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볼리버 버크너 주니어 Simon Bolivar Buckner Jr. | |
출생 | 1886년 7월 18일 |
미국 켄터키주 먼포드빌 | |
사망 | 1945년 6월 18일 (향년 58세) |
일본 제국 오키나와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8 ~ 1945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대장 (사후) |
지휘 | 22 보병연대 알래스카 방위 사령부 제10야전군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알류샨 열도 전역 - 오키나와 전투† |
서훈 내역 | 퍼플 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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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대전 당시 미 육군의 장성으로 당시 중장 계급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하여 전황을 시찰하다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사후 육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그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인 사이먼 버크너에게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붙여준데 유래하고 있다. 당시엔 남미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2. 생애
1886년 켄터키 주에서 남북 전쟁 당시 남군의 장군이었던 사이먼 버크너 시니어의 아들로[1] 태어났다. 켄터키 주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추천으로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이후 제1차 세계대전때 소령으로 참전하였고 전간기에는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을 역임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다시 복귀하여 준장 계급을 받고 알래스카 방위사령부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알류샨 열도 전역에 투입되었다. 이후 소장으로 승진하여 1942년 6월 하버 공격과 1943년 8월 키스카 섬 탈환을 지휘했다.[2] 중장으로 승진하여 대만 침공을 계획하였으나 이후 취소되어 오키나와 전투를 총 지휘하였다. 단 버크너가 지휘한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미 육군 10군은 이전 이오지마 전투에서 해병대의 큰 인명피해를 본 트라우마 때문인지 지나치게 신중한 병력운용을 했던 까닭에 과감한 작전 전개를 기대했던 해병대와 해군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3] 심지어 직속 상관인 해병대 총사령관 알렉스 밴더그리프트는 물론 이 전역의 총사령관인 해군의 니미츠까지 나서서 빨리 진격 안하면 짤리버린다는 통첩까지 날렸지만 인명피해와 보급문제를 들어 끝까지 속전을 거부했고, 그로 인해 중요한 타이밍을 놓쳐 진격이 늦어지고 장마까지 겹친 탓에 이 전장이 늘어지면서 전투 후반쯤엔 거의 1차대전 참호전 수준의 처절한 공방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평가가 다소 박하다.[4]
수륙양용군을 지휘하여 오키나와의 일본군을 치열한 전투끝에 격멸시키고 전투의 막바지를 보았으나 전선을 시찰하던 중 일본군에 발각되어 버크너를 노린 47mm 포의 포격으로[5] 인하여 전사했다. 당시 임무를 물려받은 후임 10군 사령관은 미 해병대 3상륙군단장 로이 가이거이고, 그는 처음부터 버크너가 자기가 전사할 경우 후임을 이 사람으로 할 것을 지시했지만 타라와 전투때 일어난 홀랜드 스미스 vs 랄프 스미스 해임사건 때문에 육군과 해병대가 크게 들이받아 니미츠가 나서야 할 정도로 확대된 내분때문에, 가이거는 처음부터 사령관 대행이었다. 따라서 실제 후임은 육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권한을 가지고, 그가 인선한 조지프 스틸웰이 후임 10군단장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의 다 끝나가던 전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던 가이거는 임시 사령관 역할로 스틸웰이 오키나와로 이동하던 5일 사이 빠르게 가데나 공항에 성조기를 올리면서 승리선언을 하고 그로 인해 가이거는 임시지만 미 해병대 역사상 최초로 야전군 총사령관을 맡고 승리한 인물이 되었다.[6]
그의 사후 1954년 7월 19일 미국 의회에서 육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미군 중 레슬리 맥네어와 함께 최고위급이었다. 다만 맥네어는 엄밀히 따지면 아군의 오폭에 휘말린 것이므로, 적군에게 공격을 받아서 전사한 미군 중에서는 버크너가 최고위 인사가 맞다.
[1] 이때 아버지의 나이는 무려 63세였다.[2] 다만 키스카 섬에 있던 일본군은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이 성공적으로 철수시킴으로서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3] 해군의 경우는 더 심했는데, 작전때문에 오키나와 해역에 떠있는 동안 계속 날아오는 카미카제때문이었다.[4]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은 오키나와에서 버크너 중장의 전술에 실책이라고 할 것은 없었고, 이는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이해관계자 전원이 인정했다. 과감하냐 신중하냐는 옮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지휘 스타일의 문제이다. 당시 일본군의 상황과 전술을 분석한 현대 군사학자들도 10군의 진격이 늦은 건 그만큼 일본군 32군이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5]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격이 버크너 바로 옆에 있던 바위를 때렸고, 그와 동시에 쪼개진 돌조각들과 포탄 파편이 가슴을 관통하는 바람에 전사했다.[6] 물론, 승리선언만 했고 스틸웰 부임 후에도 잔당 소탕등의 산발적 전투는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