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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설립자
미합중국 연방대법관 서굿 마셜 Thurgood Marshall | |
<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출생 | 1908년 7월 2일 |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
사망 | 1993년 1월 24일 (향년 84세) |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 |
학력 | 링컨 대학교 (철학 , 미국문학 / B.A) 하워드 대학교 (법학 / LL.B.[1]) (-1933년) |
경력 | 제 2 연방 순회 항소법원 판사 (1961년 10월 5일 –1965년 8월 23일) 법무부 송무차관 (1965년 8월 23일 - 1967년 8월 30일) 미국 연방대법관 (1967년 10월 2일 – 1991년 10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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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변호사, 연방 대법관. 1967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연방 대법관을 지냈으며,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이었다.볼티모어/워싱턴 서굿 마셜 국제공항에 이름이 붙었다.
2. 생애
1908년 7월 2일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2] 그의 부모는 양쪽 모두 흑백혼혈인 물라토였으며,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 둘 다 해방된 흑인 노예 출신이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은 서러굿(Thoroughgood)이었지만 길어서 서굿으로 바꿨다.192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주의 흑인대학인 링컨 대학교에 진학했다. 철학과 미국문학을 공부했으며 나중에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입학절차에서 불합격하고 흑인대학인 하워드 대학교[3]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된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1960년대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집권하자 연방 항소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1965년에는 린든 존슨 대통령에 의해 미국 법무부의 송무차관으로 오르고, 법무부장관 직위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사되지 않았고, 대신 1967년에 톰 C. 클라크의 후임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존슨이 마셜에게 송무차관[4] 취임을 설득하며 내뱉은 발언이 유명하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송무차관 자리에 깜둥이(Nigger)가 앉아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뭔 낯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단 말이오!"라고 마셜 앞에서 질러 버린 것. 마셜은 린든 존슨과 사적으로도 거의 불알친구 수준으로 친한 사이였는데 만날 때마다 평소 자기네들이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 X새끼, X해버릴 새끼." 뭐 이런 식의 뒷담화 수다를 떨었단다.
1991년에 대법관 자리에서 퇴임하고[5], 1993년 1월 24일에 고향 메릴랜드의 베데스다에서 별세하였다. 원래 마셜은 이른 퇴임을 바라진 않았지만 닉슨-레이건 시대를 거치면서 연방 대법원에 보수 성향 판사가 다수가 되었고, 특히 1년전 함께 진보 성향으로 함께 대법원을 이끌어온 윌리엄 J. 브레넌 대법관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고립감을 느낀 영향이 크다고 한다.
1929년 비비언 버리[6]와 결혼하였으나 1955년 사별하였고, 이후 시실리어 수얏[7]와 결혼하였다. 비비언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서굿의 후손은 수얏과의 사이에 얻은 자식들이다.
장남 서굿 마셜 주니어는 1956년생으로 변호사이다. 차남인 존 윌리엄스 마셜은 1958년생으로 관료로 일했다. 서굿 마셜도 나이 쉰이 되어 얻은 자식들인데, 장남인 주니어도 2008년에 결혼하여 아들 둘을 늦게 얻었다.
3. 대중 매체
[1] 당시에는 법무박사 학위였으며 1960년대 이후로는 J.D.로 변경되었다. 현재에는 미국에선 쓰이지않는 학위이며 국제적으로 보면 법학학사로 쓰이는 국가들이 존재해서 헷갈릴 수 있다.[2] 볼티모어는 현재도 흑인의 비중이 매우 높은 도시로, 지역구 연방하원의원 2인 중 1명이 흑인이다.[3] 뒷날 미국 최초의 흑인 부통령이 되는 카멀라 해리스도 이 학교 학부를 졸업하게 된다.[4] Solicitor General. 미국 연방정부의 대표 변호사라고 봐도 되며, 연방대법원 청사에 따로 사무실까지 주어지는 자리이다. 그만큼 당대 최고의 법률가가 보임되며, 당연히 연방대법관 후보 0순위로 거론된다. (엘레나 케이건도 송무차관-대법관 테크를 탔다.)[5] 후임자는 역시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 다만 마셜과 성향은 정반대인 강경우파이다.[6] 1911년생으로 민권 운동가로 살았다. 폐암으로 사망하였다.[7] 1928년생으로, 서굿보다 20살이 어리다. 하와이 태생으로 필리핀계 미국인이며 민권 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활동하다 2022년 11월 2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