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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12:09:32

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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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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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Heide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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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스루에
Karlsru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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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
Mannhe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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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츠하임
Pforzheim
독일의 행정 구역바덴뷔르템베르크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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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1]
Heidelberg
파일:하이델베르크 기.svg 파일:하이델베르크 문장.svg
시기 문장
하이델베르크의 위치
행정
국가
[[독일|]][[틀:국기|]][[틀:국기|]]
시간대 (UTC+1/+2)
바덴뷔르템베르크
카를스루에 현
인문환경
면적 108.84km²
인구 162,960명(2023년 12월)
인구밀도 1,497명/km²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정치
시장 에카르트 뷔르츠너

[[무소속(정치)|
무소속
]]
연방하원의원 프란치스카 브란트너

주의회 의원 3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Heidelberg_corr.jpg
[2]

1. 개요2. 역사3. 여담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독일 라인 강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도시. 유구한 역사의 하이델베르크 성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유명하며 관광지로 꽤 각광받고 있는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16만 명으로 이 도시가 비교적 작은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인근에 만하임, 카를스루에 등 비교적 큰 도시들이 있다.

2. 역사

호모 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의 조상격으로 추측되는 하이델베르크 원인(原人)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켈트족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 원인이 살았던 시기가 신생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견해가 갈리는데, 200만~60만년 전 사이로 그 폭이 꽤나 넓다.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라인강 이서 지방이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 하이델베르크 일대에 로마군의 주둔지가 세워졌으며, 로마 제국이 쇠락한 3세기 이후 이 일대는 다시 게르만족의 영향권에 편입된다.

하이델베르크라는 지명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중세이던 서기 12세기의 일이었다. 그 전에도 이 일대에 사람들이 거주하기는 했지만 사료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르크하임(Bergheim)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가톨릭 수도원들이 이 일대에 건립되면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1386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가 당시 팔츠 선제후였던 루프레히트 1세에 의해 설립되면서 발전세가 급속히 빨라졌다. 르네상스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당대 독일 문화권 지성들의 경연장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나 17~18세기 끊임없는 전란으로 타격을 입었다. 30년 전쟁 와중인 1622년에는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측이 2달에 걸친 포위전 끝에 이 곳을 점령하면서 일시적으로 하이델베르크는 팔츠가 아니라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는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Bibliotheca Palatina)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이 도서관에는 알프스 이북에서 르네상스 시기 발간된 수많은 장서들을 보관되어있었으나, 틸리 백작에 의하여 바티칸으로 압수되었다. 1634년 스웨덴군이 하이델베르크를 탈환하자 가톨릭 측은 하이델베르크를 재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으나 같은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뒷통수를 친 프랑스가 스웨덴군을 지원하면서 결국 실패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하이델베르크는 다시 팔츠 선제후의 품안으로 돌아왔지만, 본격적인 전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팔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9년 전쟁이 발발한 것. 팔츠 선제후였던 카를 1세 루트비히는 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를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에게 시집보냈는데,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 지메른 분가의 대가 끊기고 노이부르크 분가의 필리프 빌헬름이 즉위하자 루이 14세가 이 혼인을 근거로 팔츠가 자신의 땅임을 주장했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 측의 반응은 이뭐병... 프랑스의 위협을 느낀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뒤셀도르프로 천도했고, 1693년 하이델베르크는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한편 거듭된 전란에 지친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일대 주민은 영국을 거쳐 신대륙으로 이주를 감행하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사우스캐롤라이나 일대를 개척한 선구자들이다.

이후 1803년 하이델베르크는 제국대표회의 최종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에 따라 바덴 대공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존재의 힘입어 19세기 전반기 내내 하이델베르크는 자유주의의 성지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1848년 혁명 당시에는 혁명세력의 거점 역할을 맡기도 했다가 혁명이 결국 분쇄당하면서 프로이센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1815년 혁명 이념을 박살내버리기로 결의하면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신성 동맹이 이곳에서 맺어졌다는 점이다. 원체 소규모 도시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지는 못한 채 소규모의 도시로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독일 제국 시기에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존재에 힘입어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중요한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나치 독일 시기는 하이델베르크의 흑역사인데, 나치의 정치적 아성이었기 때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아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 뉘른베르크 법에 따라 많은 비 아리아(주로 유대인) 출신 교직원들이 해고되었으며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과 슈츠슈타펠을 위한 시설을 건설하기도 했다(...) 역시 괴벨스를 동문으로 둔 학교답다. 산업이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말 그대로 순수한 교육 도시였기 때문에, 2차 대전 중에는 연합국 측으로부터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미군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막사나 포로 수용소로 쓰려고 일부러 폭격을 안 했다는 루머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전쟁이 길어질 경우 이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30일에 미군이 이 곳을 점령했고, 이후 2011년까지 하이델베르크는 주독미군의 거점 중 하나였다. 2011년 이후로 2013년까지 2년에 걸쳐 비스바덴으로 주둔지를 옮겼지만, 한창 시절에는 하이델베르크 인구의 10%가 미군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 탓에 1970년대 내내 급진 공산주의 학생조직이었던 적군파(RAF)의 타겟이 되어 1972년에는 이 곳에 주둔하던 미군 세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빚어졌다.

3. 여담

4. 관련 문서



[1] R이 모음화되는 독일어 경향상 현지인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하이델베어크' 정도에 가깝게 들린다.[2] 이미지 출처(위키미디어)[3] 사고가 발생한 곳은 하이델베르크 인근의 도시였던 만하임이었으나 치료를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졌고, 치료 도중에 끝내 사망.[4] 분데스리가 승격 후 2014년에 정식으로 구단주가 되었으며, 그의 사업체 SAP 본사가 위치한 연고로 아스토리아 발도르프에도 후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