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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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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5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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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대선
1960년 11월 6일
1960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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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일시 11월 6일 5시 ~ 11월 7일 6시 (UTC)
투표율 60.6%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부통령 리처드 닉슨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부통령 에스테스 키포버
선거인단
457명 73명[1]
전국 득표
57.4%
35,579,180표
42.0%
26,028,028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 후보 지명자.jpg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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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3.1.1. 아이젠하워의 건강 문제3.1.2.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갈등3.1.3. 1956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
3.2. 민주당
3.2.1. 스티븐슨 vs 키포버 시즌23.2.2. 스티븐슨 vs 트루먼3.2.3. 키포버 vs 케네디
4. 최종 후보5. 선거 과정
5.1. TV 광고의 중요성5.2. 1956년 헝가리 혁명제2차 중동전쟁5.3.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둔 의견 차이
6. 선거 결과7. 관련 문서

1. 개요

1956년에 치러진 미국의 34대[2] 혹은 35대[3]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

2. 배경

4년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민주당의 20년 집권을 깨뜨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6.25 전쟁 정전 및 전후 재건 특수 속에 경제 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전후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었고 재선도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갤럽 여론조사 상 첫 임기 중 최저 지지율이 68% 수준일 정도.

하지만 1954년 중간선거에서는 상·하원을 모두 다시 민주당에게 내주면서 패했고 아이젠하워 본인도 1955년 콜로라도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심근경색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지라 고령 리스크가 조금씩 부각되고 있었다. 다행히 살아났지만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심장마비의 후유증으로 인해 1956년 초까지도 통상적인 수준의 업무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어했다. 이때문에 한때는 차기 대선 불출마 가능성이 언급되었다.

민주당은 이 점을 적극 지적하며 아이젠하워를 파트타임 대통령이라 비판했고, 여기에 더해 전국민적 호감도가 높은 아이젠하워보다는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젊은 정치인이었지만 "교활한 딕(Tricky Dick)"이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대중적으로 노회한 이미지가 컸던 닉슨이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자리를 대신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집중 공격했다.

닉슨 역시 민주당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국가를 방문하고 노쇠한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여러 공식 석상에 자리해 연설을 하고, 때로는 내각 회의를 주재하는 등 실세 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며 활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 연말 대선을 노리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1956년 2월 29일 자신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선언한 뒤 재선 도전을 공식화했고, 리처드 닉슨 역시 별다른 반발이나 움직임 없이 부통령 자리를 다시 한번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민주당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렇게 1956년 대선 시즌이 찾아오고 있었다.

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3.1.1. 아이젠하워의 건강 문제

195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내부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재선 출마 여부를 둘러싼 긴장감이 팽배했다. 아이젠하워가 출마만 한다면 공화당 내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아이젠하워 본인의 건강 상태와 정치적 의지였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정권 교체 그 자체를 목표로 1952년 대선에 출마했던 인물로, 집권 초반부터 재선에 대한 열의는 크지 않았다. 심지어 임기 1년 차부터 차기 대선 불출마를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권력 의지가 강한 편은 아니었다.[4] 설상가상으로 195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 다수당 지위를 일부 상실한 데 이어, 1955년에는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실려 가는 일까지 겪으면서, 정가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재선을 포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1955년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는 달랐다. 여전히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현직 대통령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회복 중이던 아이젠하워에게 거듭 재선 도전을 권유했다. 결국 이를 받아들인 아이젠하워는 1956년 2월, 공식적으로 재선 출마를 선언한다. 같은 해 5월 12일, 신체검사 결과 건강에 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아 정치적 부담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지만, 불과 한 달 뒤인 6월에는 회장염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수술을 받게 되면서, 고령과 건강 문제는 다시금 대선 국면의 잠재적 리스크로 부각되었다.

3.1.2.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갈등

한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리처드 닉슨 사이의 불편한 관계는 1956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워싱턴 정가에선 닉슨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이젠하워가 재선 출마를 결심하게 만든 계기였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비록 정식으로 확인된 발언은 아니지만, 아이젠하워가 닉슨의 정치적 스타일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던 것만은 분명했다.

아이젠하워는 처음엔 닉슨이 스스로 부통령직에서 물러나길 바랐고, 그 대안으로 차기 내각에서 국방장관직을 제안하는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거취 정리를 유도했다. 하지만 닉슨은 단호했다. 공식적인 요청이 없다면 물러날 이유도 없다는 입장이었고, 이는 곧 “그렇게 싫으면 대놓고 말하라”는 메시지로도 읽혔다.

아이젠하워로서도 닉슨과 정면충돌을 벌이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닉슨은 공화당 내부에서 강한 조직력과 보수층의 뿌리 깊은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조율하기 위해 당 지도부는 닉슨 대신 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 인물을 물색했고, 실제로 로버트 B. 앤더슨 국방차관에게 출마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앤더슨이 거절하면서 닉슨을 대체할 현실적인 대안은 사실상 사라졌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닉슨을 배제하기 위해 당내 분열을 감수하는 것은 지나치게 큰 정치적 리스크라고 판단했고, 공화당 지도부 역시 갈등이 자칫 정권 재창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하여 아이젠하워는 닉슨의 재지명을 수용했고, 두 사람은 1956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한 번 러닝메이트로 함께 나서게 되었다.

3.1.3. 1956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

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 표결 결과
<rowcolor=#E81018> 후보자 1차 투표
<colbgcolor=#f5f5f5><colcolor=#000>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323
(100.00%)

그렇게 공화당의 대선 티켓이 아이젠하워-닉슨으로 사실상 확정된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당대회가 열리게 됐다. 이 자리에는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이 기조연설에 나서 공화당원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당연하게 손쉽게 만장일치로 재지명되었고, 전당대회까지 닉슨을 교체하려는 일부 시도에도 불구하고 닉슨 역시 단 한 표의 반란표를 제외하고 압도적인 지명을 받으면서 손쉽게 재선 도전에 나서게 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후보직 수락 연설에서 주 정부의 역할에 힘을 실으며 연방정부의 비대화에 대해 다시 한번 경고[5]했고, 닉슨 역시 자신은 복지국가를 믿지 않는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연방 차원에서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다소 유화적인 입장을 보였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이 각각 자신에게 있는 약점[6]을 보완하기 위한 연설을 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3.2. 민주당

3.2.1. 스티븐슨 vs 키포버 시즌2

<nopad>
4년전 당권파의 비토로 경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직을 차지하지 못한 에스테스 키포버가 민주당 주자 중 가장 먼저 아이젠하워에게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편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역시 4년전 사실상 당 지도부의 추대로 반쯤 원치않게 출마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본인도 의지를 가지고 경선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외에도 뉴욕 주지사인 W. 애버럴 해리먼이 스티븐슨에게 추가로 도전장을 내밀어 민주당 경선은 스티븐슨과 키포버의 양자대결 속에 다시한번 3파전 구도가 되었다.

키포버는 초반 뉴햄프셔미네소타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기세를 올렸고 이어 위스콘신 경선에서도 승리하면서 후보직에 가까워졌다는 평을 받았지만 미네소타 경선 과정에서 스티븐슨이 키포버의 과도한 네거티브를 지적하며 비판한 뒤 마음을 바꿔 키포버와의 토론회를 여러차례 여는 등 좀 더 공격적으로 경선에 참여했고 플로리다 경선에서 52%를 득표해 승리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승부처였던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63%를 득표하며 스티븐슨이 키포버를 상대로 큰 격차로 승리했고, 당권파의 반대를 꺾기 위해선 압도적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던 키포버는 이 패배와 함께 모멘텀을 잃고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3.2.2. 스티븐슨 vs 트루먼

경선에서 라이벌 키포버를 주저앉힌 스티븐슨의 마지막 적은 1956년 8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반대를 뚫는 것이었다. 1952년에는 키포버를 꺾기 위해 스티븐슨을 지지한 트루먼이었지만 이번엔 스티븐슨의 재지명에 반대하며 해리먼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공개표명했다.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 표결 결과
<rowcolor=#0044C9> 후보자 1차 투표
<colbgcolor=#f5f5f5><colcolor=#000> 애들레이
스티븐슨
905.5
(66.00%)
W. 애버럴
해리먼
210
(15.31%)
린든 B.
존슨
80
(5.83%)
스튜어트
사이밍턴
45.5
(3.32%)
해피
챈들러
36.5
(2.66%)
제임스 C.
데이비스
33
(2.41%)
존 S.
배틀
32.5
(2.37%)
조지
티머만스
23.5
(1.71%)
프랭크
라우체
5.5
(0.40%)
하지만 더이상 '전직 대통령'에 불과했던 트루먼의 의사는 당 지도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존 F. 케네디, 앨버트 고어 시니어, 휴버트 험프리 등 신진 그룹이 스티븐슨을 지지한 영향도 있어 스티븐슨이 무난히 1차 투표만에 해리먼을 꺾고 후보 지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신진 그룹의 지지를 대가로 스티븐슨은 통상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지명하던 부통령 후보직을 공개 경선으로 풀었고 이 자리에 바로 케네디가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3.2.3. 키포버 vs 케네디

스티븐슨의 공개 지명 선언으로 인해 부통령직을 둔 표결이 진행됐는데, 유력한 후보는 비록 경선 과정에서 포기하긴 했지만 여전히 강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던 키포버였다. 그나마 공개 경쟁을 할 수 있는 여유도 딱 하루 주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지명이 유력하다고 판단되었지만 여기에 당시까지만 해도 초선 상원의원이었던 신예 케네디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티븐슨은 키포버보다는 케네디를 러닝메이트로 개인적으로 선호했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1차 표결에서는 예상대로 키포버가 케네디에 179.5표 차이로 앞섰지만, 2차 표결 도중 648표로 케네디가 역전에 성공(케네디 648표 vs 키포버 551.5표)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만약 39표만 더 나왔다면 이대로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대로 부통령 후보가 되는 파란을 일으키는가 했으나, 결국 다시 키포버가 최종 교대 투표에서 역전에 성공하면서 케네디는 후보직을 양보하는 연설을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어찌보면 케네디로서는 이름값을 높이면서 남는 장사가 되었는데, 패배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게 되면서 이미지 소모를 막은 동시에 거물 키포버에게 대항하면서 이름값을 한껏 높였기 때문.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케네디는 4년 뒤 열린 대선에서는 진짜 대통령 후보직에 도전하게 된다.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 부통령 표결 결과
<rowcolor=#0044C9> 후보자 1차 투표 2차 투표 3차 투표
<rowcolor=#0044C9> 교대 전 교대 후 교대 전 교대 중 교대 후 최종
<colbgcolor=#f5f5f5><colcolor=#000> 에스테스
키포버
466.5
(34.00%)
483.5
(35.24%)
551.5
(40.20%)
551.5
(40.20%)
755.5
(55.70%)
1,372
(100.00%)
존 F.
케네디
294.5
(21.47%)
304
(22.16%)
618
(45.04%)
648
(47.23%)
589
(42.93%)
중단
앨버트
고어
178
(12.97%)
178
(12.97%)
110.5
(8.05%)
80.5
(5.87%)
13.5
(0.98%)
중단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 후보 지명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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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제36대 미국 부통령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의 후보직 수락 연설
I Like Ike!
나는 아이크가 좋아!

1956 아이젠하워-닉슨 티켓 슬로건

4.2. 민주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1956_Estes-Kefauver-(left)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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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
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에스테스 키포버
테네시 주 연방 상원의원
}}}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후보직 수락 연설
All the Way with Adlai
애들레이를 위해 온힘을 다해

1956 스티븐슨-키포버 티켓 슬로건

5. 선거 과정

5.1. TV 광고의 중요성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광고
"Taxes"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광고
"Women Voters"

4년 전인 1952년 대선에서부터 TV 광고는 유권자 설득의 보조 수단으로 도입되었지만, 1956년 대선은 양당 모두가 텔레비전을 본격적인 선거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은 첫 번째 선거로 기록된다. 특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진영은 고령 및 건강 문제로 전국 유세를 활발히 소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TV 광고는 후보 개인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 아이젠하워는 이전처럼 모든 주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안정된 리더십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었고, 유세 현장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이 시기 TV 광고는 단순한 메시지 전달을 넘어, 유권자 감성에 직접 호소하는 장르적 실험장이기도 했다. 1956년은 특히 전후 베이비붐과 함께 확산된 핵가족 문화, 그리고 주부 타겟팅이 광고 전략의 핵심으로 떠오른 시점이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캠프는 "Women Voters"와 같은 광고를 통해 가정의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이는 1952년 대선에서 큰 역할을 했던 여성 유권자, 특히 중산층 주부층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반면 민주당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1952년 당시 TV 광고에 대해 엘리트주의적 거리감을 보이며 비판적 태도를 취했지만, "I Like Ike" 광고의 파괴력을 직접 체험한 후 1956년 대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카툰 스타일 등 시청각적인 실험을 포함한 광고 전략에 나섰다. 특히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실정을 부각시키는 네거티브 광고를 다수 제작했는데, 이는 지지율 열세를 따라잡기 위한 공격적 메시지 전략이었다. 다만, 아이젠하워 개인의 국민적 호감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공격의 초점은 행정부 정책과 측근들, 특히 당시 부통령 후보인 리처드 닉슨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흥미롭게도, 현장 유세 전략에서도 노쇠한 아이젠하워를 대신하여 닉슨이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에 나서면서, 스티븐슨과 닉슨이 마주치는 장면이 언론에 자주 포착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의 인식 속에서 대선 이슈 전면에 닉슨 vs 스티븐슨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만들었고, 아이젠하워는 본인의 취약점이 가려진 채로 대통령직 수행의 상징성만 유지하는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7]

또한, 이 시기 아이젠하워는 전국 신문의 약 60% 이상으로부터 공개적 지지를 받는 등 전례 없는 미디어 우위를 점유했다. 덕분에 대중매체의 프레임 바깥에서, 전쟁 영웅이자 안정된 행정가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선거 캠페인의 최종 구도 역시 아이젠하워 개인에 대한 검증보다는 그를 둘러싼 인물들에 대한 공방전으로 흘러갔다.

5.2. 1956년 헝가리 혁명제2차 중동전쟁

애들레이 스티븐슨과 민주당은 대선 주제를 내치와 경제에 맞추려고 주안점을 두었고, 인플레이션 문제를 집중공격했다. 공교롭게도 4년전 대선에서는 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이 공격하던 주제로 다시 반격을 가한 셈이 되었다. 공화당 측은 이에 대해 물가 상승은 오히려 안정화 과정의 일환이라며 방어 논리를 폈고, 아이젠하워는 직접 대응을 자제하고 참모진과 재무관료들을 앞세운 간접 방어 전략을 택했다.

한편, 국내 정치적 분위기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1954년 상원이 조지프 매카시에 대한 공식적인 견책(censure) 징계를 내리면서 매카시즘 광풍이 한풀 꺾였고, 이에 따라 민주당은 보다 자유롭게 사회보장법 확대, 농작물 가격 지지, 토양은행 프로그램 등 진보적 정책 아젠다를 꺼내 들 수 있었다. 이는 스티븐슨이 가장 자신 있어 하던 분야였고, 내치 중심의 선거 프레임이 정착되는 듯 보였다. 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은 내치 분야 대신 주제를 냉전과 외교로 옮기려 노력하였고 소련 니콜라이 불가닌의 내정 간섭 시도가 좋은 먹잇감이 되어주긴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기치 않게 흘러갔다. 1956년 10월, 두 개의 국제적 위기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며 미국 사회 전체의 관심을 외교와 냉전 문제로 돌려놓은 것이다.

첫째, 헝가리 혁명이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반소 봉기가 일어나자, 소련은 전차부대와 병력을 투입해 시민들의 저항을 유혈 진압했다. 이 장면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미국 사회에 강렬하게 중계되었고, 소련의 폭력성에 대한 감정적 반감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둘째는 제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 위기였다. 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하자, 이에 반발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공동 군사행동에 돌입하면서 중동 정세가 격랑에 휩싸였다. 미국은 이 사태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냉전 속 대외 질서 안정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극도로 증폭되었다.

이 두 사건은 선거 막판 유권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경제 → 냉전 외교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바로 이 국면에서 아이젠하워는 전쟁 영웅, 외교의 상징으로서 강력한 상징 자산을 재확인받게 되었다. “강한 지도자, 믿을 수 있는 사령관”이라는 국민적 인식은 더욱 공고해졌고, 이는 외교 위기 상황에서 아이젠하워를 재신임하려는 본능적 결집으로 이어졌다.

반면, 스티븐슨의 전략은 외교 현안의 폭풍에 휩쓸리며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특히 스티븐슨은 과거부터 수소폭탄 실험 중단, 징병제 폐지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평화주의·재정 절약주의 성향을 드러냈는데, 이는 오히려 안보 위기 국면에서 비현실적인 후보라는 프레임을 낳았다. 즉, 외교 환경 변화는 민주당의 내치 전략을 무력화했을 뿐만 아니라, 스티븐슨의 정체성마저 시기적 부조화로 낙인찍히게 만든 셈이다.

5.3.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둔 의견 차이

1954년, 대법원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통해 미국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에 마침표를 찍었다.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오래된 명제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 판결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하지만 2년 뒤 치러진 1956년 대선에서 이 판결은 의외로 조용하게 다뤄졌다.

그 배경에는, 아직 흑인 유권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던 현실과 함께, 남부 백인들의 반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양당의 조심스러운 전략이 있었다. 그럼에도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두 후보가 이 판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심이 분명히 존재했다.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하진 않았지만, 판결의 이행을 방해하지 않았고, 행정부 차원에서는 판결의 정당성을 사실상 인정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실제로 그는 1957년 리틀록 사건 당시 연방군을 투입하며, 연방 차원의 인종 통합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 일화는 이후 아이젠하워의 민권 문제에 대한 태도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의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브라운 판결에 대해, “연방 정부가 주 교육에 개입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식의 우회적인 비판을 내놓았다. 분리주의 정서가 여전히 강한 남부 백인 유권자, 즉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을 고려한 발언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흑인 유권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불과 몇 년 전인 1948년 민주당이 오히려 민권법 도입과 인종 차별 철폐에 앞장섰던 정당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 내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9981호)을 발동했고, 민주당 전당대회는 이를 공식 강령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이 되자, 남부 백인의 정치적 이탈 본격화를 우려한 민주당 주류는 민권 이슈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슨의 입장 역시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이었다.

공화당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측은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번지는 민주당 회의론을 감지했고, 이를 직접적으로 공략하진 않았지만, 브라운 판결을 둘러싼 민감한 쟁점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하며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질서와 통합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를 흑인 유권자와 중도층 모두에게 무리없이 동시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6. 선거 결과

<rowcolor=#000>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득표수 비고
부통령 후보 득표율
정당 선거인단 당락
파일:공화당(미국) 엠블럼.svg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35,579,180 1위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57.37%


457명 당선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애들레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26,028,028 2위
에스테스 키포버
(Estes Kefauver)
41.97%


73명 낙선
- 그 외 후보 414,771 -
0.67%


[[무소속(정치)|
무소속
]]
1명
총 투표수 62,021,979


유지
전국 득표 선거인단
아이젠하워 스티븐슨 아이젠하워 스티븐슨
<rowcolor=#000,#fff> 57.37% 41.97% 86.06% 13.75%

선거 결과, 4년전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아이젠하워-닉슨 티켓이 민주당 스티븐슨-키포버 티켓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아이젠하워의 득표율은 선거 전 우려와 달리 오히려 55%에서 57%로 상승했으며 지난 선거 대비 미주리를 빼앗기긴 했지만 대신 켄터키, 루이지애나, 웨스트버지니아를 탈환하면서 선거인단 격차도 더욱 벌렸다. 특히 루이지애나에서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의미 깊었는데 아이젠하워는 루이지애나에서 승리한 역사상 첫 공화당 후보가 되었으며 러더퍼드 헤이스 이후 딥사우스(Deep South) 주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맛본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번 승리로 1896-1900년의 윌리엄 매킨리 이후 56년만에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공화당 대통령이 되었다. 이 사이 다른 공화당 대통령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후에 재선에 성공했거나 사망, 대선 패배 등의 이유로 단임으로 끝났다.

스티븐슨은 이번에도 남부에서만 지지를 받았지만(정확히는 남부 6개주와 미주리) 그 중에서도 딥사우스(Deep South) 지역만 지켰을뿐 오히려 남부 대서양 지역(South Atlantic)에 있는 주들은 아이젠하워에게 빼앗기며 2번 연속 대선에서 참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도시권에서의 참패도 이어졌는데 4년전에는 인구 25만명 이상 도시 39개 중 21개에서 패했지만 이번에는 28개에서 패배를 당했다. 미국 남부의 8대 대도시 중에서도 오직 애틀랜타만 민주당이 지켰다.

선거 직후 스티븐슨은 승복 선언에서 자신을 "대선 참패의 최고 권위자"라고 냉소적으로 희화화한 뒤[8] 다시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자신이 대선 과정에서 여러 현대적 자유주의 의제를 제안하였으며 자신은 패했지만 그 의제들은 끝내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단서를 남겼다. 한편 닉슨은 1956년 대선 과정에서 노쇠한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정력적으로 전국 유세를 나서면서 위상을 한층 더 키우는 데 성공했다. 어찌보면 이번 대선 최고의 승자.

한편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다시 한번 과반을 확보하면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또다시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7. 관련 문서


[1] 민주당의 월터 존스 후보를 투표하고 싶던 투표자 1명이 배신표를 던졌다.[2] 현직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승리 시.[3] 도전자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승리 시.[4] 다만,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당시 아이젠하워를 대체할 만한 확실한 인물이 없다는 평가가 우세했고, 이런 분위기가 결국 그를 재선 결심으로 이끌었다는 후문도 있다.[5] 아이젠하워는 인종문제 등 몇몇 이슈들에 대해서는 공화당답지 않게 진보적이었지만, 적어도 재정적으로는 보수주의 성향이 확고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의 임기동안 미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57.2%에서 43.6%로 하락하여, 미국 경제의 재정건전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GDP 대비 정부지출 또한 20.4%에서 18.4%로 감축시켰으며, 이는 아이젠하워 이전에 집권한 루스벨트와 트루먼 행정부, 그리고 아이젠하워 이후에 집권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모두 GDP 대비 정부지출을 증액시킨 것과 대조적이다.[6] 아이젠하워는 무늬만 공화당원인 민주당원 아니냐는 비판, 닉슨은 너무 강성우파가 아니냐는 비판.[7] 1952년 대선부터 1956년 대선으로 이어지는 과정 사이에 닉슨은 스티븐슨을 배운 티를 내는 엘리트주의자라며 대놓고 폄하했고, 스티븐슨은 그런 닉슨을 매우 경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8] 미국 역사상 2번 연속에 대선에 나서 2번 연속 참패한건 스티븐슨이 최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