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비스 E. 바이어스 Clovis E. Byers | |
본명 | 클로비스 에설버트 바이어스 Clovis Ethelbert Byers |
출생 | 1899년 11월 5일 |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 |
사망 | 1973년 12월 13일 (향년 74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중장 |
복무 기간 | 1920~1959 |
학력 |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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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고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진학했으나 2년 뒤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20년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기병대에서 복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전술학교관, 기병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1936년 지휘참모학교를 수료하고 대위로 진급했다. 허버트 J. 브리스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제5기병연대에서 복무했다.1940년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하고 소령으로 진급해 사단인사참모, 전쟁부 참모를 역임했고 1941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대령으로 진급해 로버트 아이첼버거가 이끄는 제77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뉴질랜드, 호주에서 현지적응훈련을 거친 후 준장으로 진급했다. 뉴기니 전역에서 첫 실전을 치렀으며 부나-고나 전투에서 에드윈 F. 하딩이 이끄는 제32보병사단이 일본군의 방어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태스크포스장 핸퍼드 맥나이더[1], 포병연대장이였다가 하딩의 후임으로 사단장이 된 앨버트 W. 월드론이 돌격을 진두지휘하다가 일본군의 저격에 어깨 총상을 입었다. 이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아이첼버거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인물을 찾자 바이어스를 추천했고 이에 부응해 일본군을 몰아붙이며 수훈십자장, 은성훈장, 퍼플하트를 수여받았다.[2]
뉴기니 전역에서 공을 세워 동성훈장, 비아크 전투에서 과감한 행동으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제6군의 한 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영전했고 훈공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필리핀 탈환전 중 레이테, 루손섬에서 철저한 계획으로 작전을 원활하게 진행시커 동성훈장, 육군수훈근무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이 끝나기 2달 전 소장으로 진급했다.
전후 대령으로 계급환원 되었고 제11공수사단 소속으로 일본에 진주했고 1948년 아이첼버거의 추천으로 훈공장을 수여받았다. 1948년 제82공수사단장을 역임했고 6.25 전쟁 당시 에드워드 알몬드의 후임으로 제10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단장의 능선 전투[3], 피의 능선 전투를 지휘했다.
1955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1959년 퇴역했다. 1973년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