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상원의원 (테네시 주 클래스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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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83-91대 연방 상원의원 앨버트 아널드 고어 시니어 Albert Arnold Gore Sr.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07년 12월 26일 |
미국 테네시 주 그랜빌 | |
사망 | 1998년 12월 5일 (향년 90세) |
미국 테네시 주 카시지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배우자 폴린 라폰 고어 (1937~1998) 장녀 낸시 고어 장남 앨버트 고어 주니어 |
학력 | 미들 테네시 주립대학교 (B.A.) 내슈빌 법학전문대학원 (법학 / LL.B.) |
정당 | |
의원 선수 | 7 (하원) 3 (상원) |
의원 대수 | 76, 77, 78, 79, 80, 81, 82 (하원) 83, 84, 85, 86, 87, 88, 89, 90, 91 (상원) |
경력 | 연방 하원의원 (1939~1944 / 테네시 4구) 미 육군 복무 (1944~1945) 연방 하원의원 (1945~1953 / 테네시 4구) 연방 상원의원 (테네시 클래스 1 / 1953~1971)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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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 시기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있다.2. 생애
1907년 영국계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20대에 처음 정계에 입문해 23세에 스미스 카운티 교육위원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36년, 내슈빌 로스쿨을 졸업해 LLB 학위를 받고 변호사를 개업해 지역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1936년부터 1937년까지 테네시의 노동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했으며, 이 때의 경험을 살려 1938년 현직 의원인 존 리들리 미첼이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지역구를 내놓자 그의 지역구인 테네시 4구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는데 단독 출마해 당선된다. 이때 그는 10대 때 친구였던 코델 헐의 도움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코델 헐이 국회의원을 지낼 때 지역구도 테네시 4구였다.
1944년 3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그는 군에 입대하기 위해 잠시 의원직을 사퇴했고 연합군 점령하 독일에서 군사법원에서 검사로 1년간 복무했다. 1944년 11월 그는 자신의 사퇴로 공석이 된 테네시 4구에 다시 출마해 당선된다. 그것도 군 제대를 하기 전에 출마해 독일에서 당선되었으며(...) 군 복무 기간 1년을 맞추기 위해 1945년 1월 국회 임기 시작 이후 3월에 제대할 때까지 의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테네시 주는 민주당의 텃밭이었기에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매우 강경한 입장을 내놓는 하원의원 중 하나였다. 심지어 그는 1951년 한반도에 핵폭격을 해 방사능의 바다를 만들어 중국의 대양 진출을 막자는 막장 주장까지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한 입장은 해리 S. 트루먼의 한국전쟁 대응 능력이 비판받고 있던 당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1952년, 그는 테네시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는데, 무려 7선에 도전하는 케네스 매클러 상원의원을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57% 대 41%로 꺾고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다.[1] 케네스 매클러 상원의원의 경선 패배와 앨버트 고어의 승리는 오랫동안 테네시 주 정계를 장악해 "테네시 소통령"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E. H. 크럼프 멤피스 시장의 영향력이 종결되는 테네시 정계의 변혁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남부 민주당원으로 보수적 성향이 있었지만 일부 사안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2] 그는 해리 S. 트루먼과 그 뒤를 이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전국적인 인프라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는데,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숙원 사업이었던 주 간 고속도로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3]
또한 인종 문제에 있어서도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흑백 통합에 반대하는 남부민주당원의 서한인 "남부서한"에 동참하지 않은 셋 뿐인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중 하나였다.[4] 1957년, 1960년, 1968년 민권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테네시 주에서 자신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에 반대 표를 던지고, 서굿 마셜 대법원 인준안과 수정헌법 24조(인두세 폐지)에도 반대하는 등 중도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1964년, 존슨 대통령의 흑백 통합 정책에 대한 반발 속에서 고어는 53%의 득표율로 간신히 상원의원 3선에 성공한다.
1970년, 리처드 닉슨의 남부전략이 큰 효과를 발하는 가운데 앨버트 고어는 상원의원 4선에 실패하고 만다. 그는 남부에서 인기 있었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면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1970년 단기 공황을 두고 닉슨의 경제 정책을 크게 비판했는데 이로 인해 리처드 닉슨의 개인적인 미움을 샀고 닉슨은 어떤 수단이 있어서라도 고어를 낙선시키라고 했다.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테네시 주 유세에서 그를 "북동부 진보파의 남부 지사장이 앨버트 고어"라는 원색적인 네거티브를 시전했고, 이는 테네시 주민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그 결과 그는 51% 대 47%로 근소하게 패배한다. 이후, 앨버트 고어는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 은퇴 이후, 앨버트 고어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석유 회사를 운영하며 여생을 보낸다. 앨버트 고어는 옥시덴탈 페트롤리움이라는 미국 석유 기업의 CEO인 아만드 해머와 친구 사이였는데, 앨버트 고어가 상원의원직을 잃자 그에게 이사 자리와 주식 지분을 내어줬고 앨버트 고어는 민주당 상원의원 시절 맺은 외교관, 정치인들과의 인맥으로 회사의 국제 진출에 큰 도움을 줬다. 앨버트 고어는 1970년대 두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엄청난 떼돈을 벌었으며 테네시에서 가장 부유한 부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자신이 소유한 석유회사 지분을 아들 앨 고어에게 물려줬다. 앨버트 고어는 대학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는 소일거리로 골동품점을 운영했으며 장수해 자신의 아들이 테네시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되고 부통령까지 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사망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는 65번 고속도로의 이름을 "앨버트 고어 시니어 고속도로"로 개칭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8 | 연방 하원의원 선거 | 테네시 제4구 | | 무투표 당선 | 당선 (1위) | 초선 |
194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38,278 (88.90%) | 재선 | |||
194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667 (68.89%) | 3선[5] | |||
194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20,684 (65.12%) | 4선 | |||
19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624 (67.49%) | 5선 | |||
194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21,445 (64.29%) | 6선 | |||
195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무투표 당선 | 7선 | |||
195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테네시 | 545,432 (74.19%) | 초선 | ||
195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17,324 (79.00%) | 재선 | |||
196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570,542 (53.62%) | 3선 | |||
197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519,858 (47.39%) | 낙선 (2위) |
4. 여담
- 환경운동가로 잘 알려진 앨 고어이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는 다국적 석유회사의 임원을 지내며 엄청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랄프 네이더와 같은 몇몇 환경운동가들은 이를 문제 삼으며 앨 고어를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