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상륙했는데 곧 제43사단이 미국으로 귀국할 첫 부대로 선정되면서[5] 일본에 진주한지 보름 후에 다시 출항을 시작해 10월에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했고 그 달 말에 사단은 비활성화로 해체되었다. 윙 자신은 현역 복무에서 해제되어 11월 초에 그가 살았던 버몬트 주의 러틀랜드 시에 돌아와 그의 귀향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리셉션이 펼쳐졌고 육군 지상군 사령관인 제이콥 데버스 대장이 현지에 찾아와 윙 소장에게 수훈근무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주지사 경선에 출마할 예정이였으나 폐렴으로 인해 요양했고 그 해 12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6] 당시 버몬트 주지사 후보였던 어니스트 W. 깁슨 주니어[7]가 경선에서 당선되며 1946년 총선거에서 당선했다.
3. 여담
- 장남인 레너드 F. 윙 주니어도 노리치 대학교 출신으로 유럽전선에서 싸우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했다. 전후 버몬트 주방위군에서 복무하며 준장까지 올랐다.
[1] 정규군의 경우 1941년 시점에선 거의 개편을 완료했고 주방위군은 순차적으로 진행돼 42년 말까지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개편의 핵심은 보병사단의 보병여단 본부를 폐지하고 기존 여단장 중 1명은 (주로 여단의 연대 2개가 사단에 남은 쪽이) 부사단장이 되는 경우가 적잖다. 사단에 있는 보병연대 4개 중 1개는 사단 밖으로 방출했고 제43사단의 경우 제102보병연대가 여기에 해당했고 사단보다 앞서 42년 초에 태평양에 파병돼 전쟁 내내 독립부대로 태평양 곳곳의 도서지역을 오가며 수비대로 지내다 전쟁 말기에 예하 조직이 순차적으로 해체됨, 포병여단 본부는 사단포병 본부로 개편했으며 포병연대 본부를 (기존엔 포병여단 밑으로 3개 연대 본부가 있었다.) 폐지했다. 이 때 포병연대장 중 1명은 사단포병대의 부지휘관이 (Assistant Division Artillery Commander) 되는 경우가 있다. 사단의 포병대대는 6개 (포병 연대 예하로 2개) → 4개 (사단포병 본부에서 대대를 직접 관리) 로 감소했고 잉여 대대는 방출되었다. 지원/근무병과로 구성된 사단 직할대의 각 연대급 본부도 폐지되었고 1개 대대씩만 남긴채 역시 밖으로 방출되었다.[2] 포병대대와 사단 직할대대들은 기존엔 연대가 가졌던 권한과 기능을 나눠받아 부대의 자립성이 증가했고 단대호의 숫자 부호가 기존의 1~3 대대에서 최대 1~4자리의 고유부호로 개명되었다. 이 경우 기존의 연대 예하 대대 중 1개가 연대가 썼던 번호를 물려받고, 다른 대대들은 개명되는 경우가 흔했다. (Ex: 제43사단의 제103포병연대 1대대는 개편 후 제103포병대대가 됨)[3] 사단이 미국에서 배를 타고 출항할 때 윙은 선발대장으로 항공편으로 도착지인 뉴질랜드에 미리 와서 사단이 주둔할 숙영지를 물색하고 관련 업무를 처리하면서 사단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후 1944년 상반기에 뉴조지아 섬에서 철수한 사단의 2번째 뉴질랜드 주둔이 이뤄졌고 7월에 사단이 뉴기니로 이동하면서 윙은 뉴질랜드 방송에 출연해 고별인사를 남긴다. https://nzhistory.govt.nz/media/video/americans-depart-new-zealand[4] 뉴조지아 전투에서 기존 사단장인 존 헤스터 소장이 해임되고 아메리칼 사단장인 존 하지 소장이 대리로 지휘하다 전장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원대 복귀했고 그 직후 사단포병대장인 해럴드 R. 바커 준장이 (로드아일랜드 주방위군 포병장교로 1937년 ~ 1942년까지 사단포병여단인 제68포병여단장을 재직했고, 3각 편제 이후에도 종전까지 유임함) 사단장 대리로 (준장 진급 시점이 윙보다 빨랐다.) 잠시 지냈다가 윙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공석을 노렸을 정규군 측의 시도가 없진 않았을 것 같지만 전투에서 윙과 바커 장군이 펼친 지휘력이 상부의 인정을 받았다고 추측한다.[5] 사단의 귀국 준비의 진행과정에서 일본에 진주한 미군의 다른 부대들과 인적교환 작업이 있었는데 사단 장병들 중 전역과 인사이동의 기준에 미달되는 이들은 타 부대로 전출되었으며 이들은 기준을 충족하는 시점까지 현지에 남아서 복무하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반대로 다른 부대에서 기준에 부합하는 장병들이 전입을 왔고 일시적으로 사단의 구성원으로 미국에 돌아갔다.[6] 참고자료 - https://www.rutlandherald.com/news/in-the-fall-of-1945-maj-gen-leonard-wing-came-marching-home/article_8bbca5cc-51b8-51bf-9429-a95f127830f3.html,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13919517/leonard-fish-wing[7]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이며 대령까지 진급했다. 한때 윙의 부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