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대니얼 코타 시니어 Norman Daniel Cota, Sr. | |
출생 | 1893년 5월 30일 |
미국 매사추세츠주 첼시 | |
사망 | 1971년 10월 4일 (향년 68세) |
미국 캔자스주 위치타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17~1946 |
학력 | 우스터 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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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매사추세츠 첼시에서 열차 통신원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 이민자출신 교사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스터 대학교 미식축구부였으나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17년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 있었고 중위로 진급했고 얼마 안가 대위로 진급했다.이후로 군경력을 계속 이어나가다가 2차 대전 당시 1보병사단 참모였다. 1941년 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2년 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에서 추축국과 맞서 싸웠다.
1943년 준장으로 진급했고 영국에서 미영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을 계획햐고 훈련시켰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당시 29보병사단 부사단장[1]으로 당시 오마하 해변에서 독일군의 기관총과 야포에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상륙을 성공시켰다. 이 공으로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프랑스로 진격해 파리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했고 1944년 8월 14일 전사한 제임스 에드워드 워튼의 후임으로 28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2] 이후 휘르트겐 숲 전투에 참가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벌지 전투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전투로 인한 피해로 라인강 서쪽으로 물러나 재편성을 했고 이후 미시시피주에 있는 캠프 셸비의 훈련소장으로 있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1947년 소장으로 전역했으며 1950년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카운티의 민방위장을 역임했다. 1971년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크로아티아계 였지만 우스터 대학교 시절부터 네덜란드계 별명인 더치(Dutch)라는 별명이 붙었다.
- 2차 대전 당시 탈영으로 사형당한 에디 슬로빅에게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인물이다.
[1] 당시 사관학교 동기였던 찰스 H. 게르하르트가 사단장이였다.[2] 그의 후임은 리로이 H. 왓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