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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행정 구역|바덴뷔르템베르크의 현 |
하이델베르크[1] Heidelberg | |||||
시기 | 문장 | ||||
하이델베르크의 위치 | |||||
행정 | |||||
국가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시간대 | (UTC+1/+2) | ||||
주 | 바덴뷔르템베르크 | ||||
현 | 카를스루에 현 | ||||
인문환경 | |||||
면적 | 108.84km² | ||||
인구 | 162,960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1,497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에카르트 뷔르츠너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연방하원의원 | 프란치스카 브란트너 | | |||
주의회 의원 | 3석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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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라인 강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도시. 유구한 역사의 하이델베르크 성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유명하며 관광지로 꽤 각광받고 있는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16만 명으로 이 도시가 비교적 작은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인근에 만하임, 카를스루에 등 비교적 큰 도시들이 있다.2. 역사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조상격으로 추측되는 하이델베르크 원인(原人)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켈트족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 원인이 살았던 시기가 신생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견해가 갈리는데, 200만~60만년 전 사이로 그 폭이 꽤나 넓다.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라인강 이서 지방이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 하이델베르크 일대에 로마군의 주둔지가 세워졌으며, 로마 제국이 쇠락한 3세기 이후 이 일대는 다시 게르만족의 영향권에 편입된다.하이델베르크라는 지명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중세이던 서기 12세기의 일이었다. 그 전에도 이 일대에 사람들이 거주하기는 했지만 사료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르크하임(Bergheim)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가톨릭 수도원들이 이 일대에 건립되면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1386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가 당시 팔츠 선제후였던 루프레히트 1세에 의해 설립되면서 발전세가 급속히 빨라졌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당대 독일 문화권 지성들의 경연장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나 17~18세기 끊임없는 전란으로 타격을 입었다. 30년 전쟁 와중인 1622년에는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측이 2달에 걸친 포위전 끝에 이 곳을 점령하면서 일시적으로 하이델베르크는 팔츠가 아니라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는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Bibliotheca Palatina)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이 도서관에는 알프스 이북에서 르네상스 시기 발간된 수많은 장서들을 보관되어있었으나, 틸리 백작에 의하여 바티칸으로 압수되었다. 1634년 스웨덴군이 하이델베르크를 탈환하자 가톨릭 측은 하이델베르크를 재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으나
이후 1803년 하이델베르크는 제국대표회의 최종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에 따라 바덴 대공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존재의 힘입어 19세기 전반기 내내 하이델베르크는 자유주의의 성지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1848년 혁명 당시에는 혁명세력의 거점 역할을 맡기도 했다가 혁명이 결국 분쇄당하면서 프로이센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1815년 혁명 이념을 박살내버리기로 결의하면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신성 동맹이 이곳에서 맺어졌다는 점이다. 원체 소규모 도시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지는 못한 채 소규모의 도시로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독일 제국 시기에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존재에 힘입어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중요한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나치 독일 시기는 하이델베르크의 흑역사인데, 나치의 정치적 아성이었기 때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아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 뉘른베르크 법에 따라 많은 비 아리아(주로 유대인) 출신 교직원들이 해고되었으며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과 슈츠슈타펠을 위한 시설을 건설하기도 했다(...)
3. 여담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 미국의 명장 조지 S. 패튼이 교통사고로 인해 이 곳에서 사망했다.[3] 전투 도중 사고가 아니라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사고를 당했다.
- 2007년에는 하이델베르크 성과 구 시가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 고전 뮤지컬 'The Student Prince'(한국에서는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번역)의 무대이기도 하다. 독일 어느 소국에서 이 도시로 유학온 왕자 카를 하인리히가 현지 바걸 케티(또는 케이티)와 사랑에 빠진다는 작품인데, 독일 연극(Wilhelm Meyer-Förster의 독일어 원작 연극 Alt (old) Heidelberg. 이 연극 자체도 그의 소설 '카를 하인리히'를 다시 각색한것)을 각색하여 1924년 미국에서 제일 처음 상연하였며 영화로는 1954년 만들어졌다. 역시 하이델베르크를 띄우기 위해 미국에서 엄청 홍보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붉은 황소(Zum Roten Ochsen)"라는 술집이 실제로 아직도 존재한다.
- 독일에서 이름있는 도시임에도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축구팀이 없다. 웬만한 소도시들도 다 도시를 대표로 하는 축구팀이 있음을 감안하면 의외의 일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축구팀으론 3. 리가의 SV 잔트하우젠이 있고 가장 가까운 분데스리가 팀으로는 남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진스하임 연고의 TSG 1899 호펜하임이 있다. 실제 호펜하임이 분데스리가로 승격하기 전 호펜하임의 실질적 구단주[4] 디트마어 호프가 잔트하우젠과 FC 아스토리아 발도르프까지 통합하여 하이델베르크 연고팀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다 좌절되기도 했다.
- 교통 허브인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은 독일 도시 치고는 외곽에 치우쳐 있으며 중심지 비스마르크 광장까지 도보로는 약간 애매한 거리에 있다. 개통 당시에는 중앙역이 도심 가까이에 있었으나 1955년에 현재 위치로 이설된 것이다. 또한 독일철도의 주간선에서는 빗겨나 있어 장거리 노선은 대체로 만하임 중앙역이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통해 환승이 필요하다.
- 사파리 만년필로 유명한 독일의 문구 회사 LAMY의 본사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 출시예정인 인디 게임 하이델베르크 1693의 배경으로, 스토리는 1693년,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루이 14세가, 궁중암투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사생아이자 왕자 월왕(문킹)이 자신과 프랑스 왕가에 대한 복수심으로 흑마법과 계약하여 언데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해 루트비히의 왕좌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에 전 유럽의 안보와 국가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루이 14세는 프로이센 왕가와 공조하여 자신의 근위병이자 법의식 의식을 받은 총사대원 한 명을 그가 생과 사를 뒤틀어버린 생지옥으로 전락시킨 하이델베르크로 파견시켜 사태수습을 진행하는 것이 게임의 스토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